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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위)나라
위강숙은 이름이 봉이고, 주 무왕의 동복동생이다. 봉 아래에 염계가 있다. 그가 막내다.
주 무왕이 은나라 주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은나라 유민들과 이들이 사는 땅을 은나라 주의
아들로 자가 녹보인 무경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타의 제후들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이들의
조상에 관한 제사를 받들게 하고 대가 끓기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후 무경이 기꺼이
복종하지 않자 주 무왕은 그가 역심을 품을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두 아우 관숙과 채숙
에게 무경을 보좌하게 했다. 은나라 유민을 다독이고자 한 것이다. 주 무왕 사후 뒤를 이
어 즉위한 주 성왕은 나이가 어렸다. 주공 단이 주 성왕을 대리해 나라를 다스렸다. 관숙
과 채숙은 주공 단을 믿지 않고 곧 무경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洛陽(낙양)인 성주를 치려
고 했다. 주공 단은 주 성왕의 명을 받들어 은나라 유민들을 정벌하고 무경과 관숙을 죽
인 뒤 채숙을 멀리 추방했다. 이어 강숙을 위나라에 봉해 黃河(황하)와 淇水(기수)사이의
은나라 옛터에 자리 잡게 했다.
衛 王 朝 世 家
衛(위) BC. 1040∼BC. 209 위치 河南省(하남성) 성 姬(희) 작위 후작
|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제1대 | 康叔(강숙) | 封(봉) | 楚丘 | 河南省滑縣 | ||
| 제2대 | 康伯(강백) | 牟(모) | 강숙의 아들 | (초구) | 하남성활현 | |
| 제3대 | 考伯(고백) | 강백의 아들 | ||||
| 제4대 | 嗣伯(사백) | 고백의 아들 | ||||
| 제5대 | 疌伯(섭백) | 사백의 아들 | ||||
| 제6대 | 靖伯(정백) | 섭백의 아들 | ||||
| 제7대 | BC. ?∼BC. 867 | 貞伯(정백) | 정백의 아들 | |||
| 제8대 | BC. 866∼BC. 855 | 頃侯(경후) | 정백의 아들 | |||
| 제9대 | BC. 854∼BC. 813 | 釐侯(희후) | 경후의 아들 | |||
| 제10대 | BC. 813 | 共伯(공백) | 餘(여) | 희후의 아들 | ||
| 제11대 | BC. 812∼BC. 758 | 武公(무공) | 和(화) | 공백의 아들 | ||
| 제12대 | BC. 757∼BC. 735 | 莊公(장공) | 揚(양) | 무공의 아들 | ||
| 제13대 | BC. 734∼BC. 719 | 桓公(환공) | 完(완) | 장공의 아들 | ||
| 제14대 | BC. 719 | 폐위 | 州旴(주우) | 환공의 아들 | ||
| 제15대 | BC. 718∼BC. 700 | 宣公(선공) | 晉(진) | 환공의 아들 | ||
| 제16대 | BC. 699∼BC. 696 | 惠公(혜공) | 朔(삭) | 선공의 아들 | ||
| 제17대 | BC. 699∼BC. 688 | 폐위 | 黔牟(검모) | 혜공의 아들 | ||
| 제18대 | BC. 688∼BC. 669 | 惠公(혜공) | 朔(삭) | 선공의 아들 | ||
| 제19대 | BC. 668∼BC. 660 | 懿公(의공) | 赤(적) | 혜공의 아들 | ||
| 제20대 | BC. 660 | 戴公(대공) | 申(신) | |||
| 제21대 | BC. 659∼BC. 635 | 文公(문공) | 燬(훼) | 대공의 아들 | ||
| 제22대 | BC. 634∼BC. 600 | 成公(성공) | 鄭(정) | 문공의 아들 | ||
| 섭정 | BC. 632 | 叔武(숙무) | 문공의 아들 | |||
| 제23대 | BC. 632 | 瑕(하) | ||||
| 제24대 | BC. 634∼BC. 900 | 成公(성공) | 鄭(정) | 문공의 아들 | ||
| 제25대 | BC. 599∼BC. 589 | 穆公(목공) | 速(속) | 성공의 아들 | ||
| 제26대 | BC. 588∼BC. 577 | 定公(정공) | 臧(장) | 목공의 아들 | ||
| 제27대 | BC. 576∼BC. 559 | 獻公(헌공) | 衎(간) | 정공의 아들 | ||
| 제28대 | BC. 558∼BC. 547 | 殤公(상공) | 秋(추) | 정공의 아들 | ||
| 제29대 | BC. 546∼BC. 544 | 獻公(헌공) | 衎(간) | 정공의 아들 | ||
| 제30대 | BC. 543∼BC. 535 | 襄公(양공) | 惡(악) | 헌공의 아들 | ||
| 제31대 | BC. 534∼BC. 493 | 靈公(영공) | 元(원) | 양공의 아들 | ||
| 제32대 | BC. 492∼BC. 480 | 出公(출공) | 輒(첩) | 영공의 아들 | ||
| 제33대 | BC. 480∼BC. 478 | 莊公(장공) | 蒯聵(괴외) | 영공의 아들 | ||
| 제34대 | BC. 477 | 폐위 ? | 班師(반사) | 양공의 손자 | ||
| 제35대 | BC. 476 | 폐위 ? | 起(기) | 영공의 아들 | ||
| 제36대 | BC. 476∼BC. 470 | 出公(출공) | 輒(첩) | 영공의 아들 | ||
| 제37대 | BC. 469∼BC. 465 | 悼公(도공) | 黔(검) | 출공의 아들 | ||
| 제38대 | BC. 464∼BC. 432 | 敬公(경공) | 弗(불) | 도공의 아들 | ||
| 제39대 | BC. 431∼BC. 426 | 昭公(소공) | 糾(규) | 경공의 아들 | ||
| 제40대 | BC. 425∼BC. 415 | 懷公(회공) | 亹(미) | |||
| 제41대 | BC. 414∼BC. 383 | 愼公(신공) | 頹(퇴) | |||
| 제42대 | BC. 382∼BC. 372 | 聲公(성공) | 訓(훈) | 신공의 아들 | ||
| 제43대 | BC. 371∼BC. 343 | 成侯(성후) | 藗(속) | 성공의 아들 | ||
| 제44대 | BC. 342∼BC. 335 | 平侯(평후) | 勁(경) | 성후의 아들 | ||
| 제45대 | BC. 334∼BC. 293 | 嗣君(사군) | 평후의 아들 | |||
| 제46대 | BC. 292∼BC. 254 | 懷君(회군) | 사군의 아들 | |||
| 제47대 | BC. 254∼BC. 241 | 元君(원군) | 사군의 동생 | |||
| 제48대 | BC. 240∼BC. 209 | 폐위 | 角(각) | 원군의 아들 |
위나라는 商(상)나라가 西周(서주)에 의해 멸망한 직후 西周 武王(서주 무왕)의 친동생
인 위 강숙이 상나라의 수도였던 朝歌(조가) 와 그 주위의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
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
바쳐 후작으로 올랐다.
