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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드립니다.
법주사
위치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번지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는 1400년전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24년째인 진흥왕 14년 (서기 553년)에 의신조사가 세웠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3대 불상전 가운데 하나인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8개의 전각과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종고루, 부도전 등 5개의 부속건 축물, 그리고 선원, 강원, 염불원 등 3개의 원과 또한 염화당, 용화당, 미룡당, 응주 전, 사리각, 종무소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도합 30여동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주요문화재
팔상전(국보 55호)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나라 목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에 의신이 세웠고, 776년 병진이 중창하였고, 1597년 정유 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1984년에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3층 목조탑이 소실됨으로써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전체 높이가 상륜까지 22.7m 이며 현존하 는 한국의 탑파중 제일 높은 것이다.
석연지(국보 64호)는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굄과 한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모습을 조식한 걸작품으로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괘불(보물 1259호)은 법주사 대웅보전 내에 소장되어 있는 대형불화로 1966년에 화성 하였는데, 이 불화는 천장보살 즉 노사나 불화로 적, 록, 황, 청색의 색채가 곱고 보 존상태가 양호하다.
사천왕 석등(보물 15호)은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 로 보아 혜공왕(765-780재위)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던 때의 작품으로 추정 하고 있다. 쌍사자 석등(국보 5호)은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중의 하나로 그 조성년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등의 간주석을 석사자로 대치한 이 석등은 전형양식 에서 벗어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대 방석을 모두 하 나의 돌에 조각한 것으로 다른 석등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매년 음력 4월에 열리는 속리 축전과 매년 10월에 열리는 속리산 단풍 가요제, 무용제 는 지역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의 문화재
1.법주사 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법주사 팔상전
종 목 국보 제5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법주사 석연지
종 목 국보 제6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다만, 크게 갈라진 연지의 몸돌을 쇠붙이로 겨우 이어놓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4.법주사 사천왕석등
종 목 보물 제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5.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종 목 보물 제21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고려시대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가 새롭게 고쳐 지었으며 그 뒤로 진표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6.신법천문도병풍
종 목 보물 제848호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신법천문도』는 조선 영조 18년(1742)에 관상감에서 황도 남북의 별자리를 그린 것으로, 높이 183㎝, 너비 451㎝이다. 이 천문도는 경종 3년(1723)에 중국에 와 있던 쾨글러(I.Koegler)가 작성한 300좌, 3,083성의 큰 별자리표를 김태서와 안국빈이 직접 배워서 그려온 별자리그림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8폭 병풍으로 되어 있는 이 천문도는 제1폭에는 신법천문도설의 표제로 그 당시 천문학적 지식을 510자로 설명하고, 그 왼쪽에 태양과 달, 그리고 당시의 망원경으로 관측한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의 순으로 5개의 행성을 크기와 색깔을 달리해서 그렸다. 제 2, 3, 4폭에는 직경 165㎝의 큰 원이 3중으로 그려져 있고, 360등본의 눈금띠가 매겨져 있다. 이 큰 원의 중심에 황극(黃極)이 있기 때문에 큰 원은 곧 황도이다. 제5, 6, 7폭은 위의 세 폭과 같은 양식으로 황도의 남극을 중심으로 남쪽 하늘의 별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8폭에는 이 천문도 제작에 관여한 관원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천문도가 언제, 어떤 경위로 법주사에 보존되고 있는지 그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법주사의『신법천문도병풍』은 현재까지 알려진 쾨글러의 천문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본으로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어진다.
7.법주사 대웅보전
종 목 보물 제915호
지 정 일 1987.03.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 중 하나이다.
8.법주사 원통보전
종 목 보물 제916호
지 정 일 1987.03.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9.법주사 괘불탱
종 목 보물 제1259호
지 정 일 1997.08.08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쓰이는 대형불화를 말하며, 이 불화는 보살 형태의 단독상을 화면 전체에 꽉 차게 그려 넣은 것이다.
