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고구려기획 제2편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1995년 여름. 마침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은 관을 놓았던 흔적 뿐. 무덤은 적어도 천 오백년 전의 것. 그리고 고구려의 것. 과연 이곳에 잠든 이는 누구인가.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 가지, 바로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입니다. 역사스페셜의 고구려 기획, 지난 시간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통해, 광개토대왕시대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이 장군총을 통해, 고구려의 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것이 집안에 있는 장군총을 실물크기로 복원한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한번 보실까요. 장군총과 제가 한 화면에 들어가면 이렇게 보입니다. 높이가 약 12미터. 사람 키로는 약 7배, 건물로 치면 5층 높이나 됩니다. 왜 중국의 학자들이 이 장군총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 장군총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컸지만, 지금은 고구려의 옛 영토가 남의 나라 땅이다 보니, 잊혀져 온데다가, 최근에는 한국인들이 고구려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을 꺼려한 중국정부가 현지촬영을 금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있기 전에 장군총을 답사한 한 학자가 촬영해놓은 테잎을, 이번에 구하게 됐는데요, 그 속에서, 남의 땅이 되어버린 고구려의 옛 도읍지에서 천 오백년이란 세월을 꿋꿋하게 이겨온, 장군총의 전설적인 위용을, 비로소 볼 수가 있었습니다.
1. 장군총을 찾아서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fgh0202/Dea8/2?docid=1IpnL|Dea8|2|20090828211236
오늘날, 중국과 한반도의 서부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791킬로미터의 압록강. 그러나 1500년 전 압록강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북쪽으로는 중국이, 남쪽으로는 북한땅이 바로 몇 미터 앞에 보인다. 서기 3년 고구려인들은 이곳 압록강변에 도읍을 정했다. 그것은 바로 국내성,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 시대 강성했던 제국 고구려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세계적인 이목을 모으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 있다.
그것은, 집안시 외곽, 즉 1500년 전 국내성의 어디에서든 맞닦뜨리게 되는, 거대한 무덤 떼들이다. 그 수가 무려 만 삼천 여기. 세계최대규모의 고분군이다. 산으로 착각할 만큼 큰 무덤이 천 여기. 작다고 해도 집 한 채 크기다. 이 무덤 떼는 대부분, 1000여년 전,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구려시대에 만든 것들로, 초기고구려의 강돌을 덮어 만든 무덤에서부터, 흙을 쌓아 만든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만 이천 여기에 이르는 고구려 무덤 떼 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이 있다. 마치 1500년의 세월을 비껴온 것처럼, 완벽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돌무덤. 그것이 바로 장군총이다.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의 그 당당한 위용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밑변의 길이는 약 32미터, 높이는 12미터가 조금 넘는다. 돌의 나이와 축조방식으로 보아 무덤은 약 5세기의 것.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층과 층 사이를 규칙적으로 들여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총은 이렇듯, 그 완벽한 형태와 빼어난 조형미, 그리고 탁월한 건축기법으로, 광개토태왕비와 함께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인터뷰> 이건하 교수 “탁 보는 순간 주눅이 들리더라구요. 어떻게 저 큰 바위들을 세련되면서도, 웅장하게 구축할 수 있었는가, 여태까지 사람들이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겠더라구요. 