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 헌병대 체육관
지난 회와 연결된다. 세 번째 상대가 초조한 듯 김두한을 보고 있다.
김두한이 자세를 취하며 돌다가 대좌 쪽을 본다.
두한 잠깐.....할 말이 있소..
대좌 말해보라.
두한 조선에는 주먹의 법칙이 있소.
대좌 주먹의 법칙...?
두한 (대좌를 노려보며)조선에는 삼세번이라는 것이 있소. 모든 걸 세 번째에 끝내는 거요.
대좌 그건 무슨 소리인가?
두한 지금 이 자가 세 번째 상대요. 두 번째까지는 살려주었지만 이 마지막 상대는....죽을지도 모르오.
대좌 .........?
두한 그래도 나를...풀어주겠소?
체육관에 있던 모든 헌병들이 술렁거린다.
동시에 대좌이 표정에도 균열이 일고 있다.
두한의 눈빛은 엄청난 살기를 띄우고 있다.
두한은 세 번째 상대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무섭게 대좌를 노려보고 있다.
대좌 내 부하가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두한 나는 이미 지쳤소.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상대의 급소를 노릴 수 밖에 없소.
대좌 ...........
장교 몇몇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대위 이 건방진 놈....감히 어디서 잔꾀를 부리려는 것이냐? 대좌님, 저 자는 이미 싸울 힘이 다 떨어졌습니다. 간교한 말에 속지 마십시오.
장교1 그렇습니다. 싸움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대좌는 턱을 만지작거린 채 그저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대좌 (세번째 상대에게)자신 있는가? 내키지 않는다면 포기해도 좋다.
하세가와 걱정마십쇼.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저 조센징 녀석을 저승으로 보내버리겠습니다.
대좌 좋다.(두한을 보며) 이 자리에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약속은 지키겠다. 싸워라.
하세가와가 대좌에게 고개를 숙이고 두한을 향해 돌아선다.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고 두한에게 다가서는 하세가와. 다시 접전이 펼쳐진다.
그러나 두한은 이미 지칠대로 지쳤고, 하세가와는 세 명 중에서도 최고수다.
따라서 상대3이 일방적으로 두한을 몰아붙이고 두한은 피하기에 급급한다.
그러다가 결국 두한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그제서야 헌병대들이 안도하며 미소를 띄운다.
대좌 역시 그렇다. 그러나 두한은 불사조처럼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그들을 경악시킨다.
승부를 자신한 하세가와는 두한을 거칠게 밀어붙인다. 그러나 자만했던 것일까?
결정적인 한 방을 노리고 있던 두한의 발차기가 하세가와에게 명중되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이 된다.
두한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하세가와를 대좌와 장교들이 앉아 있는 탁자 앞까지 날려버린다.
공교롭게도 하세가와는 두한을 고문했던 대위의 탁자에 쓰러진다.
당황한 대위가 흥분하며 소리친다.
대위 일어나라, 하세가와. 일어나. 어서 나가 싸우란 말이다. 어서....!
두한이 주먹을 불끈 쥐며 천천히 하세가와에게 다가온다. 하세가와가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일어나지만...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이다.
대좌 그만! 그만하라!
두한 ..........?
대좌 긴또깡 네가 이겼다.
두한 ..................?
대좌 너는 이제 자유다.
대위 대좌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 놈을 그냥 내보내선 안됩니다.
대좌 닥쳐라! (큰소리로 모두를 향해)깨끗한 패배는 절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역시 조선의 주먹이다. 이 시간 이후로 저 자에게 어떠한 보복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겠는가?
모두들 ..........
대좌 (두한을 향해)많은 사람들이 왜 너를 구하고자 했는지 알 것 같구나. 약속대로 너를 풀어주겠다. 부관!
부관 하이..
대좌 저 자를 보내줘라. 좋은 구경했다.
부관 하이, 알겠습니다.
대좌가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 뒤를 따라 모든 장교들도 밖으로 나간다.
대위도 잠시 두한을 노려보다가 돌아선다. 두한이 아직도 노려보며 서 있다.
씬 헌병대 정문 근처
김영태와 우미관패들이 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두한이 비틀거리며 정문으로 나오자 삼수가 소리를 지른다.
삼수 큰형님입니다! 큰형님께서 나오고 계십니다!
모두들 두한을 부르며 정문 앞으로 다가간다. 두한의 시선에 부하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흐릿하게 가물거리며 보인다. 두한이 미소를 짓고 다가오다가 그들 앞에서 쓰러진다.
모두들 놀라며 두한에게 달려들며 부른다.
김영태 안되겠다. 어서 병원으로 옮겨라! 어서!
그 분주한 모습들 위로 전화벨 소리가 겹쳐지고......
씬 동 응접실
하야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받고 있다.
하야시 하하하...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이호 대좌님...
씬 헌병대 대좌실
대좌가 직접 통화를 하고 있다.
대좌 아니오..나는 그 자에게 기회를 준 것 뿐이오. 내심 나는 그 자를 시험해보고 싶었고, 긴또깡은 그 시험에 통과했을 뿐이오. 물론 하야시상의 구명 요청 때문에 그런 기회를 준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씬 혼마찌 서재
하야시는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야시 어쨌든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이) ...예....그러지요. 다음에 제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사이) 예. 그럼..
미우라가 수화기를 받아 내려 놓는다.
