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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의 장(章)
박 완 서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동네였다. 어디선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잘 친다든가 못 친다든가 하는 기교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은은한 채 다만 그 하염없음으로 둘레의 고요와 사람의 심금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고요 때문인지 비탈길 때문인지 숨이 차고 목이 탔다. 그 동네는 해마다 그랬다. 부자나 명사들이란 즈이 동네선 늘 이렇게 숨죽이고 사는 것일까? 나는 그게 해마다 궁금했지만, 그결 확인하려고 정초 아닌 때 일부러 그 동네에 와본 적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할 일 없는 몸이 아니었다.
지교수 댁 대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육중한 철문 옆에 달린
작은 출입문도 꼼짝을 안 했다. 해마다 정월 초이튿날이면 활짝 열려 있었고, 나는 초이튿날 아닌 날에 거기 가본 적이 없으므로 그 철문이 그렇게 배타적인 위엄에 넘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나는 그 낯설음에 가볍게 진저리를 치면서 거기 또 와 있다는 게 일껏 떨친 줄 알았던 수치스러운 버릇을 또 저지르고 난 것처럼 낭패스러웠다. 그냥 돌아가자니 안에서 누가 내 꼴을 보고 있을 것 같고, 초인종을 누르자니 용기가 모자라 당최 중심이 안 잡히는 마음으로 두리번대가다 문득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문패가 눈에 띄었다. ‘지굉묵’ ‘김복녀’, 그 두 개의 나무로 된 한글 문패는 내가 지교수 댁을 출입하기 시작한 십여 년 전에도 이미 고색창연해 보일 만큼 오래된 거였으니까 요새 흔히 그렇게들 하는 유행하곤 상관없는 거였다. 그래도 보는 사람마다 참 의좋은 부부, 엄처시하, 평등한 부부, 바람직한 부부 등 그 안에 사는 부부에 대한 신식 해설을 붙이고 싶어했다. 나는 좀 달랐다. 지굉묵이란 이름이 혀도 잘 안 돌아갈 뿐 아니라 한자로도 얼핏 감이 안 잡히기 때문인지 우선 김복녀란 이름을 한자로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절로 웃음이 났다. 지금도 ‘복 복(福)자, 계집 녀(女)자’ 란 소박하고 만만한 이름은 나의 변변치 못한 망설임, 단순치 못한 속셈, 불투명하고 지사스러운 이해타산을 너그럽게 다독거리면서 다만 세배를 왔을 뿐이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 세배를 왔을 뿐이야, 딴 저의 같은 건 없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김에 얼른 초인종을 눌렀다. 뉘시우? 사모님, 저예요, 조숙희예요. 세배 왔어요. 문기둥에 달린 작은 창살을 통한 이런 문답 끝에 출입문이 열렸다. 현관까지의 오솔길을 빼고는 넓은 마당에 작년 섣달 그믐께 내린 눈이 고스란했다. 현관문을 손수 열어준 복녀 여사는 그 나이에도 팽팽한 볼에 건강한 홍조가 남아 있는 게 여전했다.
“어머, 사모님 더 젊어지셨어요.”
주는 데 힘 안 들고 받아서 즐거운 그 인사말을 올해도 또 써 먹을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다음은 복녀 여사가, 뭐얼…… 하면서 살짝 부끄러움을 탈 차롄데 뜻밖에도, 고마워요, 하면서 두 팔을 크게 벌려 나를 얼싸안고 등을 토닥거리는 것이었다. 고소한 양념 냄새 대신 감미로운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도 예년과 달랐다. 바지저고리 대신 대추색 비단가운을 입은 지교수는 소파에서 흰 털실뭉치 같은 강아지를 희롱하고 있었다. 내가 세배절을 올리는 동안도 그놈은 지교수의 무릎에서 떠나지 않고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함부로 눈을 가린 곱슬곱슬한 털 사이로 노려보는 눈은 섬뜩하도록 영롱하고도 교만했다.
“올해는 음력 과세를 하시나보죠? 몰랐어요, 용서하세요.”
세배를 하고 나서 지교수 맞은편 소파에 앉긴 했지만 예년과 다른 호젓한 분위기가 암만 해도 마음에 걸려 나는 이렇게 변명 겸 떠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력설이 공휴일이 되고 나서 음력으로 차례 지내고 세배 손님 받는 집이 부쩍 늘어났다고 하는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그결 미리 알하보지 않고 불쑥 세배부터 온 게 어쩌면 큰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불안했다.
“아닐세, 정년퇴직한 김에 자식들네를 두루 둘러보느라 작년 설엔 우리가 여기 없었잖나. 한 해 거르는 사이에 세배꾼의 맥이 이렇게 시원섭섭히 뚝 끊어져버렸다네, 껄껄…….”
지교수의 웃음소리는 플라스틱 바가지를 두드리는 소리처럼 시끄럽기만 하고 통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아서 시원한 쪽인지 섭섭한 쪽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물을 대할 때 그게 싫다든가 좋다든가, 악하다든가 선하다든가, 밉다든가 예쁘다든가 하는 양자 중 택일하기가 곤란할 때 괜히 주눅이 드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엔 자신의 이런 단세포적인 감각에 대한 느닷없는 싫증까지 겹쳐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숙희씨, 마침 잘 왔어요. 지금 선생님하고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큰 싸움 될 뻔했지 뭐유.”
들으나마나 낮간지러운 말장난일 게 뻔했다. 남편 흉보는 척 하면서 추켜세우고 대판 싸웠다는 게 깨가 쏟아지는 금슬 자랑인 게 복녀 여사의 특기이자 미덕이었다. 그 어마어마하게 배타적인 철문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게 겨우 개도 안 먹는다는 느글느글한 사랑싸움의 찌꺼기라는 게 나의 입장을 더욱 초라하게 했다. 그래도 어느 틈에 예전 가락이 되살아나 나는 시들시들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머, 그게 정말이세요' 교수님 이 사모님하고 싸우셨다면 아무도 안 믿을걸요. 저만 아는, 그야말로 특종이에요. 왜 싸우셨어요?”