보살상은 양 손으로 꽃가지를 받치고 서 있는 모습으로 상체를 크게 묘사한 반면 하체는 짧게 나타냈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보관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싼 옷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여 큼직하게 그렸다.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그려 공간을 채우고 있는데 옷의 화려한 무늬들과 어우러져 부처님 세계의 정경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광배 위쪽으로는 구름이 감싸고 있고 화면의 가장 윗부분은 흰 광선이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걸쳐져 있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묵중하고 중후한 느낌을 보여주며 다양한 문양과 장식, 밝고 선명한 원색과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참여한 많은 인물들과 함께 법주사 창건 배경과 당시의 불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
10.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종 목 보물 제1360호
지 정 일 2003.02.03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준다. 왼손은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이다.
아미타불상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은 비로자나불상·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손모양과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옷 차림법이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동안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한 이 불상은, 조형성이 탄탄하여 임진왜란 후의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불상 안에 넣어둔 유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는 연기문(緣起文)에 의하면, 조선 인조 4년(1626)에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121년이 지난 조선 영조 23년(1747)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초반의 불상연구에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11.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1361호
지 정 일 2003.02.03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이다.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서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 2년, 즉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12.법주사 철확
종 목 보물 제1413호
지 정 일 2004.08.3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큰 사발의 형상을 한 법주사 철확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법주사의 사세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확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2.복천암 수암화상탑
종 목 보물 제1416호
지 정 일 2004.10.07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 복천암 동쪽 약 200m 지점에 구축된 평평한 대지에 학조등곡화상탑과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데 옥개석은 학조등곡화상탑에 비하여 간략한 편이나 세부 수법은 두 탑이 비슷하다. 이 부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수암화상탑'이라 하였고, 중대석에 '성화십육년팔월일립'이라고 2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부도의 주인공과 조성년대를 알게 하는 점이다. 즉 성종 11년(1480)에 조성되었으며, 수암화상은 복천암과 관계된 조선초기의 고승으로 짐작된다.
복천암수암화상탑은 고려시대 팔각원당형부도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부도로서 조형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주인공의 존명과 조성년대를 부도에 직접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부도의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3.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종 목 보물 제1417호
지 정 일 2004.10.07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희견보살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법주사희견보살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14.복천암 학조등곡화상탑
종 목 보물 제1418호
지 정 일 2004.10.07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은 법주사 복천암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부도이다. 이 부도는 주인공의 존명과 건립년대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부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도의 형태는 팔각원당형의 고려 부도를 계승하고 있으나 탑신이 구형(球形)인 점이 크게 다르다. 팔각 중대석 두 면에 걸쳐 '정덕구년 갑술오월 일립'그리고 '학조등곡 화상탑'이란 명문이 있어 조선 중종9년(1514)의 건립임을 알게 한다.
학조화상은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은 건립년대와 주인공의 존명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부도는 탑비가 부족하여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희귀하나 이 부도는 고려 부도를 계승한 조선초기 부도양식을 알게 함과 동시에 다른 부도의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15.순조대왕 태실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75.08.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으로, 이곳에는 순조의 태가 안치되어 있었다. 항아리에 태를 넣어두었던 것을,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왕의 태실로서 여러 석물을 갖추고 태실비를 세웠다.
태실의 형태는 8각을 기본으로 한 부도(승려의 사리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8각의 돌난간이 둘러 놓았다. 앞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갖춘 태실비가 있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이라고 새겨 놓았다.
조선 정조 11년(1787)에 만든 것으로, 이 때부터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산이라 하고 보은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한다. 태항아리는 1927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비와 석조물만 남아있다. 8각형의 돌난간은 1982년 해체, 보수한 것이다.
16.법주사 세존사리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고려시대
고려 공민왕이 법주사에 행차했을 때,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의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 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세워놓은 사리탑이다.
8각을 기본형태로 하여,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만든 것으로 전한다.
17.법주사 사천왕문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그 후 몇 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 2년(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1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은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하였다.
법주사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8.법주사 석조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지 정 일 1980.11.13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고려시대
법주사의 3천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 한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며, 규모는 길이 446㎝, 폭 240㎝로 제법 크다.
통일신라 성덕왕 1년(720)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19.법주사 벽암대사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지 정 일 1980.11.13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20.법주사 자정국존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지 정 일 1980.12.1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고려시대
속리산 법주사 내에 있는 자정국존의 비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국령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21.속리산 사실기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지 정 일 1989.12.08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 수정교 앞에 놓여 있는 비이다.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22.속리산 금강골 쌍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
지 정 일 2000.09.15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시 대 고려시대
속리산 금강골 절터의 동쪽 암반 위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97년에 복원해 놓았다.