그리고 1500년 전에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구축할 수 있었는지 그 기술에 대해서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지는 장군총의 기단부와 일층 사이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돌은 모두 화강암으로, 전체 무게가 적어도 6천톤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철근을 박아 넣었다거나, 따로 기둥을 세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돌로 쌓아 올린 무덤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무게의 돌무덤이 어떻게 천오백 년이란 세월을 버텨왔을까요? 밑단으로 내려오면 처음에는 잔디로 덮혀 있고, 그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의 하나가 바로 이 바닥에 숨어있습니다. 발 밑으로 강돌들 발굴하는 과정에서 장군총의 밑부분은 물론, 이렇게 주변까지 강돌을 사면에 둘러놓은 것이 드러나고, 발견됐습니다. 큰 것은 직경 1m도 넘습니다. 이런 큰 돌을 규칙적으로 놓고, 작은 강돌로 다시 촘촘하게 사이를 메웠는데요. 건축학자에 의하면 이것이 무거운 윗돌의 압력으로, 무덤의 밑부분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천오백년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것 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을까 싶은데, 이런 것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2. 그랭이 공법과 들여쌓기
장군총에 숨어있는 고구려인만의 독특한 건축기법.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10년간 장군총을 연구해 온 한 연구회를 찾았다. 그 곳에서 장군총의 기록필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인터뷰> 서길수 교수 (고구려사람들은 돌을 다루는 마술사다 하는 표현들을 중국 현지사람들이 많이 써요. 가서 보면 실감할 수 있는데, 마치 마음대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을 현장에 가면느낄 수가 있어요)
장군총을 천 오백년이란 세월을 버티게 한 돌의 마술사 고구려인들. 그들의 빼어난 솜씨는 먼저, 돌과 돌 사이의 좀은 틈에서 발견됐다. 그것은 돌과 돌이 맞물린 부분에 만들어진 일종의 홈 같은 것이었다. 그 홈은 모든 돌의 가장자리에서 예외없이 발견됐다. 폭이 약 9센티. 파인 홈의 깊이는 약 5센티. 안쪽은 높게 바깥쪽은 낮게 만든, 매우 정교한 홈이었다. 즉, 돌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밑돌을 놓은 다음, 그 홈에 맞추어 위돌을 정확하게 맞물린 것이다. 이것은 건축기법상 들여쌓기다. 그런데 이 들여쌓기는 원래 무덤을 쌓던 방식이 아니다.
중국대륙 동부와 서부의 경계인 요동 북부. 그런데 바로 그 땅에서 천 년 넘는 세월을 견뎌온 것이 있다. 바로, 고구려의 성이다. 5세기, 고구려가 중국쪽 세력을 막기 위해 1차 방어선으로 쌓은 이 백암성은 구려가 망한 후, 지금까지 버려져 있는 상태. 그러나, 지금도, 성벽과 주요 방어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성벽으로 가는 사람들 뒷모습 이처럼 중국을 능가했던 고구려의 탁월한 축성술, 그 독자적인 기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그것은 성벽의 기단부에서 발견됐다. 그것은 성을 쌓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방식, 바로 들여쌓기였다. 장군총은 바로,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술인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이건하 교수에게로 그렇다면, 실제로 들여쌓기의 견고함은, 어느 정도나 될까. 측정 결과, 장군총은 정확하게 45도 각도로 들여쌓기를 했고, 위로 갈수록 층과 층 사이를 좁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결과를 토대로, 모형을 만들어 충격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결과비교를 위해, 한쪽에 수직쌓기 모형도 함께 만들었다. 벽돌로 만든 모형속에 모래를 채우고, 위에서 충격을 주기로 했다. 수직쌓기로 세운 벽은 두사람이 두번 발을 구르자, 이내 무너져내렸다. 그런데. 두 사람 세 번 뛰고 들여쌓기로 만든 벽은 몇 번을 굴러도,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네사람 함께 뛰고 네 사람이 올라갔을 때도 결과는마찬가지. 결국, 버팀대가 벌어지도록, 들여쌓기로 세운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인터뷰> 이건하교수 (건물이 무너지는 중요원인이 안에서 바깥으로 누르는 측압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렇게 45도 각도로 들여쌓기를 하면 그 측압을 없앨 수가 있는 것이죠)
장군총이 천 오백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견고한 축성방식인 들여쌓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들여쌓기 이외에도 눈길을 끄는 것이 또 있었다.