“나는 글쎄, 이번 설에 세배 손님 발길이 뚝 끊어진 게 선생님의 정년퇴직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부득부득 우리가 일 년간 외유한 것하고 관계가 있다시는 거야. 숙희씨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마치 진작부터 내 속에 잠복해 있던 의문을 그들에게 들킨 것처럼 당황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그럴 염려는 전혀 없어 보였다. 지교수도 복녀 여사님도 남을 넘겨짚거나 떠볼 만큼 음흉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럴 만한 남에 대한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하마터면 큰 싸움 될 뻔했다는 문제의 쟁점에 심각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제기한 의문은 염량세태와 관계있는 것이어서 한 번쯤 비분강개할 만도 하고, 제아무리 달관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초연하게 인생무상을 읊조릴 만도 하건만 그들의 분위기는 그런 것하곤 얼토당토않았다. 마치 최신의 식인종 시리즈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재미가 자글자글 있어 보였고, 약간 얼빠져 보였다. 나는 잠시지만 정답을 알아맞히려고 긴장했던 게 억울해서 아까부터 발밑에 굴러다니는 조그만 고무공을 집어서 지교수 무릎에 앉아 있는 강아지 얼굴을 겨냥하고 던졌다. 공이 미처 얼굴을 때리기 전에 그놈이 먼저 날렵하게 뛰어오르면서 두 앞발로 공을 받았다. “아이고, 똑똑한 내 새끼.” 복녀 여사가 혀 짧은 교성을 지르면서 지교수 무릎으로 달려들어 강아지를 안았고, 지교수도 늙은 곡예사처럼 확실한 자신감 넘치는 웃음으로 나에게 답례를 보내고 나서 강아지 볼을 비볐다. 자연히 노부부와 강아지는 한 덩어리가 됐다. 작은 공은 또 한번의 도전을 촉구하듯이 데굴데귤 내 발밑으로 굴러오고, 천진난만하고도 경박한 노부부의 웃음 사이로 강아지의 영특한 눈이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밑도끝도없이 아아, 바보짓이다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내가 소원한 것은 그런 바보짓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 확실하게 내 몫으로 떠맡은 게 바보짓뿐임을 어이하랴.
노부부는 강아지 쪽에서 싫증을 내고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낼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강아지가 방금 부린 재롱을 즐거워하고 감격하고 자랑해 마지않았다. 노부부가 번갈아 흉내까지 내가며 자랑하는 바에 의하면, 그 강아지는 그 밖에도 열몇 가지의 재롱을 부릴 줄 아는데 목하 임신중이라 행여 과로를 시킬세라 재릉을 부릴 기회를 안 줬다는 것이었다. 내 덕에 그 강아지가 — 참, 임신중이라니 아무리 쪼끄매도 개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 — 그 동안 재주를 안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날렵함까지 여전하다는 걸 보여준 셈이었다.
“이름이 뭐냐?”
나는 개에게 직접 물었다. 네가 아무리 재주가 많기로소니 말이야 못 하겠지 하는 유치한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개가 다 웃을 지경이었다.
“퍼얼.”
“진주.”
개 대신 지교수와 복녀 여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퍼얼, 퍼얼, 내 새끼 우리 귀염둥이, 아이고 예쁜 것, 하면서 혀 짧은 소리로 수선을 떨고 나서야 복녀 여사는 조촐한 다과상을 내왔다. 나는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나서 건더기까지 씹으면서 염치없는 소리를 했다.
“올핸 빈자떡 안 부치셨어요? 작년엔 그 맛을 못 보고 설을 더니 도무지 나이를 헛먹은 것같이 허전하길래 이번 설을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지교수 댁 만두국과 녹두빈자는 제자들 사이에서 그 맛이 신식화되지 않고 진국스럽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만두국은 몰라도 녹두빈자의 맛은 정말 일미여서 나도 그 맛을 못 잊고 몇 번인가 집에서 시도해보았지만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유, 녹두빈자 얘긴 꺼내지도 말아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니까. 해마다 자.그만치 녹두를 두 말은 부쳐야 그 손님을 다 치르게 되어 있는데, 제 맛을 내려면 믹서를 써선 안 된다우. 방앗간에서 갈아와도 단박 맛이 달라지는걸. 꼭 집에서 맷돌로 갈아야 하니 그 수고가 이만저만인 줄 아우. 그때만 해도 황소 같은 식모를 두고 살 땐데도 섣달그믐껜 꼭 파출부를 불러서 맷돌질을 돕게 하건만도 맷돌질을 핑계로 앓아눕기가 일쑤였으니 얼마나 눈치 보이는 일인지 몰라요. 그뿐인 줄 알아요. 맷돌을 하도 심하게 쓰니까 몇 년에 한 번은 맷돌장이를 대서 쪼아주어야 하는데 요새 맷돌장이가 어디 있수? 내가 손수 정으로 맷돌을 쫀 적이 있다면 말 다 했지. 한번 맛본 사람은 입맛을 다시며 먹고 싶어하고 해마다 그 맛을 못 잊어하는 맛을 내기란 사람 공력이 그만큼 드는 법이에요. 선생님의 신조가 제자를 워낙 인간적으루다 대하시는 거니까 나도 그 뜻을 받들려니 숨은 고생이 많았다우. 선생님이 정년퇴직하시자 그 짓 안 해도 될 생각을 하니 어찌나 시원하던지 외국 나갈 땐 맷돌을 아예 마당구석에다 팽개치고 떠났다우. 돌아와보니 글쎄, 중쇠가 삭하서 부러져 있습디다. 중쇠가 부러졌으니 맷돌 구실은 끝난 거지 뭐. 맷돌도 정년퇴직해서 지금은 화분 받침 노릇을 하고 있어요.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을 한결같이 인간적으루다 대한 건 하여튼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처음으로 얻어들은 녹두빈자의 진미의 비결이 신기하긴 해도 지루해서 적당히 흘려버렸지만 ‘인간적으루다’ 만은 고약처럼 끈끈하게 귀청에 엉겨붙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오랜 희망의 줄이 죽자꾸나 매달려 있는 허구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내가 지교수 댁을 출입하기 시작한 것은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한답시고 대학원에 진학하고부터였다. 지교수는 내 석사학위 논문의 지도교수였다. 지금이야 석사학위 가지고 대학 전임 자리는 꿈도 못 꾸지만 그때만 해도 전공에 따라서는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지방대학 전임 자리로 풀리는 수가 드물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참 열심히 공부했었다. 매우도, 탤런트도, 가수도, 호스티스도, 주방장도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가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대학원을, 대학원보다는 석사학위를, 석사학위보다는 직업은 교수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교수 자리보다는 육십오 세 정년퇴직을 더욱 사랑했었다. 남편이 무능하거나 실직 중도 아니건만도 나는 그때 육십오 세까지 안정이 보장된 자리에 걸신이 들려 있었다. 