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서울은 어떻게 생겼을까?Ⅰ
광화문,육조거리,사직단,경희궁, 돈의문,소의문
광화문과 육조거리
2012년 현재의 서울은 인구 1000만명이 넘고 콘그리트와 아스필트로 뒤덮힌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을 이루고 있다.
좀 길게 잡은 인간의 수명 정도인 100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인구 20만 정도에 성곽 안으로
기와집과 초가집이 섞여있는 지금으로 치면 아주 작은 도시였다.
지난 100년 동안 일어난 서울의 변화는 그 이전의 100년, 1000년간의 변화보다도 더 엄청난 것이었다.
궁궐 같은 왕조의 기념물 외에는 100년 이상된 것은 거의 남지 않았고 흔적마저도 대부분 사라져 갔다.
도시는 오랜 세월의 기억과 이야기가 쌓이지만 급박하게 바뀌어가는
서울은 그것을 그대로 둘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기억의 지층마저 걷어내고 어제의 이야기와도 매일 이별을 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 지워진 서울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서울이 아닌 한성이었을 시절 서울은 성곽으로 둘려싸인 성곽 도시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북쪽에는 북악산이 있고, 동쪽에는 낙산, 서쪽에는 인왕산,
남쪽에는 목멱산(남산)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성곽을 쌓고 궁궐과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
조선 전기에는 인구가 10만명 정도였으나 후기로 가면 20만을 넘어섰다.
당시 한성부는 길이 17Km정도의 성곽 내부와 성곽 밖으로 4Km 정도를 관할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중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북악산 아래에는 경복궁이 있었고 그 앞의
육조거리 좌우에는 관청이 밀집해 있었으며 동서로 뻗은 운종가는 시전행랑이 밀집한
상업의 중심지였고 , 남쪽에는 청계천이 흘렀다.
그리고 주변으로는 민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곳 곳에는 도시의 여러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수많은 장소 중 도시의 중심은 단연 법궁인 경복궁이었다.
한성은 풍수지리설의 사상에 띠라 세워진 도시다.
북쪽에서 내려온 산 줄기는 주산인 북악산에서 양쪽을 퍼지고 좌 청룡인 낙산과 우 청룡인 인왕산이 감싼다.
북악산 아래 최고의 명당 자리에는 경복궁을 세워 도시의 중심을 잡았다.
임진왜란 때 궁궐은 불타버렸지만 흥선대운군이 다시 중건을 하면서 경복궁은 다시 도시의 중심이 된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동서로 육조을 비롯한 여러 관청이 신하가
도열해 있는 것처럼 느러서 있어 궁궐의 위엄을 더 하였다.
하지만 중건된 경복궁은 을미사변 이후 궁궐의 기능이 중지 되었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대부분 파괴되고 그 앞의 육조거리는 흔적 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파괴되기 전의 경복궁과 육조거리의 모습을 살펴 보도록 하자.
각 번호는 촬영한 사람의 위치를 추정하여 표시한 것이다.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복원)
3개의 홍예로 괴어 있는데 가운데 큰 문은 왕이 사용하는 어문 동쪽은 문관이 사용하는 동협문 ,
서쪽은 무관이 사용화는 서협문이다.
월대 위에 '어도'의 모습이 잘 보인다. 광화문 좌우측에 있는 작은 건물인데 경복궁을지키는 경비초소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396년 창건 때는 사정문이었으나 세종 때 광화문으로 명명되었다.
광화문 앞에는 지금과 달리 땅 보다 높은 월대가 놓여있고 석난간을 둘러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더 했다.
경복궁 안쪽인 홍례문 앞에서 바라본 광화문 뒷 모습
광화문의 동측면
광화문과 해태상
해태는 해치라고도 하는데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 속의 동물로
화재와 재앙을 물치친다고 믿어졌기 땨문에 흉배나 건축물의 장식물로 많이 쓰여졌다.
광화문 앞의 해치상
동편의 해태와 육조의 행각
논이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에 촬영한 것으로 해태 뒤로 높은 행각이 보인다.
광화문 앞에는 육조거리가 있었고 육조거리 좌우에는 여러 관청이 있었다.
동쪽에는 의정부, 예조, 이조, 호조, 한성부, 기로소가 서쪽에는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가 있었다.
삼군부 대문 앞에서 바라본 광화문의 모습
양쪽으로 해태가 지키고 있으며 광화문 뒤로 뽀족한 형상의 북악산이 보인다.
남쪽에서 바라본 육조거리 전경.1900년경
육조거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사진에서 보는 솟을 삼문의 갯수로 보아 사지 찍은 장소는 황토현 광장
에 인접한 곳(육조거리의 남쪽 끝)으로 추정되며 사진 오른편에서 동측을 향해서 걷는 사람이향하는 곳이 기로소에 인접한 길로 추정된다.
육조거리는 폭이 40m가 넘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상징적 거리이다.
일제시대에는 광화문통이라 불렀고 현재는 세종로로 불린다.
육조거리 전경
육조거리를 가장 넓은 각도에서 보여주는 사지니오른편의 소의 방향과 전체적인 길이로 보아 황토현 광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한성부 청사의 모습
한성부는 지금은 서울시청과 같은 곳으로 고려의 예를 따라 경관직에 속하며 육조와 같은 서열에 있다.