미우라 헌병대에서 걸려온 전화입니까?
하야시 그래...김두한을 풀어줬다고 하는구나.
미우라 역시 김두한이 이겼군요.
하야시 이제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셈이로군.
미우라 조금이 아니라 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야붕께서는 김두한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하야시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미우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야시 내 힘만은 아니었다는 것이야. 종로가 김두한을 구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미우라 저는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야시 김두한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종로의 유지들이며 상인들이 그를 도왔다. 이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그들처럼 작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미우라 .........
하야시 어쨌거나 김두한이 나왔다고 하니 얼굴이라도 봐야겠지.
미우라 지금 가보시겠습니까?
하야시 급할 것은 없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복잡할 테니까. 미우라 자네가 적당한 때를 잡도록 해라.
미우라 예, 알겠습니다. 오야붕...
하야시 ...........
씬 병원 외경
씬 동 병실
주위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오고 두한이 서서히 눈을 뜬다. 김영태를 비롯한 우미관패들이 두한을 내려다 보고 있다.
김무옥 두한아...?인자 정신이 드냐?
두한 여...여긴.....?
김무옥 병원이구먼.. 니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우리가 들쳐업고 온 것이여..
두한 그래..헌병대 앞에서....너희들을 본 기억이 나는 것 같다.
김영태 하야시 오야붕이 무술 시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더구만..우린 자네가 이길 줄 알았고, 이렇게 풀려날 줄 믿고 있었네..
두한 하야시가..미리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김영태 그렇네..이번에 자네를 위해서 많은 힘을 썼다네..
두한 ......그랬군요..
문영철 하야시도 하야시지만 종로의 유지들과 상인들도 두한이 니가 풀려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다. 설향씨도 그렇구.
두한 설향씨..?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영태 나 역시 처음 듣는 소리군.
문영철 애란이 이야기로는.......아니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한 .........?
김무옥 ......왜 야그를 하다가 말어?
문영철 여러 사람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야. 그렇게만 알아라.
모두들 ......(궁금하고)
김영태 어쨌거나 자넬 이렇게 살아서 볼 수 있을 줄 몰랐네. 정말 하늘이 도왔어.
두한 (비통한).....번개의 시신은...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말에 모두들 어두워진다.
김영태 헌병대에서 고문의 증거를 없애려고 서둘러 화장을 했더군. 우리가 강에 뿌려주었네.
두한 ......제 잘못입니다. 제가 번개를 죽인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김영태 아닐세..정말 번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날세. 난 번개를 살릴 수도 있었지만...
개코 누구 잘못도 아니여라우...번개 그 자식이 끝까지 우덜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할라고 죽어버린 것이여라우..
모두들 .............
두한 삼수야....
삼수 예, 형님..
두한 내 옷좀 챙겨다오.
삼수 예?
정진영 두한아.....갑자기 어딜 가려구. 그 몸으로는 무리야.
두한 번개한테........가봐야지. 가서 나도 번개에게 인사를 해야지..
모두들 ...........
씬 강변
바람이 불고 있다. 두한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허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개코가 곁에서 두한을 부축하고 있다. 모두들 말이 없다.
두한 여기서 번개를 떠나보냈단 말씀입니까?
김영태 ......(무겁게 끄덕인다)........
두한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의 얼굴 위로 번개와의 추억이 지나간다.
처음 번개를 만났던 경찰서 보호소에서의 일들과 종로를 거침없이 활보하던 번개의 모습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현재 두한의 모습이 겹쳐진다.
두한 (E)잘가라 번개야...죽는 날까지 너를 잊지 않으마..미안하다, 번개야..
두한의 그 모습에서...
씬 종로서 고등계
억지로 화를 누르고 있던 미와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책상을 박차고 일어난다.
미와 칙쇼...칙쇼...헌병대마저 긴또깡을 풀어주다니....모두다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라구...
오무라 고정하십쇼, 경부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하야시가 헌병대 대좌를 움직였다고 합니다. 은밀하게 뭔가 큰 거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와 멍청한 자들 같으니라구..헌병대는 긴또깡에게 무릎을 꿇고 하야시는 앞장서서 그 놈을 도와줘? 하나 같이 쓸개 빠진 자들이 아니고 뭔가?
눈치도 없이 김태서가 웃는 얼굴로 들어오다 미와와 눈이 마주친다.
미와 김형사...자네는 도대체 어디를 그렇게 말도 없이 싸돌아다니는가?
김태서 ...자,잠시...총독부에 근무하는 친구가 찾아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느라....
미와 아침부터 사적인 일로 노닥거릭나 하고.....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인가?
김태서 죄송합니다, 경부님...주의하겠습니다.
미와 요즘 우리 고등계 기강이 너무 해이해졌어. 모두 정신들 바짝 차려.
형사들 하이...
김태서 저....그런데 경부님.
미와 말해봐..
김태서 그 총독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긴데...곧 총독부에서 대대적인 징용에 착수할 것이라고 합니다.
미와 그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김태서 물론 그렇습니다만...이번에는 주먹패들도 거기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미와 주먹패들까지...?
김태서 예, 그렇습니다. 헌병대에서 긴또깡을 석방시킨 것도 아마 징용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하더군요. 물론 하야시가 총독부며 헌병대를 들쑤시고 다니기도 했었지만 말입니다.