남편은 그때 실직중이기는커녕 마침 중동 붐이 불어닥쳤을 때라 재벌급 건설회사가 스카우트에 눈독을 들일 만큼 유능한 토목기사일 뿐 아니라 자기 관리에도 영악해서 이태에 한 번꼴로 회사와 현장을 바꿔가면서 직위와 급료를 올려받고 있었다. 그의 말짝으로 그는 운이 좋았다. 그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토목과는 비인기학과여서 제3지망으로 써넣은 게 성적이 시원치 않다보니 거기까지 굴러떨어졌고, 재수하기도 싫고, 굴러떨어진 걸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도 뭣해 공부 안 하는 걸로 반항을 일삼느라 남이 사 년 다니는 대학을 육 년이나 다니고 군복무 삼 년하고 나니 국내의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일 때라 취직이 쉽게 됐다. 작지만 자꾸 커가는 토건회사에서 착실하게 현장 경험을 쌓고 나니 뒤미처 중동 붐이 불어닥쳤다. 나는 사통오달 막힌 데 없이 막막한 사막에도 왜 고속도로가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추억과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허리를 무참히 자르고 천 년 묵은 씨족마을을 수장하지 않아도 되는 넓디넓은 땅에서의 토목공사를 생각하면 절로 숨통이 트였다. 또, 국내의 월급쟁이보다 많은 돈을 벌고 그게 외화라는 건 긍지를 가질 만했고 속된 소견으로는 자주 비행기를 탄다는 것도 부러웠다. 어떤 사람은, 그까짓 중동, 하면서 우리가 무조건 동경하는 외국에서 중동은 마땅히 제외시키려 했지만, 내가 동경하는 외국에서의 경험이란 우리보다 발달한 과거나 현재의 문화를 관광하고 배우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한국적인 사고의 틀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로워지는 거였기 때문에, 그 외국이 선진국이라든가 후진국이라든가 온대라든가 열대라든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봄을 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불안했다. 갑자기 불어닥친 좋은 세월은 갑자기 가게 마련이라는 걸 잠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신의 불안을 위로하기 위해 특하면 세계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길 잘했다. 중동지방엔 우리 국토의 몇 배, 몇십 배나 되는 사막이 널려 있었다. 고속이니 발전이니 하는 것은 하면 할수록 갈증이 나는 것이므로 그 넓은 사막에 길을 뚫고 또 뚫어 바둑판처럼 정연한 걸로 만들려면 몇십 년이 걸려도 모자랄 것 같았다. 남편이 오십오 세, 아니 육십오 세가 될 때까지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 안심해도 될 만큼 쪼끄만 우리 땅에 비해 사막은 광활했다. 그러나 붐을 타고 있다는 불안감은 고약할 뿐 아니라 집요해서 떨치면 떨칠수록 내 속 어딘가에 늘어붙어 있었다. 나는 남편이 붐을 타고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시한을 그의 사십오 세 쯤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봄의 주기를 일단 십 년으로 잡은 것도 ‘십 년 가는 세도 없다’ 는 속담에서 암시받은 바도 없지 않았지만, 그 밖의 체력의 한계, 승진의 벽 등 과학적인 계산도 충분히 반영한 결과가 그랬다. 그가 마흔다섯 살이면 큰애가 겨우 고등학교 이학년이다. 둘째는 중3. 그러므로 마흔다섯에 실직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무리 이를 갈아붙이고 항의를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보다는 같은 봄을 타고 있는 기능공의 아내들이 훨씬 더 현명했다. 그들은 춤바람이 나서 그런 불안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파출부라도 나가서 악착같이 생활비를 벌고 남편이 번 외화는 고스란히 저축을 함으로써 실직의 불안과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정면대결을 펴기도 했다. 밥 먹고 이빨 쑤시는 방법도 백 사람이면 백 가지 방법이 나올 만큼 다 다른데, 하물며 자신의 삶을 뿌리째 뒤흔드는 불안과 대결하는 방법이 같을 리는 만무했다. 나는 내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고 생각했고, 그건 나라도 육십오 세 정년의 일자리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위해 남편이 비워준 시간과 부쳐준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지교수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재능에 대해서뿐 아니라 희망에 대해서도 매우 너그러웠고 또 발이 넓어 각계각층에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육심오 세 정년에 대한 나의 희망의 끈을 십 년 아니라 이십 년도 더 붙잡아둘 만한 힘이 지교수에겐 있었다. 여북해야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하다못해 지적 호기심조차 결코 보통 이상이 못 되는 내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박사과정을 밟을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 꿈에서 십 년 안에 깰 수 있었던 것은 지교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마흔다섯 안에 실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동 붐은 내가 예측한 것보다도 미리 퇴조했다. 별안간 본사로 소환된 남편은 일거리도, 자리를 지킬 만한 책상 결상도 주지 않고 월급만 받는 특별한 대우를 석 달쯤 견디다가 스스로 사표를 냈다. 과장 대우를 받고 있다가 과장으로 스카웃당해 간 지 이 년이 채 안 돼서 받은 대접이었다. 실직 후 그는 비참했다. 그가 차마 바로 보기 민망하게 비참해 보인 것은 실직과 어처구니없는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동 근무만 하는 동안 돈은 좀 벌었지만, 국내의 친구와 연줄을 놓쳐버려 자기 회사에 자기 의자가 없었듯이 이 사회에 기댈 데도 부빌 데도 울분을 털어놓을 데도 없이 완전 고립되어 지내야만 했다. 마흔다섯도 안 돼 실직도 억울한데 이 인맥으로 얽힌 사회에서 유력한 연줄은커녕 대포 마시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우정조차 없다는 건 끔찍한 노릇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매달려 있던 끈이 끊어져 허공으로 한없이 추락해가는 상자갑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마흔다섯도 못 돼 실직을 하다니. 이왕 실직을 하려면 좀더 일찍 하든지. 그때 그는 마흔두 살이었다. 내 딴엔 꽤 짜게 그리고 꽤 과학적으로 계산한 게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빗나가자 육십오 세 정년에 대한 나의 집요한 꿈에서도 비로소 부스스 깨어날 수가 있었다. 그 동안 불안하기 때문에 꿈을 꾼 게 아니라 풍요하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있었음인가. 나는 그후 일 년쯤 하던 박사과정을 무심히 쥐고 있던 쓸모없는 물건 버리듯이 포기하고 방송국에서 여성프로 담당의 프로듀서가 된 동창의 연줄로 그 프로의 스크립터 노릇을 하게 됐다. 