서로 같은 양식을 하고 있어서, 2층 기단 위에 3층을 이루는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에는 모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특히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얕게 새겨 놓았다. 탑신의 각 몸돌에도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50m아래 계곡에 옛 암자터가 있는데 그 곳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이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것이고, 탑의 각 부분에 새긴 조각을 보아도 이 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23.법주사 석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지 정 일 2000.12.22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미상
이 석옹은 돌항아리 형태로 조성연대는 미상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속리산의 삼천여 승려들이 김칫독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하나가 더 있었다고 전한다.
항아리 모양으로 상·하부를 각기 하나의 돌로 깎아 만들고 배부분은 30∼40cm크기의 4매내지 5매의 돌을 원형에 맞게 가공하여 3단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깊이 225cm, 상부 외부직경 180cm, 상부 내부직경 85cm의 규모이다.
24.법주사 능인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지 정 일 2004.01.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능인전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조선후기 호영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 당초의 성격을 추정할 수 없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이다.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옮겨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건물의 기단석 및 기둥 등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고 있으며, 팔상전(국보 제55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다.
25.법주사 선희궁원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지 정 일 2004.01.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의 전면 우측에 위치한 이 건물은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65년경 조선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희궁 원당’으로 조영되었다고 한다. 그 뒤 법주사와 관련이 있는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비워진 상태이다. 법주사에서는 ‘구 조사각’으로 불리우고 있다.
조사각으로 사용할 때에는 중앙 좌우로 개산시조 의신선사와 전법초조 태고선사의 영상이 있었고 좌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분의 영정을 비롯해 세홍·함월·명찰·정준·장신·도홍·홍민·지영·영인·진하·탄응·석상·금오·명일·보흔·충은·법영 등 모두 스물 한 분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모셔 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두어 경내의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사당이나 향교, 서원 등에 자주 사용된 유교적 건축형식이다.
기단과 사각초석은 규격화되어 있고 정다듬으로 마감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42.99㎡이다.
건물 내부 앞부분에는 한 쌍의 사각기둥이 있으며, 익공형식과 주심포형식이 혼용된 이른바 주심포식구조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사당 건축의 외형을 지녔다.
영쌍창 형식의 창문을 두었으며, 전면 담장은 와편과 둥근 돌들을 이용해 여러 가지 길상무늬와 별무늬를 장식화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민화풍의 담장 장식이 잘 보존된 예이다.
이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찰 내의 유교적 건축물로 한때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위패를 모셨던 건축물을 법주사와 관련이 있는 역대 큰 스님들의 초상을 모셔 두는 조사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건물로 비교적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26.법주사 궁현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지 정 일 2004.01.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 궁현당은 원래 법주사 선당으로 중수된 건물이다. 현존하는 상량문에 의하면, 궁현당 선당은 ‘숭정기원사임자년’ 즉 조선 철종 3년(1852)에 퇴락된 기존 건물을 철거한 뒤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상량문에는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을 알 수 있다.
궁현당은 팔상전(국보 제55호) 우측에 위치하며, 건물의 형태가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인 남향의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정면 14칸, 측면 3칸 구조의 동향 건물이 ‘ㄴ’자 모양으로 연결된 형태인 건물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1998년도에 크게 보수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383㎡이다. 조선고적도보 사진에서도 ‘一’자(字)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건물을 ‘ㄴ’자 모양으로 연결한 형태의 이 건물은 상량문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의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다.
27.법주사 가경구년명 범종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지 정 일 2004.07.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 범종은 조선 순조 4년(1804) 7월에 대시주 1명과 15명의 일반시주자의 시주를 받아 4천근의 동으로 제작된 청동종이다.
종신 하단에는 “가경구년갑자칠월일대법주사대종중사천근” 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고, 시주자와 당시의 주지, 만든이 등이 새겨져 있어 제작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조선 후기의 종이다.
크기는 높이 212.5cm, 종신부 상단 지름 82cm, 종신부 하단 지름 140cm인데, 종신의 전체 선은 둔중한 편으로 양각의 횡선이 3줄 둘러져 종신을 크게 구획하고 있고 용뉴가 쌍룡으로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범종으로 종신의 문양이 약하게 표현되는 등 주조기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나 특히 명문이 있어 시주자, 당시의 주지, 제작자, 제작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사찰명이 새겨져 있는 등 보존가치가 높다.