수도의 행정 뿐만 아니라 전국의 호적을 관리했으며 소송의 일부인 토지, 가옥,묘지에 관한 소송을 맡아 처리했기 때문에 중앙의 형조, 사헌부와 함께 3법사라 일컬었다.
한성부 건너편에서 찍은 서측 육조관아 모습- 첫번쨰가 한성부 행랑으로 보인다.
육조거리 앞에서 나뭇짐을 짊어진 소. 땔감시장은 운종가나 의주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육조거리에 땔감 장수가 보이는것이 이채롭다.
남북으로 뻗은 육조거리와 동서로 뻗은 종로가 만나는 황토현 광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1907년 쯤에 찍은 것으로 전신주와 서양식 건물도 보이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광화문통이 되어 육조의 건물은 대부분 없어졌다.
고종 즉위 40주년과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02년에 세운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기로소 남쪽 육조거리와 종로가 만나는 지점 모서리 근처에 있는데 현재 교보빌딩 앞에 있다.
지난 100년간 육조거리에서 제자리에 유일한 건물일 것이다.
육조거리를 돌아 종로인 남쪽에서 바라본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아치형 서양식이 가미된 철제문은 만세문으로 이후 일본인 집대문으로쓰여졌는데 광복 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한국전쟁 때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1954년 보수하였는데 원래와 약간 달라졌다.
경희궁 북쪽에서 경복궁 쪽을 보고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앞 쪽에는 궁궐 물자를 담당하였던 내자시가 있었던 건물로 보이며 경복궁을 보면 지금은 사라진 서십자각이 뚜렸하게 보이며 중심축을 이루는 광화문-홍례문-근정문-근정전이 일렬로 정연하게 놓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희궁 남쪽 근처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광화문 앞으로 길게 육조거리가 이어져 있고 육조 뒤로는 빽빽하개 민가가 밀집하고 있다.
육조거리에서 얼어질 수록 초가집이 더 눈에 띈다.
육조거리 전경
경복궁 광화문 문루에서 본 육조거리 사진으로는 유일하다
동측의 해태상과 사람의 모습이 보여 6조거리의 분위기를 잘보여주지만 사진 상태가 너무 어두어 주변 6조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것이 흠이다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은 일제침략기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가 생기면서 모두 철거되었고 그 일대는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격으면서 모두 사라져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없다 그래서 육조거리 관청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가 힘든데 철거되기 직전인 1920년 쯤에 찍은 육조 거리 건물의 정문을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남아 있다
육조거리 동쪽의 관청
육조거리의 동쪽 관아들의 전면의 정문과 행랑들이 연속해 있다. 1900년 경
오른편의 행랑은 의정부와 이조의 행량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6조 거리의 도로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도로는 포장이 안된 상태이며 도로의 양쪽에는 구거가 마련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6조 행랑에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행랑의 놓이를 추정해서 행랑 복원의 높이 추정의 근거로 삼았다.
육조거리 동편 관아의 정문과 행랑
동편 관아 앞에는 없는 전보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서편관아의 정문과 행랑으로 북악산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동편 관아 남쪽에서 한성부 쯤에서 북쪽 광화문 쪽을 향해 찍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 관아는 행랑의 길이가 두번째나 세번쨰보다 길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성부가 아닐까 ? 다음이 예조, 그 다음이 이조의 정문과 행랑으로 보인다.
윗 사진의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남쪽을 향하여 찍은 육조관아의 정문과 행랑
전형적인 육조거리의 전형적인 행랑의 모습을 모여주는 사진이다.
사람키의 2배 정도 되는 높이의 행랑이 이어지는 가운데 육조관아의 솟을 삼문이 솟아 있는 풍경윽 가지고 있었다.
사진에서는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전봇대와 전선이가로 경관의 새로운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정부 : 지금으로 치면 내각회의라고 할 수 있는 의정부는 조선 초기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종2품 이상의 관윈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국가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는 최고 회의기관이었다.
시대에 따라 권한에 변화가 있얶는데 비변사가 비대해지면서 형식적인 최고기관으로만 남게 되었디.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군사, 외교를 제외한 비변사의 기능을 흡수하면서 국가 최고기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884년에는 통리군국기무아문을 합병하였고 이후 내각으로 개편되었다
예조 : 예의 및 조회, 음악과 제사 및 연회와 외교, 교육과 과거에 대한 사항을 담당한다.
주로 국가적인 헹사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관청으로 보면되는데 요즘의 교육과학기술부,외교통상부, 문화체육부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관제를 개혁하면서 8아문 중 학부아문으로 대부분 흡수되었다.
이조 : 육조 중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부서고 문관의 임용, 공훈 및 봉작, 인사고과 등을 담당하였다.
지금으로치면인사를 담당하는행저안전부에 해당하는 관청으로 여기에 근무하던 직책인 이조전랑은 관직은 낮았지만 권한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각 파당에서는 서로 이 자리를 차지하려하고 하였다.
붕당정치의 시작도 이 자리에 대한 갈등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조의 솟을 삼문으로 추정
현존하는 육조 솟을 삼문 사진 자료 중 관아의 대문을 자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행각과 솟을 삼문이 관계를 잘 보여주며 도로와 행랑 사이로 위치안 구거 위에 판석이 설치되어 통행에 불편이 없게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흥미로운 것은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가로변에 가로수를 심지 않았기 떄문에 이 사진은 솟을 삼문 뒤에 보이는 양식 목조건축으로 보아 한일 합방 후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특희 삼문 뒤의 건물을 기준으로 추정컨데 사진의 솟을 삼문은 이조의 문으로 추정된다.
