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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영욕의 벤처 흥망사
1. 벤처 탄생, 희망인가 바람인가
지난 1998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대통령에 새로 취임하는
벤처플라자는 벤처기업창업촉진토론회, 벤처마트, 벤처포럼 3가지 행사로 구성됐고, 대통령 취임식 전날인 24일과 취임식 당일인 25일 연이어 열렸습니다. 벤처플라자에는 2일 동안 7,000여 명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 벤처기업 육성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기도 한
당시 왜 그리 벤처에 열광했을까.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한국경제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성장엔진이라 믿었던 대기업들이 힘없이 무너지고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구조조정 여파로 실직자와 청년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서광이 비쳤습니다. 바로 벤처였습니다.
‘한국의 빌 게이츠’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믿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벤처 복음’에 먼저 20~30대 젊고 유능하고 도전적인 엔지니어들이 뛰어들었습니다.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창업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도 확산됐습니다. 기업의 정의도 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유지돼 온 대기업 중심의 경제질서가 구조조정과 벤처 붐으로 급속히 무너졌습니다. 외환위기가 가져온 한국사회 내 ‘인력·자본 대이동’이 벤처생태계를 급성장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벤처가 단순히
벤처기업협회 창립 이듬해인 1996년 7월, 코스닥 시장이 개설됐습니다. 벤처기업들의 고질적 문제인 자금조달창구가 마련된 것입니다. 1997년 8월에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됐습니다. 벤처기업특별법에 따라 연기금의 10% 한도에서 창업투자 출자도 가능해지고 코스닥을 비롯한 벤처캐피탈 분야가 급성장하게 되자 벤처로 돈이 급속히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정부가 벤처확인제도를 본격 실시한 이후 벤처기업 수는 한 때 1만2,000개로 급격히 불어났습니다. 정부 확인을 받은 벤처기업(누계 기준)은 1998년 2,042개사에서 1999년 4,934개, 2000년 8,798개, 2001년 1만1,392개사로 급증했습니다.
벤처산업의 급성장은 외환위기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는 활력소가 됐습니다. ‘뭉칫돈’의 유입이 가속화됐습니다. 골드뱅크, 새롬기술, 다음커뮤니케이션 등 스타 기업도 속속 탄생했습니다. 코스닥 시장은 탄생한 지 불과 2년 만에 13배로 팽창했습니다. 1999년 거래량은 전년보다 8배 늘어난 50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코스닥 지수는 무려 240%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성장은 여기까지였습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벤처 버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 벤처를 태동시킨 사람들
한국 벤처 태동에는 ‘카이스트(KAIST) 인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벤처를 논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이스트 출신 창업자들이 조직한 과기회(科技會)입니다. 이 모임에서 한 때 활동하던 벤처기업만 500여 명입니다. 가히 ‘벤처사관학교’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과기회는 초창기 ‘벤처군단’을 탄생시켰고 그 자체로 한국 벤처사가 됐습니다.
벤처사에서 ‘원조 벤처’로 꼽히는 인물로는 단연
이민화 前 회장보다 2년 앞서 창업한 비트컴퓨터의
1983년 2월 창업한 반도체 검사장비업체 미래산업의 정문술 前 회장도 원조 벤처격입니다. 40대 늦은 나이에 정부기관에서 나와 벤처를 설립한 정 前 회장은 미래산업을 한국의 대표 반도체장비업체로 키우고 미국 나스닥 시장에까지 상장시켰습니다. 창업 후 19년 만인 2001년 1월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전격 은퇴를 선언, 성공한 경영자의 모델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밖에 큐닉스컴퓨터에서 스핀오프형 창업에 나선 다우기술의
벤처 1세대는 벤처캐피탈 제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힘겹게 회사를 키우며 외국 기술에 의존해온 한국 IT산업의 발전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공적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1세대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다진 ‘벤처생태계’에서 1990년대 이후 나눔기술의
