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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
다 같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지만 섭씨 500도에 구우면 된장 뚝배기 같은 토기가 되고, 섭씨 1000도에 구우면 도기가 되고, 섭씨 2000도에 구우면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재료지만, 그 굽는 온도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500도에 구운 토기와 2000도에 구운 자기는 그 가치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고려 청자, 이조 백자는 대단한 보물입니다.
우리 모두 같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고 같은 영혼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가치,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얼마나 들어가 있느냐,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토기, 도기, 자기는 다르듯이, 다 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 앞에 자기 같은 귀한 사람도 있고, 도기 같은 사람도 있고, 흙(토기)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그릇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점점 더 깊은 은혜 속으로, 성령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시 성령의 깊은 은혜, 뜨거운 은혜에 들어가서 토기는 도기가 되고, 도기는 자기가 되는 축복의 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 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글라우디스는 "직업은 의사요, 직업은 행복의 본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없으면 병이 오는데 열심히 일하면 건강하고, 일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일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일할 때도 좋지만 일을 끝냈을 때의 그 기쁨이 한이 없습니다.
저는 한 주간의 사역을 끝낸 주일 밤에는 날아갈 것 같이 기쁩니다. 몸은 파김치가 되어도 영혼은 날아갈 것 같습니다.
'아, 한 주간의 사역을 끝냈구나!'
이 맛은 저밖에 모릅니다. 제 아내도 모릅니다.
하루 일을 끝냈을 때의 그 보람이 얼마나 얼마나 큰지….
일은 보람이요, 즐거움이요, 건강이요, 행복이요, 또 축복의 젖줄입니다.
IMF 직후에 갑자기 실직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충격을 받는 일이 있는데,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랍니다. 어떤 사고로 아들이 죽고 딸이 죽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이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도 충격을 받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랍니다. 그 충격을 100으로 보면, 갑자기 실직 당했을 때 받는 충격은 70이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죽는 일 다음으로 큰 인생의 충격이 바로 실직인 것입니다.
실직을 당하면 정신적 아픔과 그 짐, 부담이 한이 없고,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실직자들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실직자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심으로 일자리가 많아져 온 국민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일을 찾지 못한 분이 계시면 하나님께서 불원간에 좋은 일거리를 주시길 축원합니다. .
기도하고, 그리고 찾고, 두드려서 일거리를 찾아야 됩니다.
일이 있는 사람, 직장이 있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이 있다는 것,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하면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근로자, 피고용인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경영주, 상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환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환들아, 두려워함으로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복하라."
이 사환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케타이'인데, 둘로스와는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종, 노예는 거의 둘로스를 가리키는데, 사환은 둘로스가 아니고 오이케타이입니다. 사환은 노예가 아닙니다. 노예는 품삯도 받지 않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죽도록 일을 해도 십 원도 받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됩니까?
빚을 많이 져서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그 자녀들도 노예가 됩니다.
