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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1호 : 통도사삼층석탑(通度寺三層石塔) 2006.6.1지정
통도사삼층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이다.
석탑의 높이는 3.9m 기단폭은 1.8m이며, 기단은 여러 매의 장대석을 사용해 지대석을 구축한 후 올려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개의 부재로 조성되었다.
양식적 특징으로는 첫째, 하층기단의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생략하며 안상을 조각했다. 신라석탑에서 통도사삼층석탑과 같이 우주와 탱주를 생략하며 기단부에 안상을 조각한 것으로는 범어사삼층석탑, 안동 옥동삼층석탑, 무장사지삼층석탑, 칠곡 기성동삼층석탑, 술정리서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옥개석의 양식으로 전각의 경쾌한 반전과 낙수홈을 들 수 있다. 보편적인 신라석탑의 낙수면은 곧게 일직선으로 조성되어 전각의 반전이 날렵하게 조성되고 있다. 이같은 예를 실상사삼층석탑과 해남 대흥사 응진전앞 삼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바, 이들 석탑이 모두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을 볼 때 이 석탑 역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472호 : 통도사아미타여래설법도(通度寺阿彌陀如來說法圖)
화면의 중앙에 본존인 아미타여래가 보단(寶壇)위에 결가부좌하고 그 좌우에 관음과 세지보살을 비롯한 8대보살과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화면 윗부분에는 10대 제자와 용왕·용녀 등이 배치된 전형적인 설법도 형식의 그림이다. 채색은 주, 군청 그리고 녹청을 주조색으로 하였으며 중간색은 억제되어 있어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본존을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하여 주제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며, 법의의 옷주름 역시 비교적 굵고 활달하여 본존의 모습과 조화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구도는 물론 색감도 안정되어 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한편 이 그림은 화기(畵記)에 의하면 임한(任閑)이란 화사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임한은 기림사의 비로자나삼신불도(1718년)를 비롯하여 통도사의 석가설법도(1734년)와 비로자나삼신불도(1759년) 및 석남사, 운문사 등 통도사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의 불화제작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 화사이다.
전반적으로 필치가 섬세하고 유연함이 돋보이며 인물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함이 엿보임과 아울러 ‘임한’이 수화원을 맡아 조성한 이른 시기의 불화로서 이른바 ‘임한파’ 화풍을 선도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제1473호 : 여주이씨옥산문중소장고문서(驪州李氏玉山門中所藏古文書) 경주안강
여주이씨 옥산문중에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을 비롯하여 이 가문의 세대별 고문서가 잘 보전되어 있다. 이들 문서는 16~20세기 초까지 그 어느 문중보다 수량이 많고 종류가 다양하며 내용도 풍부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지정대상은 시기를 선조 이전의 문서로 한정하여 교서(敎書) 1점, 유지(有旨) 7점, 교지·첩(敎旨·牒) 20점, 급첩(給牒) 1점, 상소초(上疏草) 2점, 첩(帖) 1점, 입안(立案) 12점, 소지류(所志類) 7점, 분재기류(分財記類) 14점, 노비문기(奴婢文記) 18점, 토지문기(土地文記) 14점, 간찰(簡札) 1점 등 총 98건이다. 내용은 이언적의 관력(官歷)과 관련된 부분으로 특히 이언적의 학문적 위상을 고려하여 작성된 有旨를 비롯하여 세자시강원의 좌우부빈객을 역임할 당시 맺었던 친분으로 보낸 답장의 글인 인종수찰(仁宗手札)이 있다.