수입은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낫지만,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육십오 세까지의 안정과는 얼토당토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생존권은 프로듀서의 기분에 달렸고, 하루의 안정을 그의 안색에서 점치며 산다. 그렇다고 그후 당장 지교수 댁에 발길을 끊지는 않았다. 전처럼 자주 드나들진 않았어도 세배는 거르지 않았다. 의리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일 년에 한 번쯤은 향수처럼 그 증이 도졌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세배가 아니라 귀향이었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옛 꿈의 자리를 일 년에 한 번쯤 돌아보고자 했다. 녹두빈자 맛은 해마다 일정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무엇보다도 스승과 학자의 전형 같은 지교수가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스승과 학자의 박제를 남길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학자였다. 아니, 그는 이미 박제가 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모두 그의 생각이나 업적보다도 학자의 모름지기 그래야 될 것 같은 그의 외관에 황홀했으니까.
“우리도 이제 번거로운 건 피하고 오븟하게 편하게 살래요. 선생님도 정년퇴직하셨겠다, 인생은 이제부터라고 기분 좀 낸들 누가 뭐라겠수. 외국 가서 보니까 우린 여직껏 참 너무 쓰잘 데 없는 고생에다 쓰잘 데 없는 신경만 쓰고 살았다는 걸 절감하겠습디다. 숙희씨 보기엔 어때요? 우리 두 내외 이만하면 이상적인 부부죠?”
복녀 여사가 지교수 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포즈를 취했다. 카메라를 갖고 있지 않은 게 유감이었다. 그러나 노부부는 행복한 부부상의 박제가 되어 오래오래 내 의식 속에 눌어붙어 있을 게 뻔했다. 그때 소파 밑에 웅크리고 있던 퍼얼이 깡총 뛰어올라 노부부 사이에서 포즈를 취했다. 아까부터 뭐가 하나 빠진 것 같더라니 바로 그놈이었다. 그놈의 영특함에 나는 새삼스럽게 혀를 내둘렀다. 그놈이 끼어듦으로써 노부부의 행복의 구도는 완벽했고, 그놈은 자신이 끼어들 자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믄요, 사모님. 두 분을 뵙고 있으면 하도 보기가 좋아서 덩달아서 자신이 늙어가는 것도 조금도 서글픈 줄 모르겠다니까요.”
나는 속으로 엣다 모르겠다, 어차피 마지막 아부가 될 텐데, 아껴뒀다 뭐 할 건가 싶어 속에서 보깨는 걸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토악질해내듯이 지껄였다.
“그렇지만 아무나 우리처럼 늙을 수 있는 게 아니라구.”
사모님이 약간 섭섭한 뜻을 비쳤다.
“그러믄요, 아무나 퍼얼 같은 개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내 속셈은 두 분의 행복하고 오븟한 노후를 비꼴 셈이었으나 뜻밖에도 지교수가 무릎을 탁 치며 좋아했다.
“여보, 우리 진주가 새끼 낳거든 조군에게 나누어줍시다. 괜찮지, 여보?”
“우리 퍼얼은 새끼를 한 마리밖에 안 낳을걸요. 똥개나 여러 마리 낳지, 고급 개는 사람처럼 한 마리씩밖에 안 낳는다고 수의사가 그러던걸요.”
사모님은 새끼를 주기가 아까운지 이렇게 말하면서 퍼얼을 품에 꼭 껴안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새끼의 값어치를 올리고 생색을 내려는 것뿐이지 아주 안 주려는 눈치는 아니었다.
“귀하니까 조군에게 주려는 거 아뉴.”
“숙희씨, 오늘 횡재했네.”
드디어 사모님의 동의가 떨어졌다.
“전 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양하겠어요, 선생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스스로도 대견했다. 지교수가 제자들한테 뭘 주고 싶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값나가는 물건이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아니었지만 하찮은 물건도 귀물처럼 가치를 부여해서 주는 특별한 기술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혜택을 받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누가 응접실에 난만히 핀 아프리칸 바이올렛 중 희귀종을 들여다보고 감탄을 할라치면 지교수는 매우 심한 갈등을 나타내다가도 어김없이 주고 싶은 마음으로 기울어 예리한 면도칼로 그중 싱싱한 이파리를 한 장 그지없이 안쓰럽게 도려내어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그가 기르는 난초나 수집한 돌도 그런 방법으로 얻어가질 수 있는 것도 있었다. 홍보용으로 들어온 수첩이나 일기장 같은 걸 나누어줄 때도 귀물 같은 가치를 부여하긴 마찬가지였다. 바이올렛 이파리를 한 장 떼어주면서도 바이올렛의 고향으로부터 종류, 번식법, 시비(施肥), 걸리기 쉬운 질병 등 일장의 해박한 지식이 피력되구 아무쪼록 잘 길러야 한다는 애정 어린 신신당부가 첨부됐다. 수첩을 줄 때는 메모의 중요성이, 일기장을 줄 때는 일기의 중요성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되어 우리 골 속에 늘어붙게 했다. 그 역시 그것을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이 뇌리에서 일 년 내내 떠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단 나누어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해엔 어김없이 그 안부를 물었다; 바이올렛이 며칠 만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잎이 돋아 지금은 어느 만큼 충실하게 자라고 있나를 소상하게 알고 싶어했다. 돌은 어디다 놓았고 어느 만큼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나 알고 싶어했고, 수첩이나 일기장은 기록하는 버릇에 획기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치하를 받고 싶어했다. 그는 자주 제자들의 이름을 헷갈렸고, 제자들이 지금 준비중이거나 이미 학위를 받은 논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 번도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잡다한 것들의 품목을 헷갈린 일이 없고 한 번도 그 뒷조사를 망각하거나 허술히 하지 않았다. 지교수한테서 무엇을 얻어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감히 그것을 거절할 생각을 못 했다. 안 쓴 일기를 쓴 것처럼 꾸며댈지언정 시들어버린 이파리가 큰 포기로 번식하고 꽃 핀 것처럼 거짓부렁을 시킬지언정 애시당초 싫다고는 못 했다. 총애의 표시 같아서였다.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구? 숙희씨,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복녀 여사는 아직도 나의 거절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난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라는 듯이 분개하고 있었다.
