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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4 - 오스만의 속국 노예 사냥의 크림 칸국과 예니체리에 이집트 독립!
오스만 제국의 핵심인 예니체리는 엘리트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하고 군벌화가
촉진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는데..... 예니체리들의
전투력 쇠퇴로 생긴 공백은 흑해 북쪽에 세워진 크림 칸국의 군사력이 이를 대신하게 됩니다.
관계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오스만 황제와 크림 칸의 유대 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으니, 얼마나
깊었는지 18세기말 오스만 황통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할 후보로 크림 칸이 대두되기도
했는데, 군주는 하즈 1세 기라이(1441~1456)부터 48대 샤힌 기라이(1782~1783) 까지 320년간 이어졌습니다.
크림칸국은 1430년에 킵차크 칸국의 후손 하즈 게라이가 세운 국가로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에 망하기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던 나라니, 1771년에 러시아-
튀르크 전쟁 이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보낸 러시아 제국군이 정복할
때 까지 하지 게라이의 가문이 통치했으니......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반도 인근을 지배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남부의 소수 민족인 크림 타타르족이 크림 칸국의 후예들인데, 이들은 몽골제국 침략
전부터 흘러들어온 튀르크계 유목민인 쿠만인의 후예로, 정확히는 중앙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쿠만인과 몽골 제국의 침략 시기에 들어온 몽골인 중 우크라이나 영토와
크림반도 등을 식민 지배하던 일부 몽골인이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으며 크림 타타르인이 되었습니다.
크림 반도는 고대에는 그리스인의 식민도시와 스키타이계, 캅카스계 민족들이 교역하며 살았으나
중세에는 하자르 칸국이나 페체네그, 폴로베츠 등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유입되었으니
이들은 몽골제국이 키예프 루스를 침략하기 전부터 우크라이나 초원지대 진출을
노리며 키예프 루스와 대립했으니.... 킵차크 칸국이 건국되기 전에도 타타르인이라고 불렸습니다.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이 침략해 킵차크 칸국이 건국된 후에는 이주한 몽골인 귀족층이나 몽골 제국의
원정대원으로 온 다른 튀르크 부족들이 타타르에 동화되어 킵차크 칸국의 백성으로 살았으나
킵차크 칸국이 쇠퇴하게 되자 크림반도 일대를 다스리던 몽골인 케레이트족의 후손 하즈 게라이
(Hacı Geray) 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원을 얻어 킵차크 칸국에서 독립해 크림 칸국을 세웠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모스크바 대공국,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위험한 독립을 유지하던
크림 칸국은 1466년 하즈 게라이가 사망하자 아들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으니 장남인 누르 데블레트가 킵차크 칸국의 지원을 얻어 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자 대다수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있던 육남 멩리 게라이가 반란을 일으켜 잠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바로
형한테 패해 크림 반도 남쪽의 제노바 식민지였던 카파로 쫓겨났지만 멩리는 카파의
제노바인들과 손을 잡은후 1469년 수도로 진격해 형을 제노바의 감옥에 가둔후 다시 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멩리 게라이는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제노바및 테오도로 공국과 손을 잡았는데 메흐메트
2세의 심기를 건드렸고 1475년 오스만 함대가 대대적으로 크림 반도를 침공하니 칸 자리를 다른 형인
하이데르에게 뺏겼던 멩리 게라이는 칸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동맹 제노바를 도울려다가 오스만군에게 포로가 됩니다.
오스만 제국은 내친 김에 크림 칸국까지 공격해 하이데르를 몰아내고 누르 데블레트를 칸 자리에
앉혀 크림 칸국을 속국으로 삼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477년 킵차크의 칸인
아흐메드 칸의 사촌 야니베그가 침공해 크림 칸국은 일시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지배 하에 들게 됩니다.
한편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로 끌려간 멩리는 칸 자리를 되찾게만 해준다면 오스만에 복속하여 앞으로 영원히
파디샤의 봉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고 킵차크에 멸망한 크림 칸국의 귀족들이 오스만에게 킵차크를 몰아내고
멩리를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하면서 1478년 멩리는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오스만군과 크림 반도에 돌아옵니다.