미와 좀 자세히 말해봐.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김태서 그동안 하야시가 긴또깡의 석방 문제로 총독부의 몇몇 인사들에게 청탁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관료들은 헌병대에 전화를 넣어 이러한 사실을 흘렸던 모양입니다.
미와 그러니까 긴또깡이 곧 징용으로 끌려갈 것이니 헌병대에서 생색을 낸 것이다...이런 뜻인가?
김태서 그렇습니다, 경부님..
미와 그럴 듯하구만...참으로 그럴 듯해...긴또깡이 징용에 끌려간다? 징용에....?
미와의 묘한 표정에서
씬 병원 외경(밤)
하야시의 승용차가 그 앞으로 달려와 선다. 미우라, 시바루, 하야시가 차례로 내려 안으로 들어간다.
씬 동 병실 안
두한이 병상에 기대어 있고, 김영태, 김무옥, 문영철, 정진영, 개코들이 그 곁을 지키고 있다.
두한 영태 형님, 이제 들어가 쉬십시오. 너희들도 그만 가봐..
문영철 괜찮아..아직 초저녁인데 뭘..
삼수가 나가고 잠시 후에 하야시와 시바루, 미우라가 들어온다. 우미관패들이 한쪽으로 비켜선다.
두한 어서오십시오. 어떻게 여기까지...?
하야시 그 동안 고생이 많았네. 그래 몸은 좀 괜찮은가?
두한 예...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퇴원을 하면 혼마찌로 찾아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이번에 저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다구요?
하야시 허허허. 아우님에게 이런 치사를 듣다니...바쁘게 움직인 보람이 있구먼.
두한 .........
하야시 오랜만에 재회를 해서 할 말들이 많을텐데 우리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구만..
두한 아닙니다. 다들 들어가 쉬라고 말하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하야시 그럼 우리도 가봐야지...몸조리 잘하고 푹 쉬도록 하게..
두한 (몸을 일으키며)그러시겠습니까?
하야시 몸도 불편하니 그냥 앉아있게.
두한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하야시가 시바루, 미우라와 함께 병실을 나간다. 모두들 두한 곁으로 몰려든다.
개코 인자본께 참말로 오야붕다워 보이는구마잉..
김무옥 그러게 말이다..이번에 나도 저 사람을 다시 봤구먼.
김영태 자, 우리도 그만 나가자. 두한이도 좀 쉬어야지.
개코 예, 형님. 쉬어라, 두한아..
모두들 인사를 한마디씩 던지고 나가는데 문영철이 남아 머뭇거리고 있다.
문영철 저는 두한이한테 할 말이 좀 있습니다.
김영태 그래...?(끄덕이며)알았다.
김영태가 문을 닫고 나간다.
두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문영철 아무래도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두한 혹시 설향씨 이야기냐?
문영철 (고개를 끄덕이며)자세한 건 모르지만 너를 헌병대에서 구해내기 위해 설향씨가 헌병대 대좌 앞에서 곤욕을 치룬 모양이야.
두한 ........?
문영철 애란이한테 워낙 앞뒤 없이 들은 이야기라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더라..
두한 ..............
문영철 너도 무슨 일인지 대강 짐작은 할 거야. 뭐 어디까지가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말이야..그리고 설향씨는 너 때문에 잘 나가는 사업가가 결혼하자는 것도 마다했다더라..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고 했다고 하는데... 아니다. 그 얘긴 그만 두자.
두한 ...........
문영철 어쨌든 설향씨한테 좀 잘해줘라..설향씨만큼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 (사이) 그럼 쉬어라..
문영철이 나가자 두한은 마음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이 굳는다. 그런 두한의 모습에서..
씬 권번 방안
애란이 놀란 듯 옷가지를 개는 설향을 멍하게 쳐다본다.
애란 그러니까.....평생 권번에서 늙어 죽겠다구? 어머니처럼 수절 아닌 수절이나 하면서....?
설향 그래.
애란 그렇긴 뭐가 그래? 참 기가 막혀서...그럼 두한 오라버닌 어떡하구?
설향 ........
애란 이제 쫓아다니는 년들도 다 사라졌는데...이제와서 그러는 건 또 무슨 심사니? 니가 그동안 좀 고생했어? 두한 오라버니 살리려고 헌병대 대좌하테 몸까지 바치려고 했는데...
설향 애란아........그 얘긴 입밖에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
애란 아....답답한 소리만 골라가면서 하니까 그렇지.
설향 어머니께 그렇게 말씀드렸어...그러니까 너도 아무 말 말아.
애란 설향아?
씬 우미관 (아침)
기도들이 무료한 듯 삼삼오오 모여 기지개를 펴는데 멀리에서 두한이 문영철, 김무옥과 함께 극장을 향해 오고 있다. 기도는 고개를 갸웃하며 보다가 깜짝 놀라서 달려간다.
기도 큰형님...? 퇴원하셨습니까?
두한 (미소)그래...수고가 많다.
두한이 등을 한 번 두드려주고 안으로 들어간다.
씬 동 사무실
두한과 김영태, 정진영, 김무옥, 문영철, 개코, 삼수, 털보들이 오랜만에 모여 앉았다.
김영태 벌써 퇴원하다니...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두한 병원에 누워 있으려니 갑갑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이제 다닐만 합니다.