“왜요, 제가 뵐 어쨌게요'”
“숙희씨, 그런 줄 몰랐더니 개장국도 먹을 것 같은 얼굴이야. 야만스럽게.”
“사모님도 참, 사람이 어떻게 싫어하는 건 모조리 먹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언제?”
“방급 그러셨잖아요?”
“이건 뒤죽박죽이야, 정초부터 난 여간 불쾌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전 다만 좋아하지 않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뿐인데.”
“아, 그만들 해둬요. 논쟁도 원, 논쟁 같은 걸 해야지. 여보, 나 좀 쉬고 싶으니 조용히 하도록 해요.”
지교수도 불쾌한 빛을 역력히 나타내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퍼얼을 안고 눈을 지그시 감더니 소파에 기댔다. 나는 하직할 시간이 됐다는 걸 깨닫고 일어섰다. 쫓겨나는 기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게 그닥 불쾌하진 않았다.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생급스럽게 들릴 만큼 들뜬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바쁠 텐데 어여 가봐요.”
지교수가 눈을 번쩍 뜨고 반색을 한다. 노부부는 애매한 얼굴로 현관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노부부 사이에서 퍼얼의 섬뜩하도록 맑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놈을 향해 애매하게 웃었다. 애매하지 않은 건 사제지간을 결정적으로 이간질한 그 고급 개의 눈및밖에 없었다. 하늘은 덜 간 먹물로 개칠을 해놓은 것처럼 암울했다. 나는 퍼얼 새끼를 거절한 일은 참 잘한 거라고 애써 개운해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퍼얼 새끼를 지우는 건 간단했지만 또하나의 개가 아직도 내 속에 늘어붙어있었다.
처음으로 집 장만을 했을 때도 남편은 중동에 나가 있었다. 큰집은 아니었지만 아이들만 데리고 하는 이사가 안돼 보였던지 친정 어머니가 집 지키는 개 한 마리를 어디서 얻어다주었다. 며칠 후 동생이 개집까지 지어왔다. 까만 발바리였는데 몸집은 작았지만 영악해서 낯선 사람이 얼씬만 해도 악착같이 짖어댔다. 그 개는 제 구실을 열심히 하면서 한편 주인 식구의 총애를 바라마지않는 듯 식구들만 보면 꼬리를 맹렬히 흔들면서 흥얼댔다. 그러나 아이들도 나를 닮아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딸애는 개를 무서워해서 곁에 오기만 해도 비명을 질렀다. 나는 개에 비해 너무 크고 튼튼한 개집에다 큰 못을 박고 거기다가 쇠사슬로 개를 묶어놓고 길렀다. 아들애가 아침저녁 마지못해 오줌똥을 뉘기 위해 끌러주는 것 외엔 줄창 묶여 있어야만 했다. 발정을 해도 모르는 척 했다. 암캐였지만 새끼 같은 것은 바라지 않았다. 개는 외부 사람한테는 더욱 사나워지고 식구한테는 더이상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섭섭하다 못해 냉담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몸집에 비해 사납게 짖어대는 걸 보고 사람들은 묶어 기르면 사나워진다고 했지만 풀어 기를 마음은 없었다. 우리는 주인에겐 치근덕거리지 않고 외부인에겐 사나운 개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집 지키기였을 뿐 애완은 아니었다. 한갓 집짐승으로부터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걸 취했으면 됐지, 짐승이 인간으로부터 취하고 싶어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걸 헤아릴 만한 마음의 여분이 나에겐 없었다.