28.중사자암 동종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지 정 일 2004.07.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의 부속암자인 중사자암은 조선 선조가 즐겨 찾던 암자로 임진왜란후 인조 때 중건되었다.
이 종은 높이 73cm, 종신부 상단 지름 330cm, 종신부 하단 지름 44cm 정도의 소형 동종으로 하단의 명문에 의해 법주사의 부속 암자인 중사자암에서 주조된 종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법주사에 이관되어 있는데, 인조 14년(1636)에 시주자의 시주를 받아 170근의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종신은 2조원문을 양각하여 상·하부로 구분하고 있다. 상부에 있는 유곽은 당초문의 띠를 둘렀으며 연꽃받침 위에 돌기된 9개의 종유는 단순화시켜 도형화하여 표현하였다. 유곽 아래는 범자문양이 새겨져 있다. 종의 상대는 기하학적 무늬가 있고 그 위에 삼각형의 입상화문이 있으며 하대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규모는 작으나 고려 종의 전통양식을 가진 조선시대 중기의 소형 동종으로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며 암자명이 새겨져 있고 주조기법이 정교한 편으로 주조명문이 있어 미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보존가치가 높다.
29.법주사 선조대왕 어필 병풍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지 정 일 2004.07.09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는 속리산 법주사의 부속 암자인 중사자암을 즐겨 찾았으며, 암자 남쪽에 원당을 짓고 곡식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선조는 여러 사람에게 글씨를 하사했으며 서산대사에게 묵죽과 제찬을 친필하여 하사한 일도 있다고 한다.
선조대왕어필병풍은 영조 34년(1758)에 왕이 ‘신법천문도병풍’을 하사할 때 ‘주서무일편병풍’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나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이 병풍은 제1폭 서두에 전자로 ‘선조대왕어필’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대자 연면초인데 더러 결자가 있으나 유창호방한 달필이다.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선조가 산중에 머물 당시 노년의 외로운 분위기를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는 초서에 능했다고 하며 모두 8폭으로 한 폭당 규격은 가로 67cm, 세로 190cm이며 글씨는 초서체의 붓글씨이고, 구성은 오언절구 네 수이다.
비록 목판본의 병풍이기는 하나 조선중기의 우리나라 목판인쇄문화와 서예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30.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지 정 일 2008.11.14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시 대 조선시대 및 일제강점기
이 탱화는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삼불좌상(보물제1360호) 후불정화로 모시고 있는 그림이다.
명문에 의하면 금호당 약효가 제작한 것으로 제작연대는 1897년 전후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후면에 각 1점씩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사천왕탱화 2폭이 분리되어 걸려 있으며 3차례에 걸쳐 수리된 기록이 남아있다.
법주사 대웅보전의 높은 불단 위에 봉안된 소조삼존불좌상의 후면 벽에 걸려 있는 5폭의 후불탱화이다. 본존인 비로자나불도, 좌우협시인 아미타불도 2폭, 그리고 삼존불상 좌우 양쪽에 사천왕도 2폭 등 모두 5폭으로 상태가 양호하다.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일괄은 각각 제작시기가 다른데다가 근대화사로서 명성을 알렸으며, 최근 근대불교회화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세 화사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근대 불화계의 일부 화사들에게 크게 선호되었던 서양화법 수용과 그에 따른 표현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재료는 면포이다.
31.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지 정 일 2009.03.06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22번지
시 대 고려시대
여적암은 법주사에 속한 암자로 조선 숙종 20년(1694)에 여적당 경수대사가 창건한 후 광무 9년(1901) 당시 주지였던 남응익 대사가 중창하였다. 1950년 6.25로 소실된 뒤 1964년 행담이 중건한 암자이다.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경내에 남아있는 청석탑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적암다층청석탑은 대석을 포함한 현재 높이 2m로서 지면에 높직한 화강암 석재 2단을 놓아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화강암의 초층 옥신석을 얹었다. 옥신 좌우에는 우주를 목각하였으며, 옥개는 점판암으로 조성한 8매의 방형 지붕동 만을 첩첩이 쌓았다. 12층의 옥개 낙수면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노반과 보륜이 있다.