김영태 어쨌거나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게.
두한 알겠습니다. (둘러보며)그 동안 고생들이 많았다. 나 때문에 헌병대에 끌려가서 정말 고생들이 많았어..
모두들 .....
두한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다시금 깨달은 것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너희들이 있다는 것 말이야. 너희들 모두 나 때문에 그 모진 고문을 받았으면서도 내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모두들 .........
두한 그리고 이번에 죽은 번개를 생각하면...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만..앞으로 번개에게 못다한 만큼 너희들에게 잘해주고 싶다. 아마 번개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김무옥 우리도 마찬가지구먼. 오야붕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것이여. 안 그러냐?
문영철 .....(끄덕인다).....
개코 그야 두 말 허면 잔소리제라우. 아따 근디..오늘 같은 날은 술 한 잔 혀야 하는 것 아니겄어라우? 우리 두한이 큰형님도 나오셨고, 오랜만에 우덜이 우미관에 다 모여부렀는디..
두한 그래야지...한 잔 해야지..오랜만에 명월관에 가서 한 번 마셔볼까?
문영철 .,.....?
두한 며, 명월관? 오매 참말이여?
두한 마루오까 형님도 모셔야 하니까 거기가 좋을 것 같다..진영이 니가 마루오까 형님한테 연락을 좀 드려라.
정진영 알았어..
최동열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렇게 무사하게 나오다니 참으로 꿈만 같구나...
두한 매번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최동열 황병관이라는 운동선수를 구하려다가 그렇게 됐다는 이야길 들었다.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제 너도 성인이고 어른이다. 이제는 가슴 속의 격정을 다스리고 주변을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두한 잘 알겠습니다.
최동열 그리고 주변이 정리되면 삼청동에도 신경을 쓰거라. 언제까지 이렇게 떨어져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두한 .........
최동열 두한이 네 일 때문에 삼청동에 가보았는데 네 조모님께서 많이 쇠약해지셨더구나...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 그 대쪽 같으신 분도 세월만은 어쩌실 수 없으셨던 모야이다.
두한 ,..........
씬 삼청동
오씨가 병석에 누워있는 조모의 물수건을 갈아준다.
오씨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어머님..최기자님 말씀대로 병원에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모 아니다. 며칠 쉬면 나을 게야.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것이니라..
오씨 하지만 통 차도가 없으십니다.
조모 괜찮데두 그러는구나.
오씨 ........(걱정스럽다)
조모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몸보다도 마음이 약해져서 생긴 병이니라. 치료를 받는다고 나을 병이 아니야.
오씨 ...........
조모 그보다도....두한이 소식은 좀 듣고 있느냐?
오씨 ..........?
조모 어찌 지낸다고 하더냐?
오씨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최기자님께서도 아무 말씀 없으셨구요..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님...
조모 그래....그렇겠지.
오씨 한 번 들리라고 연락을 넣겠습니다.
조모 그럴 거까진 없다. 놔두거라. 이렇게 누워 있으니 자꾸만 마음이 더 약해지는구나.
오씨 ........
조모 그 아이도 어느덧 스물하고도 세 살이 되었구나. 장정이 다 되었어. 다른 건 몰라도 장가는 들여놓고 죽어야 할 터인데.....
오씨 어머니...
조모 시간을 두고 어디 적당한 곳으로 혼처 자리나 알아보거라.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도 인륜지대사까지 무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오씨 알겠습니다, 어머니.
조모는 몸을 바로 뉘인다. 오씨는 다시 수건을 짜 조모의 머리에 올려준다.
씬 명월관 마당 (밤)
불을 환하게 밝힌 명월관에서 흥겨운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온다. 두한과 마루오까, 그리고 우미관패가 왁짜하게 그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다. 지배인이 달려와 그들을 맞는다.
지배인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요? 참으로 오랜만에 저희집을 찾아주셨습니다요. 자 이 쪽으로...
지배인의 안내로 두한들이 안으로 향한다.
씬 종로 거리
인력거 두 대가 달려오고 있다. 애란과 설향을 태운 인력거다. 애란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반면에 설향의 표정은 차분하다.
씬 동 별실
거나한 술판이 벌어져 있다. 그러나 기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두한이 마루오까에게 술을 따른다.
두한 한 잔 더 하십시오, 마루오까 형님.
마루오까 허허허. 그만그만. 나는 이미 술이 많이 되었네. 벌써 취기가 오른다구.
개코 아따 오늘 같은 날은 좀 취하면 어떻습니까요?
김무옥 그려...개코 니가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구마잉. 아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 아니요? 자 한 잔 쭈욱 비우시고 제 잔도 받아부씨요.
마루오까 허허허. 이거야...주당이란 주당은 모두 우미관에 모였나? 무슨 술을 이렇게들 잘 마신단 말인가? 이 자리에 더 있다간 술에 치여 죽을 것 같아서 안되겠네. (일어나며)나 먼저 일어날 테니 많이들 마시게.
두한 (같이 일어나며)벌써 일어나시려구요?
마루오까 아주 기분 좋게 마셨어. 다음엔 내가 한 잔 사지.
두한 형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루오까 무슨 소린가? 형님 아우 지간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닐세. 나는 공치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야. 흥을 깨고 싶지 않으니 그대로들 앉아 있게. 자 그럼 이 불청객은 먼저 가네.