특히 납속(納贖)을 통해 신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는 허통급첩(許通給牒)은 신분사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으며, 노비문기 가운데 입안 절차를 밟아 입안을 받은 일괄문서가 16건이나 된다. 이들 옥산문중 고문서는 조선시대 신분사 및 사회·경제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제1474호 : 경주이씨양월문중소장고문서및향안(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및鄕案)
경주이씨 양월문중의 경우에는 선조 및 가문 관련 자료도 많지만 사실상 가문소장 자료라고 보기 어려운 경주 향안 등 유향소 관련자료, 구강서원 문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고문서 중 지정대상은 양월문중 소장 조사첩 2점, 교지·교첩·차첩류 23점, 소지 1점 및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지대 왕지 1점이다. 조사첩(朝謝帖)은 이조(吏曹)에서 사헌부의 서경(署經)을 거친 사실이 기록된 것으로 고신식(告身式)이 확정되기 이전의 고려적인 양식이 남아있어 귀중하다. 조사첩은 사헌부의 서경을 받는 최종 종결로 보여지며 이 조사첩을 발급받는 것은 관료가 해당관직에 정식으로 임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사행정에 관한 자료이다. 이점(李點)이 받은 조사첩은 2점인데 1423년의 것은 조사첩(朝謝帖) 이고 1444년은 조사첩(朝謝牒)이다.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이전에 쓰였던 문서로서 문서서식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17세기 경주향안(총17책)은 다른 지역의 자료와 비교할 때 자료의 17세기 집중도와 희소성이 주목된다. 지정대상 총17책의 향안은 1592-1692년에 이르는 집중성을 보이는데, 17세기는 우리나라 향안의 변천사가 함축된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경주 향안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사례가 거의 없다. 또한 경주향안은 원본과 등서본, 신천안, 이에 부수된 입의와 완의, 유향소 관련 각종 향촌운영 문서, 그리고 향약까지 망라된 종합성을 가진다.
제1474-1호 : 경주이씨양월문중소장고문서및향안(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및鄕案) 이상천
제1474-2호 : 경주이씨양월문중소장고문서및향안(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및鄕案) 서울역사박물관
제1475호 : 안압지출토금동판불상일괄(雁鴨池出土金銅板佛像一括)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출토의 삼존불상 등 판불상 10점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상들의 표현이 사실적이며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양식적으로는 7세기 말 통일신라와 중국, 일본을 포함한 국제적인 조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도상이나 양식면에서 일본 법륭사 헌납보물에 있는 판불들이나 법륭사 금당 서벽 아미타정토의 본존불상과도 비교된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에 보이는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은 중국 당(唐)시대 전성기 불상양식을 반영하면서도 7세기 후반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뛰어난 표현력을 잘 대변해준다. 이 10점의 상들은 하나의 삼존불상과 4보살상이 한 세트로 두 종류의 소형목제 불감과 같은 구조물에 부착되어 예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조기법 및 기량이 뛰어난 10점의 안압지 출토 판불상들은 7세기 말 통일신라 초기에 새로이 유입되는 국제적인 조각양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들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당시 한 · 중 · 일 불교조각의 양식비교 및 전파과정과 영향관계를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제1476호 : 김시민선무공신교서(金時敏宣武功臣敎書)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에게 내린 선무공신 교서이다.
선무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 10월에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장군들에게 내린 것으로,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총 18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공신교서는 김시민 장군의 공적과 그에 따른 포상내역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존하는 선무공신교서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임진왜란사 연구와 고문서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38.4 x 287.0cm(본문 37.2 x 222.5cm)
제1477호 : 채제공초상일괄(蔡濟恭肖像一括)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우측 상단에 ‘聖上 十五年 辛亥(1791) 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1792) 粧’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畵者 李命基’라고 밝혀 놓았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금관조복본(1784년작)>은 65세 때 초상으로 왼편에 채제공의 자찬문을 이정운(李鼎運 1743- ?)이 썼다.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장식적인 금관조복을 금박,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누가 그렸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단령포본>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으로 본래 夫餘 道江影堂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역시 이명기의 초상화법이다.
조선후기 채제공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이 높으며 초상화를 그린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 역시 당대의 최고로 꼽힌다. 게다가 <채제공영정> 일괄(시복본·금관조복본·흑단령포본)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고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초상과 아울러, 정조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향낭과 영정함도 일괄로 지정되었다.
제1477-1호 : 시복본(時服本) 수원 선경도서관
제1477-2호 :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대구 채규식
제1477-3호 : 흑단령포본(黑團領袍本) 국립부여박물관
제1478호 : 조씨삼형제초상(趙氏三兄弟肖像) 국립민속박물관
제1479호 : 유숙초상및관련교지(柳潚肖像및關聯敎旨) 국립고궁박물관
제1480호 : 심환지초상(沈煥之肖像) 경기도박물관
제1481호 : 김유초상(金楺肖像) 경기도박물관
제1482호 : 이시방 초상(李時昉 肖像) 대전선사박물관
李時昉(1594-1660)은 仁祖反正의 주역들인 延平府院君 李貴(1557-1633)의 次子이자 延陽府院君 李時白(1581-1660)의 동생이다. 이시방은 아버지와 형을 따라 1623년의 30세 때 仁祖反正에 참여하여 靖社功臣 2等으로 延城君에 봉해지고, 이후 여러 차례 判書를 지낸 뒤 顯宗 즉위년(1659) 가을에 判義禁府事를 지냈다.