인터뷰> 서길수 교수 (돌을 놓고, 그 위에 돌을 깍아서 맞추는 그런 것을 건축하는 사람들은 그랭이라고 그렇게 얘길합니다)
그것은 그랭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장군총에서 발견된 그랭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한국 사찰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고찰 불국사. 통일신라 최고의 건축술이 결집된 건축물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그랭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보면, 자연석인데 그 위에 돌을 깍아서 얹었죠)
장군총보다 약 4세기 후에 세워진 불국사 기단부에 똑 같은 모양의 그랭이가 있었다. 장구한 세월, 불당과 전각을 떠받쳐 갈 대들보와 건물의 초석과 기단부를 그랭이로 쌓아 올린 것이다. 목공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난 95년 조선 총독부가 사라진 자리에 경복궁에 서 가장 아름답다는 홍예문이 복원됐다.
인터뷰> 문기현씨 (이걸 다 그랭이 해서 세운거다. 이렇게 기둥과 초석을 그랭이질을 해서 세우면 틈이 없죠)
대궐의 기둥까지도 어김없이 그랭이로 세웠다는 것이다. 그 위력을 알아보기 위해, 그랭이 작업과정을 살펴보았다. 먼저 초석의 표면에 십자로 줄을 그어 중심을 잡는다. 기둥세우고 그리고 기둥을 가운데 맞춰 세운다. 그랭이칼 그랭이 질을 할 때는 두 개의 대나무조각으로 만든 그랭이 칼을 사용한다. 그랭이칼에 먹물을 묻힌 후, 마치 젓가락을 사용하듯, 벌려서, 돌 표면을 따라 그리면, 기둥에 같은 모양의 선이 생긴다. 그 선을 따라 기둥 밑둥지를 깍은다움 돌 위에 빈틈없이 끼워 맞춘다. 장군총도, 같은 방식으로 윗돌과 아랫돌을 단단하게 끼워 맞춘 것이다.
인터뷰> 문기현씨 천 오백년 전에 돌을 그랭이질을 해가지고 짜서 맞추었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랭이공법과 들여쌓기. 장군총이 1500년의 세월 동안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런 고구려인들의 탁월한 건축술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런 곳을 자세히 보면, 이 돌과 이 돌을 맞붙이고 남은 틈새는 이렇게 작은 돌을 꼭 맞도록 짜집기를 한 것 같은데요. 이 작은 틈새 하나도 그냥 두지 않을 만큼, 고구려인들은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이 돌들, 정말 크군요. 길이가 얼마나 될까요. 제 품의 길이가 약 170미터쯤 되니까, 5m가 넘는 셈인데요, 이런 엄청난 크기의 돌을 무려 1100개나 쌓아올렸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 이 많은 돌은 어디서 구했을까요. 그리고 기중기나 파워크레인도 없었던 그 시대에 어떻게 이렇게 높이 쌓았을까요.
3. 장군총을 쌓아라
장군총에서 서북쪽으로 약 16킬로미터 지점. 그곳에 산능선이 암벽에서 암벽으로 이어지는 우산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 흥미로운 것이 발견됐다. 바윗돌 흙보다는 돌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산길은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암벽사이로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길의 끝에 길림성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방기동이 발견해낸 '고구려채석장'이 있었다. 지금도, 곳곳에 쪼갰던 남아 있다. 1500년 전, 그 단단한 화강암을 어떻게 떼어냈을까. 현대식 자동쇄기 설명 요즘 채석장에서 사용되는 것은 벌림장치가 달려있는 발달된 형태의 쇄기.
이 쇄기를 전기드라이버를 이용해 돌 표면에 나란히 박아 넣은 다음, 망치질을 해서 잘라낸다. 그런데, 석공들의 말에 따르면, 돌을 쪼개는 방식은 그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터뷰> 권오달씨 (예나 지금이나, 석공들이 지혜가 있어서 돌을 보면 그 돌이 얼마나 잘 쪼개질 것인지 또 봐서, 결을 보고 결이 무르고 돌이 연하면 작은 쐐기를 쓰고, 돌이 강하고 결이 좋을 때는 큰 쐐기를 쓰는데, 고구려시대처럼 손으로 쐐기를 박을 때는 이것이 좀 더 넓지 않았겠느냐..)