마루오까가 나가면 모두들 자리에 앉는다.
김무옥 자, 자...술 싫다고 간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우리들끼리라도 밤새 마셔보더라고...
개코 헤헤헤. 좋지요. 좋아요.
그들 그렇게 술을 마시는데, 애란의 소리가 들려온다.
애란 (E) 애란이예요. 들어가도 되겠어요?
김무옥 애란이...?
문영철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애란과 설향이 들어온다.
애란 안녕들 하셨어요? 오늘은 기생이 아니라 우미관 식구 자격으로 온 거예요. 앉아도 되겠죠?
김무옥 잉 그려..아 애란이야 우리 식구제..우리 영철이 각시 될 사람잉께...허허허..
문영철 (두한을 보며)내가 불렀다. 그래두 오랜만에 명월관에 왔는데 두 사람이 빠지면 섭섭할 것 같아서...
두한 ....잘 했다..
문영철 이리와 앉아라.
애란 예.....설향아..
애란이 설향이를 두한 옆으로 데려간다.
애란 두한 오라버니 옆에 앉아..여기가 니 자리잖니...
설향 ........
두한 앉아요, 설향씨..
설향 네.....(자리에 앉는다)
김무옥 아따 그림 좋구마잉. 딱 새신랑 새각시랑께...허허허...
두한 .........
설향 .........
김무옥 새로운 사람들이 왔응께 또 한 잔 혀야겄제...자 잔들 채우더라고. 아따 영태 성님은 고 한 잔 갖고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것이요? 진영이 너두 좀 마시고..
그들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두한이 약간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설향을 쳐다본다. 설향은 아무 말도 없이 다소곳이 앉아만 있다.
씬 명월관 밖
두한을 제외한 우미관패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지배인이 문 밖까지 딸나와 그들을 배웅한다.
김무옥 영태 성님, 2차까지는 혀야겄제라우?
김영태 아직도 술이 모자란 거냐?
김무옥 기왕 마신 술인께 뿌리를 뽑아야제라우..
개코 근디 우리 오야붕은 으디 갔어라우? (주위를 둘러보며) 오야붕? 오야..
김무옥 (뒤통수를 때리며)아따 왜 이렇게 눈치가 읎냐? 두한인 설향씨하고 할 말이 많을 것 아녀.
개코 헤헤헤.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것이여라우?
김무옥 (지배인에게)이봐, 방에 술상 다시 보드라고.
지배인 예. 벌써 조용한 방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김무옥 그려...?
문영철 영태 형님 가시죠.
김영태 그래...
그들 그렇게 우르르 몰려나가는데...
씬 동 별실
두한과 설향이 가벼운 술상을 두고 마주앉아 있다. 설향이 조심스럽게 두한의 잔에 술을 채운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두한 미안해요, 설향씨...그리고 고마워요..
설향 .........?
두한 영철이한테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난 설향씨한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늘 이렇게 받기만 하는군요.
설향 아니예요..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두한씨는 저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두한 설향씨는 언제나 내게 한결 같았어요. 그것이 늘 부담스럽고 미안해서..외면할 수 밖에 없었죠.
설향 (알고 있다는 듯 지긋이 고개만 끄덕이고).......
두한 왜 그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설향 ........?
두한 나 때문입니까?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까?
설향 .......
두한 지금도 그렇다면..그 마음을 내가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설향 ...........?
두한 설향씨 같은 심성을 가진 여자라면 할머님과 어머니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설향 ....두한씨....?
설향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두한 .........
설향 하지만 저는.....저는...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두한 ........?
설향 저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몸을 바치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두한씨를 떠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두한이 설향의 손을 꼭 잡는다.
두한 그런 이유라면 상관 없어요. 설향씨는 내게 과분한 여잡니다.
설향 두한씨....?
두한 ....(미소).....
두한이 부드럽게 설향을 품안으로 끌어들인다. 설향의 두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씬 명월관 외경 (새벽)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 오고 있다.
씬 동 별실
설향이 등을 돌리고 옷을 입고 있다. 두한은 여전히 잠에 빠져 일어날 줄을 모른다. 설향이 옷고름을 매고 슬픈 눈으로 두한을 바라본다.
설향 (E)서방님.....이 설향이는 서방님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곁에서 서방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분입니다. 부디 저 같이 천한 기생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나서 백년가약을 맺으세요. 그게 이 설향이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설향은 두한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설향이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가면 두한은 이미 깨어있었던 듯 눈을 뜬다. 그리곤 설향이 나간 방문을 오랫동안 쳐다만 본다. 그 알 수 없는 두한의 얼굴에서 길게 디졸브 되면......
씬 인써트
일본의 진주만 공습 기록필름.
씬 종로 거리
소년이 신문을 뿌리며 달려온다.
소년 호외요!! 호외요!
지나가던 행인들이 흩날리는 호외를 읽으며 수군거린다. 거리를 지나치던 김무옥과 개코가 호외를 보며 의문스러운 얼굴이다.
김무옥 뭐라고 쓴 거여?
개코 어따 뭐긴 뭐겄소?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제라우.
신문에는 태평양전쟁 발발을 알리는 제호가 크게 써있다.
씬 우미관 사무실
탁자 위에 호외를 놓고 모두들 둘러서 있다. 정진영과 김영태는 심각하게 호외를 읽어내려간다.