현재 대전의 후손가에 전하는 이시방의 영정은 모두 6점인데, 본래는 이시방의 후손들이 世居하던 洪城의 祠堂에서 주로 봉안해오던 것들이라고 한다. 먼저 1623년의 仁祖反正에 참여하여 靖社功臣에 녹훈되던 30세 때의 젊은 모습을 그린 것이 3점인데, 이 중에서 官服本 全身像 1점은 17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功臣圖像의 형식과 화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이시방의 靖社功臣像 원작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와 圖像이 같은 半身小像 1점은 훗날 延平府院君 李貴의 祠宇가 있는 公州 木洞面의 盛峰書社(盛峰書院)에 李時昉 像을 모시기 위해서 이 功臣像의 일부를 다소 거칠고 조악하게 摹寫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1점의 油紙 草本은 이 胸像을 그릴 때 全身像에서 떠냈던 草本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다른 한 종류의 영정 3점은 얼굴 모습이 거의 동일한 老年像인데, 2점은 종이에 그린 胸像 草本이고, 나머지 1본은 이 草本을 토대로 하여 비단에 그린 正本의 半身像이다. 이 중 17세기 공신 도상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관복본 전신상>에 대해서만 보물로 지정한다.
제1483호 : 이채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의 性理學者이자 文臣인 李采(1745-1820)의 초상이다. 이 이채 상은 深衣를 입고 程子冠을 쓴 뒤 두 손을 拱手한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인데, 눈부시게 수려한 용모를 실로 뛰어난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 상부에 京山 李漢鎭(1732-1815)과 綺園 兪漢芝(1760-1834) 등 당대 명필들의 미려한 贊文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조선후기 燕居服 초상화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李采 상은 조선후기 19세기 초반의 가장 대표적인 儒學者 상으로서 눈빛이 형형한 얼굴의 정교한 묘사는 조선후기 초상화가 도달했던 높은 수준의 사실성을 대표해준다.
제1484호 : 남구만초상(南九萬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南九萬(1629-1711)은 숙종 초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치고 1683년 노소론이 나뉠 때 소론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화면의 우상단에 ‘領議政致仕藥泉南先生眞 文人領議政崔錫鼎贊’이라고 쓰여 있고 화면 좌상단에는 大司成 崔昌大가 쓴 긴 찬문이 쓰여 있다. 최창대가 대사성으로 있었던 것은 1711년뿐이었고 이후에는 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므로 대사성이란 관직명으로 인하여 이 초상이 1711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상은 관복을 입고 교의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으로 얼굴이 정면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오사모에 녹포단령을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와 서대를 하고 있다. 이 초상 가운데 가장 특이한 요소는 얼굴표현에서 나타난다. 정면으로 그려진 얼굴은 윤곽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깝게 보이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드러내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정면상이란 점에서도 새로우며 얼굴의 입체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선묘의 효과를 극소화하고 선염처리를 활용한 점도 이채롭다. 이 초상은 18세기 초 새로운 영정 유형과 기법의 대두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가 된다.
제1483호 | 제1484호 |
제1485호 : 강이오초상(姜彛五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강이오(姜彛五 1788∼?)의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약산(若山)으로 강세황(姜世晃)의 손자이다. <강이오 초상>은 오사모를 쓰고 분홍 시복을 입은 정면 반신상으로 배경은 없다. 화면 상단에는 “若山眞影 小塘寫”라고 예서로 쓰여 있고 그 우측에 세로쓰기로 “具足慧相現宰官身 是惟丹靑之咄咄逼眞 誰更知天地弧線 羅心胸隨遇而神 老髥題”라는 김정희의 찬문이 특유의 추사체 해서로 적혀있으며 주문방인 “髥”과 “秋史”가 찍혀있다. 따라서 화가는 초상화로 이름이 높았던 이재관(李在寬 1783-1838년경)이며 김정희가 이 초상을 보고 찬을 짓고 직접 적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분홍색 시복은 비수(肥瘦)가 있는 필선으로 윤곽과 의습을 묘사하였는데 필치가 활달하며, 분홍색 농담을 달리하여 명암효과를 가미하였다. 푸른색 각대에는 가운데 금박 장식이 있는데 금박이 일부 탈락되었다. 얼굴, 수염, 복식 등으로 미루어 40대 정도의 중년기의 초상으로 추정된다. 족자 형태인 작품의 상태는 양호하며, 화면 전체에는 아교가 포수되어 반짝거린다.