제1대 강숙(BC. ?∼BC. ?) 주 문왕(姬昌, 희창)과 태사 사이에서 태어난 9번째 아들이다.
주 문왕이 죽고 백읍고 또한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紂王(주왕)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주 무왕이 뒤를 이었다. 주 무왕 원년(기원전 1046년), 무왕이 목야전투에서 상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워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다. 공을 세운 신하들과 종실
선현의 후손들을 분봉했다. 그리고 강숙을 康(강) 땅에 봉해 봉지를 내렸다. 그리하여
강숙이라 불리는 것이다. 당시에 주 무왕이 채숙도, 곽숙처, 관숙 선을 삼감에 봉해 주
왕의 아들인 무경을 감시하게 했다. 주 무왕이 죽고 주 성왕이 즉위했는데 성왕은 나이
가 어려 周公 丹(주공 단)이 섭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감이 이에 반발해 주공 단을 모
함하고 끝내는 이들이 무경과 짜고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을 삼감의 난이라 한다. 이것이
주 성왕 2년의 일이었다. 주 성왕 4년, 주 성왕의 명령으로 삼감의 난을 진압할 때 강숙
봉이 거기에 참여했다. 그 결과 무경과 관숙선은 처형당하고. 채숙 도는 유배되었으며.
곽숙 처는 서민으로 강등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주공 단은 주 성왕을 대신해 강숙 봉을
衛(위)나라에 봉했다. 그 땅은 상나라 수도 조가 일대였다. 그리고 그에게 상나라 유민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겼고, 영역은 대략 삼국지의 연주, 기주, 예주의 일부 정도로 제법 크
게 봉해졌다. 주 성왕 7년, 주 성왕이 성인이 되자 주공 단은 섭정이 아닌 신하로서 정사
돌보게 되었다. 주 성왕은 위 강숙을 사구로 임명해 법을 집행하니 범죄율이 줄어들고,
선한 행실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주나라 정치는 안정되었다. 그리고 위나
라 국내에서는 백성들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가 죽고
그 뒤를 아들인 공자 무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강백이다.
제2대 강백(BC. ?∼BC. ?) 위 강숙의 아들이며, 위 고백의 아버지다.
강백은 아버지 위 강숙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정무를 돌보아 위나라를 흥성하게 했
다. 그리고 동이족의 반란을 진압해 주 왕실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제 정공. 진후 섭. 노
공 백금과 함께 주 성왕을 모셔 成康之治(성강지치)를 이룩했다. 그가 죽고 아들인 위
고백이 즉위했다.
제3대 고백(BC, ?〜BC, ?) 위 강백의 아들이며, 위 사백의 아버지다.
위 강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고백이 뒤를 이었다. 위 고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사백이
뒤를 이었다.
제4대 사백(BC, ?〜BC, ?) 위 고백의 아들이며, 위 첩백의 아버지다.
위 고백이 죽고 위 사백이 뒤를 이었다. 위 사백이 죽고 위 첩백이 뒤를 이었다.
제5대 첩백(BC, ?〜BC, ?) 위 사백의 아들이며, 위 정백의 아버지다.
위 사백이 죽고 위 첩백이 뒤를 이었다. 위 첩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정백이 뒤를 이었
다.
제6대 정백(BC, ?〜BC, ?) 위 첩백의 아들이며 위 정백의 아버지다.
위 첩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靖伯(정백)이 뒤를 이었다. 위 靖伯(정백)이 죽고 그 아들
인 위 貞伯(정백)이 뒤를 이었다.
제7대 정백(BC, ?〜BC, 869) 위 정백의 아들이며, 위 경후의 아버지다.
위 정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정백이 뒤를 이었다. 위 정백 말년(기원전 869년), 위 정
백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위 경후가 뒤를 이었다.
제8대 경후(BC. ?∼BC. 857) 위 정백의 아들이며, 위 희후의 아버지다.
기원전 869년, 위 정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경후가 뒤를 이었다. 위 경후가 周 夷王(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승진했다. 위 경후 10년(기원전 857년), 위 경후가 죽
고 그 아들인 위 희우가 뒤를 이었다.
제9대 희후(BC. ?∼BC. 815) 위 경후의 아들이며, 위 공백, 위 무공의 아버지다.
위 희우 16년(기원전 841년), 周 厲王(주 여왕)이 국인들의 반란으로 彘(체) 땅으로 쫓겨
가고 공화 시기가 시작되었다. 위 희후 28년(기원전 828년), 周 宣王(주 선왕)이 즉위했
다. 위 희후 42년(기원전 815년), 희후가 죽고 태자 여가 즉위 하니 그가 위 공백이다.
그러나 그는 동생인 희화의 손에 살해당했고, 희화가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무공
공이다.
제10대 공백(BC. ?∼BC. 813) 위 희후의 아들이며, 위 무공의 형
위 희후가 죽은 뒤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공자 화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을 이용
하여 무사들에게 뿌려 위 희후의 무덤에서 위 공백을 습격하니 위 공백은 세력이 모자라
더 저항할 수 없어 자결한다. 그 자리는 희화가 이었다. 그가 바로 위 무공이다.
제11대 무공(BC. 852∼BC. 758) 위 희후의 아들이며, 위 공백의 동생
위 무공은 위 희후가 살아있을 당시에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무사들을 육성해
희후의 묘지에서 위 공백을 습격하니 위 공백은 세력이 모자라 더 저항할 수 없어 자결
한다. 그 자리는 회화가 이었다. 그가 바로 위 무공이다. 위 무공 42년 기원전(771년),
犬戎族(견융족)이, 申侯 寧(신후 령)의 사주를 받아 서주의 수도인 호경을 쳐서 周 幽王
(주 유왕)과 鄭 桓公(정 환공)을 죽였다. 이에 위 무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다. 이때 같이 도우러 온 사람이 정 환공의 아들 정 무공. 진 문후. 秦 襄公(진
양공)이었다. 그리고 주 유왕의 아들인 주 평왕을 도와 낙읍으로 동천하는 것을 도와 낙
읍으로 동천하는 것을 도와 동주가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위 무공의 공로에
사례했다. 위 무공 55년(기원전 758년), 위무공이 죽고, 그 아들인 희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장공이다.
제12대 장공(BC. ?∼BC. 735) 위 무공의 아들이며, 위 환공, 위군 주우, 위 선공의 아버지
위 장공 5년(기원전 753년), 장공은 齊(제)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陣(진)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얻었지만 일찍 죽고 말았다. 그래
서 陣(진)나라 여자의 여동생을 총애해 공자 完(완)을 낳고 그를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애첩에게서 공자 州旴(주우)를 얻었다. 공자 주우는 자라서 군사일을 좋아했다. 위 장공
18년(기원전 740년), 장공이 공자 주우에게 장군직을 내리니 대부 石碏(석작)이 간했으나
위 장공은 듣지 않았다. 위 장공 23년(기원전 735년), 위 장공이 죽고 태자 완이 즉위하
니 그가 바로 위 환공이다.