여러분은 빚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빚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옷도 알맞게 사 입고, 생활비를 줄여야 합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안 됩니다. 수입이 50만 원이면 50만 원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100만 원이면 100만 원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수입이 아무리 적어도 미래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수입이 50만 원인데 70만 원을 쓰고, 수입이 100만 원인데 120만 원을 쓰면 나중에 노예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노예는 없을지라도 빚지면 그 사람 앞에서 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 포로는 무조건 끌려가서 노예가 됩니다. 전쟁에 지면 아픈 일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고, 전쟁해도 이기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환은 노예가 아니라 돈을 받고 일하는 하인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종업원, 회사의 근로자들도 사환이라 보면 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사환들에게 상전, 육신의 주인들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내가 돈을 받고 일하는 사환이라도 주인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노예도 포함됩니다. 노예도 모든 주인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6500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노예가 시민들보다 4배나 많았습니다. 로마시 안에만 65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노예들의 주인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황소 한 마리의 값으로 주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다 같지 않습니까? 예수 안에서는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
얼굴은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
신분은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
주인이나 노예나 교회에서는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주인은 믿음이 약해서 집사님인데 노예는 믿음이 좋아서 안수 집사님인 경우도 있고, 주인은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데 노예는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어제와 달라졌습니다. 또 집에서는 종이지만 교회에 오면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을 높이지 않고 맞먹으려고 하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종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주인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물론 노예 제도와 같은 악한 제도는 없어져야 되지만, 그 당시에는 사회 속에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제도가 없어지기까지는 노예들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환들에게 "사환들아,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을 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나 사환이나 주인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모든 직장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사의 경영주나 직장의 상사들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배나 윗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자세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자녀가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공직 사회에서나 일반 단체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을 존중히 여기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 말씀하십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상전들에게 주님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사의 과장님이나 부장님이나 이사님이나 상무님이나 사장님에게 주님을 대하듯 대하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입니까? 그 사람만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직장은 우리가 우연히 들어간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일터이기 때문에 그 위에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의 상전이 까다롭든 까다롭지 않든,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직장의 상사나 경영주에게 악담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 사장님, 우리 부장님, 우리 과장님."하고 반듯하게 말하는 사람은 회사의 보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우리 목사님."하는 교인이 참 교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치시는 교훈은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어느 자리에서나 상사를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상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로새서 4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또 에베소서 6장 9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
종들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종들에게는 물론 상전들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회장이나 사장이나 중역들도 하나님 앞에는 똑같은 종입니다. 상전들도 하나님 앞에는 똑같은 사람이고, 청지기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경영주도 하나님 앞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원들, 하나님께서 내 일터에 보내주신 직원들.'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경영주와 근로자가 서로 존중히 여길 때 그 회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교인들만 목사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도 교인들을 존중히 여기고, 장로님들만 목사님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도 장로님들을 중히 여길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중히 여기는 회사가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경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됩니다.
반도체 사업을 보십시오. 저는 반도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우리 나라 최고 사업이라고 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 사업이 반도체 사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업이 지금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경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에서나 땅에서나 친구 관계, 이웃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이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람들을 살폈답니다. 마침 한 사람을 만나서 물었답니다.
"당신 아이큐가 얼마요?"
"180이오."
아이큐가 180이라는 말을 듣고 아인슈타인이 매우 반가워하며 말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물었습니다.
"당신 아이큐가 얼마요?"
"130이오."
그 사람의 아이큐가 자신의 아이큐와 차이가 나니 아인슈타인이 약간 실망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과는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요."
얼마 후에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이큐가 얼마요?"
"80이오."
아인슈타인이 아주 낙담했지만 말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상대성 이론이나 정치 이야기는 하지 못해도 경제 이야기는 할 수 있겠군요."
무슨 뜻입니까? 경제는 아이큐가 아무리 높은 사람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식 투자할 때, 머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의 조언을 받아도 망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경제는 머리 좋은 사람이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을 받는 회사는 어떤 회사입니까?