두한 뭐라고 써있는 거냐?
정진영 잠깐만....
개코 사람들이 이걸 보고 보통 난리가 아니던디...큰 변이라도 난 거냐?
정진영 일본이 미국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시작했대. 일본 공군 항공편대가 미국 영토인 진주만을 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사야.
김무옥 뭐여....?미국이라면 겁나게 큰 나라 아녀...?
김영태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전쟁이 전 세계로 확대되는 조짐이란 말이지.
개코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김영태 글쎄.....어떤 식으로일진 몰라도 분명 우리에게도 불똥이 튈걸세. 그것만은 분명해.
모두들 .........?
씬 잡지사
이곳에서도 호외를 보고 있다.
최동열과 직원들의 표정이 어둡다.
남직원 결국 일본이 미국마저 꺾고 말았습니다.
최동열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지. 일본은 이제 겨우 첫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일세.
남직원 하지만 이 기사를 보면 벌써 태평양 전체를 장악했다고 돼 있지 않습니까?
최동열 총독부의 기관지들이 떠들어대는 보도를 전부 믿어서는 안되네. 지금 일본은 무리수를 두고 있어. 불이 꺼지기 전에 활활 타오르듯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거지.
직원2 그럼 사장님께서는 일본이 질 거란 말씀이십니까?
최동열 생각해보게. 일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어. 그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어.
직원2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최동열 문제는 이 전쟁 때문에 우리 조선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일세. 곧 본격적으로 물자 징발이 시행될 테고..징용과 징병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일세..그렇게 되면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이 왜놈들의 총알받이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가겠지.
최동열의 근심스런 얼굴 위로.....
해설 1942년 가을, 본격적으로 전세를 확장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 바디비아 함락을 시작으로 버어마의 랭군, 중국의 옥산을 점령하고 캐나다 벤쿠버에까지 맹렬한 포격을 퍼부으며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 가을, 솔로몬군도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에 더욱 광분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징용과 노력동원을 시작하였고, 그 대상은 조선의 주먹패들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해설이 진행되는 동안 기록필름이 보여진다.
씬 우미관 앞
김무옥이 손에 뭔가(징용장)를 쥐고 급히 달려오고 있다.
씬 동 사무실
두한과 김영태들이 모여있는 안으로 김무옥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김무옥 크...큰일 나부렀다.
문영철 왜 그래?
김무옥 이...이것 좀 보라고..나한테 징용장이 날라왔단 말이여..
문영철 (담담하게)너도 나왔구나?
김무옥 뭣이여? 그럼 영철이 너두 나온 것이여?
문영철 (끄덕이며)나뿐만이 아니야. 우리 애들 거의 대부분이 징용장을 받았다.
김무옥 영태 성님도 나왓소? 두한이 니도...?
두한 ........
문영철 개코만 빼고 여기 있는 사람한테 다 나왔어.
김무옥 그려....?
개코 .....(머리를 긁적인다).....
문영철 두한아...어떻게 할 거냐? 징용에 끌려가야 되는 거냐?
두한 .........
김무옥 뭔 소리여? 당연히 도망쳐야제. 거그 끌려가면 살아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잖냐?
문영철 안 가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다는 거야?
김무옥 그거야 모르겄지만....좌우지간 나는 못 간당께.
두한 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영태 글쎄....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라서 말이야...그저 난감할 뿐일세.
두한 ..........
김영태 자네가 최동열 기자님을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나? 그 분이라면 해결 방법까진 아니더라도 조언을 해주실 수는 있을 걸세.
두한 (고개를 끄덕인다) 예...그래야겠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진영이가 보이질 않던데 어딜 간 거야?
개코 요새 신불출인가 뭔가 하는 사람하고 자주 만나던디..아마 거그 간 모양인디..
두한 만담가 신불출 말이야?
개코 잉...뭐 그 사람허고 공부를 한다던가 하는디...모를 소리만 늘어놓더라구.
두한 그래........?
씬 극단 사무실
정진영이 스승을 대하듯 신불출 앞에 공손하게 앉아있다.
신불출 차후에 조선이 해방이 되면 지주, 자본가 계급을 척결하고 바야흐로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이 될걸세. 그것이 바로 프로레타리아 혁멱이라는 거지.
정진영 ........
신불출 말은 거창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거 없네. 바로 진영이 자네와 같은 무산대중이 봉기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걸세. 모두가 평등한 세상 말이야. 거지도 농민도 노동자도 모두가 똑같이 평등한 그러한 세상이지.
정진영 저 역시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신불출 용기와 신념을 갖고 행동하게 자네와 같은 젊은이들이 동참한다면 그리 먼 훗날의 이야기도 아니야.
정진영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하지만 지금 조선의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저 역시 곧 징용에 끌려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신불출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린가? 사할린이나 남양 군도로 끌려가 일제의 총알받이가 되겠다는 것인가?
정진영 하지만 징용을 피할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신불출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말고 살아남아야 할 때일세..
정진영 .........?
신불출 악랄한 일제의 탄압을 피아기 위해 우리의 동지들은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있어. 박헌영 동지와 같은 분께서도 광주 벽돌공장에서 연와공으로 숨어 계시고, 전무 형무소에 수감된 김상룡과 이현상 동지들도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네.
정진영 ...........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신불출 누구십니까?
김해숙 (E)저예요. 김해숙이예요.