서양화법을 일부 반영하면서도 이전의 전통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는 19세기 초상화의 수작이다.
제1486호 : 이광사초상(李匡師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李匡師(1705-1777)는 원교체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이광사 초상> 화면 우상단에 ‘朝鮮國光山李公諱匡師字道甫圓嶠先生遺像 … 此本卽 先生七十歲甲午冬畵師申漢枰所寫……’라고 쓰여 있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제작시기, 화가 등 내력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1775년에 이광사 말년의 모습을 신윤복의 아버지로 유명한 화원화가 신한평이 그린 것임이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필묘와 은근한 요철감을 표현하는 수법으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품격 있고 깊은 傳神을 성취하였다는 점에서 수준이 높은 역작이다. 또한 신한평이 초상으로 유명하였지만 전해지는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희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1485호 | 제1486호 |
제1487호 : 서직수초상(徐直修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서직수(1735-?)는 본관은 達城이며, 자는 敬之, 호는 十友軒이다. 영의정 서명균의 조카로서, 진사로 관직에 있지 않고 일생을 시서화를 하면서 보냈다한다. <서직수상> 화면의 오른 편 상단에는 서직수의 自贊이 있어 서직수 62세인 1796년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린 합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서직수상>은 동파관에 도포를 입고 흑색 광다회를 두르고, 버선발로 서 있는 좌안8분면의 전신입상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좌상인데 반해 입상(그 것도 실내장면)일 뿐더러, 당대 최고화가들의 합작이라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매우 뛰어난 형태 묘사와 투시법, 명암법을 구사하면서도 높은 품격을 보여주어 정조대 초상화의 백미로 꼽히는 걸작이다.
제1488호 : 심득경초상(沈得經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심득경(沈得經 1629-1710)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이 초상은 동파관에 유복 차림을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 전신좌상이다. 화면 상단에 “定齋處士沈公眞”이라고 예서로 쓰여 있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는 이서 (李漵 1662- )가 지은 찬을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썼으며, 왼쪽 상단에 다시 이서의 찬이 적혀있다. 그리고 우측 아래쪽에 “維 王三十六年庚寅十一月寫時 公歿後第四月也海南尹斗緖謹齋心寫”라고 쓰여 있어 윤두서가 숙종36년인 1710년 11월에 추화(追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이나 의복의 묘사는 다소 과장과 형식화가 엿보이고 있어서 사실적 묘사로서의 초상화의 특징과 유형화된 표현을 위주로 하는 일반 인물화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靑竹畵史)'에 이 초상에 대하여 적혀있는데 친구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리니 심득경 가족들이 이를 보고 모두 울었다고 전한다.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화가인 윤두서가 그린 초상화로서 의미가 크며 회화성도 높은 중요한 작품이다.
제1487호 | 제1488호 |
제1489호 : 박유명초상(朴惟明 肖像) 수원역사박물관
박유명(朴惟明 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堂上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제1490호 : 이성윤초상(李誠胤 肖像) 국립고궁박물관
李誠胤(1570-1620)이 光海君 5년(1613)에 衛聖功臣 2等에 錄勳될 때 하사받은 衛聖功臣像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는 초상화이다. 光海君이 壬亂을 극복하고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어진 光海君 5년(1613)의 衛聖功臣과 翼社功臣, 定運功臣, 亨難功臣은 1623년의 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모두 削勳되고 功臣錄券과 功臣圖像도 국가에서 수거하여 소각했다.
그래서 광해군 때의 功臣像은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어 그 실상이 미상인 채 거의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현재 후손가에는 위성공신 녹권과 이 초상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圖像은 17세기 초반의 가장 전형적인 功臣圖像의 모습으로서 團領을 입고 拱手한 뒤 交椅子에 半右向 정도로 앉은 모습이며, 바닥에는 화려한 彩氈을 깔고 두 발은 돗자리를 깐 木製 椅踏 위에 약간 八字形으로 벌린 모습이다.
衛聖功臣으로 따지면 2等의 功臣像이지만 宗室 어른일 뿐만 아니라 평소 높은 人品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인 듯, 전체적으로 金銀이 매우 화려하게 사용되고 石彩 眞彩도 매우 곱고 선명하며 描寫도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여 17세기 초반의 功臣像 중에서도 매우 良質의 上品에 속하는 초상화라고 생각된다.