경영주는 근로자를 존중히 여기고, 근로자는 경영주를 존중히 여기는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홛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8절에 말씀하십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회사에서 일하면 회사의 사장님이 월급을 주지만, 그것은 잠시의 일, 일시적인 것이고, 참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순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의 일을 너무나 잘 하니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가정 총무가 되어서도 가정 살림을 잘 살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전옥, 옥사장에게 복종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을 잘 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도 애굽 왕에게도 복종을 잘 했습니다. 80년간 총리로 일하면서 왕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복종을 잘 했습니다. 그러니 왕이 자기 나라 국민도 아닌, 애굽 국민도 아닌 이스라엘 사람인 요셉을 총리로 세워 놓고 그가 죽을 때까지 모든 국사를 그에게 맡기고 자기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도장까지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회사에서 경영주나 상사의 말에 복종할 때 주님께 하듯 해서 그분들에게 "저 사람에게는 무엇을 맡겨도 틀림없다."하는 신뢰를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회사의 방침대로 순종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 순종하듯 회사의 방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일을 잘 하나!"하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설혹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느 회사에서든지 무조건 데리고 가려고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참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데모에 앞장서는 사람이 교인이고, 회사의 문제를 캐내고 약점을 캐내어 회사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 교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나라의 중소기업 중에 데모를 많이 한 기업은 거의 문을 닫았습니다. 문을 닫지 않았어도 데모하느라 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 그 기업의 일감을 다른 기업에서 가져가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나가게 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기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시의 내 이익을 위해 데모하다가 결국 회사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큰 회사들 중에도 데모만 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건재했을 텐데, 데모했다가 망한 회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도 이제 살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사 분규가 많으니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국가적인 손실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데모하라는 말씀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주인에게 열 번이나 사기를 당했습니다. 야곱의 주인이 열 번이나 품삯을 사기쳤습니다. 그래도 그는 참았습니다. 20년간 머슴살이를 했어도 집 한 채 없었지만 참으니, 하나님께서 꿈에 지혜를 주셨습니다. 꿈대로 하니 불과 얼마 후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결국 우리는 회사 일을 해도 사장님을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의 주인을 보고, 상사를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을 믿으며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의 경영주는 우상을 섬겨도 우리는 그 회사가 하나님 회사인 것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직장에서 순복하는 아주 겸손한 그리스도인, '아, 기독교인 직원에게는 무엇을 맡겨도 되는구나.'라는 신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악을 행해 벌을 받는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회사 물건을 어떻게 하거나, 부정한 짓을 해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는 것, 그것은 정말 아픈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악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빅토르위고의 그 레미제라블을 아시지요?
주인공 장발장이 너무 가난하여 굶는 가족을 위해 빵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는데, 너무 억울했습니다.
'빵 하나를 훔쳤는데 이렇게 중형을 주다니!'
그는 탈옥을 시도하다가 죄 값만 더 많아져 7년간 감옥에서 고생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왔으나 전과자인 그를 고용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배가 고픈 그는 어쩔 수 없이 노 주교를 찾아갔습니다. 노 주교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해 주었습니다. 인간 대접을 해 주고, 잠까지 재워 주었습니다.
자리에 누운 장발장의 눈에 은촛대가 보였습니다. 큰 은촛대를 팔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돈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주교에게 미안했지만, 주교가 잠을 자는 시간에 은촛대를 갖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만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훔쳤나?"
"주교님 댁에서 훔쳤습니다."
경찰이 그를 데리고 주교의 집으로 갔습니다.
"주교님! 도둑놈을 잡아 왔습니다. 은촛대 도둑을 잡아왔습니다."
그때 노 주교가 말했습니다.
"오, 경찰관.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이것은 어제 밤에 내가 이 사람에게 준 것이오. 이 사람이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갔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이것은 내가 이 사람에게 준 것이오."
그 순간, 장발장은 온 몸의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경찰관이 가고 난 후에 장발장과 노 주교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이 은촛대로 자네 영혼을 샀네. 이제는 결코 악에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게."
7년간 감옥살이를 해도 변하지 않았는데, 노 주교의 그 말에 장발장은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은촛대로 자네 영혼을 샀네.'라는 말에 그는 중생합니다.
우리는 은촛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사신 바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악에 속할 수 없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아무리 기회가 있어도 부정을 행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해야 됩니다.
직장에서의 선은 무엇입니까?
직장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가 살까? 어떻게 해서 우리 회사를 살릴까?'를 생각하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봉사하는 것입니다.
경기 침체로 영국이 흔들리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도 직전의 회사에 다니는 두 기독교인 여공이 식사 후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회사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까?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회사를 한번 일으켜 보자.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와서 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자. 회사를 위해 무급으로 일을 해 보자."
그래서 두 여공이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상사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나 일찍 와서 물건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도 남아 일을 하면서 회사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상사가 그 여공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서 열심히 일을 하는가?"
"저희는 기독교인입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작은 힘이지만 저희들의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습니다."
상사는 두 여공이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영국 전역에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모든 근로자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회사를 살려보자."
그래서 모든 회사의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영국 경제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기업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우리 나라의 기업을 살려야 합니다.