제13대 환공(BC. ?∼BC. 719) 위 장공의 아들이며, 위군 주우, 우 선공의 형
공자 완은 陣(진)나라 여자인 戴嬀(대규)의 소생으로 장공이 그를 아껴 본처인 제나라 여
자 莊姜(장강)의 손에 길러졌다. 그리고 위 장공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위 환공
2년(기원전 733년), 환공은 동생인 주우가 교만하여 횡포를 부리고 사치가 심해 장군직
에서 그를 해고하자 주우는 위나라를 떠났다. 위 환공 13년(기원전 722년), 노 은공은
아버지 노 혜공의 장례를 치렀다. 위 환공이 그 장례에 참여했다. 이때 정나라의 군주 정
장공은 그 아우인 공숙 단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것을 진압하니 공숙단이 패해 위(위)나라
로 달아났다. 그리고 위 환공은 그것을 빌미로 정나라를 쳤다. 그래서 정나라의 늠연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정 장공은 주 천자의 군대와 괵나라 군대는 위나라 남북을 치게하고,
邾(주)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주나라 군주는 노나라의 공자 예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
을 요청했으나 노 은공이 거절했다. 결국 공자 예는 스스로 정나라, 邾(주)나라와 회맹했
다. 위 환공 14년(기원전 721년), 정 장공이 위나라를 치니 공손 환은 패배했다. 위 환공
16년(기원전 719년), 환공의 이복 동생 공자 주우는 사람들을 모아 위 환공을 살해하고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자 석작이 陳 桓公(진 환공)과 함께 주우를 죽이고 공자 진
을 세우니 그가 바로 위 선공이다.
제14대 위군(BC. ?∼BC. 719) 위 장공의 아들이며, 위 환공의 이복 동생
주우는 위 장공 애첩의 소생이다. 그 탓인지 모자가 총애를 받은 걸로도 모자라 주우가
자라서 군사를 좋아하였으므로 위 장공은 그것이 기특하고 대견했는지 그를 장수로 임
명했다. 그러자 상경인 석작이 간했다. “아드님이 군사를 좋아한다고 일을 맡기지 마십시
오, 그는 교만하고 사치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고, 그것이 훗날의 화근이 됩니다” 그
러나 위 장공이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주우는 석작의 아들인 석후와 친하게 지냈
는데, 석작이 석후를 꾸짖었으나 석후는 듣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위 장공은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죽어 세자인 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 환공이다. 위 환공 2년(기원전
733년), 위 환공은 주우가 석작의 말대로 교만하여 횡포를 부리고 사치를 저지르자 위 환
공은 그를 장군직에서 해임했다. 이에 주우는 나라를 떠나 망명했다. 위 환공 13년(기원
전 722년), 정나라의 군주 정 장공의 동생인 공숙 단이 망명을 왔을 때, 그와 친하게 지
냈다. 위 환공 16년(기원전 719년), 주우가 위 환공을 습격해 그를 살해하고 위후가 된다.
주우는 공숙 단을 시켜 정나라를 치게 하고 宋(송). 陣(진)나라. 채나라에게 지원을 요청
했다. 그리고 정나라의 도성 신정의 동문을 쳤으나 이득을 얻지 못하고 달아나게 되었다.
주우는 위 환공을 죽여 민심을 잃었다. 석작은 일단 위군 주우가 돌아왔을 때 그와 잘
지내는 척했다. 그러나 석작은 대규를 통해 진 환공과 비밀리에 연결하고 있었다. 9월
陳侯(진후)와 짜고 濮(복) 땅에서 右宰醜(우재추)와 함께 위군 주우를 죽이고, 위 환공의
아우 공자 진을 세우니 그가 위 선공이다.
제15대 선공(BC. ?∼BC. 700) 위 장공의 아들이며, 위 환공의 아우다.
위 환공 16년(기원전 719년), 공자 주우가 위 환공을 죽이고 위후가 되었으나 상대부 石
碏(석작)이 陳 桓公(진 환공) 과 함께 위군 주우를 살해하고 邢(형)나라에 인질로 간 공
자 진을 세우니 그가 위 선공이다. 위 선공 원년(기원전 718년), 4월 정나라가 위나라 교
외를 침범했다. 이에 정나라의 대신 채중, 원번, 설가가 3군을 거느리고 남연군과 맞섰고
공자 만백과 공자 자원을 보내 남연국의 후방을 치게 했다. 이에 남연국 사람들은 제대
로 대비하지 못했다. 6월, 공자 만백과 공자 자원이 호뢰관에서 연나라 군대를 쳐부쉈다.
당시 衛(위)나라 郕(성)나라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위나라는 성나라를 치고 있었
다. 위 성공 4년(기원전 715년) 봄, 제나라의 군주 제 희공이 송나라, 위나라 양국과 함
께 정나라와 강화를 위한 회맹을 준비했다. 송 상공은 위나라에 예물을 요구했다. 위 선
선공이 그것에 동의해 견구에서 비공식 회맹이 열리고 위나라와 정나라는 강화했다.
위 선공 6년(기원전 713년), 가을 위나라와 채나라, 성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동의없이 송
나라를 쳤다. 7월 5일 정나라 군대는 노나라의 교외에 머물렀다. 위군, 송군은 정나라를
쳤고, 채나라 군대는 대나라의 후방을 노렸다. 8월 8일 정나라는 대나라를 포위했다. 8
월 9일 위나라, 송나라, 채나라 3군이 합치지 못해 정나라가 대나라를 이겼고 3국의 군
대를 포로로 잡았다. 위 선공 10년(기원전 709년), 위 선공이 제 희공과 포 땅에서 회맹
했다. 위 선공 12년(기원전 707년), 주 환왕이 정 장공에게 경사직을 박탈해 다시는 주
왕실에 입조하지 않았다. 주 환왕은 정 장공의 주 왕실을 무시하는 행보에 진노하여, 위
나라, 채나라, 陳(진)나라 3개국의 병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쳤다. 정 장공이 친히 그것
을 막으러 갔다. 주 환왕이 중군을 거느리고 괵공 림보에게 우군을 거느리게 하고, 채군
과 위군이 돕게 했다. 그리고 좌군은 주공 흑견이 거느리게 하고 陳(진)군이 돕게 했다.