다른 점이 있었다면, 손으로 돌에 쐐기를 박아 넣었을 그 당시에는 쐐기의 크기가 조금 더 컷을 것이라는 것. 그런데, 무게가 평균 15톤이나 되는 무거운 돌을 어떻게 날랐을까. 현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겨울에 비탈길이 얼면 돌을 아래로 굴렸을 것이라고 한다.
인터뷰> 권오달씨 (가능하죠. 겨울에 눈이 와서 얼음이 얼면, 여기다 돌멩이를 놓고, 밑에다가 돌을 바로 굴리면 안내려 오겠지만, 밑에다가, 나무를 넣고, 지금의 스케이트처럼 밀어만 주면, 경사도가 있기 때문에 내려옵니다. 그곳은 겨울이 길고, 얼음이 두껍게 얼기 때문에 작은 힘으로 큰 돌을 옮길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문제는 또 있다. 우산에서 장군총까지는 약 16킬로미터 거리. 어떤 방법으로 돌을 운반했을까.
인터뷰> 이건하 교수 (기중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큰 돌을 옮기는 방법이란, 유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16세기 일본에서 성을 쌓는 모습 이때까지도 큰 돌을 통나무를 깔고 나르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들은 고인돌을 쌓아야 했던 청동기인들. 5세기 고구려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돌을 옮겼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 돌 하나의 높이는 약 80cm. 넉단만 쌓아도 사람의 키를 넘는다. 장군총의 높이는 사람 키의 약 7배. 어떻게 그렇게 높이 쌓아올렸을까. 우리나라 동해안에 나타난 선사시대의 흔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구 선사박물관. 이곳에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청동기 인들이 고인돌의 버팀돌위에 판석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인터뷰> 이건하 교수 (옛날의 성쌓는 방법. 먼저 기단을 쌓은 다음에 둔덕을 만들어서, 석재를 날랐겠죠. 2단, 3단쌓으며, 둔덕을 만들어 쌓았을 것)
즉, 장군총도 고인돌의 판석을 운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기단부를 쌓은 다음, 흙으로 주변에 길을 만들고, 그 위로 돌을 끌어 오르는 방식으로 22단을 쌓아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장군총은 기술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전체 작업량을 계산해 볼 때 약 7만명 가량의 인력과 막대한 물자가 동원됐다는 것이다.
화강암 19000톤(5톤트럭 3800대분), 흙.12,500톤(5톤트럭 2500대분), 총동원인력 : 7만명
인터뷰> 이건하 교수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단순히 기술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경제력과 함께 강력한 왕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죠. 이런 것을 5세기에 고구려가 지었다고 하는 것은, 고구려가 그 당시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돌무덤 하나 쌓는 과정만 봐도, 그 시대 고구려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다 쌓은 장군총 꼭대기에 있습니다. 현재, 장군총의 정상은 이렇게 널찍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요. 여기, 좀 이상한 것이 눈에 띄는군요. 구멍 같은데요. 한번 재볼까요. 직경이 약 9센티. 구멍과 구멍사이의 간격은 약50cm. 이런 가장자리를 쭉 둘러가며 이런 구멍이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 분명 뭐가 있었다는 얘긴데. 이상한 것은 또 있습니다. 잘 다듬어 만든 무덤에 울퉁불퉁한 커다란 자연석을 기대놨군요. 돌 하나의 크기가 제 키의 두 배쯤은 되는 것 같은데……. 참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장군총에서도 보았듯이 고구려인들의 석재기술은 중국 문헌에서도 여러 번 언급될 만큼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1100개나 되는 돌을 정교하게 깎아서 무덤을 만든 고구려인들이 왜 이 바위는 그냥 갖다 세워놓았을까요. 꼭대기의 구멍과, 이 거대한 바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4. 전각과 호석의 수수께끼
장군총이 처음으로 중국학계에 보고된 것은 1905년. 무덤은, 1000여 년 간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목이 무성했다. 그런데 당시, 정상부분에서, 상당수의 기와편이 발견됐다. 그중에는 마치 주름을 잡은 듯, 가장자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누른 흔적이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막기와가 상당수였다. 정교한 무늬의 연화무늬의 수막새도 발견됐다. 그런데, 이런 유물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다. 즉, 장군총의 정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물이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무덤정상의 구멍은, 바로 그 건물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터뷰> 이건하 교수 (이 구멍은 기둥을 세우기 위한 구멍으로는 너무 작습니다. 아마도 철재 또는 목재로 만들어진 난간 정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구멍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건물 주변에 둘렀던 울타리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들어섰을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선 건물의 크기를 추측해보았다.
