아래 기록은 나의 극친(極親)인 민우를 비롯한 고향의 선 후배가 모인 향우회(鄕友會) 모임을 마치고 만보(萬步)
걷기를 하면서 노량진수산시장에서 1km 쯤을 오다가 사육신공원에 들러 폰 카메라(phone camera)로 사진촬영을 하고선 사육신 묘역(墓域)을 나와서 길을 건너 흑석동 방향으로 가다가 중앙대학교입구 못미쳐 노들강변 위의
용양봉저정공원(龍驤鳳翥亭公園)에 들러서 폰카에 담아왔던 사진으로 내가 지기로 있는 인터넷 카페(cafe) "아름다운 자연의 표상"에 익일(翌日)인 2023년2월19일 오늘 아침에 게시물(揭示物)을 만들어 격일근무를 마치고 집에가서 수면(睡眠)을 취할 시간인데 퇴근길에 곧바로 모임장소로 와서 자리를 함께하고 산회(散會)한 민우 친구에게 이 게시물을 보냅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정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내용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은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지만, 1441년(세종 23)에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洪氏)·양씨(楊氏)만을 두었던 것이다.
사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內事)를 돕는 일에만 관여할 뿐이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잡고 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 출생한 적자(嫡子)는 문종 외에도 수양(首陽)·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응(永膺)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당시 단종의 왕권은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능력있는 여러 대군은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았다. 반면에,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을 끌어들렸다. 이에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단종 초 고명대신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종이 즉위할 때의 진용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南旨), 우의정에 김종서였다. 이후 남지는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신병으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같은 해 12월 김종서를 좌의정, 정분(鄭苯)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황보 인은 성격이 유약하고 남지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신병으로 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실권은 자연히 김종서가 장악하게 되었다.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모든 권력은 김종서에게 기울었다.
『단종실록』은 이 대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대신들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해 궁중에까지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黃標政事)라 불릴 정도로 자제를 포함, 많은 당여(黨與)를 요직에 배열해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실록』이 세조 때 어용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또,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다음,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는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황보 인·김종서 등이 반드시 안평대군과 모의해 종사를 결단내었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수성지군(守成之君)이 아니라 창업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의 체재는 물론, 많은 신법을 제정한 것을 보아도 그의 야망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황보 인·김종서 등은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단종을 끝까지 충성을 다해 보필하려고 했을 뿐, 야심을 품고 붕당을 조성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들 대신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본래 임무를 넘어섰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관(史官)의 말을 인용하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유교적 비전제정치를 내세워 재상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 집현전 출신의 유신도 황보 인·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는 비판적이었다. 뒷날 수양대군이 황보 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많은 집현전 출신 관료가 수양대군에 동조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양대군도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들이 세력을 더 굳히기 전에 제거할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수양대군의 생각처럼 황보 인·김종서 등이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문객 권람(權擥)은 수양이 사신으로 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웃으며 황보 인·김종서는 호걸이 아니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행동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시기는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년(단종 즉위) 7월경으로 예상된다. 이때 권람이 방문하자, 수양대군은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진심을 털어놓았다. 또한,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홍윤성(洪允成)·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그가 1453년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 밤, 마침내 유숙(柳淑)·양정·어을운(於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황보 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密召)하여 궁문에서 퇴살(推殺)하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정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 등은 귀양보냈다가 곧 교살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함길도 절도사로 있던 이징옥(李澄玉)도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하여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門)을 임명하였다. 이에 이징옥이 분개하여 박호문을 죽인 다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였다. 그는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종성부사 정종(鄭種)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잡혀 죽었다.
무단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거사에 직접·간접으로 공을 세운 정인지·권람·한명회·양정 등 43인(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2년 뒤에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
참고문헌
『단종실록(端宗實錄)』
「왕권의 확립과 제도의 완성-세조·성종-」(한영우,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육신묘[死六臣墓]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조선전기 단종 복위운동에 목숨을 바친 6명의 무덤.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원래는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겨우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고 하는데, 나머지 사육신의 아들들은 모두 교형(絞刑)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되었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도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유씨지묘·이씨지묘·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 5)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 군사 검열을 관람)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해 육신묘를 봉식(封植 ;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음)하였다. 1691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사장(露梁沙場)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하게 했으며, 곧 이어 사육신을 숭장(崇奬)하였다. 한편,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 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의 존숭을 받게 되었다.그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로 설치된 민절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서울시가 세운 6각(角)의 육신묘비가 있다. 비면 상단에는 김광섭(金光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중·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또,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와 정문인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모두 1978년사육신 묘역의 정화 사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장릉지(莊陵誌)』
「육신의총비(六臣疑塚碑)」(허목)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등의 사육신 6위 절의(節義)가 세겨진 비석
2023-02-1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