반대로 정나라 공자 자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만백에게 우군을, 채중에게 좌군, 고거미
에게 중군에서 정 장공을 호위하게 했다. 그 교전에서 정나라가 이겼을 뿐만 아니라 축
담은 주 환왕의 어깨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위 선공 14년(기원전 705년), 위나라는 정나
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 맹읍과 상읍을 쳤다. 주 환왕은 맹읍, 상읍의 백성을 겹 땅에 옮
기게 했다. 위 선공 17년(기원전 702년), 위, 제, 정 3국과 노나라의 낭 땅에서 교전을
벌렸다. 우 선공 18년(기원전 701년), 위, 제, 정, 송 4개 나라가 회맹했다. 위 선공 19
년(기원전 700년), 11월 병술일 위 선공이 죽었다. 시호는 선이었다. 우 선공이 죽고 세
자 삭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혜공이다. 위 선공은, 아버지 위 장공의 첩인 夷姜(
이강)과 사통하는 사이였다. 그 사이에 공자 伋(급)을 얻어 우공자에게 가르치게 했다.
이강을 총애해 공자 급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강은 공자 검모와 공자 석을 낳았다.
우공자가 태자에게 제나라 여인을 중매했다. 성혼 전에 위 선공이 며느리가 될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것를 보고는 자신이 차지한 뒤 태자에게는 다른 여인을 맺어주었다. 훗
날 위 선공이 제나라 여자로부터 아들인 공자 壽(수)와 朔(삭)을 얻었다. 좌공자에게 두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태자 급의 모친 이강이 죽자, 위 선공의 정부인이 삭과 공모해
태자 급을 비방했다. 위 선공은 태자의 아내가 될 여인을 탈취한 일로 태자를 내심 미
워하며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자 했다. 그러던 차에 태자 급에 관한 비방을 듣게 되
자 크게 화를 내면서 태자 급을 제나라 사자로 보내면서 강도를 시켜 살해하게 했다.
그리고 급자가 제나라의 사신으로 파견할 때 들고 가도록 白旄(백모)를 내주었다. 선강
과공자 삭은 계책을 써서 무사들을 도적으로 위장해 급자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공
자 수는 태자 급자를 돕기 위해 그것을 알렸으나 급자가 듣지 않아 몰래 태자의 의장과
복장을 하고 도적들에게 가서 대신 죽었다. 이에 급자는 공자 수가 가는 길에 자신을 대
신해 도적들에게 죽을 것을 알고 그리로 가서 자신을 밝히고 같이 죽어 공자 삭이 태자
가 되었다.
제16대 혜공(BC. ?∼BC. 669) 위 선공의 아들이며, 위 의공의 아버지다.
어머니 선강과 함께 태자인 급자를 모함했다. 그리고 무사들을 도적으로 위장해 제나라
의 사신으로 보내는 세자인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복 동생인 공자 수는 그것
을 알고 급자를 설득해 제나라로 가지 말라고 했으나 임무를 수행해야한다며 고집을 피
웠다. 그리하여 공자 수는 세자의 의장을 하고 그 도적들에게 갔다가 살해당했다. 그리
고 급자는 그것을 알고 슬퍼하며 도적들에게 가서 죽었다. 선강 입장에서는 자신의 큰
아들이 본의 아니게 죽은 것은 안타까웠겠지만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인 공자 삭이 세자
가 되었다. 위 선공이 죽자 바로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혜공이다. 위 혜공 원년
(기원전 699년) 2월, 宋(송)나라 鄭(정)나라에 여러 차례 뇌물을 요구하자 그 요구에 견
디지 못한 정나라 측에서는 魯(노)나라, 紀(기)나라, 송나라 측에서는 衛(위)나라, 齊(제)
나라 燕(연)나라와 각기 합쳐 싸웠는데, 송나라 측이 패했다. 3월 위 헤공은 아버지 위
선공의 장례를 치렀다. 위 혜공 4년(기원전 696년), 위 혜공은 노 환공. 송 장공. 채 환
후와 함께 이 땅에서 회맹했고, 다시 정나라를 치려했다. 4월 제후들과 정나라를 쳤다.
그런데 위나라 내부에서 위 혜공이 급자를 죽인 일로 민심을 잃자 좌공자 실. 우공자
직은 위 혜공을 폐위시키고 태자 급자의 동생인 금모를 세웠다. 이에 위 혜공은 제나라
로 달아났다. 위후 검모 4년(기원전 689년), 노 장공은 제나라, 송나라, 陳(진)나라, 채
나 4개 국과 연합해 위나라를 쳐서 위 혜공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위후 검모 8년
(기원전 688년), 제 양공은 周 莊王(주 장왕)의 명으로 위나라를 쳐서 위후 검모를 몰아
내고 좌, 우공자를 죽이고 위 혜공을 복위시켰다. 위후 검모는 주나라의 수도 낙읍으로
망명했다. 위 혜공은 8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것이었
다. 위 혜공 20년(기원전 680년), 위 혜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견 땅에서 회맹했
다. 위 혜공 25년(기원전 675년), 위 혜공은 주 왕실에서 검모를 받아들여 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남연과 함께 주나라를 치는 간 큰 짓을 한다. 이에 주 혜왕은 온읍으로 달
아나고 그들은 왕자 퇴를 세웠다. 위 혜공 31년(기원전 669년), 5월 계축일 위 혜공이
죽고 공자 적이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학덕후로 유명한 위 의공이다.
제17대 위후 검모(BC. ?∼BC. ?) 위 선공의 아들이며, 위 혜공의 이복 형
위 혜공 4년(기원전 696년), 좌공자 실. 우공자 직이 급자와 공자 수를 살해한 것에 한을
품고 들고 일어나 위 혜공을 폐위시키고 급자의 친동생인 공자 검모를 세웠다.
위후 검모 8년(기원전 688년), 제 양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쳐서 위후 검모를
내쫓고 좌. 우 공자를 처형했다. 위후 검모는 주왕실로 달아났다.
제18대 혜왕(BC. ?∼BC. 669) 위나라의 제16대, 18대 군주며, 위 선공의 아들
위 혜공은 8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것이다.
위 혜공 원년(기원전 699), 宋(송)나라 鄭(정)나라에 여러 차례 뇌물을 요구하자 그 요구
에 견디지 못한 정나라 측에서는 魯(노)나라, 紀(기)나라, 송나라 측에서는 衛(위)나라, 齊
(제)나라, 燕(연)나라와 각기 합쳐 싸웠는데, 송나라측이 패했다. 3월 위 혜공은 아버지 위
선공의 장례를 치렀다. 위 혜공 25년(기원전 675년), 위 혜공은 주왕실에서 검모를 받아
들여준 것에 원한을 품고 연나라와 함께 주 나라를 쳤다. 이에 주 혜왕은 온읍으로 달아
나고 그들은 왕자 퇴를 세웠다. 위 혜공 31년(기원전 669년), 위 혜공이 죽고 그 아들 공
자 적이 그 뒤를 이으니 그가 위 의공이다.
제19대 의공(BC. ?∼BC. 690) 위 혜공의 아들이다.