일본의 기업보다, 미국의 기업보다 우리 기업이 더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회사의 근로자들은 회사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물건 하나를 만들 때도 내 것, 아니, 하나님의 것을 만드는 것처럼 만들고, 회사를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경영주들도 사원들을 위해 마음을 써야 합니다. 사원들을 대할 때 하나님 대하듯 잘 대해야 하고, 사원들이 행복한지, 즐겁게 일하는지를 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일하는 첫째 목적은 월급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명을 받고 회사로 선교하러 나온 사명자들입니다.
우리 선교단원들이 러시아에 단기 선교를 갑니다만, 선교하러 가는 그것만 선교가 아닙니다. 내가 일하는 그 직장, 그 자리가 나의 선교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경영주라면 '우리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내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텐데…', 예수님을 믿는 근로자라면 '회사에 충성하고 회사를 잘 섬기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장님과 상사들과 동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텐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무런 죄 없이 죄인이 되시고, 그 힘든 고난을 참으신 것은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의 이야기에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면 되는데, 예수님을 어려움에 빠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그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시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그 글이 무슨 글이었는지, 퀘스천 마크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것은 방언과 같아서 그 글을 본 사람들마다 자기 죄가 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얼굴이 발개져서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글을 보았으면 모두 도망갔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도망간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그 죄를 예수님께서 덮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죄 지은 자는 벌해야 하는데, 벌하지 않는 것은 부정입니다. 그러니 간음한 여인의 죄를 예수님께서 덮어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말씀은 창조적인 삶을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죄 짓지 말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일은 죽어라 하고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아도, 잘못을 덮어쓰고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땅에서도 채워 주시고 하늘에서도 상을 내려 주십니다.
내 생각, 내 철학으로 직장 생활을 하지 맙시다.
내 경영 마인드로 회사를 경영하지 맙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직장 생활하고,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회사를 경영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나 때문에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직장이 예수님의 직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 단기 선교팀 여러분, 큰 역사를 일으키고 큰 열매를 맺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러시아에 가지 않는 우리도 여기에서 선교 열매를 맺는 역사를 일으키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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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
2001.7.22 주일 밤예배(베드로전서 2:18-21 )
다 같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지만 섭씨 500도에 구우면 된장 뚝배기 같은 토기가 되고, 섭씨 1000도에 구우면 도기가 되고, 섭씨 2000도에 구우면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재료지만, 그 굽는 온도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500도에 구운 토기와 2000도에 구운 자기는 그 가치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고려 청자, 이조 백자는 대단한 보물입니다.
우리 모두 같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고 같은 영혼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가치,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얼마나 들어가 있느냐,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토기, 도기, 자기는 다르듯이, 다 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 앞에 자기 같은 귀한 사람도 있고, 도기 같은 사람도 있고, 흙(토기)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그릇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점점 더 깊은 은혜 속으로, 성령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시 성령의 깊은 은혜, 뜨거운 은혜에 들어가서 토기는 도기가 되고, 도기는 자기가 되는 축복의 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 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글라우디스는 "직업은 의사요, 직업은 행복의 본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없으면 병이 오는데 열심히 일하면 건강하고, 일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일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일할 때도 좋지만 일을 끝냈을 때의 그 기쁨이 한이 없습니다.
저는 한 주간의 사역을 끝낸 주일 밤에는 날아갈 것 같이 기쁩니다. 몸은 파김치가 되어도 영혼은 날아갈 것 같습니다.
'아, 한 주간의 사역을 끝냈구나!'
이 맛은 저밖에 모릅니다. 제 아내도 모릅니다.
하루 일을 끝냈을 때의 그 보람이 얼마나 얼마나 큰지….
일은 보람이요, 즐거움이요, 건강이요, 행복이요, 또 축복의 젖줄입니다.
IMF 직후에 갑자기 실직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충격을 받는 일이 있는데,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랍니다. 어떤 사고로 아들이 죽고 딸이 죽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이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도 충격을 받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랍니다. 그 충격을 100으로 보면, 갑자기 실직 당했을 때 받는 충격은 70이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죽는 일 다음으로 큰 인생의 충격이 바로 실직인 것입니다.