호조 : 호구조사에 대한 것이나 공납, 조세 같은 세금과 관련있는 일, 국사 재정과 관련된 부분을 담당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이다, 호조의 밑으로는 호구, 농토, 조세, 부역, 공납, 농사, 누에치기 권장, 생산량의 조사 및 구휼 등을 담당한 판적사, 중앙과 지방의 저축및 수입과 지출 회계, 인계 문건, 재물의 결손 등을 담당한 회계사, 수도에서의 지출 경비, 홰인에 대한 식량 배급 등을 담담한 경비사, 이렇게 3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한성부 : 지금의 서울시청으로 호구장부 작성을 비롯하여 농토, 가옥, 점포, 삼림 등 한성 안의 재산관리, 도로, 교량, 개천 등 시설을 관리하였으며 탈세와 관물의 낭비에 대한 추심, 부채, 순찰, 검시, 수레, 소, 말에 대한 관리에 관한 일 등 한성안의 다양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행정 뿐만 아니라 소송 같은 사법 업무도 담당하였으므로 형조,사헌부와 함께 삼법사로 칭하였다.
지금의 서울 시청격인 한성부
기노소 :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명예기구로 정 2품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중에서 70세 이상이 되었거나 왕이 연로한 경우에 등록하였다.
국가원로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침녹과 연회를 주관하였다.
육조거리 서측의 관청
삼군부: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의 기능이 본래의 기능인 군사를 넘어 정치, 재정, 외교 등 광범위한 범위까지 흡수하여 국가최고 합의기관으로 권력이 비대화되었다.
세도정치의 권력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집권이후 의정부에 통합시미고 군사 업무는 삼군부에서 맡게 되었다.
1867년 부터 조직이 완전히 갖추어졌고 개항 이후인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립되면서 폐지되었다.
1890년 광화문과 삼군부 모습
삼군부는 광화문 서측 관청중 가장 먼저 있는 관청으로 해태상 안쪽으로 광화문 월대와 인접하여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삼군부 왼쪽은 공사중인데 삼문이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삼문을 정문을 포함한 공사를 하는것으로 추청된다.
육조거리 서측 앞에 삼문은 중추부의 삼문이고 삼군부의 삼문은 뒷쪽 해태상 안쪽에 있는 것이다
삼군부 정문
현재 정부종합청사에 있었던 관청으로 1865년 예조를 옮긴 자리에 훈련도감의 신영, 남여, 마병소를 합설하여 삼군부라 불렀다.
흥선대원군이 정치와 군사를 장악하고 있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정치는 의정부로, 군사는삼군부에서 맡도록 했다.
1880년 삼군부는 폐지되고 건물은 이후 통리기무아문과 시위대 청사로 쓰였다.
사진은 삼군부 마당에서 훈련하고 있는 시위대 군인들로 보인다.
뒤에 보이는 문이 광화문이다.
삼군부의 중심 건물로 총무당이고 왼쪽이 청헌당, 오른쪽이 덕의당이다.
이러한 배치는 관아배치에 있어 기본적인 것으로 의 정부의 경우 관아를 직접 보여주는사진은 존재하니 않지만 조선총독부 건립 당시 작성된 육조거리의 배치도와 전경 사진에 남아 있는 당상대청의 위치 확인을 통해서 관아배치의 전형을 복원하는 기초자료로 사용되었다.
삼군부의 경우 여타 관아와는 달리 주당의 전면에 전각이 없이 넓은 공지가 확보되어 있는데 이는 삼군부가 갖고 있는 관아의 성격상 군사 훈현등을 위한 공간이 핑요한 때문으로 파악된다. 총무당은 1868년에 세우졌는데 1930년데에 삼선공원으로 옮겨지고 청헌당은1967년 공릉동 육사 경내로 옮겨졌고, 덕의당은 없어졌다. 이들 건물은 보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삼군부 청사인 덕의당
삼군부는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정부 직제를 조선개국 초기의 것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관부다 예조의 위치에 자라잡았으며 육조거리 전체 전경 사진과 함께 삼군부의 충부당 등 자신 자료가 비교적 충실하게 남아있어 삼둔부의기록화는 남있지 않지만 사진자료을 통해 비교적 완전한 복원이 가능했다. 사진을 보면 건물의 정면에 조적으로 현관부를 새롭게 신설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근대시기에 부분적으로 전래한 건축에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추부 : 특정한 관할 직무가 없이 소임이 없던 문무의 당상관을 소속시캬 대우하던 기관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다른 기관에 비해 규모가 작다. 조선 초에는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으나 삼군부와 승정원으로 기능이 옮겨가면서 한 때 없어졌으나 1409년 다시 설치되었고 1466년 이후로는 기능아 없는 유명무실한 관청이 되었다
사헌부 : 정치에 대한 언론 활동, 풍속의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관리의 자격을 심사하는 서경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행정부인 의정부, 육조와는 대립하고 견제 하는 관계였다. 지금을 치면 야당, 감찰, 언론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사간원, 홍문관과 함께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로 불렸고 형조, 한성부와 함께 사법권을 가지고 있어 삼법사라고 불렸다.