의공 4년(기원전 666년), 아버지가 동주 혜왕을 쫓아내고 왕자 퇴를 주왕으로 세운 죄를
토벌하러 온 제 환공과 싸워 대패했으나, 뇌물을 바쳐 화해했다. 아버지 혜공이 자기 형
들을 참소하여 죽게하고 임금이 되었으며, 의공 자신은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치하며, 특
히 학을 기르는 취미에 국고를 매우 탕진했으며, 학을 대신들처럼 대우했으므로 인심을
잃었다. 의공 9년(기원전 660년), 翟(적)이 쳐들어오자 병사를 일으켜 막으려 했으나 백성
들은 징집을 거부했고 대신들도 학들을 보내 막으라며 비꼬왔다. 滎澤(형택)에서 적과 싸
웠으나 참패하고 살해당했다. 적은 위 의공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성마저 함몰하여 위나라
는 멸망했다가 패자 제 환공이 제후들을 회합하고 위나라의 유민들을 모아 초구를 새 서
울로 삼아 부활했다.
제20대 대공(BC. ?∼BC. 660) 위 선공과 이강의 손자며, 소백 완과 선강의 아들이다.
위 의공 9년(기원전 660년), 의공이 적족에게 살해당했다. 그 까닭은 위 혜공의 악행과
대신과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지 않는 탓이다. 위나라 사람들은 위 혜공의 자손들을 멸족
시켜 위 혜공의 일족들은 망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급자의 후손과 공자 수의 자손
을 찾았으나 없었다. 위왕 감모를 되세우고 싶어도 그마저 죽은 뒤였다. 그 나마도 검모
는 후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소생인 소백의 아들 공손 신을 세우니 그가 위 대공이다.
위 대공 원년(기원전 660년), 위 대공이 죽었다. 제 환공은 위나라가 누차 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제후들을 이끌고 가 적인을 정벌하고 위나라를 위해 초구에 성을 쌓아 주었
다. 제나라로 달아난 그 아우 희훼가 즉위하니 그가 위 문공이다.
제21대 문공(BC. ?∼BC. 635) 소백 완과 선강의 아들이고 위 대공의 친동생이다.
위문공 원년(기원전 659년), 문공은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적게 내리며, 스스로 부지런히
정사를 돌봐 백성들과 괴로움을 같이하여 민심이 위 문공을 따랐다. 위 문공 4년(기원전
656년), 봄 위 문공은 제나라, 魯(노)나라, 宋(송)나라, 陳(진)나라, 鄭(정)나라와 함께 蔡
(채)나라를 쳤다. 그 결과 채나라 군대는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그리고 채나라의 상국인
楚(초)나라를 치기 위해 형 땅에 주둔했다. 여름에 초 성왕이 屈完(굴완)을 보내 소릉에
서 회맹하고 돌아갔다. 12월 위 문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함께 陳(진)나라를 쳤
다. 위 문공 5년(기원전 655년), 위 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陳(진)나라, 정나라
와 수지 땅에서 회맹했다. 주나라에서는 태자 정을 보냈다. 그 까닭은 낙읍의 안정과 태
자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위 문공6년(기원전 654년), 여름 위 문공은 제후들과 함께 도
중에 회맹에 빠진 정 문공 때문에 정나라를 쳤다. 그리고 정나라의 수도인 신정을 물샐
틈 없이 포위했다. 가을에 초 성왕이 병사를 보내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허나라를 쳤다.
그러나 제후들이 허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서자 초군이 물러났다. 위 문공 15년(기원전
645년), 초나라는 徐(서)나라가 중원의 제후들에게 기울어 서나라를 쳤다. 3월 위 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목구 땅에서 회맹했다. 이것은 규구의 회맹을 상기시
키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서나라를 구원할 목적도 있었다. 위 문공 16년(기원전 644년),
晉(진)나라의 공자 중이가 방랑중에 위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위 문공은 공자 중이에
게 무례하게 대우했다. 12월에 위 문공은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 등과 함께 회
땅에서 회맹했다. 증나라에 회이 족이 침입해 군사를 내기 위함이었다. 위문공 18년(기
원전 642년), 제 환공이 죽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에 위 문공과 宋
襄公(송 양공), 曹(조)나라, 주(주)나라 4개국이 제나라를 쳤다. 5월 제후 연합군이 언 땅
에서 제군을 박살내고, 제 효공을 송나라에서 데려왔다. 같은 해 겨울 邢(형)나라가 적족
과 연합해 위나라를 쳤다. 그리고 위나라의 면포를 포위했다. 위 문공은 군민들에게 격려
의 말을 하며, 적족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위 문공 19년(기원전 641년), 위 문
공은 그 일을 벌인 형나라를 쳐서 면포 땅을 포위한 것에 보복을 했다. 위 문공 20년(기
원전 640년), 활나라가 정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를 섬겼다. 가을 제나라와 적족이 형나
라에서 회맹해 위나라를 칠 것을 도모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위 문공은 형나라를 멸망시
킬 뜻을 품었다. 위 문공 21년(기원전 639년), 적족이 위나라를 쳤다. 위 문공 22년(기원
전 638년), 위 문공은 송나라, 허나라, 滕(등)나라와 정나라를 쳤다. 위 문공 25년(기원전
635년), 정월 위 문공은 병사를 풀어 형나라를 대대적으로 쳤다. 정월 20일 위군은 형나
라를 멸망시켰다. 4월 계유일 위 문공이 죽었다. 그리하여 그 아들 세자 정이 뒤를 이으
니 그가 바로 위 성공이다.
제22대 성공(BC. ?∼BC. 600) 위 문공의 아들이며, 위군 하의 형, 위 목공의 아버지다.
위 성공 원년(기원전 634년) 가을, 아버지 위 문공을 안장했다. 12월, 위 성공은 거나라,
노나라와 화해를 주선했다. 12월, 우 성공은 노 희공, 거나라 군주와 도 땅에서 회맹했
다. 위성공 3년(기원전 632년), 晉 文公(진 문공)은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했다. 진나라 군대는 남쪽 황하를 건너 우회하여 송나라를 구원
했다. 晉(진)나라는 衛(위)나라를 칠 군대를 모집했다. 위나라의 대부들은 그것에 대비하
라고 했으나 위 성공은 그것을 무시했다. 대부 원훤은 위 성공을 치니 위 성공은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진 문공이 위나라를 쳐서 차지한 땅을 송나라에 주었다. 이것은 진 문
공에게 위 문공, 위 성공 부자가 무례하고, 송나라를 구하는데 협조하지 않는 까닭이다.