(건축물은 이 높이 내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높이는 약 4.5미터..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건물은 요 사방 13미터 안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건물은 대략 한 면의 길이가 약 7미터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높이 약 4.5미터. 가로세로의 길이는 약 7미터의 전각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 지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분벽화 속에서 그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각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모임지붕, 팔각지붕,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장군총의 건물은 좀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요동성총 벽화에서 비슷한 건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3층 전각이었다.
(이것이 유일하게 나타나는 중층건물인데 꼭대기 지붕은 3육면 모임지붕이네요. 장군총의 전각도 대략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45도 각도의 사각추 장군총. 그 건물 비례로 볼 때, 장군총의 정상에는 바로 이런 형태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조형미를 완성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장식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단부에 기대놓은 엄청난 바위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위의 크기는 3미터에서 큰 것은 5미터. 무게가 30톤 가까이 된다. 이런 돌들이 기단부 사면에 둘러져 있는데, 현재 발견되는 것은 전부 11개. 그러나 정면에 두 개, 삼면에 세 개씩이다. 그런데 원래 정면에도 돌이 하나 더 있어 모두 12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바위가 없는 무덤 정면의 중앙 기단부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바로 그 부분이 무너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바위가 무덤의 버팀돌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인터뷰> 이건하 교수 (물리적인 버팀돌은 아니다. 이 무덤은 그 자체가 들여쌓기를 해서 매우 정밀한 시공을 한 것이기 때문에 무너질 염려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연석들은 장군총을 보다 웅장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상징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버팀돌이 아니라면 열둘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라 경주의 김유신 묘. 열둘이라는 숫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김유신의 묘는 열두개의 지신, 즉 12지신조각이 등장한다.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묘에 나타난 열둘이라는 숫자는 바로 이 십이지신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았다.
질문 (장군총 둘레에 12개 돌이 있다. 이것이 12지신상과 관계가 있나) 인터뷰> 천진기 연구사 답변 (보니까 자연석을 세 개씩 12개를 돌렸는데요, 12지신상은 8,9세기부터 나타나. 장군총은 5세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태왕릉에서도 확인됐다. 거기에서도 장군총과 똑같은 형태의 자연석이 발견됐다. 축조시기가 거의 같고, 기본적인 무덤양식이 같은 광개토 태왕릉의 바위는, 장군총과 같은 목적으로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동서쪽 면에 다섯 개, 남북쪽 면에는 여섯 개씩, 모두 합하면 22개나 된다. 버팀돌도, 십이지신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집안 시내에서 외곽으로 그 해답의 실마리는 태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에서 보았던 자연석을 쓴 곳이 또 있었다. 살아서는 위대한 군주였고, 죽어서 는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위대한 고구려의 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그것은 바로 광개토태왕비였다. 태왕비는 응회암. 화강암보다 훨씬 연한 돌임에도 불구하고, 글짜를 새겨넣은 표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다듬은 흔적이 없는, 자연석이었던 것이다.