그 무렵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어 허구한 날 시청자를 울리고 있었다. 내가 6·25를 체험한 건 여덟 살 때였다. 몇 개의 참상의 기억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건 마치 문자를 해독하기 전에 펄떡펄떡 넘겨본 그림책 속의 삽화에 지나지 않았다. 곱고 예쁜 삽화보다는 끔찍하고 무서워서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림 일 뿐이었다. 해방 전에 결혼해서 죽 서울에서 살았지만 친정이 북쪽인 어머니는 자주 6·25 때 얘기를 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내 기억 속의 무서운 그림에다 슬픈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그 무서움을 한층 강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감정적인 넋두리에 냉담했다. 어머니 세대는 체험 했지만 우리 세대는 생각하고 분석해야 하므로 감정에 휘말려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만남의 드라마는 분석이나 이념을 떠나서 곧장 누선을 자극했다. 남도 질질 짜기 잘하는 사람은 질색이었는데 자신이 질질 짜는 걸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비극을 보지 않으면 눈물이 날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안 봐도 좀이 쑤셨다.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편안해지려면 마치 제 두 눈만 가리고 온 세상을 무화(無化)시킨 걸로 억지로 믿을 때처럼 창피해지곤 했다. 보고도 울지 않을 수 있는 계기는 전혀 예상 밖의 사건으로 부터 비롯됐다. 어느 날 친정 어머니가 그의 막내동생과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됐다. 어머니가 결혼할 당시 겨우 다섯 살이었다는 막내동생은 어머니가 아무도 모르게 신청한 여러 명의 친정 식구 중 남으로 내려와 살고 있는 단 하나의 동기간이었다. 나에겐 외삼촌이 생긴 것이었다. 맥몇번째로 만남을 이룩한 어머니와 외삼촌은 그 전의 백여 명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원색적인 통곡을 터뜨렸고 화면은 신통히도 닮은 남매의 얼굴을 사정없이 클로즈업시켰다. 그때 나는 눈물 대신 열화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 마음대로 내 어머니의 오장육부를 난도질하고 피눈물을 쥐어짜고 그러고도 모자라 가장 비통한 얼굴을 구경거리로 삼느냐 말이다. 나 역시 좀 전까지 남의 비극을 구경거리로 삼았건만 내 어머니의 실룩거리는 노안이 몇 백몇천만의 구경 거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되자 분노와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어머니와 삼촌은 격정을 가라앉히자 앞서 만난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예의지국의 민족다운 인사성을 빠뜨리지 않았다. 방송국에 감사하고 온 국민에게 감사하고 나서 또 한바탕 감읍(感泣)을 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바로 그 감읍이었다. 누가 우릴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누가 우릴 구경거리로 삼을 수 있어? 하고 왜 아무도 외치지않나. 생사람을 토막치듯이 양단해놓은 자리에서 아직 유혈이 낭자함을 몸으로 증거하면서 왜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감사는 무슨 놈의 감산가. 그게 속상해지고부터 그후에도 만남은 계속 됐지만 눈물 없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맏딸로서 새로운 친척이 된 외삼촌을 집으로 초대하는 게 불가피해졌을 때는 오히려 눈물 마른 게 큰 걱정이 되고 말았다. 외삼촌이 엉엉 우는데 나만 눈물이 안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될수록 눈물을 한 방울도 못 흘릴 것 같은 예감이 확실해졌다. 어머니한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외삼촌은 남한에서 공부는 못 했지만 장사로 돈을 꽤 벌어서 결혼을 늦게 해서 아이들이 아직 어린 것 말고는 남부러울 게 없이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외삼촌이 잘산다는 소리를 좀 듣기 싫을 만큼 여러 번 반복했다. 못살아서 신세 지려고 하는 것보다 좋은 일이지만, 너무 좋아하니까 못살아서 신세 지려는 동기간은 안 만나느니만 못할지도 모른다는 객쩍은 비약을 유발하기 십상이었다.
아이들을 집에 있게 하고 음식을 좀 차리고 외삼촌네 식구를 초대한 날이었다. 외삼촌 내외와 네 아이를 다 초대했지만 아이들 중 한둘쯤은 빠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는데, 처제랑 처조카까지 같이 온다니 여남은 명은 더 될 것 같으니까, 음식을 넉넉히 차리라고 어머니가 미리 귀띔을 했다.
“뭐 그런 몰상식 한 사람들이 다 있어요?”
나는 발칵 화부터 냈다.
“얘야, 이왕 초대했으니 네가 참아야지 어떡허니? 몰상식한 게 어디 그 사람 죄냐? 혼자 살아보려고 학교 못 다니고 어른이 없으니 가정교육을 못 받았으니 몰상식해질 수밖에. 그래도 가문 있는 핏줄은 못 속이겠더라. 시장바닥에서 뼈가 굵은 깐으론 아래위턱 알아보고 말씨도 점잖더라. 제딴엔 친척 생긴 게 얼마나 좋고 대견하면 처가 식구를 다 끌고 오겠니. 여적지 처가 친척밖엔 없이 살았다니 자랑을 시키고 싶은 게야.”
어머니는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게 변명을 했고 나도 몰상식하다는 편견을 스스로 뉘우쳤다. 드디어 왁자지껄 그들이 들이닥쳤다. 친정에서나 시집에서나 비슷하게 가늘게 먹고 가늘게 싸고, 체면을 존중하고 말소리가 조곤조곤한 사람들만 봐온 내 눈에 그들은 첫눈에 낯설었다. 사람도 여럿이지만 하도 문 밖에서부터 크게 떠들길래 싸우는 줄 알았더니 웃는 얼굴이었고, 아이 어른이 한꼇 차려입은 옷도 너무 울긋불긋 요란해서 면구스러웠다. 이런 것이 소위 문화의 차이라는 결까. 나는 핏줄의 동질성을 확인하기 전에 문화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화해로운 만남을 이룩할 것인가가 도무지 난감해서 잠시 우두망찰을 하고 있는데 우리 개가 들입다 짖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워낙 악바리같이 짖는 개였지만 이번엔 짖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길길이 뛰어올랐다. 개가 뛰는 대로 사슬을 매단 개집까지 덜컹덜컹 널을 뛰었다. 워낙 개에 비해 튼튼하고 큰 개집이라 그렇게 개한테 휘둘리는 걸 보긴 처음이었다. 개의 난동이 내 힘으로 다스리기엔 벅차다는 걸 판단한 나는 다급한 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개는 한층 난폭하게 날뛰며 짖어댔고 그 큰 개집이 작은 방울처럼 경망스립게 춤을 추었다. 명랑하고 활기차고 겁 없이 보이는 외삼촌네 식구들도 개의 심상치 않은 난동에는 질린 듯 말없이 한데 똘똘 뭉쳐 섰다. 그때 개집에 달린 못이 빠지면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개는 비호같이 일행 중 맨 앞에 선 소년한테로 달려들었다. 소년의 자지러진 비명이 들리고, 아들이 뛰어나오고, 나는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아들과 함께 개목에 달린 쇠사슬을 죽을 기를 쓰고 끌어당겼다. 가까스로 개를 소년으로부터 떼어내고 나서도 나는 소년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내 아들의 등에 얼굴을 묻고 와들와들 공포에 떨었다. 소년이 처참하게 찢겼을 것만 같아서였다. 다행히 소년은 넓적다리 한 군데만 물렸는데, 청바지 위로 물려서 살에 이빨 자국만 나 있을 뿐 피는 나지 않았다. 소년은 외삼촌의 처조카였다. 소년보다 그의 엄마가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시골서 공수병으로 죽은 사람을 본 얘기를, 울면서도 여실히 흉내까지 내 소년이 겁에 질려 울게 만들었다. 나는 소년을 업고 근처 병원으로 달음질치고 애엄마는 울음과 넋두리를 멈추지 않고 뒤따라왔다. 나이 지긋한 외과의사는 넓적다리의 이빨 자국과 청바지의 상태를 면밀히 들여다보더니 상처를 소독만 해주고 가라고 했다.
