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해미읍성, 외적에 대비하고 외래 종교를 박해하던 곳
충무공 이순신, 군관으로 근무
다산 정약용이 유배 생활했던 곳이기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읍(邑)은 지방행정 단위다.
읍장(邑長)과 동장(洞長)의 직급이 같은 것으로 미뤄보면 지방의 읍은 도시의 동(洞)과 같은 단위로 볼 수 있다.
읍 설치 기준은 다양하지만 대개 군(郡) 단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군청이 소재한 곳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에 읍은 고을과 같은 의미였다. 당시 도(道) 단위 아래 지방 단위인 부목군현(府牧郡縣)의 관아를 설치한 고을을
읍치(邑治)라 했고, 그 고을 영역을 읍내(邑內)라고도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에 해미현(海美縣)의
읍치였다. 해미읍성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다.
(2022. 11. 14)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해미, 바다가 아름다운 곳?
해미(海美)라는 이름만 놓고 보면 바닷가 아름다운 마을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런 의미로 고을 이름을 지었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가까운 곳에 서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해미라는 지명은 오래전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치면서 두 고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 두 고을은 이웃해 있었다가
조선시대 태종 7년(1407)에 병합돼 해미현이 되었다. 이 책에는 당시 해미읍성의 규모도 언급되었다. “읍성(邑城)의 둘레는
2천 6백 30척”이고, “옹성(甕城)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밖은 탱자나무 숲으로 둘러있다”고 전한다.
읍성은 주로 내륙의 큰 고을처럼 사람이 많이 사는 중심지에 건설됐다. 그런데 해안 근처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축성됐다.
해미에 성을 건축한 것도 바다에 면한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해미읍성 자료를 보면 고려 말 조선 초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성을 쌓게 됐다고 한다.
왜구를 막기 위해 해안 지역에 많이 들어선 읍성은 아이러니하게도 1910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거의 모두 헐렸다.
여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근대 도시 건설 및 새로운 도로망 부설이라는 명목과 함께 조선의 방어거점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여지도의 해미현 지도. 해미읍성을 구병영으로 표시했다. 여지도는 간행 시기가 미상의 지도첩이다.
다만 충청병영이 떠난 1651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 시절인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광여도와 내용이 유사하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선 초기 해미읍성에는 충청도 육군 지휘 본부인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자리했다. 그래서 충청병영성으로도 불렸다.
선조 9년(1576) 무과에 급제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선조 12년(1579)에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도 해미읍성에서 잠시 유배 생활했다.
해미읍성은 내탁식 성벽을 갖춘 평지성이다. 성 안쪽으로 계단식 석축을 쌓아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경사진 성 내벽을
만들었다. 바깥으로는 성돌을 수직으로 쌓아 성 외벽을 쌓았다. 읍성 전체를 감싸는 해자도 설치했다.
현재는 일부 구간에 해자 흔적이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800m, 성 내 면적은 57,122평이다.
백성이 동원돼 쌓은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까지 축성했고, 이후에도 계속 고쳐 쌓았다.
지난 기사에서 다룬 전라도 백성을 동원해 쌓은 고창읍성처럼 해미읍성도 충청도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았다.
해미읍성 안내자료를 보면 처음에는 여러 고을 백성이 한데 모여 성벽을 쌓았다.
그러다 보수할 때 고을 별로 책임 구간을 정해 작업하도록 바꾸었다고.
이는 부실하게 쌓은 구간이 나오면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축성 초기에는 여러 고을 백성들이 한데 모여 작업한 까닭에
책임소재를 다루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중에 성벽이 무너지면 그 구간을 맡았던 고을을 문책할 할 의도로 축성 맡은 구간의
성벽 돌에 고을 이름을 새겨 넣게 되었다고.
해미읍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해미읍성은 내탁식 구조로 성을 쌓았다.
성벽 안쪽은 계단식 석축 위로 경사지게 흙을 쌓았고 바깥으로는 수직으로 성돌을 쌓았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고창읍성 성벽에 적힌 전라도 고을 이름에도 같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양민에게는
역(役)의 의무가 있었다. 대표적인 게 관아나 성곽 건축 등 국가가 주관하는 공사에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생업이 아닌 노동에 정성을 다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읍성의 각자석(刻字石)은 그래서 나온 대책이었다.
한편, 여러 고지도에 해미읍성이 나와 있다. 주변 산천의 모습과 함께 나온 읍성은 내부가 간략하게 표현되어 정확한
내부 시설은 알 수 없다. 다만 발굴 과정에서 33동의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종교적 소신을 지킨 순교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 조정은 내륙 방어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그래서 해미읍성에 두었던
충청병영을 효종 2년(1651)에 청주로 옮겼다. 대신 해미읍성에는 충청도 5군영의 하나인 호서좌영이 설치되었다.
호서좌영의 영장은 지역 군사 책임자이기도 했지만 민정에도 관여했다. 그래서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의 임무도 가졌다. 조선 말 천주교 신자 검거도 호서좌영이 맡았다.
해미읍성의 옥사. 감옥 안에는 천주교인들이 갇힌 모습이 조형물로 전시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천주교 순교비와 회화나무.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당시 충청도 내포 지역의 신자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혀있다가 처형됐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순교자가 1,000여 명이 넘는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당시 감옥에 갇힌 천주교인들의 모습을 조형물로 재현했다.
그때 흔적이 읍성 안의 회화나무에 남았다.
천주교 신자들의 손발과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한 이 나무는 호야나무라고도 하는데 충남 기념물이 되었다.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의 순교지를 방문했고 2020년 11월 교황청이 이곳을 국제성지로 지정했다.
역사 관광지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에서 가깝다. 수도권과 충청권은 물론 전라권에서도 접근성이 좋아 당일 여행 코스로
인기 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해미면에 들어서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읍내가 나오고 고풍스런 해미읍성도 볼 수 있다.
성곽 위에서 바라본 해미읍성 내부.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해미현 관아 입구. 문으로 들어 가면 동헌과 내아가 나온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성안으로 들어서면 평지가 넓게 펼쳐진다. 북쪽에만 나지막한 산이 있고 대부분이 평지다.
고창읍성과 달리 해미읍성은 성곽 위로 다닐 수 없다. 성곽 구조상 상부가 좁아서 여러 사람이 다니기에 불편하다.
다만 성곽 안 여러 갈래 길을 찬찬히 걸으며 동헌과 내아 등 옛 건물들을 둘러 볼 수 있다.
정문인 진남문 근처에는 전통 가옥의 모습을 한 먹거리와 기념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다.
동문 근처에는 여러 채의 민속 가옥을 재현했다. 서문 근처의 활터에서는 국궁 체험도 할 수 있다.
해미읍성은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기도 했지만 현대의 관광객이 좋아할 만한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성 중앙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현장학습 나온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양한 역사를 간직한 해미읍성에서 이 아이들은 어떤 모습을 마음에 품게 될까.
해미읍성으로 현장 학습 나온 어린이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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