멩리가 오스만군 도움으로 킵차크군과 누르 데블레트를 몰아내고 칸 자리를 되찾으면서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번국이 되었는데,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이 강력한 오스만제국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북쪽의
러시아인과 서쪽의 폴란드인 및 합스부르크 제국의 독일인(오스트리아인) 들이 그들을 상대할때 조심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크림 칸국은 다른 타타르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루스 차르국
(러시아) 에 멸망당할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물론 그 대가로 왈라키아, 몰다비아
등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들이 으례 그러했듯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는 군대를 보내주어야 했습니다.
이후 크림 칸국이 보낸 타타르 기병대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으니....
특이한 부분은 연공을 면제받는 대신 다른 신하국들 보다 군사를 더 보낼
의무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만큼 크림의 기병대가 오스만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봉신국으로 복속된 크림 칸국에 대한 오스만의 대우는 좋았던 편으로, 고유의 문장을 사용할 권리는
물론이고 독자적인 법령 제정권에 동전 주조권까지 있어 거의 독립이나 다름없는
자치를 누렸고, 의전상으로도 칸은 제국의 재상 보다도 높아 술탄 바로 다음의 2인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훗날 칸의 반란으로 위치가 강등된게 재상과 동급으로 간주되었을 정도이니 이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들 가운데
이슬람 국가가 크림 칸국 뿐이었다는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루마니아 및 몰도바에 해당하는 왈라키아 공국이나
몰다비아 공국, 헝가리 왕국의 후신이었던 트란실바니아 공국등은 기독교 국가였기에 크림 칸국을 우대해 준
것이며 그외 바르바리 해적들은 '신하' 는 틀림없었지만 '신하국' 으로 볼수 있을 정도 조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 에 따르면 오스만의 왕통이 단절될 경우 제국의 술탄위를 게라이의
가문이 이을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니, 오스만 왕통이 단절되었다면
보르지긴 씨족 출신 술탄이 나오는 것도 가능했단 얘기로 그만큼 크림 칸국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크림 칸국은 노예 무역과 약탈이 활발히 이루어진 나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유럽 러시아가 크림 칸국의
약탈지가 되었고, 크림 칸국은 주민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파는데 혈안이 되었으니,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를 비롯 지중해에 공급되는 백인 노예의 상당수는 크림 칸국이 잡아온 러시아나 폴란드-
리투아니아 출신 노예였고 심지어 오스만의 도나우 번국들도 크림 칸국의 주요 약탈 대상 이었습니다.
그들은 포로 노예를 크림의 모든 도시에서 매매하고 있었으며 카파에서는 노예매매의 규모가 가장 큰데, 노예로
팔리는 불행한 사람들의 무리 전체를 시장으로 부터 곧바로 배에 타라고 몰어넣는 일도
벌어지니, 도시가 바닷가 부두에 붙어있기 때문으로 때문에 카파는 그냥 도시가 아니라 노예시장이라고 불립니다.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크림 칸국에서 주민들인 타타르족은 평상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오면 급히 소집되었으니 몽골의 군사들 처럼 십진법에 따라 조직되어
모든 병사들은 코스 (kos) 라고 불리는 열 명의 분대에 속했고, 각각의 코스에
소집되면 자신의 말과 호루라기, 해시계, 송곳, 부싯돌, 바늘을 포함한 장비들을 스스로 장만해 달려갑니다.
코스들이 모여서 백명, 천명, 혹은 만명까지의 부대가 되었으며 종군할 때, 타타르 병사들은 기장이나 분말 상태가
된 고기와 마늘로 끼니를 때웠으며, 행군하다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말의 고기를 작게 잘라서 안장 밑에
넣어두었다가, 따뜻해지면 날로 먹기도 했으니 조상들 처럼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내는 강인한 전사들 이었습니다.
크림 칸국의 칸들은 천명이 넘는 수행원을 거느렸고, 궁정 대신들과 하급 귀족들은 적은 수의 수행원들을 보유했으니
직업 군인과 비슷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칸에게 직접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족을
통치하는 부족장이나 귀족에게 충성했으니...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귀족과 부족장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칸이 이끌 때의 병력은 8만이나 그 이상에 달했으며, 칼가들은 5만명을 거느리고,
칼가의 부장 누르 알 딘은 4만명을 지휘했는데,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의 공격은
영토를 얻기 위한 정복이 아니라 대부분 약탈을 위한 것으로서 그들의 병력은 그보다 더 적었습니다.
