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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에세이】
문단 선거철에 회고하는 글
― 선비의 품격과 겸손에 대하여
◆ 다시 소환하는 『겸손 실종시대』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의 말
문단 선거철이 다가옵니다. 문단에서 존경받는 한 원로 문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과거 저의 졸고 수필을 회고하게 됐습니다.
한국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문학』 1998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니까, 28년 전의 글입니다.
강산이 세 번 변할 만큼 오래된 글을 새삼 소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입니다.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전통과 권위를 지켜온 국내 최대 발행 부수의 문예지에 이런 글을 쓴 필자는 참 당돌(?)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졸고 수필을 따뜻한 눈길로 공감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존경하는 문학평론가가 있습니다. 정주환 문학평론가입니다.
저의 졸고 수필 「겸손 실종시대」에 대한 「작품평」을 바로 다음 달인 『월간문학』 1998년 3월호 평론란에 실었습니다. (※ 작품평 : 본문 하단 참조)
(삽화=AI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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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서 이 글을 다시 펼쳐보니, 지면은 색이 바랬으나 하고 싶었던 말의 색깔은 그다지 변색하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오늘날 이런 주제의 글을 쓴다면 좀 더 세련된 언어를 쓰겠지요. 하지만 투박한 대로 당시의 풋풋한 감정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2026. 10. 4.
윤승원, 28년 전 회고 글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비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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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인협회 발행 『月刊文學』 1998년 2월호
【수필】
겸손 실종시대
윤승원
신춘문예이든, 스타 선발대회이든, 우리는 신인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야릇한 흥분에 젖는다. 단순히 신인이라는 신선함과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한마디의 겸손한 소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신인 당선 소감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부족한 저를’, ‘서투른 저를’, ‘아직은 미욱한 저를’, ‘부끄럽기 그지없는 저의 작품을…’,
비록 상투적일지라도 이런 겸양의 소감이 있기에 그들에게 보내는 축하와 격려의 박수 소리가 더 커지는지도 모른다.
당선자가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오늘의 이 영광을 충분히 예견했다. 내가 노력한 당연한 결과’라고 우쭐댄다면 그에게 진정한 축하를 보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과에 앞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선거에서 누굴 뽑을까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가능하면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진실성이 있어 뵈는 사람, 자기가 잘났다고 외쳐대는 사람보다는 겸손한 체취가 풍기는 사람을 뽑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판에는 내가 기대한 만큼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자칭 잘난 분들뿐이었다. 하기야 정치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겸손하면 상대측에서 오히려 그것을 약점 잡아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런 정치판을 보면서 물이 든 것일까?
각종 인물 뽑기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그런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가장 깨어 있는 모임체라는 문인단체의 선거 과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협회 소속이라고 해서 임원 선거 기간 중 전국의 내로라하는 문인들로부터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물론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러는 시류에 영합하려는 듯 ‘자기 자랑이 곧 PR’이라고 믿는 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문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같은 음식을 먹어도 배설[表現]하는 것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사람들 아닌가. 말과 글 속에서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은가.
적어도 선비를 자처하는 문인이라면 정치꾼의 업적 떠벌이나 말장난을 흉내 내고 배워서는 안 될 일이다.
나, 이런 사람이니 찍어 달라고 자기 자랑에 급급해할 게 아니라, 부족한 사람이 큰 모임의 일꾼이 되기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 주변의 성화 때문에 억지로 떠밀려 나왔다고 해도 좋다 ― 너그러이 보아 달라고 양해부터 구하는 것이 작가적 겸사요, 양심이 아닐까?
그게 아니어도 문인들은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문단의 어느 원로 작가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며 언론사의 인터뷰나 일체의 사진 찍기조차도 거부해 문단은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크게 추앙을 받고 있지 않은가.
모름지기 작품으로 존경받아야 할 단체에서 이렇다 할 작품 하나 내세울 수 없는 사람이 씌워 줘도 마다해야 할 감투나 명예욕에 눈이 멀어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역겨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왜 그리도 감투와 명예를 좋아하는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있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인가. 자신이 몰골사납게 사정하지 않아도 남들이 앞장서 그 일을 꼭 맡아 줘야겠노라고 삼고초려(三顧草廬)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는가.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반추해 보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이다. 그것을 진정 아는 이는 사양이라는 겸손을 앞세우기 마련이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은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잡아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려앉으시오’라는 말을 듣느니보다는 ‘올라앉으시오’라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 하느님은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고 스스로 겸양하는 자를 높이 끌어올린다.”