이 탑과 유사한 탑은 보물 제518호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과 도문화재자료 제56호 충주 창룡사 다층청석탑 등 8기가 지정되어 있다. 탑의 형태와 연꽃문양과 탑재질(청석)이 같을 뿐만 아니라 크기와 조각수법이 비슷하게 보인다.
규모는 높이 129㎝(탑신부 52㎝, 상륜부 50㎝, 기단부 27㎝), 우주석 폭 1단 54㎝, 2단 52㎝, 3단 47㎝, 4단 43㎝, 5단 41㎝, 6단 39㎝, 7단 38㎝, 8단 35㎝이다.
청석탑은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특이한 형태의 석탑으로 실제조사된 것은 전국적으로 10기가 넘지 않는다. 그것도 옥개석 몇 장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도 조성 양식으로 보아 대략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연꽃 문양이 조각된 갑석형과 옥개석 네 귀퉁이 전각에 풍경공이 있으며 탑신석이 남아 있는 상태로 학술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
32.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
지 정 일 2009.03.06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9번지
시 대 조선시대
법주사 복천암극락보전은 조선후기 다포계 맞배집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에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중·후기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희귀하게 건립된 것으로 전국에 20여동 밖에 보이지 않는 특이한 형태로서 공포, 내부구성 등 건축양식이 뛰어나 건축기술사에서의 가치성이 높다.
33.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
지 정 일 2009.09.1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9
시 대 조선시대
복천암 극락전의 주불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다. 이 불상은 법당이 1733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1735년부터 1737년까지의 중창불사 때에 법당과 함께 조성된 상이다. 1737년(건륭 2년)에 이루어진 복장 발원문은 다시 불상에 봉안되었는지 조사 때에는 볼 수 없었고, 『사지』(충청북도, 1982. P.254)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불상을 만든 조각장은 연기, 두책, 수성, 초붕, 수견, 광붕 등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좌상을 본존상으로 하여 관음보살좌상을 좌협시보살로 그리고 대세지보살좌상을 우협시보살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이다. 삼존상은 각각 중대석이 사각인 3단 연화대좌에 봉안되어 있다.
본존상은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으며, 얼굴에 살집이 있고 특히 코가 작고 양 볼과 턱이 풍만하여 온후한 인상이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둥글게 감싼 변형 편단우견으로 속에 입은 편삼의 옷깃을 대의와 대칭을 이루게 입고 있다. 가슴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의 윗단이 보이는데 윗부분이 주름져 있다. 상체가 길쭉한 편이나 어깨는 작고 움추린 자세이다. 불신의 양감은 적당하며 옷 주름은 이에 걸맞게 적당히 투박하며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좌우 보살상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손만 좌우대칭을 이룬다. 높은 보관을 썼는데 각각의 보관에 화불과 정병이 표현되어 있어서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임을 구별할 수 있다. 보관 속으로 높게 묶은 보발이 있고 보발은 다시 귀를 감아 돌아 어깨 위로 몇 가닥 늘어지고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본존상과 달리 아래턱의 살집이 적어서 갸름하고 단정한 인상이다. 불신도 작으며 법의는 여래상과 같은 형식으로 입고 있다. 관음이 들고 있는 연꽃가지 위에는 특이하게 정병이 붙어 있다.
삼존상의 대좌는 크기에서만 조금 차이를 보일뿐 거의 같은 형태로, 상단과 하단의 연판은 양감이 있으며 중대석 앞면에는 옆으로 긴 안상 안에 당초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미타불좌상을 본존상으로 하여 관음보살좌상을 좌협시보살로 그리고 대세지보살좌상을 우협시보살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이다.
극락보전 내 봉안중인 아미타불은 복천암 사적기에 의하면 건륭 2년(1737)에 두책, 초붕, 수견, 광붕 등의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통견의 가사와 옷 주름 선이 간략화 되고 형식화 된 수법 등 18세기 불상의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 조성 기록이 잘 남아 있다.