병조 : 현재 국방부에 해당하는 관청으로 작전 계획, 병기의 생산관리, 무관의 인사권 등 국방을 총괄하여 담당하였다. 수레와 말 등의 교통수단, 봉화, 역참 등의 통신수단, 궁궐 경비 등도 담당하였다. 비변사가 대두된 이후에는 국방과 군무 전반에 걸친 사항이 많이 이양괴어 병조의 지위와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 균역법의 실시로 군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이것을 담당하는 병조의 임무도 더욱 번거로워졌다.
형조 : 오늘날의 법무부로 국가의 사법과 형벌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개개인의 다툼에 대한 재판, 죄를 저지른 자애 대한 형벌 결정, 중죄를 저지른 자애 대한 심문,죄수와 노비의 권리 등을 맡아보았다. 형조 안에는 법률과 심문, 형량을 결정하는 고율사, 각종 시설과 금령과 관련있는 일을 담당하는 장금사, 노비장부와 포로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도관사의 3사를 두어 업무를 분담하였다.
공조 : 국가의 토목공사, 공예품과 도량형이 제작, 산림과 소택 관리, 교통업무 등을 관장하였다. 오늘날의 국토해양부와 지식경제부에 해당한다. 소관 부서로는 건축과 토목공사, 피혁을 담당하는 영조사,각종 공예품과 금속, 기와 , 도기제품을 제작하고 도량형을 담당하는 공야사, 산림과 나루터,교량, 목재, 선박 등을 담당하는 산택사 등이 있었다.
공조의 정문
공조은 육조거리 서편에 위치한 관아중 가장 남측에 위치하고 있있다. 현 세종문화회관 남측 끝에 해당한다. 사진에 보는공조으 정문 오른 편의문은 인접한 형조의 부속대문이다
2. 사직단, 경희궁, 돈의문, 소의문
도성의 서쪽에는 제법 높은 험준한 인왕산이 웅크리고 있다. 북악산을 지나온 성벽은 험준한 인왕산의 화강암 암벽을 타고 돌면서 남쪽의 평지로 내려온다. 인왕산을 끼고 있는 평지에는 사직이 있다. 사직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종묘와 함께 도시계획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국가의 상징물이었다.
성벽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근처에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궐이라 불리던 경희궁이 있다. 경희궁 앞에는 길이있는데 이 길은 서대문인 돈의문과 통하고 돈의문을 빠져 나오면 의주 방향으로 가는 길과 통한다. 돈의문에서 다시 성벽을 따라 내려오면 서소문인 소의문이 있다. 계속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남대문인 숭례문이 나온다. 여기서는 사직에서 경희궁, 돈의문, 소의문에 이르는 도성 서쪽 부근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사직단 정문의 모습
이 문이 원래 위치한 자리는현재의 위치 바로 앞에 있는 도로위 인데 1962년 도시계획으로 인해 북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안에는 토지의 신과 곡식이 신께 제사 지내는 3개의 단이 있는데 일제시대에 이 단 주변으로 영역이 잘려나간 채로 사직공원이 되었다.
2.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경희궁은 일제가 이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면서 궁궐 중 가장 철저히 파괴되었다. 숭정전도 이 때 해체되어 1926년 남산의 조계사로 이전되었고 현재는 동국대학교 내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건물 노후화 등의 문제로 원래 위치에 옮기지 못하고 현재의 숭정전은 그 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이다.
3.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경희궁이 파괴되면서 이 문 역시 해체되어 1932년 장충동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이되었다가 해방 후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이되기도 했다. 1988년 경희궁 복원계획으로 경희궁 내에 세워졌지만 현재의 위치 또한 원래의 위치가 아니다.
4. 1900년경에 촬영된 사진으로 나무를 지게에 한짐 가득 올린 땔감 장수
뒤로 경희궁 흥화문이 보인다. 흥화문은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앞으로 쭉 가면 종로가 나온다. 사진의 좌측으로가면 새문길(신문로)인데 돈의문(서대문)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야 한다.
5.경운궁(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운교인 홍교
1901년에서 1908년 사이에 있었던 듯하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으로 증축하였다. 경운궁은 도심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민가를 매입하더라도 대규모로 확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북쪽에 있었던 경희궁을 운교(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궁궐처럼 활용하였다.
6.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돈의문(서대문)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 도로에 있었다. 흥인지문(동대문)이 2층 문루를 하고 있는데 비해 1층 문루를 하고 있으며 규모도 비교적 작다. 풍수적으로 험준한 서쪽과 지대가 낮은 동쪽과 균형을 맞추기위해 이렇게 지은 둣하다.
7. 1903년 돈의문 안쪽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두 사진은 거의 같은 때 찍은 것으로 보인다.
군인들은 대한제국 군인으로 보이며 전차는 1899년 개통되었는데 청량리에서 서대문 밖까지 운행하였다. 조선 초기 서대문은 원래 위치보다 북쪽에 있었지만 세종 떼 이 자리에 새로 세움으로 새문이라 불렀고 여기로 가는 길은 새문길로 불리게 되었다. 한자로 신문로라고 쓴다.
8. 돈의문 옆 성벽 위에서 찍은 사진으로 성벽이 왼쪽으로 밀려 드러가는 곳에 돈의문이 있다. 오른쪽에는 점포와 민가가 길 따라 쭉 이어져 있으며 왼쪽에 보이는 서양식 건축물은 프랑스 공사관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남산이다.