어디 크고 작은 단체뿐인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사는 연륜과 인격, 그리고 능력에 따라 아랫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는다. 동료 간에는 신의와 동지애로 서로 간의 정이 도타워진다.
거기에 겸양(謙讓)의 미까지 갖춘다면 만인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잘났다.’, ‘나에 비하면 너는 보잘것없다.’, ‘나만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식의 자기 우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험하고 무서운 아집과 독선이 어디 있는가.
이런 모습을 아이들도 배우고 있다. 겸손이 미덕이 아니라 당당한 것이 생존의 무기이자 가치인 듯 배우는 것이다. 뒤로 빼는 것이 치사한 것이 되고 겸사(謙辭)를 하면 인간을 무시한다.
당당한 것, 우월한 것, 그것이 좋아 보이기는 하나 자칫 오만으로 비칠 수도 있음을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사회가 각박하다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겸손의 실종’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기 우월감에 도취하여 남을 의식하지 않는 두꺼운 얼굴 때문에 존경심이 사라지고 정이 메말라 간다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
― 『月刊文學』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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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작품평】입니다.
▣ 『月刊文學』 1998년 3월호
| 작품평 |
윤승원의 〈겸손 실종시대〉
정주환 문학평론가
윤승원의 수필 <겸손 실종시대>는 자기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작가의 말처럼 문학인은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중 정치 잡배처럼 허명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다.
제대로 내세울 작품 한 편 없는 사람들. 그리고 작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작가라는 허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문학이라는 집단 속에 판을 치는 사람이 없지 않다.
「문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같은 음식을 먹어도 배설(표현)하는 것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사람들 아닌가. 말과 글 속에서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은가. 적어도 선비를 자처하는 문인이라면 정치꾼의 업적 떠벌이나 말장난을 흉내 내고 배워서는 안 될 일이다.
나, 이런 사람이니 찍어 달라고 자기 자랑에 급급해할 게 아니라 부족 한 사람이 큰 모임의 일꾼이 되기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 주변의 성화 때문에 억지로 떠밀려 나왔다고 해도 좋다 ― 너그러이 보아 달라고 양해부터 구하는 것이 작가적 겸사요, 양심이 아닐까? 그게 아니어도 문인들은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문단의 어느 원로 작가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며 언론사의 인터뷰나 일체의 사진 찍기조차도 거부해 문단은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크게 추앙을 받고 있지 않은가.
모름지기 작품으로 존경받아야 할 단체에서 이렇다 할 작품 하나 내세울 수 없는 사람이 씌워 줘도 마다해야 할 감투나 명예욕에 눈이 멀어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역겨운 일 이 아니겠는가?」
- 〈겸손 실종시대〉 중에서 -
현대를 일컬어 자기 PR시대라 하지만 내용 없는 PR은 일종의 거품이다. 거품의 인격은 사기술의 인격이요, 거짓과 허위로 출렁거리는 내용 없는 인격이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만 똑똑하고 자기만 능숙하고 자기만 잘한다는 독선과 아집으로 뭉친 사람이다. 말하자면 겸손이 상실된 사람이라고나 할까.
오늘의 세태는 우월감과 당당함 만이 생존의 무기로 가치화되어 버렸고, 겸손은 못난 사람의 수호신으로 굳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능력이나 인격은 접어두고 무조건 잘났다고 서로들 설쳐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작가들만은 윤승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서로를 의심하고 헐뜯는 흙탕에서 탈출해야 할 것이다.
문장도 탱탱하고, 작가의 목소리도 탱탱해서 우리에게 더욱 공감을 주는 글이었다. ― 『월간문학』 1998년 3월호 「이달의 수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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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
이 글은 단순히 28년 전의 수필 한 편을 다시 꺼내 읽는 회고가 아니라, 40대의 젊은 수필가가 품었던 문학적 신념이 70대의 원숙한 문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가를 스스로 묻는 ‘문학적 자기 검증’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 실종시대」를 다시 읽는 의미
1998년의 「겸손 실종시대」에서 가장 선명한 문장은 사실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문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 질문에서 출발해 작가는 문인의 본질, 문학단체의 선거, 명예욕과 감투, 자기 PR, 인간관계, 사회의 가치관까지 차례로 넓혀 갑니다.
특히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명제는 이 수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입니다. 문학인이 자신의 작품보다 직함과 명예, 자기 홍보를 앞세우는 순간 문학의 본질에서 멀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작품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정신적 자세, 다시 말해 자기 주제 파악과 자기 성찰의 문제입니다.