신불출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신불출 어서오시오, 김동지..
김해숙 저를 찾으셨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신불출 김동지에게 소개시켜줄 동지가 있어서 불렀소. 인사들 하시오.
김해숙 김해숙이라고 합니다.
정진영 정진영입니다.
신불출 김해숙 동지는 종로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네. 앞으로 자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걸세.
정진영 여, 여급이라구요?
신불출 왜 놀랐는가? 허나 김해숙 동지의 사상성은 남성 동지들 못지 않지. 프로레타리아 혁명가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보기 드문 여성 동지일세..
정진영 아 그렇습니까? 여급이라고 하시기에 전...(손을 내밀며)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악수를 하는 정진영과 김해숙은 서로의 눈을 응시한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뜨겁게 부딪힌다.
씬 당구장
개코가 낄낄거리며 삼수와 함께 당구를 치고 있다. 한 쪽으로 앉은 문영철, 김무옥은 땅이 꺼질 듯 한숨 뿐이다.
김무옥 이제 이 건달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구먼. 이럴 줄 알았으면 장가라도 들어두는 것인디 말이여..
문영철 난데없이 왠 장가 타령이냐?
김무옥 죽기 전에 씨라도 뿌려 놓았어야 한다 이 말이여..
문영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냐? 정신만 빠짝 차리면 뭔가 수가 생기겠지...
김무옥 (태평한 개코를 쳐다보며)근디..왜 개코 저 자식은 징용장이 안 나왔는지 모르겄다?
문영철 집도 절도 없는 놈이니까 그렇지. 저 놈은 법적으로 아예 세상에 있지도 않은 놈이라구.
개코는 신바람이라도 난 듯 열심히 당구를 친다.
씬 다방
두한과 최동열이 마주 앉아 있다.
최동열 두한아, 지금 징용에 끌려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음이야.
두한 .........
최동열 일본은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의 전투에서 계속 패하고 있다. 태평양을 비롯한 모든 해상권은 연합군이 장악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수송선들을 집중 공격한다더구나.
두한 ........
최동열 일본의 선박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포격을 당해 대부분이 바다에 수장되고 있는 형편이다. 더구나 상해의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버어마 전선에 투입했다. 그것은 곧 피를 나눈 동포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한 아저씨의 말씀을 들으니 더 암담해지는군요.
최동열 눈앞에 닥친 상황을 바로 보아야 살 길이 있다. 징용만은 피해야 한다. 차라리 몸을 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두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 혼자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많은 동료들이 있습니다.
최동열 하지만 두한아...어차피 징용이 시작되면 동료들과도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두한 그래서 방도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최동열 ........네 뜻이 그렇다면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벌어 보거라.
두한 ..............?
최동열 일본은 머지 않아 패망할 것이다. 만해 스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단다. 일본은 멀지 않았다고 말이야. 그때까지 시간을 끌어야만 한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말이다.
두한 .....
씬 종로 거리
두한이 생각에 잠긴 채 가고 있다. 그 위로 최동열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최동열 (E)일본은 머지 않아 패망할 것이다. 만해 스님께서도 그리 말씀 하셨단다. 일본은 멀지 않았다고 말이야.
두한은 잠시 걸음을 멈춘다. 멀리로 우미관이 보여오는데 삼수들이 두한을 보고는 달려온다. 두한은 의아한 듯 그들을 본다.
삼수 큰형님?
두한 ......?
삼수 어서 우미관으로 가보십쇼. 용식이 형님이랑 짝코 형님이랑 다들 오셨어요.
두한 무슨 일로...?
삼수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징용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두한 그래...? 가자..
두한이 삼수들과 우미관으로 향한다.
씬 우미관 사무실
용식과 짝코, 작두, 황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짝코 두한 아우님은 언제쯤 돌아오는가?
김영태 애들을 보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이 열리며 두한이 들어온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들이십니까?
용식 어서 오게..일단 앉게..
두한이 상석에 앉는다.
용식 너무도 경황이 없어 이렇게 몰려오게 되었네. (징용장을 내보이며)이걸 좀 보게. 우리 아이들 거의가 징용장을 받았어.
두한 ......사정은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용식 이상하지 않은가? 경성의 전 주먹패들에게 동시에 징용장이 발부되었어. 이건 너무도 계획적이란 말일세.
두한 .......
짝코 비단 경성뿐이 아닐세..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구만..
작두 징용으로 우리 주먹패들의 씨를 말리려는 게지.
두한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아무래도 오야붕 회의를 소집해야할 것 같습니다. 조선의 모든 주먹들이 모여 이 일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용식 오야붕 회의라...
두한 경성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모든 주먹들에게 연락을 취해주십시오.
짝코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건가?
두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면 길이 있겠지요.
모두들 ....
두한 우리를 궁지로 내몬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만 합니다.
작두 초...총독부를 상대로 말인가?
두한 어차피 징용에 끌려가 죽을 거라면 싸우다가 죽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짝코 싸워.....이보게 두한 아우....?
두한 총독부건 뭐건 상관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한 번 싸워보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모두들 아연한 얼굴이다. 그런 두한의 비장한 눈빛에서 디졸브 되면.....
씬 경성역 전경
역 구내의 혼잡한 모습들이 보여온다..