“아니, 선생님 이대로 가라니요. 시상에 이 자식이 어떤 자식이라고 치료를 그렇게 엉터리로 해준대요. 이 자식이 공수병에 걸리면 이 자식만 죽는 게 아니라 여러 목숨 죽습니다요. 그때 가선 누가 책임질 거냐 이 말예요. 어여 예방주사를 놔주세요. 천만금이 들더라도 예방주사를 맞아야 안심이 될 거 아네요. 젠장,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그 여자는 마치 의사와 내가 공모를 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예방주사를 안 놓아주는 양 눈을 부라리며 생떼를 썼다.
“이것 보세요, 예방주사를 꼭 놓아야 할 환자라면 왜 안 놓아드리겠어요. 청바지 위로 물렸는데도 청바지는 이렇게 감쪽같으니까, 개 이빨이 직접 살을 문 건 아니고 단지 자국만 난 거예요. 집에서 기르는 개라니까 공수병에 감염됐을 리는 없지만 만약 보균을 하고 있대도 타액을 통해 전염되는 거니까 절대로 안전하다고 보는데,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개를 일 주일쯤 매놓고 관찰을 하세요. 만약 보균한 개면 일 주일 내에 발병을 할 테고, 그때 가서 예방주사를 맞아도 늦지가 않습니다.”
의사는 불쾌한 빛을 용케 누르고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그래도 애엄마는 막무가내였다.
“선생님, 명색이 의사가 이렇게 가해자 편만 들어도 되는 겁니까? 우린 피해자란 말예요. 피해자가 주사를 놓아달라면 놓아줄 것이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예방주사란 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놓는 거지, 어느 누가 꼭 걸릴 줄 얄고 놓는답니까.”
“못 놓겠습니다. 놓으라면 놓고 말라면 말아도 될 주사가 아니란 말예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놓아야 되고 체질에 따라선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단 말예요. 어디다 놓는 줄이나 알고 놓아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척추에다 맞아야 돼요. 맞은 애가 당할 고통도 생각해야죠.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주사라면, 안 맞을 수 있으면 안 맞도록 하는 게 내 권한이자 의무입니다.”
“어머, 의사선생님도 권리는 좋아하시네.”
그러면서도 부득부득 우기진 않았다. 그리고 애가 놀랐을 테니 간 튼튼해질 주사나 한 대 놓아달라고 했다. 의사는 놀랐다고 간이 약해지는 건 아니라고 한마디 하고는 더이상 상대를 안 했다. 차라리 영양주사라도 한 대 놓아주고 다리엔 붕대도 칭칭 감아주고 나한테 비싼 치료비를 청구했더라면 그 여자의 직성이 풀렸으련만, 그 의사는 어떻게 된 게 상처를 닦아준 비용도 그만 두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우리를 내몰았다.
“참, 그 개를 일 주일쯤 매놓고 관찰하는 건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나한테 한번 더 그 당부만 했다. 우리가 그 난리를 치고 병원에 간 사이에 아들이 개를 얼마나 혼을 냈는지, 개는 축 늘어져서 짖지도 못했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얌전해진 개를 유심히 들여다본 그 여자는 다시 보채기 시작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저 개가 어디 성한 갠가 다들 좀 봐봐요. 개는 미치면 달아난다는데, 저 개도 곧 아까처럼 용을 쓰고 사슬을 끊고 어디로 도망을 쳐버리고 이 집에선 알 게 뭐냐고 시침을 떼버리면, 우린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지. 누구한테 치료비를 청구하냐 말요. 증거물이 감쪽같이 없어져버리면 그만이지. 안 그래요, 언니, 형부?”
그 여자가 이렇게 우리 외삼촌과 외삼촌댁한테 동의를 구했다. 외삼촌과 외삼촌댁도 내 편은 아니었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 일은 있을 법한 일이고말고, 하는 뜻의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나를 바라다봤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 서린 의혹을 헤아릴 길이 없어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의혹을 상승시켜 마침내는 내가 증거를 인멸하고 치료비를 안 물기 위해 미친 개를 일부러 도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도달했다는 걸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읽었다. 아니라고, 우린 절대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살아온 인간들이기에 타인에 대해 그런 의혹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도무지 새로운 개성, 생판 낯선 타인의 정체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에 떨었다. 서로의 의혹이 맞닿거나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전무했다. 당장 개를 때려잡아 푹푹 고아 한 뚝배기에 밥을 말아 먹는다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어머니, 뭐라고 좀 그러세요. 네, 어머니? 제가 뭘 어떡해야 되는지 말씀해보세요.”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들었다. 어머니 역시 돌연 맞닥뜨린 이 새로운 상황에 무력하긴 나보다 더하면 더했다. 어머니는 저들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들로부터 돌연 적대시 당하고 있다는 걸 민감하게 느끼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얘야, 좋은 수가 있다.”
어머니가 가까스로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의 웃음은 은박지를 구긴 것처럼 처참했다.
“이놈의 개를 입원시키자. 도망도 못 가고 관찰도 할 수 있게.”
“흥, 영양주사 한 대 놓아달래도 안 놔주는 놈의 병원에서 개를 입원시켜줄 성 싶어요?”
개에게 물린 소년의 어머니가 눈을 희번덕대며 비꼬았다.
“그야 보통 병원에서 개를 입원시켜줄 리가 없죠. 개병원 가축병원을 찾아가야죠. 가축병원에 데리고 가면 만약 입원을 안 시켜주더라도 개의 건강진단이라도 떼어줄지 몰라요. 그럼 한결 안심이 될 게 아뉴.”