인터뷰> 전호태 교수 (장군총과 가까운 광개토태왕비같은 경우도 우리가 보면 느끼겠지만, 되도록 다듬지 않으려고 한 그런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성을 이용해서 신성한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장군총의 호석도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참 웅장한 모습이군요. 무덤이라기보다는 조형미가 뛰어난 건축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장군총은 위에는 전각을 세우고, 기단분에는 칼을 대지 않은 자연석을 배치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고구려시대에는 먼저 무덤을 쌓고, 그 후에 주인을 모시게 되는데 지금 이 장군총에는 5층에 있는 묘실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관을 어떻게 묘실까지 모셨을까요. 이렇게 무덤을 쌓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흙더미를 쌓아서 길을 만들었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저는 지금 묘실 앞에 와 있습니다. 묘실 안은 과연 어떤 곳인지 제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곳이 묘실인가 봅니다. 현지 중국인들에게 전해져오는 얘기에 의하면, 1800년대 말까지 이곳에 두 개의 붉은 관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묘실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약 5미터. 당시 지어진 다른 적석총에 비해 약 세배정도 넓은 것 같은데요.
벽은 돌을 6단으로 쌓았고, 천장은 가로 세로 약 5미터 정도 크기의 100톤 정도 되는 큰 돌을 지붕처럼 얹진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탁월한 축성술로 지어진,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장군총이라는 이름 때문에 어느 장군의 무덤이라고 추측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광개토태왕비와의 위치 때문에 광개토태왕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수왕릉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5.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다
무덤의 주인을 추적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무덤의 형식이다. 고구려의 무덤형식은 강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적석총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이어 기단부가 있는 방단적석묘, 기단부는 물론, 무덤 전체를 돌로 쌓아올린 방단개제적석묘, 흙으로 덮어 만든 봉토석실묘와 봉토동실묘의 형태로 변해간다. 그런데 장군총은 방단개제석실묘. 고구려의 전통적인 왕릉의 형태다. 그런데 장군총은 3세기부터 나타나는 무덤형식. 5세기에는 이미 벽화가 있는 봉토석실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에 적석총으로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 전호태 교수 (이런 적석총이 5세기에 나타나는 이유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묘제가 적석총인데, 왕실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묘제형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렵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 듭니다. 왜냐하면 왕실이 갖고 있는 전통과 제도는 그 자체가 왕실의 권위이자 신앙,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적석총형태를 지속하면서, 보다 발달된 형태로, 그리고 봉토석실묘의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군총의 주인을 가려내는 또 한 가지 단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장군총의 위치. 장군총은 왕릉급 무덤중에 태왕릉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런데 장군총과 가장 가까이 있는 적석총인 이 태왕릉은 집안의 무덤 떼 중 두 번째로 크다. 광개토태왕비와는 불과 1킬로미터. 발굴 당시 태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하나 발견됐다. 태왕이라는 글씨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왕 중에 일생에 걸쳐, 일관되게 태왕이라 불린 사람은 단 한사람. 광개토태왕뿐이다. 장군총은 바로 이 광개토태왕과 가장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장수왕의 무덤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인터뷰> 신형식 교수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장군총의 모습을 보면, 장수왕 때 상당히 번성했거든요. 부유한 나라는 돈황지역입니다. 서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일 때. 장수왕릉의 가능성을 생각해본다면 그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했다. 65년간, 평양에서 살다가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 장수왕의 무덤이 국내성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중국의 길림성의 고고학자 방기동이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나섰다. 나오면 옛 고구려 풍습에 따르면, 결혼하면 수의를 짓고, 왕들은 즉위 초부터 자신의 무덤을 짓는다는 것이다. 즉, 장수왕도 국내성에 있을 때 이미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서길수 교수 (장수왕릉이 틀림없다고 했을 때, 어떻게 국내성에 있는 문제점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초상 준비한다. 다시 말하면 태어나서부터 릉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수왕은 어디서 태어났느냐, 국내성에서. 그러니까 장군총이 장수왕릉으로 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서 아직 반론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장수왕. 그에 관한 우리의 상식은 간단합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구려 최대의 영토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사람.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에 비해 강하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5세기 장수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많은 기록들 중에 당시 중국의 가장 강대국이었던 위나라의 사서에 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위서의 기록 “고구려 장수왕이 죽으니 중국황제가 흰 베옷을 입고, 동궁에 나가 곡을 했다.” (高麗王死 白布深衣 於城東 爲盡一哀)
중국의 황제가 베옷을 입고 통곡을 했다?