씬 동 역 승강장
기차가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정지하면 우르르 승객들이 내린다. 그 인파들의 물결 속에서 눈에 확 뜨이는 거구의 사내들.
경기도 이천 패들이다. 이천패 보스 장도리 옆으로 다부진 인상의 이정제가 낯선 역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본다.
신영균 우미관이 어느 쪽이냐?
홍만길 이리로 가시면 됩니다, 형님.
신영균 늦었다. 어서 가자.
홍만길 예.
신영균 휘발유, 잘 봐두어라. 여기가 우미관이다.
휘발유 예, 형님.
그들은 서둘러 방향을 잡는다.
씬 우미관 광장
우미관패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주먹패들을 맞고 있다.
김무옥과 문영철, 개코, 와싱턴들도 점잖게 양복을 빼입고 오야붕들을 우미관 안으로 안내한다.
상인들과 행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벌어지는 낯선 광경에 놀란 듯 지켜보고 있다. 그 행인들 사이에 지켜서 있던 종로서 형사 하나가 눈빛을 빛낸다.
씬 종로서 외경
씬 동 고등계
형사들이 미와의 주위에 몰려들어 보고를 하고 있다.
미와 그러니까.....전국의 불량배들이 우리의 관할 구역인 종로에 모이고 있다는 말이지....?
김태서 그렇습니다, 미와 경부님.
문달영 사법계에서는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잔뜩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미와 긴또깡 이 녀석 도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오무라 요사이 일제히 발부된 징용장 때문에 불량배들의 불만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미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그건가?
오무라 하지만 제깟것들이 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서로 만나 술이나 마시면서 답답한 심사나 달래보려는 거겠지요.
미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긴또깡의 얼굴을 안 본 지도 꽤 되었군.
오무라 그 녀석이라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시지 않습니까?
미와 물론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오랫동안 그 녀석을 보지 않으면 왠지 서운하단 말씀이야.
오무라 하하하. 경부님께서 그런 농담을 다 하시다니요.
미와 가봐야겠다. 긴또깡 이 녀석을 좀 봐야겠어..
미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씬 우미관 사무실
두한이 김영태와 정진영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김영태 오늘 해야할 일은 전국에서 모인 오야붕들에게 전권을 위임받는 것일세. 전국의 오야붕들을 한데 묶어 단합된 힘을 보여야만 우리를 얕보았던 총독부 관리들을 압박해 들어갈 수 있을 걸세....
두한 (끄덕이고)......그 다음은 뭡니까?
김영태 어떡하든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일단은 주먹패들이 다 모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네..그것만으로도 우릴 쉽게 보지 못할 걸세.
두한 ......
정진영 그래, 두한아...오늘은 전국에서 모인 오야붕들을 설득하는 것만 생각해. 다들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야. 그것도 쉽지는 않을 거야.
두한 .............
삼수 (문을 열고 들어와)모두들 오셨습니다.
김영태 그만들 일어서지.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씬 우미관 극장 안
문영철이 단상 위에서 장내를 정리하고 있는데 두한이 김영태, 정진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다.
문영철 큰형님께서 오십니다.
극장에 있던 모든 오야붕들이 일제히 기립하며 예의를 표한다. 두한은 단상에 올라 정하게 인사를 한다.
두한 모두들 먼길 오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오늘 여러 오야붕들을 이곳까지 오시라고 한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다시피 징용장 때문입니다.
좌중 .........
두한 우리 조선의 모든 주먹들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총독부가 우리들을 무작정 전쟁터로 밀어넣으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좌중 ........
두한 모두들 뜻을 모읍시다. 이 김두한이에게 힘을 모아주십시오. 그래서 이 위기를 다 함께 헤쳐나가도록 하십시다.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각 패거리의 보스들의 모습과 이정제, 신영균들의 각기 상반된 표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두한 말해 보시오.
신영균 나 신영균이라고 합니다. 뭐 다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알맹이가 빠진 것 같아서 말이오. 결국 우리를 징용에서 어떻게 빼내주겠다는 거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소.
두한 솔직히 말하겠소. 사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오.
신영균 뭐요? 아니 그럼 확실한 것도 없으면서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보았단 거요?
갑자기 장내가 술렁거리며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한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잠시 지켜본다. 보다못한 마포의 용식이 벌떡 일어선다.
용식 조용히들 하시오! (사이) 조용, 조용히 하란 말이야!
모두들 ....(진정된다)
용식 (일어나)나 마포에 용식이오. 답답하기는 우리나 김두한 오야붕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오합지졸처럼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김두한 오야붕에게 모두 맡기도록 합시다.
짝코 맞는 말이오. 우린 그저 김두한 오야붕이 하자는 대로 따르면 되는 거요. 알았소? (위협적으로) 내 말에 이의 있으면 말해보시오.
신영균이 발끈해 일어나려는데 홍만길이 말린다. 용식과 짝코의 시퍼런 서슬에 다른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이정재는 도리질을 치며 쓴웃음을 짓는다.
짝코 그럼 없는 걸로 알겠소.(이전 태도와는 아주 정중하게)김두한 오야붕 계속 하시지요.
두한 이 김두한을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주먹 하나로 이 자리에 섰지만 절대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결코....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겠소.
짝코와 용식, 작두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모두들 따라 크게 박수를 친다. 그러나 신영균만은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불만이 어린 모습이다. 단상에 선 두한의 그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