실직을 당하면 정신적 아픔과 그 짐, 부담이 한이 없고,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실직자들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실직자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심으로 일자리가 많아져 온 국민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일을 찾지 못한 분이 계시면 하나님께서 불원간에 좋은 일거리를 주시길 축원합니다. .
기도하고, 그리고 찾고, 두드려서 일거리를 찾아야 됩니다.
일이 있는 사람, 직장이 있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이 있다는 것,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하면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근로자, 피고용인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경영주, 상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환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환들아, 두려워함으로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복하라."
이 사환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케타이'인데, 둘로스와는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종, 노예는 거의 둘로스를 가리키는데, 사환은 둘로스가 아니고 오이케타이입니다. 사환은 노예가 아닙니다. 노예는 품삯도 받지 않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죽도록 일을 해도 십 원도 받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됩니까?
빚을 많이 져서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그 자녀들도 노예가 됩니다.
여러분은 빚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빚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옷도 알맞게 사 입고, 생활비를 줄여야 합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안 됩니다. 수입이 50만 원이면 50만 원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100만 원이면 100만 원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수입이 아무리 적어도 미래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수입이 50만 원인데 70만 원을 쓰고, 수입이 100만 원인데 120만 원을 쓰면 나중에 노예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노예는 없을지라도 빚지면 그 사람 앞에서 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 포로는 무조건 끌려가서 노예가 됩니다. 전쟁에 지면 아픈 일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고, 전쟁해도 이기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환은 노예가 아니라 돈을 받고 일하는 하인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종업원, 회사의 근로자들도 사환이라 보면 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사환들에게 상전, 육신의 주인들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내가 돈을 받고 일하는 사환이라도 주인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노예도 포함됩니다. 노예도 모든 주인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6500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노예가 시민들보다 4배나 많았습니다. 로마시 안에만 65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노예들의 주인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황소 한 마리의 값으로 주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다 같지 않습니까? 예수 안에서는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
얼굴은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
신분은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
주인이나 노예나 교회에서는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주인은 믿음이 약해서 집사님인데 노예는 믿음이 좋아서 안수 집사님인 경우도 있고, 주인은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데 노예는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어제와 달라졌습니다. 또 집에서는 종이지만 교회에 오면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을 높이지 않고 맞먹으려고 하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종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주인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물론 노예 제도와 같은 악한 제도는 없어져야 되지만, 그 당시에는 사회 속에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제도가 없어지기까지는 노예들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환들에게 "사환들아,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을 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나 사환이나 주인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모든 직장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사의 경영주나 직장의 상사들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배나 윗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자세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자녀가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공직 사회에서나 일반 단체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을 존중히 여기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 말씀하십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상전들에게 주님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사의 과장님이나 부장님이나 이사님이나 상무님이나 사장님에게 주님을 대하듯 대하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입니까? 그 사람만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직장은 우리가 우연히 들어간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일터이기 때문에 그 위에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의 상전이 까다롭든 까다롭지 않든,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직장의 상사나 경영주에게 악담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 사장님, 우리 부장님, 우리 과장님."하고 반듯하게 말하는 사람은 회사의 보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우리 목사님."하는 교인이 참 교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치시는 교훈은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어느 자리에서나 상사를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상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로새서 4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또 에베소서 6장 9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
종들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종들에게는 물론 상전들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회장이나 사장이나 중역들도 하나님 앞에는 똑같은 종입니다. 상전들도 하나님 앞에는 똑같은 사람이고, 청지기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경영주도 하나님 앞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원들, 하나님께서 내 일터에 보내주신 직원들.'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경영주와 근로자가 서로 존중히 여길 때 그 회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교인들만 목사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도 교인들을 존중히 여기고, 장로님들만 목사님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도 장로님들을 중히 여길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중히 여기는 회사가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경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됩니다.
반도체 사업을 보십시오. 저는 반도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우리 나라 최고 사업이라고 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 사업이 반도체 사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업이 지금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경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에서나 땅에서나 친구 관계, 이웃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이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람들을 살폈답니다. 마침 한 사람을 만나서 물었답니다.