위 성공은 陳(진)나라로 망명했다. 대부 원훤은 공자 숙무를 섭정으로 세워 踐土之盟(천
토지맹)에 참가했으나 위 성공은 숙무를 의심하던 차에, 누군가가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말을 하니 위 성공은 귀국하는데, 선봉대가 과잉충성으로 숙무를 죽여버렸고 위 성공은
그것을 보고 슬퍼했다. 그 일로 진 문공은 대로하여, 위 성공을 감금했고, 위나라 측에
서는 위 성공의 동생인 공자 하를 군주로 올렸다. 2년 뒤 위 성공은 주 왕실에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진 문공을 알현하는데, 진 문공은 위 성공에 대한 한을 플지 못
해 위 성공을 독살하려고 했다. 이때 위 성공은 주 왕실에 뇌물을 바쳐 독을 약하게 해
죽음을 면했다. 이후 주 양왕이 진 문공에게 위 문공을 봐줄 것을 요청하니 진 문공은
결국 위 성공을 복귀 시켜주었다. 위 성공은 귀국 후 대부 원훤을 죽이고 위후 하를 내
쫓았다. 우 성공이 복위했다. 위 성공 12년(기원전 623년), 위 성공은 진(진)나라에서 진
양공을 알현했다. 위 성공 35년(기원전 600년), 위 성공이 죽고 그 아들 공자 속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목공이다.
제23대 하(BC. ?∼ BC. ?) 위 문공의 아들이며, 위 성공의 아우,
晉(진)나라의 군주 晉 文公(진 문공)이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 했으나 위
성공이 듣지 않았다. 이에 진 문공은 황하 남쪽으로 우회해 송나라를 구하러 갔다.
그리고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러 올 때 대부 원훤이 그것에 호응해 위 성공을 쳐서 쫓아
내고 공자 하를 세웠다. 위 성공은 진(진)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금방 진 문공이 위 성
공을 풀어주어 위 성공은 복귀해서 위군 하를 몰아내고 대부 원훤을 죽였다.
제24대 성공 복위
원훤은 진나라로 달아나 숙무가 죽은 것을 가지고 위 성공과 송사를 벌렸고, 우 성공은
제후이므로 배신인 원훤과 직접 송사를 벌이지 않고 영무자, 침장자, 사영 대리인으로 삼
아 송사했다. 위 성공이 져 진 문공은 위 성공을 주나라에 보내 가두고 원훤은 귀국해 공
자 적, 곧 자하를 위후로 세웠다. 2년 후 성공은 위나라로 귀국해 대부 원훤을 죽이고 위
후 하를 내 쫓았다. 다시 개원하지 않고 이해를 성공 5년으로 삼았다. 위 성공 35년 위
성공이 죽자 아들 속이 즉위했다. 그가 목공이다.
제25대 목공(BC. ?∼BC. 589) 위 성공의 아들이며, 위 정공의 아버지
성공이 재위 35년 만에 죽고 아들인 세자 속이 그 뒤를 이었다. 위 목공 2년(기원전 59
8년), 초나라의 왕인 초 장왕이 陳(진)나라를 쳐서 하징서를 죽였다. 위 모공 3년(기원전
597년), 초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했는데 정나라가 항복해 포위가 풀렸다. 위 목공 11년
(기원전 589년), 위나라의 대부 손량부가 노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나라를 쳐 빼앗긴 땅
을 회복했다. 이 때 위목공이 죽고 희장이 뒤를 이으니 그가 위 정공이다.
제26대 정공(BC. ?∼BC. 577) 위 목공의 아들이며, 위 상공의 아버지
위 목공 11년(기원전 589년), 아버지 위 목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희장이 뒤를 이으
니 그가 바로 위 정공이다. 위 정공 12년(기원전 577년), 위 정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희간이 그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 헌공이다
제27대 헌공(BC. ?∼BC. 544) 위 정공의 아들이며, 위 상공의 형이고 위 양공의 아버지다.
아버지 위 정공이 죽었을 때 그 아내인 강비는 눈물을 흘렸으나 위 헌공은 전혀 울지 않
았다. 위 헌공 6년(기원전 576년) 봄, 위 헌공은 노나라, 晉(진)나라, 정나라, 송나라, 제
나라, 등과 함께 척 땅에서 회맹했다. 그것은 조나라의 군주 조 성공을 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 성공을 주나라로 압송하기 위해서였다. 11월, 순림보는 晉(진)나라, 정나라, 제
나라 오나라와 종리에서 회맹했다. 위 헌공 13년(기원전 564년), 위 헌공은 악사 사조를
시켜 첩에게 금을 타는 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첩이 잘하지 못해 사조가 매질을 하
자 첩은 악사 사조를 모함했고, 위 헌공은 곤장 300대를 때리게 했다. 위 한공 18년(기
원전 559년), 위 헌공은 손림보와 영식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했으나 위 헌공이 끝내 부
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러기 사냥에 빠진 탓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크게 노해 숙읍
으로 갔다. 악사 시조는 그것을 알고 손림보를 교연장이라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자극했
다. 이 일을 손림보가 거백옥에게 말했는데, 거백옥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손림보는
위 헌공을 쳐서 몰아냈고, 위 헌공의 아우이자 위 정공의 아들인 공자 표를 세우니 그
가 바로 위 상공이다. 위 상공은 손림보를 숙읍에 봉했다.
위 상공 12년(기원전 547년), 영희와 손림보가 총애를 다투며 서로 미워했다. 위 상공은
영희에게 손림보를 치게하니 손림보는 晉(진)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晉(진)나라 그리고
진나라에 위 헌공을 복위시켜 달라고 했다. 齊 景公(제 경공)은 제나라에 있는 위 헌공
을 복위시키기 위해 위 헌공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晉(진)나라는 위나라를 쳐서 당시 위
나라 군주인 위 상공을 회맹에 이끌고 晉 平公(진 평공)이 영희와 위 상공을 사로잡아
위 헌공을 복위시켰다. 위 헌공이 도망간지 13년 만에 복위했다. 위 헌공 복위 원년(기
원전 546년), 위 헌공이 영희를 처형했다. 위 헌공 복위 2년(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공
자 계찰l 위나라를 방문해 거백옥과 사추를 만났다. 계찰이 그들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군자가 많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위 헌공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악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 양공이다.
제28대 상공(BC. ?∼BC. ?) 위 정공의 아들이며, 위 헌공의 동생
위 헌공 18년(기원전 559년), 희표는 위 헌공에게 한을 품은 孫林父(손림보)와 영식의
추대를 받아 헌공을 몰아내고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했다. 위 상공 원년(기원전 558년),
손림보를 숙읍에 봉했다. 위 상공 12년(기원전 547년), 영희와 손림보는 위 상공의 총애
를 두고 알력이 일어났다. 그런데 상공이 영희를 편들어 손림보를 쳤다. 손림보는 晉(진)
나라로 달아나 거기서 위 헌공의 복위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서는 위 헌공을 보
내고 晉 平公(진 평공)은 위나라를 쳤다. 이에 위 상공이 화친을 요청하자 회맹했는데,
영희와 함께 진 평공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위 헌공은 도망 생활 12년 만에 복위
에 성공했다.
제29대 헌공 복위
위 헌공 복위 원년(기원전 546년), 영희를 처형했다. 위 헌공 2년(기원전 544년), 위 헌
공이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제30대 양공(BC. ?∼535) 위 헌공의 아들이며, 위 영공의 아버지다.