대부분의 타타르 군대는 활과 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이지만 화승총을 가진 병사들도 있었으니,
칸은 6백명의 총병을 20개 중대로 나누었고, 출정한 경우에는 그만큼을 다시 모집
했는데.... 총병은 두 발로 걸어다니며 싸웠지만 이동 시에는 대부분 말에 타서 기동성을 높였습니다.
타타르인은 출정할 때, 개인당 최소한 말 세 필은 가져와야 했는데, 프랑스인 여행가 기욤 보플랑은 그가 직접
크림 칸국을 방문하여 목격한 1630년대, 자신의 책에 크림 타타르인들의 말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들 (타타르족) 이 바크마테스라고 부르는 말은 몸체가 길고 추하게 생겼으며, 야윈 데다
갈기는 무성하고 꼬리는 길게 땅까지 늘어졌다. 그 대신, 속도가 빠르고 이동 중
에는 지치지 않아서 자신을 태우고 있는 기수를 온종일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를 수 있었다.
또, 겨울에 눈으로 덮인 땅에서도 나뭇가지나 식물의 싹, 짚 등 먹을수 있는 먹이들을 발굽으로 눈을 헤쳐 찾아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타타르인들이 작고 야윈 바크마테스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플랑에 따르면
부유한 타타르인 족장들은 투르크와 아라비아에서 들여온 좋은 말들과 경주용 말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별다른 갑옷이나 투구를 걸치지 않았지만, 부유한 타타르인들은
투구를 쓰고 사슬 갑옷을 입었는데..... 라멜라 아머나 브리건딘
(두정갑) 같은 갑옷 대신에 사슬 갑옷을 사용한 것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타타르인들의 주요 무기는 합성궁 활이었고, 보플랑에 따르면 각자의 타타르 병사들은 18개에서 20개
까지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휴대했다는데, 그러나 13세기의 몽골인들이 최소한 40개에서
60개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 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합성궁 이외 타타르인들은 굽은 기병도와 허리에 찬 단도, 또는 굽은 단도와 창과 방패를 휴대했으며 드물었지만
권총이나 화승총 같은 화약 무기도 소지했는데 타타르인들은 화약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으며,
생산된 화약들은 오스만 제국에 수출했고 총기의 느린 장전과 연사 속도 때문에 총 보다는 활을 더 선호했습니다.
귀족들은 말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죽으로 만든 긴 양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 크림 칸국의
말들은 발굽에 편자를 박지 않았으니, 타타르족은 눈으로 말발굽을 보호할 수 있는 겨울에
원정을 떠나기 좋아했으며 강의 폭이 아무리 넓어도 건널 수 있었는데, 병사들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장비들을 놓고, 말꼬리에 묶어서 말을 강 건너편으로 헤엄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타타르족은 전원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병참부대가 없어 진격 속도가 굉장히 빨랐는데, 1689년
카플란 기레이가 거느린 타타르 군대는 늪이 많은 지형에서 엿새 동안 190킬로미터를 진군
했으며 타타르의 말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 기수가 말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소변을 보지 않았습니다.