34.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지 정 일 2009.09.1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9
시 대 조선시대
극락보전 아미타불 우측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도는 앞에는 별도의 제단이 있으며 중앙에 위태석천과 제석을 주존으로 하여 여러 무장신을 배치한 신중탱화로 주색은 적색과 녹색이며 배경으로는 황토색이 사용된 탱화이다. 위태천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나 옆의 제석도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어 같은 비중을 두고 그린 것으로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제석천룡탱화로 화기문에 의하면 조선후기 대표적 화승인 신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탱화로서 충청도 지역에 남아있는 드문 사례이다. 작품 제작수법이 뛰어나고 당시 대표적 화승이 작업하였으며 조성 기록이 잘 남아 있다.
35.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지 정 일 2009.09.1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9
시 대 조선시대
복천암 삼세불도는 극락보전 내 아미타불 뒤에 위치하며 화기문에 의하면 융희 3년(1909) 5월 8일에 금어, 금호, 약효 등의 화사집단이 제작한 것으로 중앙의 석가, 아미타, 약사의 삼세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팔대보살, 상단에는 제자와 권속으로 화면의 4방에는 사천왕을 배치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적색과 청색이 주색이고 황토색, 녹색, 흰색이 보조색으로 사용되었다.
화사인 약효는 19세기 후반 충청도지역의 삼세불도를 다수 제작하였는데 본 탱화는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시대적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제작시기가 명확하고 보존상태가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36.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지 정 일 2010.11.05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8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속리산 비로봉 아래에 위치한 상고암은 통일신라사대인 720년(성덕왕 19)창건되어 법주사를 짓기 위한 목재를 저장하여 두던 창고로 이용되다 뒤에 암자를 바뀌었다고 전해지나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조선 말기인 1876년(고종 13)에 인명대사(仁明大師)가 중창하였고 1897년 보봉(普峰) 스님이 중수하였다. 광복 후 1963년 법혜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고 이후 극락전과 영산전, 산신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애불의 조각된 시기를 알려주는 명문이나 기록은 없으나, 상고암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고, 마애불상군 표면에 전체적으로 석화 형태의 돌이끼가 끼어 있는 상태로 보아 최소한 100년 이상은 된 것으로 보이므로, 대략 1876년 무렵에 인명대사가 상고암을 중창할 당시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암의 본전인 극락전 맞은편에 서향으로 자리하는 자연 암벽에 6구의 마애불이 상, 하 2단으로 배치되어 조각되어 있다. 하단에는 칼과 보탑, 용, 방망이, 비파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4구가 왼쪽으로부터 나란히 서있고, 그 오른쪽에는 양손을 가슴에서 합장하고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상의 머리는 승려의 상과 같은 민머리이며, 그 위로 화염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의 화관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상단에는 이들 마애불상군 가운데 조각이 가장 뚜렷한 좌상이 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이 장식되었으며, 양 손에는 긴 줄기가 달린 연꽃봉우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은 해발 고도가 대략 9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한 상고암 마애불상군은 관음보살과 불명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또 다른 좌상, 그리고 4구의 마애사천왕상 등 총 6구의 마애상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조성된 시기는 상고암이 중창된 1876년 무렵의 조선 말기로 추정되어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매우 희귀한 자료이다.
37.보은 속리 정이품송
종 목 천연기념물 제103호
면 적 7,680㎡(보호구역)
지 정 일 1962.12.03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241외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38.보은 속리산 망개나무
종 목 천연기념물 제207호
면 적 615㎡(보호구역)
지 정 일 1968.06.2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망개나무는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드물게 자라는 희귀종으로, 황색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대체로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 번식력이 매우 약하나 한번 싹을 틔우면 잘 자라난다. 잎이 길고 타원형이며 꽃은 6월에 황색으로 피어난다. 열매는 타원형으로 8월에 붉게 익는다.
보은 속리산의 망개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3.6m, 가슴높이 둘레 1.31m이다. 속리산에서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망개나무는 가지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잘못 알려진 믿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를 꺾어 말라죽었고, 지금은 냇가에서 자라는 망개나무를 대신 지정하게 되었다.
망개나무는 번식력이 약하여 희귀수종에 속하며, 보은 속리산의 망개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망개나무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이므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첫댓글 저는 이미 몇차례 다녀온곳이지만 갈때마다 새로운곳이죠..멋진 장소 선택하셨구요..수고하신 집행부 동문님 화이팅..
잘 읽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