"당신 아이큐가 얼마요?"
"180이오."
아이큐가 180이라는 말을 듣고 아인슈타인이 매우 반가워하며 말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물었습니다.
"당신 아이큐가 얼마요?"
"130이오."
그 사람의 아이큐가 자신의 아이큐와 차이가 나니 아인슈타인이 약간 실망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과는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요."
얼마 후에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이큐가 얼마요?"
"80이오."
아인슈타인이 아주 낙담했지만 말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상대성 이론이나 정치 이야기는 하지 못해도 경제 이야기는 할 수 있겠군요."
무슨 뜻입니까? 경제는 아이큐가 아무리 높은 사람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식 투자할 때, 머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의 조언을 받아도 망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경제는 머리 좋은 사람이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을 받는 회사는 어떤 회사입니까?
경영주는 근로자를 존중히 여기고, 근로자는 경영주를 존중히 여기는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홛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8절에 말씀하십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회사에서 일하면 회사의 사장님이 월급을 주지만, 그것은 잠시의 일, 일시적인 것이고, 참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순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의 일을 너무나 잘 하니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가정 총무가 되어서도 가정 살림을 잘 살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전옥, 옥사장에게 복종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을 잘 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도 애굽 왕에게도 복종을 잘 했습니다. 80년간 총리로 일하면서 왕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복종을 잘 했습니다. 그러니 왕이 자기 나라 국민도 아닌, 애굽 국민도 아닌 이스라엘 사람인 요셉을 총리로 세워 놓고 그가 죽을 때까지 모든 국사를 그에게 맡기고 자기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도장까지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회사에서 경영주나 상사의 말에 복종할 때 주님께 하듯 해서 그분들에게 "저 사람에게는 무엇을 맡겨도 틀림없다."하는 신뢰를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회사의 방침대로 순종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 순종하듯 회사의 방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일을 잘 하나!"하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설혹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느 회사에서든지 무조건 데리고 가려고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참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데모에 앞장서는 사람이 교인이고, 회사의 문제를 캐내고 약점을 캐내어 회사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 교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나라의 중소기업 중에 데모를 많이 한 기업은 거의 문을 닫았습니다. 문을 닫지 않았어도 데모하느라 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 그 기업의 일감을 다른 기업에서 가져가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나가게 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기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시의 내 이익을 위해 데모하다가 결국 회사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큰 회사들 중에도 데모만 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건재했을 텐데, 데모했다가 망한 회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도 이제 살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사 분규가 많으니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국가적인 손실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데모하라는 말씀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주인에게 열 번이나 사기를 당했습니다. 야곱의 주인이 열 번이나 품삯을 사기쳤습니다. 그래도 그는 참았습니다. 20년간 머슴살이를 했어도 집 한 채 없었지만 참으니, 하나님께서 꿈에 지혜를 주셨습니다. 꿈대로 하니 불과 얼마 후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결국 우리는 회사 일을 해도 사장님을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의 주인을 보고, 상사를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을 믿으며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의 경영주는 우상을 섬겨도 우리는 그 회사가 하나님 회사인 것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직장에서 순복하는 아주 겸손한 그리스도인, '아, 기독교인 직원에게는 무엇을 맡겨도 되는구나.'라는 신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악을 행해 벌을 받는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회사 물건을 어떻게 하거나, 부정한 짓을 해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는 것, 그것은 정말 아픈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악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빅토르위고의 그 레미제라블을 아시지요?
주인공 장발장이 너무 가난하여 굶는 가족을 위해 빵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는데, 너무 억울했습니다.
'빵 하나를 훔쳤는데 이렇게 중형을 주다니!'
그는 탈옥을 시도하다가 죄 값만 더 많아져 7년간 감옥에서 고생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왔으나 전과자인 그를 고용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배가 고픈 그는 어쩔 수 없이 노 주교를 찾아갔습니다. 노 주교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해 주었습니다. 인간 대접을 해 주고, 잠까지 재워 주었습니다.