제1491호 : 연잉군초상(延礽君 肖像) 국립고궁박물관
<연잉군초상>은 화면의 좌측 상단에 “初封延仍君古號養性軒”이라 적혀있어 이 본이 영조가 임금이 되기 이전에 제작된 延礽君 시절 圖寫本임을 알 수 있다. 紗帽, 白澤 胸背를 부착한 綠袍團領, 犀帶, 검은색 녹피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장관복차림에 공수자세로 앉아 있는 좌안8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이 상은 영조 21세(1714년) 때 진재해(?-1735 이전)가 그린 것으로 영조 21년(1745)에 慶熙宮 泰寧殿에 봉안되었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잠시 景賢堂에 두었다가 정조 2년(1778년) 3월에 선원전으로 이봉되었다. 이 본은 가장자리가 불에 타서 1/3이 결손되었으나 얼굴, 흉배, 관대, 족좌 부분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의 초상화의 기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어진은 전주 慶基殿의 태조어진, 고궁박물관 소장의 철종어진과 익종어진 등 극소수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라 이 상은 영조가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라 할지라도 어진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특히 1713년(숙종 39년) 肅宗御眞圖寫에 主管화사였으며, 이후 조영석의 형 <趙榮福像> 등 사대부들의 초상화 제작에도 참여한 진재해의 초상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이 상은 보물 589호로 지정된 <강현상>과 함께 18세기 초기 정장관복형식의 초상화의 형식을 대표하는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제1492호 : 철종어진(哲宗御眞) 국립고궁박물관
철종어진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에 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李漢喆과 趙重黙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金夏鍾, 朴基駿, 李亨祿, 白英培, 白殷培, 劉淑 등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絳紗袍本과 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 군복본만 현전한다. 이 <철종어진>은 임금이 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제1493호 : 오재순초상(吳載純 肖像) 리움미술관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은 정조 때 대사헌,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부사까지 오른 관리이자 제자백가에 두루 달통한 학자로 유명하다. 이 <오재순 영정>은 현재 족자 반달축 뒷면에 “醇庵吳文靖公六十五歲眞像 李命基寫”라는 종이 제첨이 붙어 있는데, 비록 오재순 사후에 쓰여진 것이지만 당시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원 이명기가 오재순의 나이 65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의 산뜻한 선염법을 사용하던 것과는 달리 세세한 붓질의 반복을 통해 얼굴의 형태와 명암을 자세히 표현하였다. 옷주름 역시 강한 명암대비효과를 구사하여 입체감 있게 그렸으며, 운보문단(雲寶紋緞)의 문양도 옷주름의 변화를 고려하여 굴곡을 따라 처리하고 있다. 쌍학흉배의 경우도 자수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화법을 적용하였지만 이전에 발달되었던 선묘 위주의 해맑은 얼굴 표현의 전통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그 결과 사실성과 이상미가 어우러지는 전신(傳神)의 지극한 경지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 후기 초상화이 높은 수준을 대변해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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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4호 : 황현초상및사진(黃玹肖像 및 寫眞) 순천 황승현
大韓帝國期 전후 최고의 초상화가로 일컬어지는 石芝 蔡龍臣(1850-1941)이 그린 韓末의 대표적인 文人이자 우국지사인 梅泉 黃玹(1855-1910)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황현이 자결한 다음해인 1911년 5월에 일찍이 황현이 1909년 天然堂 寫眞館에서 찍어두었던 寫眞을 보고 追寫한 것이다. 死後에 寫眞을 보고 追寫한 것이지만,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매우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深衣를 입고 布帶를 맨 뒤 程子冠을 쓴 모습이며, 圖像은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든 채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은 趺坐像이다. 자세는 거의 九分面 정도에 가까울 정도로 약간 왼쪽으로 앉은 正面像에 가까운 모습인데, 이는 애초 황현이 찍은 寫眞의 取勢에서 온 것이며, 부채와 책을 들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사진의 모습을 따르며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초상화는 深衣를 입고 程子冠을 쓴 뒤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약간 바뀌어 있다.