그건 참으로 좋은 생각이었다. 아들이 개줄을 잡고 앞장을 섰다. 그 뒤를 나와 어머니가 따르고 우리 뒤를 소년과 그 여자가, 그 뒤를 외삼촌 내외가, 그 뒤를 네 명의 아이들이 우쫄우쭐 따랐다. 이 기괴한 행렬은 가축병원을 찾아 거리거리 골목을 헤매고 찻길을 건너고 로터리가 있는 큰길까지 나갔다. 가축병원은 보통 병원처럼 동네마다 몇 개씩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을 두 개나 지나치고 나서야 가축병원과 만날 수가 있었다. 가축병원 앞에서 우리 개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슬피 울었다. 개가 짖지 않고 우는 소리를 나는 그때 처음 들었다. 가축병원 안은 조그만 약국만해서 우리 일행이 들어서니까 꽉 찼다. 이십대로 보이는 수의사는 시원찮게 생긴 싸구려 개한테 너무 많은 보호자가 딸린 게 이상한 듯 종잡을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야, 너 호강한다.”
“호강이 다 뭡니까? 그놈이 큰일을 저질렀답니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선생님,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는 게 물린 아이는 물론 양가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될까요?”
젊은 수의사는 고맙게도 개를 일 주일쯤 입원시키고 관찰하는 게 가장 안심스럽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일러줬다. 개의 입원실은 전면이 철망으로 된 진열장같이 생긴 상자였다. 상자는 한쪽벽에 4 ×5로 쌓여 있어서 그것만 해도 이십 실은 되는 셈이었다. 입원실은 삼분의 이쯤이 차 있었다.
“이 많은 개들이 다 사람을 물고 여기 이렇게 입원했나요?”
어머니가 신기한 듯 물었다.
“아니죠. 감기를 앓는 놈, 홍역을 하는 놈, 수술하고 회복기에 있는 놈, 별의별 놈이 다 있죠. 건강한 놈을 팔아달라고 맡긴 것도 있구요.”
“일 주일 후 퇴원시킬 때까지 아무 일이 없으면 건강진단서를 떼주실 수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떼드리구말구요.”
개는 입원실에 들어가면서 또 한번 그렇게 슬피 울었다. 개를 입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온 일행은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간 후 다시는 개의 안부를 묻는 전화 한마디가 없었다. 외삼촌한테서는 그후 대접을 잘 받아서 기뻤다는 얘기와, 가을의 자기 생일에 초대할 테니 꼭 와달라는 뜻의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때도 개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개에게 병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는 것보다는 개를 입원시켜 어떻게든지 우리 돈을 축내려는 게 목적이었다는 악랄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물린 아이한테 행여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조금도 안 했으니 피장파장이었다. 우리를 그런 곤경에 빠뜨리고 그 난리를 치르게 한 개에 대해선 더더욱 생각하기도 싫었다. 개를 퇴원시키러 가면서도 개를 다시 집에 들일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 끔찍한 족속으로부터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개의 건강진단서만 보관하고 있을 작정이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개가 네 발로 창살을 휘어잡고 슬픈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다른 개들은 물론 나에게 냉담했고 가까이 가도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래 그런지 우리 개의 울음이 우레와 같은 박수, 수많은 사람의 환호성, 뭐 그런 가당찮은 것으로 들렸다. 무슨 잘못으르 별안간 관중의 미친 듯한 환호성 속으로 들어선 평범한 사람처럼 얼른 도망가고 싶었다. 우리 개의 울음은 소프라노의 발성 연습 비슷했다. 나 말고 누가 개의 짖음이 아닌 울음을 들었는가. 빳빳하게 일어서서 네 발로 창살을 휘어잡은 그놈의 배는 백설처럼 희었다. 검정개인 줄 알았는데 배 쪽은 아니었다. 나는 도망치고 싶어 죽겠으면서도 미적미적 다가갔다. 그놈이 맹렬하게 꼬리를 쳤다. 그건 눈부신 선회였다. 그리고 그놈의 눈은 기쁨으로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 인간은 제아무리 기뻐도 별수 없이 잡것이 섞이게 마련인데 그놈의 것은 무섭도록 순수했다. 아아, 진짜배기란 바로 저런 거로구나. 나는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수의사가 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가벼운 쇳소리가 나기도 전에 그놈이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창살을 긁던 다리로 내 목을 부드럽게 안았다. 마음을 놓았는지 이제 울지 않았다. 그때였다. 내 목구멍에서 헉, 소리가 나면서 통곡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울고 있는데도 내 탓은 아니었다. 나는 엉엉 소리내어 통곡했다.
개업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동물을 사랑하시는 분은 처음 뵙습니다. 수의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동물 애호라니 당치도 않았다. 그놈을 몇 년 동안 길렀지만 머리 한번 쓰다듬어준 적이 없었다. 이제 그놈에 대한 다소의 심경의 변화가 있다면, 앞으로 그놈에게 무관심이란 구박을 안 하기 위해 다시는 그놈을 집에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금 울고 있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비애(悲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디젊은 수의사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인간의 첩첩하고도 깊고깊은 오지(奧地)에 있는 그 알 수 없는 비애에 대해 나 또한 그것을 막아내지 못해 통곡했을 뿐 거기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으랴.
그날 수의사의 오해 때문에 나는 그에게 우리 개의 처분을 부탁하려던 당초의 내 계획을 바꾸었다. 때로는 남의 오해를 풀어 주기가 남의 꿈을 깨뜨리는 것 같아 차마 못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개를 다시 기를 생각을 한 건 아니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복덕방 영감에게 넘겨주었다. 그라면 우리 개하고 낯설지 않고, 언젠가새끼 낳으면 한 마리 달라는 부탁을 들은 것 같아서였다.
덜 간 먹물을 개칠해놓은 것 같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초의 눈이니 서설(瑞雪) 인가? 퍼얼 새낀지 진주 새낀지를 거절한 건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었다. 자신이 대견했다. 그러나 나의 검정개는 아직도 내 속에 늘어붙어 있었다. 그건 검정개가 아니라, 한줌의 비애인지도 몰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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