군대의 정지 신호와 행군 신호는 호루라기로 내렸으니, 타타르 병사들은 밤새 엄밀하게 망을 보았기 때문에
기습하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장소가 좁은 곳이나 강어귀의 수로가 아니라면 그들을 패배시키기란
쉽지 않았으니, 우크라이나 일대는 유목민 침입에 취약한 평야 지대 특성상 코사크가 본격적으로
방어에 나서기 이전까지 무력하게 당했으며 약탈한 물건을 수레나 말에 싣고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16, 17세기 크림 칸국의 약탈은 러시아 뿐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 동부에서도 무척 심각했는데,
이들의 노예 사냥이 하도 기승을 부려서 지주들까지 전부 노예로 끌려다가시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한동안 드네프르강 일대가 사람이 살지않는 공백지가 되다시피 하자.... 카자크들이
이 공백지를 접수한후 러시아와 폴란드- 리투아니아에서 온 도망 농노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노제가 악랄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의 반란이나 소요가 적었던 이유가
노예로 납치되는 것 보다는 농노로 사는게 나을 거 같아서.... 주로 상품 가치가 높은 처녀들이 납치의
타겟이 되었고, 어린아이들은 어차피 끌고가 봤자 병들어 죽기 쉬우니 납치하지 않고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만 1474년부터 1694년까지 평균 2만명 가까이 크림 타타르 전사들에게 납치되거나 살해
당했다니 차라리 농노로 살기를 택했던 사람들이 이해가 될 정도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모양새이니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입장에서는 국력 성장을 막는 주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국가만 약탈한 것은 아니고 같은 무슬림인 체르케스인들도 심각한 수준으로 약탈했는데,
체르케스인들은 15세기 이후 부족 대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체르케스인 군인
노예들이 몸값이 비싸고 여성들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침략을 멈추지 않았으니, 체르케스인
노예들은 이집트 맘루크로 팔려가거나 아니면 오스만 제국 황실이나 유력자들의 하렘으로 팔려갔습니다.
노예 납치산업이 얼마나 흥했는지 카파의 타타르 유력자들은 가난한 크림 타타르족에게 말과 무기를 빌려주고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납부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사업까지 번성했으며, 심지어
오스만에 충성하는 번국, 봉신국들과 같은 무슬림인 체르케스인들 까지 마구잡이로 납치하고 약탈했습니다.
약탈과 납치를 위해 벌이는 군사 원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크림 칸국의 칸이
직접 이끄는 sefer (원정, 정벌) 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 귀족 등이 주도하는 çapul (약탈)
이었으니 어휘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약탈이 잦았고, 특히 칸이 지휘하는 경우도 잦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등쌀 때문에 러시아인 및 폴란드-리투아니아인들은 방비를 위해 방책을 세우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동안 수백만명이 노예로 잡혀 갔으며, 레판토 해전이
일어난 1571년에 크림 칸국은 루스 차르국의 수도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기습하여 크렘린
요새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10만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을 노예로 납치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입장에서 보면 이가 갈릴만도 하니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부에 거주
하는 크림 타타르인은 납치된 러시아, 우크라이나인 여성들과 타타르족 남성들의 자손
들이기도 한데, 영국인들이 침략자 게르만족 앵글족과 색슨족 남자들이 영국에 정착해
현지 브리타니아인 여인들과 사이에 낳은 후손인 것과 같으니 침략자 후손이어야만 번성합니다.
체르케스인들의 경우 같은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약탈과 납치를 당했지만 러시아 제국에 정복되어
탄압받은 동병상련의 역사를 공유한 이유로 과거사는 묻혀가는 분위기로, 다만 체르케스인들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우리가 침략해서 잘못했다' 라는 식으로 인정하는데 비해 크림 타타르인한테는 그런 일은 없답니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살던 친척뻘 볼가 타타르인도 크림 타타르 처럼 러시아인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전과가
있었으니, 이반 뇌제가 정복한후 러시아어 강요와 강제 개종으로 강압적으로 동화를 시도했으나 새로 정복한
무슬림 민족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 민족으로 대우도 좋아지고 자치권도 인정받으면서 러시아와 융화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치공화국인 타타르스탄 공화국도 갖고 있는데, 그러나 지중해 진출을 가로막는 숙적의
제1번국이자 수세기 동안 자국민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치우면서 변경을 위협하던 불구
대천지 원수 크림 타타르는 정복후 잔인하게 대했으니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을 가는 계기가 됩니다.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깨뜨린건 러시아 제국이니, 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는 발트해에 관심을 보여 대북방 전쟁으로 스웨덴을
무너뜨리고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등을 얻었으나 추운 북쪽의
기후상 결빙 일수가 있어 한계가 있던 발트해 보다 흑해로 눈을 돌려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합니다.
