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의 의미를 말하다.
사리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리불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이 사리자에게 반야심경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다. 그 가르침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공空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고 난 다음 이 모든 가르침을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니 시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법(제법諸法)이 공空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내용이다. 제법諸法이 공空하다는 것은 불교교리 설명의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삼법인三法印에 잘 나타나있다.
삼법인이라 하면 모든 사물에 고유한 실체가 없다는 뜻의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이 변화할 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가 시제법공상諸法空相 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법이 공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제법공상을 제대로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삼법인 셈이다. 그렇다면 제법무아에서 제법은 일체의 모든 사물과 그 존재가 참된 고유의 실체(實體, substance, 전통적인 유럽 철학의 기본개념으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 존재를 말한다.) 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영구불변의 실체實體를 부정하는 불교의 근본사상. 「무아」의 「아」는 실체를 뜻하는 말이니 무아란 곧 그 어느 영구불변하는 실체도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따라 상호관련 속에서 변하면서 임시로 그렇게 존재할 뿐이라 한다. 불교의 이러한 사상은 종교적으로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을 뜻하며, 윤리적으로는 「나」와 「너」의 구별을 넘어서 절대적인 선善을 실천하는 자비생활로 나타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통 무아를 무자성無自性, 또는 공空으로 표현한다. 라고 했다.) 여기서 무아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세계와 우주 모든 것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사물은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무아다. 이 때 우리는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제행무상은 제법무아의 대전제에 종속되는 또 다른 설명방식에 불과하다. 제법무아가 실체의 문제를 무아라는 측면에서 다룬 존재론적 문제였다면 제행무상은 제법이 무아인 이상 그 모든 행위나 작용이 덧없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행위나 정신작용이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일 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점은 무상 즉 시간성과 결부되어 설명할 수 있다. 일체가 무상한 것일 뿐이라면 일체가 영원한 것이 없기에 덧없다는 이야기다. 이것 또한 제법의 실체가 없다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 실체가 없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무상한 측면은 시간이나 영원 앞에서 일체가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체를 인정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이 관념적 실체이든 아니면 물질적 실체이든 실체를 인정하는 측면에서 볼 때 무상無常이 아니라 상常이 된다. 관념적 실체를 제외한다면 물질적 실체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모두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잠시 인연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 점을 망각하고 나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고통의 시작은 공성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하는 데서부터라고 한다.
공성( ‘진여’眞如를 달리 이르는 말. 공空의 이치를 체득할 때에 나타나는 실성實性이라는 현상의 본질을 뜻한다.)은 인간의 작용을 넘어선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공성은 인간의 손길을 넘어서 있는 부처님의 세계, 정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손길을 넘어서 있는 부처님의 침묵하는 정토, 그러나 끊임없이 황무지에서 백합화가 피어나듯이 소생하는 만물의 세계, 생멸生滅을 거듭하지만 공성은 살아있다. 침묵하는 부처님의 미소를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나’ 라는 자아가 앞서는 만큼 부처님의 세계, 정토로 가는 길은 멀어진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나’ 라는 자아를 부정하면 할수록 그만큼 부처님의 세계, 정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극점이 극락이다. 자신의 공상空相을 보는 자, 그는 부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 다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의미를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