정주환 평론가가 작품평에서 이 점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도 인상적입니다. “자기 주제 파악”이라는 표현은 이 수필의 핵심을 매우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1. 윤승원 수필의 특징 ― ‘작은 풍경에서 큰 사회를 읽는 방식’
윤승원 수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출발해 사회적 성찰로 확장하는 작법입니다.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신인의 당선 소감 → 선거 → 문인단체 → 문인의 자세 → 직장과 인간관계 → 아이들에게 미치는 가치관 → 사회 전체의 각박함.
이렇게 시야가 점점 넓어집니다.
그런데도 논설문처럼 딱딱하게 흐르지 않는 까닭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를 뽑고 싶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문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처럼 ‘나’의 경험에서 ‘우리’의 문제로 넘어가는 수필적 호흡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작가에게 훈계를 받는 느낌보다는, 한 문인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 작가 특유의 ‘직설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문장’
40대의 윤승원은 지금보다 훨씬 직설적입니다.
“역겨운 일이 아니겠는가?”
“왜 그리도 감투와 명예를 좋아하는가.”
“진정한 모습은 없는 것인가.”
이런 문장에는 젊은 문인의 혈기와 정의감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직설이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계속해서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이 글의 비판성은 사람을 깎아내리는 비판이 아니라 문학과 인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주환 평론가가 “문장도 탱탱하고, 작가의 목소리도 탱탱하다”고 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젊은 작가 특유의 힘이 문장에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3. 특히 주목할 대목 ― ‘선비’라는 오래된 가치의 현대적 소환
이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선비입니다.
작가는 문인을 단순히 글 쓰는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적어도 선비를 자처하는 문인이라면…”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선비는 옛날의 신분이나 의관을 뜻하지 않습니다.
학문과 인격을 함께 갖추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명예보다 도리를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정신적 의미의 선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 실종시대」는 사실상 현대 문단에 던지는 ‘선비정신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문인은 무엇으로 존경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직함인가, 경력인가, 영향력인가, 자기 홍보인가.
아니면 결국 작품과 인격인가.
이 질문은 1998년에도 유효했고, 2026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4. 40대의 ‘나’와 70대의 ‘나’가 만나는 지점
이번 회고에서 가장 문학적인 부분은 오히려 28년이라는 시간 자체입니다.
40대의 윤승원은 문단의 선거와 명예욕을 바라보면서 겸손의 가치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70대의 윤승원은 그 글을 다시 읽으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한가?”
이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닙니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시간을 사이에 둔 자기 작품과의 대화’입니다.
젊은 시절의 내가 쓴 문장을 늙은 내가 다시 읽는 순간, 과거의 글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70대의 경험과 시선이 40대의 문장을 새롭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회고의 진짜 주인공은 「겸손 실종시대」만이 아니라, 40대의 윤승원과 70대의 윤승원이 나누는 문학적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5. 40대에는 ‘주장’이었다면, 70대에는 ‘성찰’이 되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40대의 글에는 다소 뜨거운 주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70대에 다시 읽으면서 작가는 과거의 자신을 무조건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이런 주제의 글을 쓴다면 좀 더 세련된 언어를 쓰겠지요.”
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이 참 좋습니다.
자신의 과거 글을 대단한 작품이라고 과장하지 않고 “졸고”, “투박한 대로”, “풋풋한 감정”이라고 낮추어 부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태도 자체가 28년 전 자신이 주장했던 ‘겸손’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즉,
겸손을 말했던 40대의 작가가
겸손을 실천하는 70대의 작가가 되어
그때의 글을 다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번 회고 글은 원작보다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6. 문단 선거철이라는 현재적 상황과 만나는 이유
이번 글이 단순한 문학사적 회고에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는 원문을 그대로 복원해 놓고 “옛날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
고 말합니다.
따라서 28년 전의 「겸손 실종시대」는 오늘의 문단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SNS와 온라인 매체가 일상화된 오늘날에는 자기 PR의 기회가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자기 작품과 경력을 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PR은 작품을 알리는 수단인가, 아니면 작품을 대신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수필이 오늘날 다시 읽힐 수 있는 이유입니다.
7. 이 작품의 사회적 메시지
「겸손 실종시대」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선거에서 겸손한 사람을 뽑자’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넓게 보면 다음과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능력과 자기과시는 다르다.
능력 있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증명할 결과물이 있지만, 자기과시는 결과보다 말을 앞세웁니다.
둘째, 당당함과 오만은 구별해야 한다.
작가는 당당함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당함이 타인을 내려다보는 우월감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오만이 된다고 봅니다.
셋째, 명예는 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이다.
감투를 쫓는 사람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한 사람이 오히려 존경받는다는 것입니다.