오스만 제국은 크림칸국 군대의 지원을 받긴 해도 주력은 예니체리인데 그외 엘리트 군제의 또 다른
축이었던 티마르 제도와 티마를르 시파히 또한 붕괴하니....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 기병대
였던 티마를르 시파히는 티마르 제도를 통해 정복지를 봉토로 하사받았는데, 제국의
팽창이 한계에 이르자 더 이상의 봉토가 나올리가 없었고 티마르 제도 자체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오스만 제국 군사력의 양익이 모두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도중 무너졌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여진, 거란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북송이 세계 최고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한 것처럼, 오스만 역시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17, 18세기 오스만 제국은 튤립 시대 (Lâle Devri)' 라 불리는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습니다.
1808년에 제위에 오른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사촌형 셀림 3세가 니자므 제디드 개혁을 통해 왕권을
농단하는 예니체리들을 박살내려다가 도리어 암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예니체리
들을 안심시키면서 민심을 얻고 최신 병기와 새 편제를 도입해 친위대를 양성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조짐이 좋지 않은걸 알아챈 예니체리는 술탄을 쫓아내기 위해 밥 먹듯이 하던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흐무트 2세는
친위군을 지휘하여 예니체리를 박살냈으니,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 15문의 30분에 걸친 포격에 예니체리
만여명이 죽었다고 전해지니 이렇게 해서 일생 일대이자 전 오스만 가문의 원수였던 예니체리가 해체 되었습니다.
권력 구조는 이미 쉴레이만 1세 재위 기간중 권력은 군주 개인에게서 그의 해방 노예, 피후원자라 할수 있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들로 넘어가기 시작했으니 데브시르메 관료들은 그 이전부터 통제받지
않는 특권 집단으로 자리잡은 예니체리 계급이나 태후, 황후와 결탁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크림 반도,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알제리, 동쪽으로는 캅카스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비대해진 제국을 술탄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까닭에 영토를 다스리고
유지할 행정 관료가 필요해졌기 때문인데, 하지만 데브시르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군사
원정을 벌이거나 통치하는 황제는 필요가 없어지고 관료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황제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즉위한 황제 가운데 대다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거나 나이가 어려 태후의 섭정이
필요했으니, 결국 오스만 2세나 무라트 4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19세기의 마흐무트 2세와
압뒬하미트 2세가 통치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문자 그대로 전제 군주로 군림했던 황제는 없었습니다.
국가의 권력은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라 할수 있는 재상과 파샤 가문으로 넘어갔으니 술탄의 권력이
있던 곳에는 예니체리 군벌을 등에 업은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데브시르메에
의한 관료 등용은 지배 계급의 권력 세습으로 대체되었는데,"아직은" 코스탄티니예
의 중앙 정부가 통치권을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방 총독의 권세가 대단히 강력했으니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한해서지만 군사권
과 행정권, 경찰권을 보유했으며, 제국의 중앙 정부가 파견한 법관의 판결만 떨어진다면 법을
집행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으니, 무늬만 중앙 집권이지 실질적으론 봉건제에다 지방 자치나 다름없었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고 총독으로 내려온 이들은 제국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중앙 정부가 파견한 법관을 우습게 보는 것도
모자라 독립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했고, 19세기가 되면 현 튀르키예 국경 밖의 영토는 전부 준 독립화했으니
이집트도 실제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총독 통치 하에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법관을 파견하는 한편 주요 도시에 예니체리 군단을
주둔시킨 다음 예니체리가 주둔하는 도시는 그 지방을 관할하는 총독이라도 들어갈 수
없게 했지만 코스탄티니예의 예니체리가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등 변질되자 총독
견제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총독들이 힘을 길러 중앙을 무시하고 군벌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 지방 중 오스만 제국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제국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곳이 이집트였으니 알바니아 출신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서구식 조병창을 건설하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 기세등등하게
근대화를 진행하는 중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중앙군이 독립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걸 봅니다.
술탄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그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에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메흐메드 알리는 자신 세력을 키울 기회로 보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 키프로스와 시리아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이를 승락합니다.
이집트군과 오스만군의 협공에 그리스 독립군은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독립군에게 온정적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이 오스만에게 유혈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 자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오스만이 거부하자
열강들은 나바리노 해전으로 실력행사를 했고, 오스만은 러시아에게 얻어 맞고는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