위 양공 6년(기원전 538년), 초 영왕이 제후들에게 회맹하자고 했으나 위 양공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위 양공 9년(기원전 535년), 양공이 죽으면서 그 아들인 원에게 뒤를
잇게 하니 그가 영공이다.
제31대 영공(BC. 540∼BC. 493) 위 양공의 아들이며, 위 출공의 할아버지.
위 영공 원년(기원전 534년), 그는 7살의 나이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위 영공 4년(기원
전 530년), 위 영공이 晉 頃公(진 경공)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런데 작위가 후작으로 같
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위 영공 12년(기원전 522년), 齊豹(제표), 北宮喜(북
궁희), 褚師圃(저사포), 公子 朝(공자 조)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위 영공의 형 집을
죽이고 위 영공은 피난했다. 위 영공 13년(기원전 521년), 위 영공이 돌아오니 공자 조
는 송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무리들을 안심시켰다. 위 영공 30년(기원전 504년), 晉(진)나
라, 노나라, 송나라, 채나라의 제후들과 회맹했다. 위 영공이 사람을 보내 주왕의 신하인
강홍에게 축하 의사를 보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위 영공 33년(기원전 501년), 사람을 보내 齊 景公(제 경공)과 짜고 위나라의 행인 북궁
결 등의 북궁씨 세력을 약하게 했다. 위 영공 36년(기원전 498년), 晉(진)나라가 위나라
의 수도를 포위했다. 위 영공은 굳게 지키면서 나가 싸우지 않았다. 진군이 물러나자 위
나라는 사타에서 강화를 했다. 위 영공 40년(기원전 494년), 위 영공은 공숙 술, 조양,
북궁결, 태자 과외, 공맹 구 등을 몰아냈다. 위 영공 41년(기원전 493년), 위 영공이 죽
었다. 공자 영이 끝내 거절하자 결국 남자는 과외의 아들인 첩을 세우니 그가 위 출공이
다.
제32대 출공(BC. ?∼BC. 456) 위나라의 제 32. 제 36대 군주. 위 장공의 아들.
위 영공 39년(기원전 496년), 세자 과외는 위 영공의 부인인 남자가 음란무도한 것을 보
고 그녀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것을 알고 남자가 위 영공에게 알리니 세자 과외는 송나라
로 망명을 갔다. 그리고 후에 晉(진)나라의 조씨에게 의탁했다. 위 영공 42년(기원전 49
3년), 영공은 막내 아들 영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공자 영이 끝내 거절했다. 같은해
위 영공이 죽자 세자 과외의 아들을 잇게하니 그가 위 출공이다. 같은 해 6월 晉(진)나
라의 趙鞅(조앙)이 조씨가문의 위나라에 대한 영양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외를 위나라에
돌려보내 군주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위나라 사람들이 세자 과외를 쳐서 돌려보
내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자 과외는 쫓겨나고 말았다. 위 출공 12년(기원전 481
년), 공리의 어머니 백희는 사람들과 모의해 세자 과외를 위나라의 군주로 세울 것을 모
의했다. 이에 공리는 위 출공을 협박해 시해하려 했다. 그러나 위 출공은 그것을 알고 제
나라로 달아났다. 위 출공 아버지 과외가 즉위하니 그가 후장공이다. 이 과정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죽었다. 위 후장공 3년(기원전 478년), 조앙은 위나라를 포위하자 후장공
은 당해 낼수 없다고 여겨 달아났지만 용인에게 살해당하고 위 양공의 손자인 衛君 班師
(위군 반사)를 세웠다. 그러나 제나라가 위나라를 쳐서 포로로 잡자 위 영공의 아들이자
위 후장공의 동생인 衛君 起(위군 기)를 세웠다. 위군 기 원년(기원전 477년), 석포는 위
군 기를 몰아내고 제나라로 달아난 위 출공을 복위시켰다.
제33대 장공(BC. ?∼BC. 478) 위 영공의 맏아들이다.
영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가 되었다. 세자 괴외가 장성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송나라를 지나던 도중 송나라 사람들이 송나라 공자 朝(조)와 과외의 계모인 南子(남자)
의 사통을 노래하며 조롱했다. 그 사실을 안 괴외는 부끄러워 했고 격분하여 귀국한 뒤
곧 자객을 보내 남자를 죽이려 했지만 이내 발각되어 송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로 다시
달아났다. 이후에 영공이 죽자 남자는 先君(선군)의 遺命(유명)이라며 공자 郢(영)을 옹
립하려 하나 공자 영이 사양하여 괴외의 아들인 공손 첩을 세우니 그가 출공이다. 진나
라가 괴외를 위나라로 돌려보내려 하자 출공은 군위를 빼앗길까봐 괴오의 귀국을 막았
다. 이에 진나라는 괴외를 척 땅에 머물게 했다. 당시 척 땅은 위나라와 매우 가까웠다.
기원전 480년, 마침내 괴외가 위나라 공실의 환관인 羅(라)의 도움을 받아 누이인 孔伯
姬(공백희), 渾良夫(혼량부), 石乞(석기), 우염, 公孫鍼(공손검) 등과 이미 죽은 대부인 孔
圉(공어, 孔文子)와 공백희 사이에서 태어난 집정대부 孔悝(공회)를 위협해 자기 편으로
만든 뒤 난을 일으켜 대부 召獲(소획)과 아들인 출공을 노나라로 도망가게 했다. 이 때
공자의 제자 高柴(고시, 子高)는 난을 피해 살아 돌아왔지만 다른 제자 仲由(중류, 子路)
는 공회를 구하러 가서 대문을 막고 있는 공손검을 만나 언쟁을 벌이다가 대문이 열린
틈을 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공회를 풀어주지 않으면 누대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
다 석기, 우염과 싸우다가 관 끈이 끊어져 묶고 전사했다. 괴외가 군위에 오르니 그가
장공이다. 장공은 즉위하자마자 궁으로 들어가 남자를 직접 죽였다. 장공은 둘째 아들인
질을 세자로 삼았다. 혼량부가 장공이 출공이 가져간 공실의 보물을 얻고 싶어하자 출공
을 다시 부른 뒤 세자 질과 출공 중에 세자를 정하게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세자 질
이 이내 그를 증오하여 죄를 씌워 죽이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밤에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닥쳐 아버지인 장공에게 혼량부를 죽이라고 하였고 돼지의 피로 맹세를 했다. 당초
장공은 혼량부에게 죽을 죄를 3번 사해주겠다고 하였는데 세자 질은 연회가 열렸을 때
4가지 죽을 죄를 지었다 하여 마침내 혼량부를 죽였다. 그 후 진나라가 위나라의 외성을
공격하자 위나라가 그 원인인 장공을 견 땅으로 몰아내고 장공의 동생인 공자 반사를 세
워서 그로 하여금 정무를 보게 하고 진나라와 강화를 하였다.