9. 조선초기 창건 당시의 돈의문은 지금의 사직동 부근이었는데 풍수상 이유로 경희궁 뒷 쪽 언덕에 세워져 서전문(西箭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통행이 원할자지 않은 곳에 세워져 불편함이 많았는데 이는 태종 때 세력가이던 이숙번이 자기 집 앞에 문과 통하는 큰 길이 생겨 번잡해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 때 지금의 자리에 새로 돈의문이 세워지고 임진왜란 후 다시 세어진 것을 숙종 때 고쳐 지었다.
10. 돈의문 밖을 나서는 신부 가마
점포 뒤로 성벽이 보이는데 들어간 구조를 하고 있다. 이는 방어상 취약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공격하기 쉽게 하기 위한 구조이다. 바닥에는 전차 선로가 깔려 있는데 돈의문 밖에 전차 종점이 있었다 . 1915년 전차 복선화와 도로 확장을 이유로 돈의문은 철거된다.
11.멀리서 바라본 돈의문과 그 근처의 전경
좌측 위에 보이는 문이 돈의문, 우측 위의 서양식 건물은 프랑스 공사관이다. 돈의문 밖 길은 완만한 내리막으로 되어 있고 하천을 건너면 경기감영이 있었다 . 사진은 1900년대의 모습으로 1896년에 수원으로 옮겨갔다. 사진의 좌우로 길쭉한 건물 오른쪽의 2층 누각이 경기감영 정문인 포정문이다. 이 문 앞은 서북쪽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인 의주로가 있는데 이 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중국 사신을 맞아 들이는 영은문과 모화관이 있었다.
12.1903년의 의주로 근처
뒤쪽으로 나무가 거의 없는 산은 안산으로 보인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앞의 통일로를 따라 좀더 북쪽으로 올라간 위치로 보인다. 이 길은 대성, 평양,의주 등 조선의 서북 도시와 중국을 잇는 주요도로였다.
13. 1903년의 사진으로 건물들 짓기 전 터를 다지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달구질을 하는 모습이다. 뒷 쪽에는 성벽이 지나가고 있는데 돈의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부분으로 시대에 따라 성벽에 쓰인 돌의 규격이 다르다. 성벽 위의 건물은 프랑스공사관으로 지금의 창덕여중 자리에 있었다.
14.돈의문과 숭례문 사이에 있었던 소의문의 성 안쪽에서 본 모습
속칭 서소문이다 , 원래 이름은 소덕문이었으나 예종 비 한씨의 시호가 소덕왕후가 되었끼 때문에 1472년 소의문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실제로는 영조 때 문루을 세우면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남소문인 광희문과 함께 도성에서 사망한 시신이 성밖으로 나가는 문이 었다.
15. 1890년대의 밖에서 본 소의문 모습 (서소문,소덕문)의 외측 모습
길이 좁고 길 양 옆으로 영세한 민가가 들어서 있다. 서소무 밖에는칠패시장이 있었는데 동대문 근처의 이현과 종로와 함께 한성의 3대 시장으로 주로 한강 포구에서 운송해오는 어물을 취급하였다.
16. 한일병합 몇 해 전의 소의문의 모습
성무 밖의 민가가 모두 철거된 상태다. 소의문도 1914년 철거되고 길이 넓혀지고 건물이 세워지면서 지금은 성곽도 성문도 거의 흔적초차 찾기 어려운 상태이다. 현재 중앙일보 본사 주차장 앞 도로가 소의문 터이다.
사직(社稷)
위성 사진으로 본 현잳이 사직단(좌)과 그래픽으로 재현한 조선시대의 사직단(우)
현재 사직단 앞에는 6차선의 사직로가 지나고 있는데 원래는 이 도로도 사직단 경내에 있었고 지금보다 영역이 훨씬 넓었다. 사직단 정문은 1962년 도로확장으로 인해 뒤로 14m나 있는 상태고 경내는 사직단 만 아니라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과 숲이 채우고 있었지만 일제시대 때 공원으로 꾸며지고 해방 후애도 경내에 건물과 동상이 세워지면서 국가의 신에데 제사 지내던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엄숙함은 사라졌다.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말이다. 사(社)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수목신앙과 마을 공동체의 집단신으로 인식되다가 한 왕조에 이르러 사(社)는토지신으로 정착되었다.
기록에는 고구려와 통일신라에서 사직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고려 성종 때 그 제도와 제단이 만들어진 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국가 차원애서 제사가 이루어젔다. 사직단에는 매년 2월과 8월, 동지와 섣달 그믐날에 사직대제가 치러졌으며,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
1908년 사직대제가 폐지되었고, 1911년에는 건물과 땅이 모두 총독부에 인계되었다. 1922년 경성부에서 사직단을 공원으로 설계하면서 대지는 잘려나가고 경내에는 휴식을 위한 건물이 세워지도 수목이 심어지면서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모습을 잃게되어었다.
해방 후에 차츰 정비가 이루져졌으나 여전하 경내에는 황학정, 단군성전,도서관,치안센터, 주민센터 등이 여전히 들어서 있어 원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조선고적도보 속의 사직단의 모습
훼손되기 전의 모습으로 보이며, 사방에는 홍살문이 배치되어 있고 단 주위를 낮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사직단은 임금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돌로 만들어진 네모난 제단이 2개 있다. 각각 사단과 직단으로 좌우 나란히 놓여있고 주위로는 사방의 문과 네모난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단은 네모진데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은 땅과 연관있기 때문에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만든 것이다. 돌로 만든 단 안에는 노란색 흙이 채워져 있는데 이것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방위 개념으로 노란색과 흙은 중앙을 상징한다.
