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게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제가 사실 3주 동안 계속 우리 탓이라고, 더 허비하기 전에 회개하자고 설교했는데 이번 주는 그래도 위로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본문을 찾아 준비하고 주보까지 다 만들었는데 어제 매일성경을 펼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 주 설교 본문하고 같은 것을 보고. 다행히 내용은 서로 다르기에 안심했습니다. 어제 매일성경 묵상 다 하셨죠?
한 소년이 나무를 깎아 정성스럽게 배를 만들었습니다. 소년은 자기가 만든 나무배를 가지고 동네 앞 개울가로 뛰어갔습니다. 배를 띄웠습니다. 배는 개울물을 따라서 잘 떠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에 저만큼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 소년은 장터에 나갔다가 어느 상점의 진열대 위에 자기가 만들었던 나무배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상점 주인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것이니 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인은 그 배는 자기가 돈을 주고 사다 놓았기에 그냥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년이 아무리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자 잠시 생각한 후 집으로 뛰어가 책상 위에 있는 저금통을 깨뜨려서 그 속에 있는 동전을 가지고 다시 주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비록 돈은 조금 모자라지만 소년이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소년은 자기가 만든 나무배를 가슴에 품고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내 것이야. 너는 두 번이나 내 것이 된 거야. 처음엔 내가 너를 만들어서 내 것이고, 이번엔 내가 너를 값을 지불하고 샀으니 내 것이야. 이제는 절대로 너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라며 돌아왔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 너는 내 것이다. 첫째로 내가 너를 창조했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내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값 주고 샀으니 너는 다시 내 것이 되었다. 이제는 영원히 너와 함께 할 거야.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약속하십니다. 할렐루야! “종수야, 왔니?”라고 한 것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절박한 문제도, 순간도 만납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갑작스런 일들이 우리를 위협해 옵니다. 온갖 종류의 시험, 아픔, 시련, 질병의 고통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제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일반적으로 종교는, 마음에 평안 얻도록 분위기도 만들고 명상도 하고 마음 수련을 하는데 기독교는 꼭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먼저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구원자이심을, 심판자이심을 믿으라고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이 나의 죄를 대신하심을, 그래서 용서받았음을 믿으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려고 노력해도, 깨달음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만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고 위로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세상을 주관하는 분입니다. 간단히 비교하면 물에 빠졌는데 종교는 스스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건져내어 주시니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위로’라는 단어만 무려 10번이 나옵니다. 다섯 절 안에 10번의 위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3절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합니다. 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진정 위로가 됩니다. 성도는 다른 무엇으로 위로받지 못해도 하나님께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가 받는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용기를 돋우어주다, 위로하다. 기쁨을 찾게 해주다. 대신 구하여 주다‘는 뜻입니다. 만나면 힘이 나고 소망이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자입니다. 꿈과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소망이 생깁니다. 가까이 하면 위로가 넘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란 중보자, 대언자, 위로자란 말입니다.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했는데, 예수님도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성령님도 위로자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롬8장 26절에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연약함을 위해 기도를 대신하며 도우시는 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아닙니까!
지난주에 영국의 물리학자 토니 윌리엄스라는 분이 아내를 잃고 외로워서 누구라도 친구하자고 공개 요청을 했습니다. 75살 할아버진데 자녀 없이 오직 아내랑 살다가 아내가 먼저 떠나고 나니 너무 외롭고 적막하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자기 집 문에 이런 글을 써서 붙였습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소울 메이트를 잃었습니다. 친구나 다른 가족이 없어서 대화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지속되는 적막이 견딜 수 없는 고문과도 같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나요?" 그랬더니 전 세계에서 할머니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다 연락을 하고 힘내시라고 위로했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란에 대해 위로할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환란을 겪으셨기에, 그 고통과 아픔을 아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보다 더 큰 아픔과 슬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슬픔, 아픔이 무엇일까요? 누가 뭐래도 자식 잃은 슬픔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만약 그 아이가 독자였다면 그 아픔이 더 클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과 이 아픔, 슬픔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비교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할까요? 그런데 하나님도 자식을 잃었습니다. 그것도 독자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 잃은 슬픔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나도 자식을 잃었다”라며. 히4장 15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할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아픔을, 슬픔을 나누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능히 동정하실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왜 슬퍼하느냐?”, “버림받았습니다.”, “나도 버림받았다.”라고 하십니다. “집에서 쫒겨났습니다.” “나도 쫒겨 났다.”
창16장에 보시면 하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여종인 하갈이 그 집에 약속한 아이가 잉태되지 않고 나이가 점점 많아지니 사라는 할 수 없이 하갈을 통해 대를 잇게합니다. 그런데 종이 주인마님 대신 아이를 가지자 갑자기 기고만장해집니다. 주인 사라가 여종 하갈을 얼마나 구박했는지 그만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창16장의 장면을 읽을 때마다 여인의 신세가 이처럼 처량할 때가 또 어디 있을까..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보다 더 처량하다 싶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든든한 남편이 있어도 배불러 오는 만큼 근심이 있겠거늘 세상에 시킨대로 하여 주인집 애기 가졌더니 쫓겨나고, 아브라함이라도 좀 말려주면 좋으련만 모른 채 하니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광야에서 우물을 찾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눈물은 두 모금 마시고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네 여주인에게 복종하라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라라”라고 약속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오늘 미혼모의 그 쓰라린 아픔도 아시는구나. 위로하시는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모로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어떤 때입니까? 자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때, 다른 부모가 하는 만큼 해주지 못할 때가 아닙니까. 가장 무력감을 느낄 것입니다. 부모인 것을 탄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의 서글픈 마음을 하나님도 아십니다. 아들이 기도하기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전능자임에도 죄를 처리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니 살리기 위해서는 죄 없는 자가 대신 희생되어야 합니다. 아들이라도 죄를 짊어졌을 때는 눈 감아 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죽어갈 때, 아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도 맞으셨습니다. 그런 때가 하나님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가장 큰 슬픔도 아시고 가장 큰 아픔도 아시고 가장 큰 절망도, 위기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나도 내 아들을 잃었다” 하십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86편 7절에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고 확신했습니다.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찾아오십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환난 중에 만날 도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인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후에 육신을 벗어버리고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도 우리 영혼을 인도하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4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우리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먼저 받고 나서 이제 너희도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똑같이 힘든데, 똑같이 어려운데, 내가 더 어려운데, 그럼에도 함께 앉아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믿음을 고백하고 비전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는 사람들!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는 위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다른 사람을 위로하길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받기만 하지 말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입니다. 주님께 위로받고 사람들을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