제34대 반사(BC. ?∼BC. ?) 위 양공의 손자
장공이 진나라의 대부 趙鞅(조앙)의 공격으로 인해 달아나고 융인에 의해서 장공이 살해
당하자 공자 반사를 세우니 그가 위군 반사다. 그러나 금방 제나라에서 위나라를 치는
바람에 거기에 맞선 위군 반사는 제 나라에 포로로 잡히고 장공의 동생인 공자 기를 세
우니 그가 바로 위군 기다.
제35대 위군 기(BC. ?∼BC. ?) 위 영공의 아들이며, 장공의 동생이다.
위군 기 원년(기원전 476년) 위나라의 대부 석만부가 위군 기를 몰아내려 하자 위군 기
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위 출공이 복위했다.
제36대 위 출공 복위
위 출공이 복위 원년(기원전 476년), 위 출공은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위
출공 복위 7년(기원전 470년), 귀족 저사비 등 사람들이 장인들과 폭동을 일으키니 위 출
공은 송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당시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죽이고 패자가 된 월나라
에 구원을 청했다. 위 출공의 숙부 공자 검이 위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 도공이다.
제37대 도공(BC. ?∼BC. 465) 위 영공의 아들이며, 위 후장공의 아우이자, 위 출공의 숙부.
위 출공 복위 7년(기원전 470년), 公子 黔(공자 검)이 위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위나
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위 도공이다. 위 도공 5년(기원전 465년), 위 도공이 사망
하자 그 아들 불이 즉위하니 그가 위 경공이다.
제38대 경공(BC. ?∼BC. 432) 위 도공의 아들이자, 위 소공의 아버지다.
위 도공 5년(기원전 465년), 위 도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 불이 즉위하니 그가 경공이다.
위 경공 33년(기원전 432년), 위 경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 규가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위 소공이다.
제39대 소공(BC. ?∼BC. 426) 위 경공의 아들
위 경공 33년(기원전 432년), 위 경공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규가 뒤를 이어니 그가
위 소공이다. 그 당시에 晉(진)나라를 3개로 나누워 생긴 三晉(삼진)이 대단히 강성해 갔
고, 위나라는 그 변화에 따를 힘도 의지도 없어 대단히 약해져 갔다. 결국 衛(위)나라는
魏(위)나라의 신하를 자청하게 되었다. 위 소공 6년(기원전 426년), 신하인 공자 미에게
살해 당했고 그 공자 미가 즉위하니 그가 위 회공이다.
제40대 회공(BC. ?∼BC. 415) 아버지 실전
위 소공 6년(기원전 426년), 공자 미가 위 소공을 살해하고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위 회공 11년(기원전 415년), 공자 퇴가 위 회공을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위 신공이다.
제41대 신공(BC. ?∼BC. 383) 위 소공의 조카이며, 공자 괄의 아들로 위 성공의 아버지다.
위 회공 11년(기원전 415년), 위 소공이 위 회공에게 죽고, 위 신공은 위 회공을 죽이고
위에 올랐다. 위 신공 32년(기원전 383년), 위 신공이 죽고 그 아들인 공자 훈이 즉위하
니 그가 위 성공이다.
제42대 성공(BC. ?∼BC. 372) 위 신공의 아들이며, 위 성후의 아버지다.
위 신공 32년(기원전 383), 위 신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국군으로 올랐
다. 위 성공 11년(기원전 372년), 위 성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공자 不折(불절)이 즉위
하니 그가 위 성후다.
제43대 성후(BC. ?∼BC. 343) 위 성공의 아들
성후 11년(기원전 361년), 위나라의 公孫鞅(공손앙)이 秦(진)나라로 갔다. 성후 16년(기원
전 356년), 성후는 세력이 미약해 시호를 공에서 후로 깎아내렸다. 성후 29년(기원전 34
3년), 魏(위)나라의 왕인 양혜왕은 그를 강제로 몰아내고 위 영공의 자손인 子南勁(자남경
을 세웠다.
제44대 평후(BC. ?∼BC. 335) 증조부 공자 영이고 자남고의 아들이다.
위 성후 29년(기원전 343년), 魏(위)나라의 왕인 양혜왕은 위 성후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위 영공의 자손인 그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시켰다. 위 평후 8년(기원전 336년), 위
평후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위 사군이 뒤를 이어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제45대 사군(BC. ?∼BC. 293) 위 평후의 아들
위 평후 8년(기원전 335년), 위 평후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위 사군 5년(기원전 3
30년), 위 사군은 스스로의 작위를 侯(후)에서 君(군)으로 낮춰서 스스로 부용국을 자칭
했다. 그리고 위나라의 영토는 澓陽(복양)만 남았다고 한다. 위 사군 42년(기원전 293년),
위 사군이 죽고 그 아들인 公期(공기)가 즉위하니 그가 위 회군이다.
제46대 회군(BC. ?∼BC. 252) 위 사군의 아들이다.
위 사군 42년(기원전 293년), 위 사군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위 회군 41
년(기원전 252년), 위 회군은 위 안희왕을 알현했다가 포박당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리
고 위 회군의 동생이자 魏(위)나라의 사위인 위 원군이 뒤를 이었다.
제47대 원군(BC. ?∼BC. 241) 위 회군의 동생
위 회군 41년(기원전 252년), 위 회군이 위 안희왕의 손에 죽자 위 안희왕은 위 회군의 동
생이자 자신의 사위인 위 원군을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웠다. 위 원군 12년(기원전 241년
秦(진)나라가 위나라의 동쪽을 차지하고 그곳에 동군을 두었다. 그리고 위 원군을 野王縣
(야왕현)으로 옮기고 복양에 복양현을 설치했다. 이 도중에 秦(진)나라 사람들이 원군을
살해했다고 전한다. 그 뒤는 위군 각이 뒤를 이었다.
제48대 위군(BC. ?∼BC, ?) 위 원군의 아들이다.
위 원군 12년(기원전 241년), 위 원군이 야왕으로 거처를 옮기던 중 살해를 당하고 자남
각은 그 뒤를 이어서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위군 각 21년(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인
영정이 천하통일을 하였다. 진시황까지는 존재했지만 위군 33년(기원전 209년), 위군은
2세 황제인 胡亥(호해)에 의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졌다.
수도 천도
康叔(강숙) 封(봉) 朝歌(조가) 河南省 鶴壁 淇縣(하남성 학벽 기현)
曹(조) 河南省 安陽 滑현(하남성 안양 활현)
懿公(의공) 赤(적) 楚丘(초구) 河南省 安陽 滑縣(하남성 안양 활현
成公(성공) 鄭(정) 帝丘(제구) 河南省 濮陽縣(하남성 복양현)
元君(원군) 野王(야왕) 河南省 沁陽縣(하남성 심양현)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馮夢
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 또한 左丘明(좌구명)의 春秋左傳(춘추좌전)과 司馬光
(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또한 인터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