자리에 누운 장발장의 눈에 은촛대가 보였습니다. 큰 은촛대를 팔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돈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주교에게 미안했지만, 주교가 잠을 자는 시간에 은촛대를 갖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만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훔쳤나?"
"주교님 댁에서 훔쳤습니다."
경찰이 그를 데리고 주교의 집으로 갔습니다.
"주교님! 도둑놈을 잡아 왔습니다. 은촛대 도둑을 잡아왔습니다."
그때 노 주교가 말했습니다.
"오, 경찰관.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이것은 어제 밤에 내가 이 사람에게 준 것이오. 이 사람이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갔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이것은 내가 이 사람에게 준 것이오."
그 순간, 장발장은 온 몸의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경찰관이 가고 난 후에 장발장과 노 주교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이 은촛대로 자네 영혼을 샀네. 이제는 결코 악에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게."
7년간 감옥살이를 해도 변하지 않았는데, 노 주교의 그 말에 장발장은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은촛대로 자네 영혼을 샀네.'라는 말에 그는 중생합니다.
우리는 은촛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사신 바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악에 속할 수 없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아무리 기회가 있어도 부정을 행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해야 됩니다.
직장에서의 선은 무엇입니까?
직장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가 살까? 어떻게 해서 우리 회사를 살릴까?'를 생각하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봉사하는 것입니다.
경기 침체로 영국이 흔들리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도 직전의 회사에 다니는 두 기독교인 여공이 식사 후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회사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까?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회사를 한번 일으켜 보자.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와서 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자. 회사를 위해 무급으로 일을 해 보자."
그래서 두 여공이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상사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나 일찍 와서 물건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도 남아 일을 하면서 회사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상사가 그 여공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서 열심히 일을 하는가?"
"저희는 기독교인입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작은 힘이지만 저희들의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습니다."
상사는 두 여공이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영국 전역에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모든 근로자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회사를 살려보자."
그래서 모든 회사의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영국 경제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기업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우리 나라의 기업을 살려야 합니다.
일본의 기업보다, 미국의 기업보다 우리 기업이 더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회사의 근로자들은 회사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물건 하나를 만들 때도 내 것, 아니, 하나님의 것을 만드는 것처럼 만들고, 회사를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경영주들도 사원들을 위해 마음을 써야 합니다. 사원들을 대할 때 하나님 대하듯 잘 대해야 하고, 사원들이 행복한지, 즐겁게 일하는지를 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일하는 첫째 목적은 월급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명을 받고 회사로 선교하러 나온 사명자들입니다.
우리 선교단원들이 러시아에 단기 선교를 갑니다만, 선교하러 가는 그것만 선교가 아닙니다. 내가 일하는 그 직장, 그 자리가 나의 선교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경영주라면 '우리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내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텐데…', 예수님을 믿는 근로자라면 '회사에 충성하고 회사를 잘 섬기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장님과 상사들과 동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텐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무런 죄 없이 죄인이 되시고, 그 힘든 고난을 참으신 것은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의 이야기에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면 되는데, 예수님을 어려움에 빠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그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시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그 글이 무슨 글이었는지, 퀘스천 마크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것은 방언과 같아서 그 글을 본 사람들마다 자기 죄가 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얼굴이 발개져서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글을 보았으면 모두 도망갔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도망간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그 죄를 예수님께서 덮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죄 지은 자는 벌해야 하는데, 벌하지 않는 것은 부정입니다. 그러니 간음한 여인의 죄를 예수님께서 덮어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말씀은 창조적인 삶을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죄 짓지 말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일은 죽어라 하고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아도, 잘못을 덮어쓰고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땅에서도 채워 주시고 하늘에서도 상을 내려 주십니다.
내 생각, 내 철학으로 직장 생활을 하지 맙시다.
내 경영 마인드로 회사를 경영하지 맙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직장 생활하고,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회사를 경영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나 때문에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직장이 예수님의 직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 단기 선교팀 여러분, 큰 역사를 일으키고 큰 열매를 맺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러시아에 가지 않는 우리도 여기에서 선교 열매를 맺는 역사를 일으키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