6. 위왕의 제사와 장수왕의 국제적 위치
장수왕의 죽음에 관한 위나라 황제의 조처가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관련 기록 하나를 찾아보았다. 조선 태조 1년, 명의 황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실록을 살펴보면, 이거인을 보내 조문하게 했다는, 비교적 간단한 기록이 등장한다. 당시 명과 조선이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태도는 상당히 의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수왕이 죽었을 때, 중국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중국, 즉 위나라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다.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으나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 왕은 특별한 애도식을 준비시켰다)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으나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 왕은 특별한 애도의식을 준비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위나라 황제는 장수왕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특별한 절차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 신형식 교수 (고구려의 세력도 인정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장수왕시대의 고구려의 위세라는 것은, 서방세계를 다 통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표시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국에 대해서 주체성은 올라갈수록 강했구요. 그런 면에서 장수왕은 당당했던 고구려의 모습을 과시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눈에 비친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을까. 427년,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장수왕은 한반도 남부의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그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화해나간다. 중원고구려비에 나오는 충주지역의 고구려장수가 신라왕을 불러서 옷을 선물했다는 기록은, 당시 한반도내 고구려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이와 함께 장수왕은 고구려의 국적인 영향력을 높여갔다. 그 발판이 된 것이 바로 평양천도. 그것은 대동강연안으로 발달한 드넓은 평야지대를 발판으로, 농경국가로 변신하기 위한 경제적인 천도였다.
인터뷰> 신형식 교수 (그러니까, 이제 고구려가 북방민족의 성격에서 탈피해서 이런 해양적인 성격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남방의 벼농사의 문제, 그것을 확보해서 고구려로 하여금 경제적인 부를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 아닐까...)
농경국가로의 변신, 그 중요성은 당시 주변국의 상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모국가였던 유연과 송은 북위와의 불편한 관계에 있어, 고구려와 교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이런 상황을 이용, 이들과 농산물을 교역하면서 유대관계 맺고 북위를 고립시켰다. 뿐만 아니라, 실리적인 외교에 밝았던 장수왕은 유연과 지두우를 분할 지배했다. 그 사건은 주변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지두우는 동북아의 주요 말산지였다. 고구려는 지두우를 차지함으로써, 기병을 조직하고 주변국과의 유대관계를 맺는데 활용했다. 장수왕은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 남부의 송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런 경제외교로, 전쟁을 하지 않고도, 주변국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했고, 이런 고구려의 영향력을 북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7. 수레를 통해서 본, 고구려 최대의 전성기, 장수왕시대
고구려가 5세기 동아시아의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백성들이 입장에서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야 했던 광개토태왕시대보다는 풍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장수왕시대가 더 행복했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물중의 하나인 무용총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했던 고구려의 문화를 말해주는 벽화고분도, 장수왕시대의 풍요와 평화 속에서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벽화에는 그 시대 고구려의 힘을 말해주는 흥미로운 단서가 숨어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 그 단서는, 바로 이런 수렙니다. 당시에는 이런 수레를 주로 소가 끌었던 모양이군요. 이 벽과 덮개는 가죽과 비단으로 만들었고, 모양 자체도 조형미가 있는 아름다운 마차인데요. 그런데 이 바퀴가 상당히 큽니다. 지름이 1m가 넘구요, 둘레에는 이렇게 철로 테를 둘렀군요. 방사형이라고 부르는 이 바퀴살도 촘촘히 박힌, 상당히 발달된 형태의 수레인데요. 이런 바퀴를 단 수레라면, 상당히 먼거리까지 물건을 나르기도 쉬웠겠습니다. 그런데 1500년 전에 그려진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이런 수레가 약 40여개나 등장합니다. 수레, 그 시대 고구려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요.