3. 불나비 투자, 불야성 테헤란로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 뒤 먹자골목에서 10여 년째 고급 일식집을 운영하는 P씨(53)는 지난 1999년을 잊지 못합니다. 음식점을 운영한 이래 그 때처럼 ‘돈이 물처럼 차고 넘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점심, 저녁 예약이 끊이지 않았고 음식값도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당시는 요즘과 같은 알뜰 정식 메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앉으면 무조건 회를 시켰는데 자연산이라고 하면 1인당 20만원을 호가해도 불평하는 사람 없고 제주 다금발이 회는 1인분에 30~40만원을 받기도 했다”고 좋았던 그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1999년 겨울 서울 테헤란로는 너나 없이 ‘벤처 돈벼락’을 맞았습니다. 서울 강남의 고급 호텔가는 송년회나 세미나를 여는 벤처기업들이 온통 점령했습니다. 고급 양주에 파트너가 아름다운 룸살롱은 한 번 술자리가 1,000만원 대에 달해도 자리가 없었습니다. 주가로 떼 돈을 번 일반 직장인들도 번듯한 일식집에서 망년회를 쐈습니다. 테헤란로 벤처밸리의 한가운데 있었던 르네상스호텔은 전체 연회장 예약의 대부분을 벤처기업들이 차지했고 호텔 측은 아예 벤처기업 담당자까지 두었습니다. 외제승용차도 즐비했고 해외에 별장을 샀다는 등 신흥 벤처인들의 과감한 씀씀이가 사람들의 입에 매일 오르내렸습니다. 실제 벤처기업협회 부회장까지 지낸 M씨는 후일 회사 공금을 횡령, 해외에 호화별장을 산 사실이 드러나 처벌되기도 해 이 같은 입소문이 단지 호사가들의 입방아만은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그 해 내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도 주식이었습니다. 얼마전까지 모든 신문 지면과 술자리를 점령한 화제어가 부동산이었던 것처럼 그 당시는 모이면 주식과 벤처로 날밤을 지새웠습니다. ‘코스닥에 등록한 어떤 회사의 주식이 폭등해 사원들이 모두 억대 부자가 됐다. 앞으로 어떤 회사가 뜬다. 어떤 회사가 주식공모에 나섰다” 등등 전국이 주식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벤처투자설명회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직장인들은 물론 주부, 대학생들까지 대박의 환상을 좇아 객장에 죽치고 앉았습니다. 투자설명회에 나온 기업들은 당초 목표액보다 4~10배나 많은 투자금을 유치했고 ‘내 돈을 받아 달라’는 투자희망자가 너무 많아 최고투자액을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 재학생들이 설립한 아이패스라는 한 벤처기업은 사업도 하기 전 아이디어 하나만 놓고 액면가 5,000원 짜리 주식을 38만원에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1997년 디지털전력량계 생산 벤처기업 옴니시스템을 창업한
돈만 몰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도 쏠렸습니다. 공대 교수들은 너나 없이 창업에 나서 한몫 차지하기 바빴고, 대기업의 유능한 사원들도 ‘늦으면 대박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것’ 같은 불안감에 너도 나도 벤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재경부 장관, 대기업 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의 명망 있는 인사들도 벤처기업의 회장, 고문으로 속속 명함을 갈았고, 정부부처, 공기업, 언론사의 젊고 전도양양한 엘리트들도 테헤란밸리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대기업들도 미래의 씨앗 사업이라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계획을 경쟁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대기업 오너 패밀리의 2, 3세 젊은 경영인들은 굴뚝 ‘가업’보다 벤처에 더 깊은 애정을 갖고 투자사업을 지휘했습니다. 당시 묻지마 투자 열풍의 광기는 인터넷 전화 서비스업체 새롬기술의 주가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종업원 79명, 자본금 66억원에 불과한 새롬기술은 2000년 2월말 시가총액이 무려 3조2,600억원까지 달했습니다. 액면가 5,000원 기준으로 따지면 주당 가격이 무려 300만원에 육박했습니다. 이 같은 시가총액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현대자동차(2조5,433억원)을 한참 앞선 것입니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직원 수는 5만 명, 자본금만도 1조3,734억원이나 됐습니다. 또 이 같은 시가총액은 재계 6위인 한진그룹과 8위인 한화그룹의 상장사 11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준이었습니다. 현재 솔본으로 이름을 바꾼 새롬기술의 주가는 5,000원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1999년 코스닥 주가는 76에서 출발했습니다. 연말까지 무려 3배가 오른 셈입니다. 시가총액도 연초 8조원에서 106조원으로 무려 10배 이상 급상승했습니다. 신규등록한 기업만 161개에 달했고, 이들은 등록 전 공모를 통해 총 3조원 가까운 천문학적인 돈을 조달했습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1999년말 당시 250선이던 코스닥 지수가 2000년에는 1,000을 돌파한다는 분석을 내놓아 주식투자 열기를 부추겼습니다.