높이는 길한 숫자인 3에 맞추어 3척 만큼 3단의 장대석을 쌓았다. 한변의 길이는 25척이고 사방으로 3단으로되어 있는 계단이 있다. 단의 외곽 울타리는 '유'라고 부르는데 신성한 구역인 성계와 인간의 세상인 속계를 구분하는 것으로 한 변의 길이는 150척 정도이다.
왼쪽 위의 사진은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사직단의 모습이다
주위를 둘러싸는 딤징이 보이지 않고 단 옆에는 새로 심은 나무가 자라고 있어 공원 개발로 훼손되기 시작한 때에 촬영한 것 같다. 오른쪽 위 사진은 1867년의 사진으로 제단 주변에 울타리 처럼 나무를 심어 제단으로서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1980년대 말의 정비사업으로 단 주변의 담장과 문 등 일부가 복원된 상태며 차후 단계적으로 복원계획이 있다.
경희궁
경희궁운 경복궁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궐이라고 불린다.
서쪽은 구릉과 성곽을 끼고 있으며 지형에 따라 건물이 배치되었다. 동쪽의 흥화문에서 정전인 숭정전까지 양쪽으로 행각이 막힌 긴 복도 같은 공간이 'ㄴ'자 모양으로 꺾인 채로 길게 이어지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경희궁의 창건
조선의 창건과 함께 정도전에 의해 법궁으로 세워진 경복궁, 태종에 의해 이궁으로 새워진 창덕궁, 태종이 상왕이 된 후 머무르던 곳이자 , 성종 때 왕실의 어르신을 위해 세워진 창경궁, 조선 전기만 해도 경복궁은 메인 궁궐, 창덕궁과 찬경궁의 동궐은 스페어 궁궐로 양궐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 이들 궁궐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선조는 전란으로 한성을 떠난 후 1년 반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도성 내에는 머물 수 있는 변변한 건물이 없었다. 왜군이 주둔하여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던 월산대군 사저와 주변의 민가를 개조하여 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는데 이곳이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이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궁궐과 종묘를 중건하려 하였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중건사업은 아들 광해군이 이어 진행시킨다. 1608년 종묘를 완공하였고, 그 해 말에는 창덕궁의 주요 전각들이 거의 완공되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경궁의 공사도 강행하였는데, 1609년 말에는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광해군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머무르다가 창덕궁으로 옮겼지만 두 달만에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1615년까지 3년을 머무르다 창덕궁으로 들어온다. 그 뒤에도 반대를 무릅쓰고 창경궁과 경운궁을 수리하고록 했고 1616년에는 법궁인 창덕궁에서 사고가 나면 이어할 궁궐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궁궐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그 궁궐은 원래 사직단 뒤편 인왕산 자락에 세울려고 햤으나 새문동 정원군 옛 집에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술사의 의견에 따라 새로운 궁궐을 세우고 경덕궁이라 칭하였다. 1622년 광해군은 경덕궁으로 들어 갈 길일을 정할 것을 명하고 이어할 준비를 하지만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인해 궁궐을 옮기기도 전에 페위된다.
위의 그림은 순조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궐도안>이고 아래 그림은 서궐도안에 채색을 하여 재현한 현대의 그림이다. 경희궁의 모습을 동궐도와 같이 위에서 내려다 본 것 같은 부감법으로 그려져 궁 전체의 모습을 실감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낙관이 없어 작자를 알수 없고 12폭의 종이에 채색이 하지 않은 채로 선반 그려 있는데 본으로 삼기 위해 그려진 법본으로 추정된다. 건물 배치와 지형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으며 건물 이름이 적혀져 있어 경희궁의 당시 모습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된다.
아궁으로서의 경희궁
반정으로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이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식을 올린다. 인조는 경운궁에 잠시 머무르며 창덕궁의 화재 현장을 수습하도록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하지만 불탄 건물이 많아 창덕궁과 창경궁을 오고갔다.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대부분 불타 버렸고 피난에서 돌아온 왕은 경희궁으로 들어간다. 경희궁은 이때 처음으로 왕이 이어함으로 궁궐 구실을 하게 되었고,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은 법궁이되고 서궐인 경희궁은 이궁이되었다.
인조 이후 여러 왕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가며 정사를 봤고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서 경희궁에서 승하하였다. 경종은 경희궁에세 즉위하였고, 영조는 53년의 재위기간 중 총 19년을 경희궁에서 머물렀다. 영조는 궁명을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개칭하였으며 마지막 12년을 경희궁에서 보내고 승하 하였다. 정조는 경희궁에서 즉위하였지만 제사를 제외하고 모든 기간을 동궐에서 머물렀다.
순조가 1810년 경희궁으로 이어 함으로서 다시 이궁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1829년 화재로 인해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엇다. 1831년 불탄 전각을 새로 세운 뒤 1832년 경희궁으로 이어한 뒤 1834년 이곳에서 승하 하고 손자인 헌종이 숭정문에서 즉위한다. 헌종은 재위 10년간 즉위후 반년과 재위 10년되던 해 반년만 경희궁에 머물렀을 뿐 장치하다 시피 했다.
철종은 1859년에 경희궁을 수리하게 하고, 1860년 경희궁으로 이어 했지만 7개월 만 머물고 창덕궁으로 이어 함으로 경희궁의 이궁의 역할을 사실상 이때가 마지막이 되었다.