가장 화려한 고분벽화중의 하나인 오회분 오호묘의 벽화. 거기에는 바퀴의 신이 등장한다. 오회분 사호묘에도 바퀴의 신이 보인다. 고구려인에게 수레가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말해준다. 벽화에 등장하는 수레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커다란 바퀴의 매우 탄탄해 보이는 짐차에서부터 귀족들이 타던 화려한 수레까지 약 40여 대가 등장한다.
인터뷰> 정동찬씨 (살이 붙은 바퀴에다가 쇠테까지 씌운단 말이죠. 이것은 대단한 발전이고, 당시로서는 첨단과학 기술이예요. 이것이 1960년대까지 타이어가 나오기 전까지 다 그대로 ?거든요. 그러니까. 물건을 대량으로 옮길 수가 있고, 도로망이 자연스럽게 정비가 되는 것...)
수레가 있었다는 것은, 도로가 그만큼 잘 정비돼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구려는 이미 3, 4세기부터, 하천제방 도로를 중심으로 전국의 도로망을 확보해 나갔다. 그래서 장수왕 시대엔 평양성과 전국각처를 잇는 도로망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인터뷰> 여호규씨 (지방의 물자와 노동력을 중앙으로 운반하고 운송하기 위해서는 원활하게 운송할 수 있는 도로망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고대국가에 있어서는 지방통치 조직을 정비하면서 지방통치 조직과 아울러서 이제 각 지방의 중심지와 중심지를 연결하는 전국적인 도로망을 확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장수왕시대에 건설된 평양의 안학궁성 터에서도 발견됐다. 1935년 발굴조사 된, 안학궁성의 문지에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다. 그것은, 약 28cm 폭의 홈이 발견됐다. 홈과 홈의 간격은 약 145cm. 조사결과 그것은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임이 증명됐다. 그로부터 약 50년 뒤에는 평양시 외곽, 안학궁성에서 멀지 않은 대동강변에서 또 하나의 흔적이 발견됐다. 대동강의 양쪽 해안에서 발견된 오래된 나무 조각들, 그것은 바로 337m에 이르는 고구려 나무다리 유적이었다. 18세기에도 강에 다리가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1500년 전에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인터뷰> 정동찬씨 (정보통신의 발달이라는 것은 국가주권, 강대국의 요건에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강대국으로서 주변국가를 아우르고 했던 부분도, 바로 좋은 수레, 그리고 아주 잘 닦인 도로망, 이런 것들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도로망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국내외교역을 확장해 나갔고, 경제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선진국가로 성장했다.
위서기록 遼東南一千餘里民戶參倍於前 (고구려의 경계는 요동남쪽 천리에 이르고인구는 전보다 세배나 늘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구가 세배나 늘어날 정도였다고 중국 의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영토확장으로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전성기, 그것은 농업을 바탕으로 한 장수왕의 탁월한 경제외교로 완성됐다. 이들이 120년간에 걸쳐 이록한 국가적 기틀은, 이후 200년간의 평화와 안정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나라, 독자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 그리고, 우리 민족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경영했던 제국. 지난주부터 두 시간에 걸쳐서 본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시대의 고구려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사실, 고구려를 얘기할 때마다, 특히 이 시기의 고구려를 다시 볼 때마다. 웬지,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를 다시 보는 것은, 단순히 화려했던 과거 한 때의 기억을 돌아보는 감상에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천 오백년의 세월을 넘어, 그 시대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고구려인들의 힘과 그 진취적인 기상이 지금의 우리에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그래서, 숨 가쁜 오늘을 헤쳐 나갈 힘을 얻고 싶은 때문일 것입니다.
* 내용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장군총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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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