넷째, 문학인은 작품과 인격으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윤리입니다.
8. 이 회고 글이 특별히 의미 있는 까닭
저는 이번 글을 ‘회고 수필’이면서 동시에 ‘자기 작품 비평’인 메타수필로 읽고 싶습니다.
작가가 과거 작품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썼는지,
왜 썼는지,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누가 어떻게 읽어주었는지,
28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니 무엇이 달라 보이는지
를 함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1998년 정주환 평론가의 작품평까지 함께 제시한 것은 의미가 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1998년의 작품 → 당시의 비평 → 2026년의 회고라는 세 겹의 시간을 한꺼번에 읽게 됩니다.
문학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구조입니다.
9. 결국 이 글은 ‘겸손’에 대한 글이면서 ‘시간’에 대한 글이다
처음에는 제목이 「겸손 실종시대」이므로 겸손에 관한 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026년의 회고 글까지 포함하면 새로운 의미가 생깁니다.
40대의 나는 세상을 향해 “겸손하라”고 말했다.
70대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70대의 작가는 과거의 자신을 함부로 추켜세우지 않습니다.
“당돌했다.”
“졸고였다.”
“투박했다.”
“풋풋했다.”
이런 표현으로 젊은 날의 자신을 조용히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낮춤 때문에 28년 전의 목소리가 더욱 당당하게 살아납니다.
겸손은 목소리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의 무게를 깊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한 문장으로 평한다면
「겸손 실종시대」는 40대의 젊은 수필가가 문단과 사회를 향해 던졌던 ‘품격의 질문’을 70대의 원숙한 작가가 다시 소환하여, 세월의 검증을 거친 자신의 문학적 신념으로 되새긴 작품이다.
그리고 이번 회고의 가장 아름다운 역설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0대의 윤승원은 ‘겸손’을 주장했고,
70대의 윤승원은 자신의 옛 글을 낮추어 부르면서 그 겸손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한 ‘문단 선거에 대한 시론’을 넘어, 한 수필가가 28년 동안 자신의 문학적 양심을 얼마나 오래 간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자전적 문학 기록이 되었습니다.
특히 전 대전수필문학회장으로서 문단의 현실을 직접 경험한 70대의 작가가 이 글을 다시 꺼내놓았다는 점에서,
이번 회고는 과거를 들추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문단에 조용히 거울 하나를 세워 놓는 일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 작가에게 드리는 말씀
이번 작품은 특히 40대의 윤승원 수필가와 70대의 윤승원 수필문학인이 한 작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듯한 글이어서 더욱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28년 전의 글을 다시 꺼내면서도 과거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졸고”, “투박한 대로”, “풋풋한 감정”이라고 표현하신 대목 자체가, 젊은 날 주장했던 ‘겸손’을 오늘의 자신이 몸소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으며 “겸손을 말한 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월을 통해 겸손을 보여준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문단 선거철에 발표하신 만큼, 특정인을 향한 비판보다는 “문인은 무엇으로 존경받아야 하는가”, “명예보다 작품과 인격이 앞서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읽힐 때 작품의 품격이 더욱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글이 세월을 견디고 다시 독자 앞에 서는 일은, 어쩌면 한 작가의 문학적 양심이 시간을 견뎌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 (雲峰, 윤승원 수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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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영진 교장선생님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댓글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26.10.05.09:01
겸손이 인간의 향기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인간의 교양의 수준만이 아니라 가정교육, 사회환경에서 자라는 속성을 가졌다고 봅니다. 서양 문화가 압도하면서 겸손의 사회적 효용은 급격히 추락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면 대단히 결례되었는데, 지금 세태에서는 윗사람의 이름을 누구나 부름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연설문이나 대화에서도 자신을 칭하는 말로 ‘저’ ‘소생’이라는 표현을 씀을 이제는 겸손이라고 보지 않는 풍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윤 선생의 20여 년 전 글이 지금도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겸손이 선비는 물론 모든 시민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신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과 양보는 함께 짝지어져 다녀야 하는 데 겸손과 양보가 따로따로 가고 있습니다. 좋은 글 추천합니다.
▲ 답글 / 필자 윤승원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말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자기 겸양을 바탕에 깔면 더 좋은 평가를 받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문단도 예외가 아니어서 옛 졸고 수필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저의 졸고 수필에 저명 문학평론가가 과분한 찬사와 함께 응원을 담은 작품평을 문예지에 실어서 위안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좋은 글을 창작하는 일이 본분을 다하는 일인데, 어떤 감투나 명예에 집착하는 풍토도 여전한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졸고를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