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의 고향집을 향해 / 고우 스님
불교의 핵심교리 중에는 삼법인(三法印)이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
삼법인입니다.
이 삼법인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으로,
불경 속에 삼법인의 가르침이 들어 있으면
불법의 도리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요의경(了義經)이라 하고,
삼법인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은
불요의경(不了義經)으로 판단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가르침이 삼법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삼법인 가운데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이 덧없이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사바세계의 삶이 괴롭고
생노병사(生老病死) 등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리이기 때문에
깊은 이해를 요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모든 것이 무아다'
이 무아야말로 중생인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나가 분명히 있는데 왜 나가 없다고 하느냐?'
사람들은 이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면 열반적정을 이룰 수 있는데도,
무아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의 낙(樂)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법무아라고 할 때의 그 '나'는 과연 무엇인가?
아주 깊은 내용보다는
중생의 입장에서 당장 극복해야 할 '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기적인 '나'입니다.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나'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공부를 계속하여
깊은 경계에 들어가면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게 됩니다.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자리, 그 자리가 무아(無我)입니다.
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나', 자기중심적인 '나'가 없습니다.
'나'가 없기 때문에 아주 공정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있을 뿐,
남과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가 있다(有我)'고 생각하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기심이 작용하여
모든 것을'나'에 맞게 생각하고 '나' 쪽으로 끌어들여
다른 사람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과 계속 비교하면서 자기학대를 합니다.
사실 모든 학대는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지
남이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괴로우면 남을 탓하고 주변에 있는 분을 탓합니다.
그리고는 더욱 깊은 괴로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의 본래 모습은 무아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본래 모습입니다.
제법무아!
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듯이,
우리가 무아임을 아는 것과 동시에 굉장한 지혜가 발동이 됩니다.
아울러 그 지혜 속에서 '나'를 가장 잘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며,
남과 더불어 반목과 갈등 없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짚과 새끼줄'을 예로 들어
우리는 새끼줄을 '나'로 보고 있습니다.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끼줄에 집착하듯이,
'나가 있다'는 생각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끼줄이 아닙니다.
새끼줄을 만들어 낸 것은 짚입니다.
무아입니다.
'나가 있다'는 생각,
'새끼줄이 나'라는 생각은 진실이 아닙니다.
착각이요, 허구입니다.
착각이요 허구이기 때문에
그 '나'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괴로움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각을 깨고 우리의 존재원리 그대로
새끼줄과 짚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밝은 지혜가 나와 자주적이고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무아임을 알고 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자기를 가장 잘 보호하는 방법이요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무아임을 알고 살면 결과적으로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남을 돕는 것이 나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곧 무아이기 때문에 남과 나를 함께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돕고 서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세계.
만약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불국토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무아!
불자의 목표는 무아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본래의 자기 집에서 살지를 못합니다.
편안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무아의 집에서 살지를 못하고,
먼 객지에 가서 고생을 하는 것과 꼭 같이 되어 버립니다.
어찌 객지의 삶이 편안할 것입니까?
그러나 지금은 비록 객지에 가서 살고 있더라도,
우리의 존재원리가 무아임을 알게 되면
그날부터 본래의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물론 집에서 멀리 가 있는 사람은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요,
멀지 않은 곳에 가 있는 사람은 쉽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대문 밖에서 놀고 있었던 이라면
홱 돌아서서 겉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불교공부입니다.
참선.염불.기도.봉사활동.경전탐독.관법 등이
모두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공부입니다.
만약 이러한 공부를 하다가 잘 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십시오.
'아, 내가 무아의 고향집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 있구나.
돌아가는 데는 넉넉한 시간이 필요 하겠구나.
그래, 부지런히 돌아가자. 언젠가는 돌아가게 된다.'
실로 무아라는 것을 알고 공부를 해보십시오.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중간과정이 굉장히 즐거워집니다.
나도 현재 고향집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아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굉장히 행복합니다.
삶에 대한 보람, 공부에 대한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세속적인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 TV. 노래방. 스포츠 등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놀이문화입니다.
외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놀이문화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 것보다 더 극적이고 더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시각을 바깥에다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의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각에서 보면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더 깊이 있게 볼 수가 있고,
운동경기를 보더라도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것 저 것' '좋고 나쁨' 등의
주관적인 양변(兩邊)을 떠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변을 떠나 본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으로
놀이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부도 됩니다.
놀이문화를 즐기는 것까지 공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러한 무아의 존재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기심으로 끊임없이 자기학대를 합니다.
그리고 불안감이나 불만스러운 생각을 벗어나고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줍니까?
'나'를 더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아의 원리부터 이해하고,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 원리를 알면 참으로 풍요롭고 편안하게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이기심으로 살다보면 놀이문화 뿐만이 아니라
발달한 현대문명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려움이 닥쳐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의 원리를 아는 이는
어려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해결을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주변사람을 원망하고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주변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공부를 꼭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스스로를 잘 보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출처] mkw728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