이 같은 광풍은 독버섯도 쑥쑥 키웠습니다. 유령회사를 차린 뒤 정부기금을 지원받거나 허위서류로 투자자를 눈속임해 거액을 받아챙긴 뒤 사라져 버리는 ‘무늬만 벤처’들이 속출했습니다. 크고 작은 주가조작 사건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먼 돈과 광기 어린 사람들이 모여 설설 끓던 벤처 시장은 ‘머니게임’의 결정판인 4대 게이트가 터지면서 급속히 식기 시작했습니다.
4. 불법대출·주가조작·정관계 로비 ‘4대 게이트’
벤처의 투자광풍은 결국 2000년 말부터 연이어 터진 각종 벤처 게이트로 급속하게 사그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4대 게이트였습니다.
벤처투자가 절정으로 치솟던 지난 2000년 1월. 당시 32세의 젊은 벤처기업 사장
2001년 말에 터진
5.
2000년 3월 코스닥 시세판은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2,834.4pt. 사상최고치로 장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는 폭탄 돌리기의 마지막 순번에 불과했습니다. 머니게임의 파국을 알리는 전주곡이었습니다.
2,834.4pt(2004년 2월*10 지수조정 감안)를 찍은 코스닥지수는 그 다음주 월요일인 13일 39pt가 미끄러지며 불안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불안은 삽시간에 개미들을 패닉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묻지마 투자’에 대한 막연했던 불안감이 돌연 ‘올 것이 왔다’는 공포로 변한 것입니다. 3월 17일 주가는 전일 대비 무려 159pt나 빠졌고 20일에는 187pt가 잘려 나갔습니다. 이 같은 끝모를 추락을 거듭한 끝에 그 해 말 코스닥 지수는 525.80pt로 마감했습니다. 벤처 버블은 그렇게 붕괴돼 갔습니다.
코스닥이 폭락하면서 벤처기업들은 점차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공모, 유상증자, 전환사채(CB) 및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등 모든 자금조달 수단이 하나 둘 막히게 된 것입니다. 기관은 물론 주식투자로 돈을 날린 엔젤투자자들 역시 시장을 외면했습니다. 투자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코스닥지수는
코스닥 대폭락, 그 이후
벤처 붐이 이끈 코스닥 전성기는 1999년과 2000년 1년 간의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1998년 초 액면가 500원 짜리 주식이 최고 800배까지 상승하는 IT기업 중심의 폭등장세가 일면서 본격적인 벤처 붐을 예고했습니다. 이 기간 기록적인 수익률도 나왔습니다. 국내 주식시장 상승률 상위 20개 기업 가운데 1999~2000년 최고 시세를 분출한 종목이 18개였습니다. 리타워텍과 한국디지탈라인은 최저가 대비 최고가 상승률이 각각 20,123.46%, 9,349.54%에 달해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밖에도 새롬기술(6,629.23%), 싸이버텍홀딩스(3,963.05%), 다음커뮤니케이션(3,529.46%), 장미디어인터랙티브(3,359.82%), 골드뱅크(3,236.90%) 등도 짧은 활황장에서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의 신경제와 함께 인터넷 기반 벤처기업이 몰고 온 ‘코스닥 광풍’이었습니다. 이 중 새롬기술은 솔본으로, 싸이버텍은 디아이세미콘으로, 골드뱅크는 코리아텐더에서 다시 그랜드포트로 각각 이름을 바꿨으며 현재 시세는 당시 대비 60분의 1, 20분의 1, 40분의 1 수준에 형성돼 있습니다.
일부 벤처기업은 부도나 청산으로 아예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02년엔 원조벤처로 벤처신화의 주역이었던 메디슨이 부도와 함께 퇴출됐으며, 게이트에 휘말렸던 한국디지탈라인, 리타워텍도 같은 운명을 거쳤습니다.
이 시기 코스닥이 이처럼 힘없이 무너진 것은 세계적인 IT경기 부진에 따른 신경제의 몰락에서 기인하지만 우리나라의 벤처몰락이 보다 더 극적이었던 것은 몇몇 업체의 주가조작과 불공정거래, 코스닥 대주주나 최고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 등 안으로 곪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때문이었습니다.
또 경쟁 과열로 인한 수익 악화도 한몫했습니다. 2007년 1월 현재 코스닥 상장사는 970여 개, 절반이 IT·BT·ET 관련 기업으로 분류됩니다. 결국 코스닥시장의 대폭락은 벤처기업 자금줄이 막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스닥 폭락은 기존 벤처기업 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창업의욕도 꺾어놨습니다. 2000년 벤처활황기 61,456개에 달하던 신설법인은 이후 62,168개(2001년)로 정점을 찍은 뒤 61,852개(2002년), 52,739개(2003년), 48,585개(2004년)로 급감했습니다.