1899년 고종은 황학정을 세워 활터로 삼았고, 1901년에는 경운궁과 연결되는 운교인 홍교를 세웠지만 1908년 경에 헐렸다. 1902년에는 궁내부로 하여금 경희궁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있는 기록으로 이때까지는궁궐의 못흡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서고적도보>의 경희궁 숭정전,
광해군이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어진 건물로 경희궁의 중심 건물로 조회를 행하는 곳이다. 숭정전이 조계사로 옮겨지는 1926년 이전의 모습으로 이미 주변의 회랑과 건물들이 보이지 않고 , 철거된 상태이고, 주위로는 잡초가 무성하다.
<조서고적도보>의 경희궁 숭정전
<조서고적도보>의 경희궁 숭정전 측면
<조서고적도보>의 경희궁 숭정전. 두공 및 헌
숭정전 내부 조정
1975년 9월 숭정전의 모습
동국대학교 내에 있다. 1975년 12월부처 1976년 9월 사이에 동국대학교 내에서 정소를 옮겨다시 세웠다 지금 이 건물은 불교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요되고 있는데 현재 경희궁내에 있는 숭정전은 이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석패(돌 계단) 측면
(위 좌측) 이건하여 남쪽에 서 있는 1980년의 흥화문, (위 우측) 이건하기 전인 1915년의 흥화문
(아래 좌측) 1932년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이건된 흥화문
(아래 우측) 1988년에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옮겨지고 그대로 다시 본떠 지는 신라 호텔 정문
(좌) 사직공원으로 이건되어 활터 정자로 쓰이던 황학정 (우) 용산 광운사에 이건되어 세워진 흥정당
파괴되는 경희궁
한일병합 전후로 여러 궁궐의 파괴와 훼손이 진행된다. 경희궁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일병합 후 궁궐은 국유지가 되면서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고, 부지는 변형되고 전각들은 민간 등에 패각되엇다. 병합 당시 이미 많은 적각들이 사라진 뒤였는데 경희궁 서쪽은 1907년 통감부중학교(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가 세워졋고 지형도 깎고 메우는 등 변형되었다.
1922년에는 동쪽 부지에 전매국 관사가 세워젔고, 1927년에서 1929년에는 남쪽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도로로 편입되었다. 이 당시의 얼마 남지 않은 건물들도 매각되어 1926년에는 당시까지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궁궐의 정전인 숭정전이 남산의 조계사로 옮겨 세우졌고, 지금 동국대학교 내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을 복원할 때에도 낡고 여러가지 문제로 옮기지 못하고 완전히 새롭게 복원하게 되었다.
회상전은 1928년에 조계사로 옮겨져 주지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흥정당은 1928년 용산에 있었던 광운사로 매각되었고, 정문인 흥화문은 1915년 도로 수리할 때 경희궁 동쪽에서 남쪽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의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박문사가 없어지고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가 1988년 경희궁으로 돌아왔으나 지금 자리도 제자리가 아니다. 황학정은 1923년 일반인에 팔아 넘겨져 사직단 동쪽에 옮겨진다. 태평양전쟁 때에는여러 개의 방공호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있다.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1978년 서초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들어서 있었고, 이 후에는 현대건설이 매입하여 1984년 까지 연수원으로 사용하였다. 1980년에 국사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서울시에서 부지를 매각하면서 공원이 되었고, 1985년 부터 여러 차레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1994년에는정전인 숭정전과 그 일곽이 복원되었고 1998년에 는 자정전과 그 회랑이 . 2000년에는 태녕전이 복원되었다.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서울시립박물관이 들어서 버렸는데 우선은 영역의 복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돈의문과 바깥 풍경
현재의 돈의문 지 근처의 모습과 조선시대의 돈의문 근처의 모습
돈의문은 1915년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 조차 없고 단지 문 자리을 알리는 표지석만 근처 길가에 서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돈의문 밖을 나가면 길 좌우로 상점들이 있었고, 완전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앞에는 하천이 있었다. 이것을 건너면 지금의 경기도청아 할 수있는 경기감영이 있었고 그 앞에는 서북쪽으로 가는 주요 교옹로인 의주로가 있었는데 지금의 통일로이다.
일제 시 개수(改修)전 서대문 (돈의문)
서대문의 본래 이름은 돈의문(敦義門)입니다. 다른 이름은 새 문으로 불리여 새 문안길이 있고, 새 문안교회도 있다. 이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전차 복선화공사로 인해 고의로 헐어 버렸다.
사진 엽서 속의 돈의문
돈의문의 복원은 예전 부터 거론되어 왔다. 문의 정확한 규모는 현판이 남아있기 때문에 사진으로 문과 현판의 비률을 고증하면 거의 비슷하게 복원랄 수있을 듯하다. 하지만 현재 예산 문제와 교통문제, 주닌 반대로 인해 지지 부진하다.
(위) 1890년대의 돈의문과 1900년대의 돈의문 모습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한성은 대대적인 도시 정비사업이 이루어진다. 길가에 난립하고 있던 가건물인 가가를 철거하고 근대적인 문물을 적극 도입하였다. 돈의문 주변도 정비가 이루어지고 전차 선로가 놓여진다.