이 황현 상은 양식사적으로도 대한제국기 전후 초상화의 새로운 면모와 특징적인 모습을 매우 종합적으로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수준도 이 시기 초상화의 백미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제1495호 : 윤증초상일괄(尹拯 肖像 一括) 충남역사문화원, 국사편찬위원회, 명재고택
‘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 라는 묵서가 있는 측면전신좌상은 1744년 작품으로, 『영당기적』에 ‘崇禎紀元後, 再甲子四月, 影子移摹四本, 正面一仄面三. 畵師張敬周’라고 밝혀져 있어 장경주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崇禎紀元後三戊申二月摹’라는 묵서를 지닌 1788년작 윤증초상 2점은 『영당기적』의 내용을 통해 이명기가 모사했음을 알 수 있다. '영당기적'에 따르면 정면 1본과 측면 1본은 신법을 가미하여 그리고, 구본의 화법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구법을 따라 측면 1본을 그렸다(故倣甲子正面點化之例, 略加新法, 摹出正仄各一本, 而舊本畵法, 亦不可不傳於後. 故又出仄面一本, 純用舊摸法)고 한다. 이명기가 제작한 현전하는 초상화 2점은 장경주 필 윤증상과 그 모습이 흡사한 구법에 따라 그린 측면상과 이명기의 개성적 화풍으로 그린 입체표현이 선명한 신법의 측면상이다. 정면과 측면의 흉상 2점은 화면에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추정된다. 측면상을 전신상과 비교해 보면 크기나 기법이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와 같다.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영당기적』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아울러 '영당기적'은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이들 작품 외에도 종가에는 1919년 및 1935년작 전신좌상 및 소묘초본이 여러 점 전하고 있다.
제1496호 : 윤급초상(尹汲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문신인 근암 윤급(近菴 尹汲 1697-1770)의 영정으로 사모(紗帽)와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표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반우향(半右向)으로 앉은 뒤 공수(拱手)하고 있는 전신상이다. 쌍학흉배(雙鶴胸背)와 서대(犀帶)를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윤급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 1품에 오른 영조 38년(1762)의 66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오세창의 ꡔ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ꡕ에 변상벽(卞相璧)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和齋畵幀)”의 기록이 인용되고 있어, 동 초상이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였던 변상벽이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의 사마귀와 검버섯, 붉은 홍기(紅氣)까지 정교하게 묘사한 수작이며 족자표장도 18세기 후반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준다.
제1497호 : 김시습초상(金時習 肖像) : 부여 무량사
제1496호 | 제1497호 |
제1498호 : 조선후기문인초상(朝鮮後期 文人 肖像) 부산 신성수
분홍색 시복을 입고 화문석에 앉아있는 좌안팔분면 좌상으로, 얼굴은 약간 화면의 좌측으로 치우쳤고 눈을 아래로 깔고 명상에 잠겨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의복은 담묵의 주름선 언저리에 명암이 가해져 있으며, 가슴 부분에서 살짝 아래로 휘어져 복부의 입체감을 암시하고 있다. 허리에는 삽대를 차고 있는데 가운데 부분을 금박으로 처리했다. 인물이 방석 위에 표범가죽을 깔고 앉아 있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그림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섬세하고 정교할 뿐 아니라 인물의 품성까지 잘 드러내주는 수작이다. 18세기 후반 초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줌과 아울러 원래 표장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1499호 : 이하응초상일괄(李昰應 肖像 一括)
제1499-1호 :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서울역사박물관)
제1499-1호 : 와룡관학창의본(臥龍冠鶴氅衣本) (서울역사박물관)
제1499-1호 : 흑건청포본(黑巾靑袍本) (서울역사박물관)
제1499-1호 : 복건심의본(袱巾深衣本) (서울역사박물관)
제1499-2호 :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국립중앙박물관)
제1500호 : 김이안초상(金履安 肖像) 연세대박물관
김이안(1722-1791)은 본관은 안동,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이며, 김상헌의 후손으로 노론의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김창협의 증손자이자 김원행의 아들로 정조대 산림으로 우대되었던 인물이다. 김이안 초상은 연세대학교박물관에 반신상이 1점, 이화여대박물관에 전신입상이 한점 전하고 있는데, 두 박물관 소장의 초상은 동일한 상호와 복식을 하고 있다.
연세대박물관 소장 <김이안 초상(반신상)>은 정교하면서도 이상화된 안면 묘사로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한 수작이다. 머리에 쓴 복건이 자주색을 띄는 점이 이채롭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본은 조선시대 초상화 중 전신입상의 희귀한 예이나 연세대박물관 소장본에 비해 화풍에 있어 경직된 면모를 보여준다. 두 점의 <김이안 초상> 중 연세대박물관 소장본만을 보물로 지정예고하였다.
[출처] 대한민국 보물 50 (제1471호 - 제1500호) |작성자 김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