부실에 부실을 더한 P-CBO 발행
코스닥 및 벤처버블이 꺼지면서 벤처는 물론 일반 중소 제조업체들까지 자금난에 시달렸습니다. 정부는 이 같은 중소 벤처기업들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2001년 자산유동화증권의 일종인 ‘프라이머리 CBO(발행시장 채권담보부증권)’ 발행을 결정햇습니다. 이는 BBB이하 투기등급 회사채 인수를 통해 기업들의 자금난을 덜어줘 연쇄부도사태를 피하자는 고육책이었습니다. 하지만 P-CBO는 기술보증기금(現 기술신보)의 부실화를 유발하고 특혜시비로 얼룩졌습니다. 알선 브로커와 발행주간 금융사 직원이 리베리트를 챙기고 부당한 업체에 발행이 성사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2004년부터 기보와 산업은행 등은 발행을 중단했으나 중진공만은 2000년 이후 매년 1, 2회씩 회당 1,000억원대에서 40~50개 기업을 대상으로 발행을 지속해 왔습니다. P-CBO는 2001년 첫 발행된 후 중소기업진흥공단, 기보, 산업은행 등을 통해 지금까지 총 7조원 가량 발행됐습니다. 이 중 기보는 2001년 발행한 원리금 합계 2조3,000여억원 중 1조원 가량의 부실이 발행돼 부도위기까지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막대한 자금수요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길고도 어두운 터널은 2004년 말 ‘벤처 활성화 방안’이 발표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정부는 중소 벤처업계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벤처’를 기치로 벤처 부활정책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新벤처정책에 힘입어 코스닥시장은 2005년 84.52%가 상승, 벤처업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6. 비운의 벤처기업들
2000년 3월 고비로 벤처 경기가 급강하하면서 미처 대비하지 못한 벤처기업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돈 걱정 없이 문어발 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스스로 거품을 일으켰던 기업들이 시차를 두고 무릎을 꺾기 시작한 것입니다.
벤처 몰락의 가장 드라마틱한 과정을 연출한 곳은 이민화 회장의 메디슨으로 한국 벤처신화의 주역으로 이름을 날렸던 메디슨은 지난 2002년 자금난으로 쓰러졌습니다. 벤처업계에는 그야말로 메가톤급 폭탄이었습니다. 메디슨은 1985년 초음파진단기 제조업체로 설립돼 화려한 성장가도를 달리며 1996년 거래소에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현대자동차보다 많은 3조원을 웃돌기도 했습니다. 부도 전 메디슨이 대주주인 자회사와 일부 지분을 투자한 관계사만 50여 개에 달했습니다. 이민화 회장은 이 방대한 네트워크를 ‘벤처연방제’라 부르며 사업을 끝없이 늘려갔습니다. 그러나 2000년 벤처 거품이 꺼지고 증시 침체가 이어지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던 메디슨은 결국 2002년 1월 부도처리됐습니다.
이민화 회장에 이어 벤처기업협회 2대 회장을 맡았던
장 회장의 분식회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벤처 1세대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에 앞서 코스닥의 최고 황제주로 꼽혔던 새롬기술의
3대 휴대폰 제조 벤처기업 창업자들도 모두 내리막길입니다.
7. 벤처 부활의 노래
新벤처정책의 핵심은
ü 벤처기업의 코스닥시장 진입요건 완화
ü 1조원 규모의 모태펀드 설립을 통한 간접적 투자 지원
ü 실패한 1, 2세대 벤처기업인들에게 재기를 주자는 패자부활제
등으로 요약됐습니다. 벤처업계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건의사항들이 대부분 적극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벤처활성화대책은 이듬해 6월 다시
ü 창업초기기업에 대한 창업보육 활성화
ü 투·융자 확대
ü 기술평가 및 기술사업화 촉진
ü 창업투자 촉진지원 강화
의 추가대책을 내놨습니다. 당시 정책을 입안했던 중기청 실무자는 “벤처기업 부활을 통해 침체된 코스닥 시장을 살리고, 자금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국가경제를 일으켜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했습니다.
