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6. 주일예배설교
시편 119편 65~72절
고난이 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말씀, 시편 119편-ט편)
■ 인생을 괴롭게 하는 고난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고난을 즐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고난은 누구도 반기지 않지만, 불청객으로 찾아옵니다. 물론 예고된 고난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 고난은 피할 수 없고, 고난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글자 그대로 불청객입니다.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환영받지도 못하면서 늘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참으로 밉고 싫습니다. 결국 화살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하나님, 왜 고난입니까?”
자, 우리도 이 질문을 받아 물어봅시다. 왜 고난일까요?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뭐 그리 잘못한 일도 없습니다. 혹시 성실하게 애쓰며 산 것이 죄라면 죄일까요? 그런데 왜 고난일까요? 억울하죠? 원망스럽죠? 애쓰며 산 시간이 후회됩니다. 자, 왜 고난일까요? 오늘 본문에 물어보겠습니다. 왜 고난인가요?
■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형식으로 들려주며 우리가 던진 질문에 답합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자신의 경험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며 고백합니다. 67절과 71절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제게 ‘왜 고난입니까?’하고 질문하신 여러분, 저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는데 이 말은 가히 도전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이 제게는 아픔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아픔이긴 했지만, 아픔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시편 기자는 그의 진지한 신앙고백을 이어갑니다. “저는 이러한 고난을 당하기 전(前)과 후(後)가 달라졌습니다.” 오호,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고난 당하기 전과 후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래도 상태가 괜찮았는데, 당한 후에는 상태가 영 안 좋아졌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의 고백을 들어볼까요? “저는 고난을 당하고 나니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What?
시편 기자의 고난에 대한 신앙고백은 점점 오묘(奧妙)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설명이 오묘한 것이 아니라 고난이 갖고 있는 의미가 오묘한 것입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고난이 주는 두 개의 놀라운 축복을 고백합니다. 하나는, 고난 덕에 그릇 행하던 삶을 청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 덕에 주님의 말씀의 의미와 그 말씀의 위대한 힘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지 않은 것보다 고난 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67절과 71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물론 고난 당하는 것보다 고난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고난 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라면, 고난을 향해 “너 왜 왔어?”라고 시비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고난 제공자나 원인을 찾아 “왜 그러셔요? 왜 고난을 주셔요?”라고 원망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그릇된 삶이 청산되고, 말씀의 위대한 힘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오히려 매우 수지맞은 일일 테니까요.
■ 그렇습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먹구름 뒤에 있는 빛나는 태양입니다. 65절을 보실까요.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선대하심”입니다. 이것은 고난이 끝이거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난은 주님이 약속을 펼치시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끝은 선대(善待)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것이 끝입니다.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시편 기자의 기도는 정확합니다. 68절입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러므로 고난은 원망의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묵상과 기다림의 이유입니다. 66절입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기자가 “믿었사오니, 가르치소서.”라고 청원한 행위는 묵상과 기다림의 행위입니다. 고난이 선대임을 깨달은 자가 이어질 깨달음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행위에는 기대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명철”과 “지식”입니다. “좋은 명철”은 ‘올바른 통찰력’입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력’입니다. “지식”은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 그리고 지혜는 무엇에 필요할까요? 다시 말해, 무엇이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이고 지혜일까요?
67절부터 보겠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 그리고 지혜는 무엇이 그릇된 행위이고 태도인지를 아는 데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릇된 행위와 태도를 구별해내는 것이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이고 지혜입니다. 그렇기에 고난 당한 시편 기자는 이를 얻고자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69절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은 “교만”이 무엇인지, “거짓”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판단합니다. 세상에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과 ‘착함’으로 위장한 “거짓”이 난무합니다. 이를 꿰뚫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만과 거짓의 삶을 사는 이들의 심리 상태까지 꿰뚫는 것은 지식이자 지혜입니다. 70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교만과 거짓의 삶을 사는 이들의 심리 상태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비만을 꿰뚫은 것입니다.
마음의 비만은 무슨 뜻인가요? 악에 둔감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교만”한 삶을 오히려 권력을 누리는 삶이라고 자부합니다. “거짓”의 삶을 오히려 권력을 축적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자신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예리하게 꿰뚫는 것이 거룩한 지식이자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고난 당함을 통해 이렇게 귀한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 그리고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었다는 시편 기자의 71절의 고백은, 거절하기 힘든 설득력을 갖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어떻습니까? 동의하시겠습니까? 아멘!
■ 그런데 아직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시편 기자의 너무도 멋진,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지 부담스러운 신앙고백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72절입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새번역)
시편 기자의 신앙고백에는 두 개의 개념이 대조/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가치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법”과 “금은”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돈/물질’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둘 중에 “주님의 법”-‘주님의 말씀’에 천만 금은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셀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합니다. 돈보다 주님의 말씀에 전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마치 “금은”-‘돈/물질’은 그 어떤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몰아가는 해석입니다. 정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72절의 말씀이 “금은”-‘돈/물질’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주님의 법”-‘주님의 말씀’만 가치가 있다고 했으면 “금은”-‘돈/물질’은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해석이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법”-‘주님의 말씀’만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금은”-‘돈/물질’보다 천만 배의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금은”-‘돈/물질’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금은”-‘돈/물질’보다 “주님의 법”-‘주님의 말씀’이 천만 배의 가치가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66절이 말씀하는 “좋은 명철”이고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우리의 고백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신앙고백’이 될 수도 있고, ‘현실고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 전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이냐, 돈/물질에 전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이냐에 따라 고백의 형태는 달라지고 삶의 태도 또한 달라집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말씀입니까, 돈입니까? 어느 것에 천만 금은의 가치가 있다고 고백하시겠습니까?
■ 혹시 아시는지요? 아마도 아실 것입니다. 고난의 큰 이유 중 하나는 ‘돈/물질’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으로 인해 겪는 고난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법 경험들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으로 인한 고난은 돈을 붙잡고 있거나 돈에 노예가 되어 있을 때 만납니다. 돈에 대한 집착, 돈의 소유권에 대한 애착이 불러온 화근으로서의 고난입니다. 부인하고 싶더라도 사실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돈/물질에 두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노예의 삶이고 집착의 삶입니다. 결국 불행은 예정된 수순이고, 안녕은 안녕이란 인사도 없이 사라진 삶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권고합니다. 돈/물질을 넘어서는 삶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돈/물질은 넘어 전적인 가치를 주님의 말씀/주님의 약속에 두고 살겠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이 괴로운 것만이 아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바꿔주는 주님의 은총이요 선물로 고백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모두의 영혼의 입술에서 72절의 신앙고백이 뜨겁게 고백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입의 법/말씀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