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 우리 말 중에 하기 힘든 말들이 있죠?
예를 들어 ‘뜰의 콩깍지는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
이 말을 쉽게 하기가 되게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말도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면, 또 연습한다면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서두르면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이 새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 있습니다.
그 어려운 말은 뭐냐? ‘예, 아니요.’
예나 아니요 가 발음하기 어려워서 어려운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예 또는 아니오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대한 말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예라고 하면서 아닌 것처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약속했으나 나중에 더 좋은 조건이 생겨 먼저 약속을 취소할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예, 아니요’를 아주 흔히 아무런 어려움 없이 난발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신의가 없는 사람’이다,
심하게는 ‘사기를 치는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약속을 하고 계약을 하고 살아갑니다.
부모님과의 약속도 있고, 부부끼리의 약속도 있고, 형제 사이에 약속도 있고, 친구 사이의 약속도 있고,
또는 동료 사이에도 약속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요.
부모님과의 약속을 저버릴 때 불효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의를 잃어버리게 되면 의리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약속이든지 손가락질당하지 않으려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들,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약속, 더 큰 계약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약속보다 훨씬 더 큰 그 약속은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인간과의 약속은 혈연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인정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돈이나 이익 관계 때문에 맺어진 약속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우리들의 영생과 직결되는 약속들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나와 하느님과의 약속은 나의 생명을 두고 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영원한 삶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 약속을 배반할 때 바로 죽음이 옵니다.
이 약속 언제 하셨습니까? 세례 성사 때 했습니다.
사제들은 서품 때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성사 때 했던 약속, 사제 서품 때 했던 약속, 종신 서원할 때 했던 약속을 우리는 사실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세례 때 ‘예’하고 대답한 것에 아무 거리낌 없이 ‘아니요’라는 행동을 할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철학관을 들락거리고, 무당한테 가서 점을 보고.
세례 때 우리 말로는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예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입으로는 분명히 ‘예’라고 했는데 살아가면서 행동은 ‘예’가 아니라 ‘아니요’입니다.
인간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거짓말쟁이, 사기꾼,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 한다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오늘 복음 읽은 거 기억나시죠?
아들 둘을 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큰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말은 했지만,
나중에 찜찜해서 그런지 일하러 갑니다.
둘째 아들한테 가라고 했더니 ‘가겠습니다.’하고 아예 안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가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너의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지키며 죄를 끊고 악의 유혹을 끊어라.’
이 말씀에 우리는 수없이 ‘예’라고 대답합니다.
고백소 안에서도 ‘예’라고 대답합니다. ‘네, 죄에 안 떨어지겠습니다.’
사제들의 강론을 들을 때마다도 ‘예’라고 대답합니다.
피정 가서도‘예’라고 대답하고, 성체를 영하면서도 ‘예’라고 대답합니다.
‘예’하고 대답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첫째 아들처럼 ‘아니요’ 하고 대답한 다음에 실행하는 자가 훨씬 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뭐겠습니까?
‘예’하고 대답한 다음에 그 대답에 충실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킬 때, 우리는 영원한 삶과 생명을 분명히 갖게 될 겁니다.
우리들이 신앙을 가질 때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처럼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신앙을 갖지는 분명히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유혹이 일어나더라도 깊이 반성하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과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목숨 바쳐서 지켜야 할 것은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저는 그 옛날 아버지를 살려주신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학교를 들어갔고, 사제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과의 약속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나와 했던 그 약속을 얼마나 성실히 지키는지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이제껏 살면서 하느님과 했던 약속 부도낸 적은 없었던가, 헛된 약속을 한 적은 없었던가,
이번만 살려주시면 뭐 뭐 하겠습니다 하고 어긴 적은 없었는가 생각해봅시다.
인간이라는 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고통 중에 살 때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난 다음에 마음이 다릅니다.
그냥 입으로만 립서비스 할 때가 있죠.
‘하느님 땡큐’ 그것이 다는 아닐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은 분명히 다 허점이 있습니다.
가장 올바른 아들이 되려면 입으로 ‘예’하고 행동도 ‘예’하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겁니다.
‘아니요’ 했다가 불편하니, 찜찜하니 일하러 나가는 것도 ‘예’하고 안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낫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명령하고 지시할 때 계산하지 말고 앞뒤 가리지 말고, ‘네’ 할 때
그 ‘네’라고 하는 순명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돌아오고, 자식에게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네’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한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3년 연중 제26주일 (10/0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