벤처부활, 막전막후
막전막후 주인공들은
ü 대기업이나 일반 중소기업에 비해 벤처의 매출성장률과 수익이 배나 높은 점
ü 대기업은 고용없는 성장을, 중소기업은 해외 이전에 바쁘지만 벤처는 국내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일자리 창출 효과가 높은 점
ü 벤처 정신이 강한 국민성
ü 4년 간의 벤처 검증
등을 적시하며 ‘한국의 희망은 벤처기업’ 뿐임을 집요하게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업계는 벤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여전히 높은 점을 감안해 정부의 직접 개입에 의한 지원보다는 자연스런 벤처생태계 조성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기업의 진입과 퇴출이 시장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벤처 인프라를 구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벤처 10대 어젠다’였습니다.
벤처기업들은 암흑기 4년 동안 기술력과 도덕성을 갖춰 살아남은 벤처기업들이 회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며 크게 반겼습니다. 新벤처 활성화정책은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4년 암흑기 동안 극적으로 줄어들던 벤처기업 수가 다시 늘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11,392개였던 벤처기업 수는 해마다 줄어 2004년에는 7,967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新벤처정책 이후 2005년 9,732개, 2006년 12,218개로 다시 급증했습니다. 코스닥도
新벤처정책의 핵심인 1조원 규모의 모태펀드는 벤처캐피탈의 자금 확보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벤처캐피탈 신규투자실적도 2005년 7,573억원, 2006년 7,333억원 수준으로 뛰어올랐습니다. 이는 극심한 코스닥 침체기였던 2002~2004년 신규투자액보다 20% 가량 증가한 수치입니다.
벤처캐피탈의 경영권 지배 허용, 사모투자펀드(PEF) 활성화, 창업투자회사에 대한 감독 강화 등도 코스닥지수를 2005년 한 때 750pt까지 치솟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기대감만 높았을 뿐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패자부활제나 프리보드 활성화에 대한 결과물이 없었고, 인프라 조성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체감할 만한 지원책이 나오지 않았다는 불만입니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벤처육성특별법 연장, M&A시장 확대, 투자은행(IB)제도 정착 등에 대한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8. 벤처업계 희망 준 대들보
도덕성 논란과 거품 논쟁으로 벤처업계가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벤처의 ‘희망 대들보’는 묵묵히 자랐습니다. 이들은 기술로 한우물을 파며 투명경영의 정도를 걸어 한국경제의 희망 ‘아이콘’이 됐습니다.
네이버보다 2년 먼저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창업한
안철수연구소의
휴맥스의
티맥스소프트를 창업한 KAIST 전자전산학과
9. 희망의 싹은 자란다
지난 한 해 벤처의 시련은 계속됐습니다. ‘386 벤처 성공신화’였던 VK, ‘포털 1세대’ 네띠앙이 줄줄이 쓰러진 데 이어 벤처 1세대로 조 단위 매출을 올리던 팬택마저 지난해 말 워크아웃을 추진 중입니다. 벤처신화는 끝났다는 자조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희망을 품은 벤처의 싹은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 해 새로 생긴 벤처만 2,500여 개로 이들은 거품 많던 테헤란 밸리를 뒤로 하고 구로 밸리에 새 둥지를 틀고 ‘벤처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벤처 희망의 또 다른 싹은 중견기업으로 쑥쑥 자라고 있는 ‘기술 벤처’들로 한 해 매출액이 1,000억원이 넘는 벤처기업들이 모인 ‘벤처 1,000억원 클럽’은 매년 10% 이상 늘어나고 있습니다.
2006년 ‘벤처 1,000억원 클럽’은 모두 78개로 이들의 매출액을 합산하면 13조7,916억원, 국내 그룹(상호출제제한기업집단) 기준으로 12위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올해는 반도체와 DMB 관련 업종 매출 호조로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건강한 생태계가 그렇듯 벤처의 세대교체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벤처의 버블이 꺼지면서 ‘무늬만’ 벤처는 이미 솎아 내졌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입니다. 벤처기업협회
안철수연구소의
담보가 아닌 기술력과 사업성을 보고 투자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 구축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매출 6,000억원을 달성한 1세대 벤처 휴맥스의
특히 벤처의 전문기업화를 위한 M&A 활성화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미국의 경우 인텔, MS, 시스코시스템즈 등 모두 벤처로 시작해 M&A를 통해 전문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기술력이 강점인 초기 벤처들을 동종 업계의 규모화된 기업이 인수해 투자와 마케팅을 하게 되면 기술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벤처기업의 자구노력이 배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기술력으로 시장을 선도할 수 있어야 대기업과의 경쟁구도와 해이시장에서 진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티맥스소프트는 회사 창립 후 10년 동안 주주배당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