(아래) 돈의문과 이어진 성벽의 모습으로 성벽 위의 기와 지붕이 돈의문이다. 뒤로 인왕산의 모습이 보인다. 방향상 의주로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데 전신주도 놓이고, 서양식 건물도 보이는 등 근대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역시인왕산이 모인다
독일인 헤르더 산더가 1906년에서1907년 사이에 촬영한 사진
장소를 유추하자면 지금의 경기대학교 근처 언덕인 것 같다. 성벽이 어어진 곳에는 단층 누각의 돈의문이 있고 가운데 나무가 있는 뒷 쪽이 덕수궁이 있는 정동으로 서양 외교관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멀리 러시아 공사관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성벽과 거의 붙은 프랑스 공사관이 위치하고 있다.
돈의문 앞으로 길이 대각선으로 길게 이어지고 가운데 부분에서 길이 5갈래로 갈라진다. 좌측에 옆으로 길게 이어진 벽돌건물은 대한제국군의 병영인데 그 뒷쪽 건믈은 원래 경기 감영이 있던 곳이다.
1896년 수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한 때 비었으나 1902년에서 1908년까지 한성부로 쓰이고 이후에는 이 자리는고양군청, 서대문우체국, 서대문경찰서로 쓰이다가 현재는 적십자 병원이 1923년 부터 사용하고있다.
좌측 사진은 위의 사진과 병영과 문의 모습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경기감영 건물이다.
사진속 2층 누각은 경기감영 정문인 포정문으로 현판에는 한성부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902년에서 1908년 사이의 모습인 듯하다. 우측 사진은 문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 앞에서 있는 군인은 대한제국 군인인 것 같다. 뒤의 벽돌 건물은 좌측 사진의 병영과 비슷한 것 같은데 세부적인 모양이 다르다. 아마도 반대편에서 찍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개인적인 추측일 뿐 확실하지 않다.
독일인 헤르더 산더가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의 장소를 유추하자면 인왕산,북한산, 북악산의 모습이 보이고 있어 대충의 방향과 위치를 알 수 있다. 도성 서쪽 성곽이 구릉을 타고 이어지다가 인왕산으로 올라가고 있으며 성 밖으로 꽤 낞은 민가들이 밀집하고 있다.
민가 중에 일렬로 나란히 집들이 배치된 것(빨간선 표시)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길 따라 세워진 상점이나 집일 것이다. 이 주변에서 직선으로 길고 어느 정도 폭을 가진 길은 아마도 의주로(현 통일로)일 것이다. 오른쪽의 서양식 건물은 독일 영사관으로 1906년지금의 종로구 평동에 있던 한성전기회사 사장 콜브린의 저택을 구입하여 옮긴것이다.
독일영사관 오른쪽에 보이는 성곽 너머에 경희궁이 있었는데 지금 저 성곽 자리에는 서울윽별시 교육청이 있다. 가운데 성곽이 지나가는 부분은 지금 사직터널이 있는 부분으로 그 뒤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직단이 있다. 주변 배경으로 추정하건데 촬영자는 지금의 감리교 신학대학교 부근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찍은 게 아닐까 한다
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감영도 병풍
모두 12폭으로 되어 있다. 경기감영을 중심으로 자연환경, 건물, 인물, 거리 풍경 등을 아름답고 정교하게 묘사하고있다. 1번에 돈의문이 있고, 5.6번이 경기감영부분이다.
7번의 의주로를 따라 위로 옭라가면 8번에 영은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 좌측으로 쭉 가면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고개인 무악재가 있는데 서북지방으로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조선시대 돈의문(서대문) 밖 모습-경기감영도)
좌측 사진의 문은 돈의문을 나와 경기감영 앞에서 길을 꺽어 의주로로 올라가면 있던 영은문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 하던 문이다. 이름은 은혜로 맞이한다는 뜻이 되겠는데 사대외교의 상징이었다. 이 문 옆으로 1407년에 처음 세워진 모화관이 있어 이곳에서 황세자가 나가 중국사신을 영접하였다. 돌라갈 때는 백관이 이 문 앞에 모여 정중하게 보냈다.
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 조공의 관례가 패지되고, 이 문 또한 헐리게 되었다. 우측 사진의 문은 1897년에 세워진 독립문으로 사대외교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 결의를 다짐하려고 건립하였다고 한다. 독립문 앞의 돌 기둥은 헐린 영은문의 주초석이다. 이 문을 지나면 무악재로 간다.
위의 1.2번 사진은 남쪽에서 본 모습으로 우측으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며, 아래의 3번 영은문 오른쪽에 보이는 사진은 남산으로 북쪽에서 본 모습이다. 4번 독립문 왼쪽으로 보이는 산은 안산으로 남쪽에서 본 모습이다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고개가 무악재이다.
가운데 보이는 건물은 원래 모화관이었는데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독립관으로 바뀐다. 영은문의 주초석과 독립문이 나란히 있다. 독립문 설계는 러시아인 사비틴이 했다고도하고,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하였다고도 하여 정확하지가 않으며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지었다 한다.
홍예문의 꼭대기 이마 돌에는 오얏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양쪽으로 갹갹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완용이 적었다고 한다. 글자 양쪽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이 있어 위에 올라 갈수 있도록 되어 있다.
(좌)1977년의 독립문 (우)1978년의 독립문
1979년 성산대로 공사를 하게 되면서 독립문의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독립문지, 이전 일자 1979.7.13. 서울특별시장' 이라고 새겨진 기념 동판(가로세로 각 70 cm )를 묻고, 원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지금의 장소로 옮겨 1980년 1월 이전공사를 끝마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