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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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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感에 관한 사담들]
윤성택 시집 / 문학동네시인선 045 / 주) 문학동네(2013.06.27)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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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感에 관한 사람들
윤성택
바람의 궤와 함께 이어지는 색감에서
사위를 움켜줜 채 회전하는 윤곽,
신화의 조난 같은 새벽이 다가오는 사이
빛은 여러 개의 가설을 파먹는다
가지마다 행성을 밝히는 액정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접속자들
후둑 떨어지는 홍시의 여정을 귀에 들려주면
불면의 시공간이 채집된다
녹슨 자전거 바퀴 속을 항해하는 먼지들은
이제 외계의 답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아득히 계통에 없는 유기물로 스며든 후
나선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을 때
감나무에서 붉어지는 봉분이 있다
핏빛 중력이 서서히 끌어당기던 언 땅 밑 항로를 가다보면
나직이 어느 불행과 조우할 수 있을까
새벽녘 얼굴만 비추는 액정에는
파리한 안색이 걸려 있거나 주술처럼 손톱이 부딪쳐온다
별들이 지독한 건 제 빛을 보내
그 눈빛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붉은 탯줄에 매달려 양육되고
고인은 외장 하드에 검은 시신경을 연결한다
희뿌연 배경 붉은 화소의 감나무는
광속의 주파수를 따라
운명은 다만 서로 돌아다보는 거라고
나뭇가지 갈레로 뻗어가고 있다
감과 감의 경계는 응시이다
기억 저편
윤성택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안개
윤성택
밤이 그치고 숲의 깊은 곳까지 서걱거리는 안개가 불빛을 들어마신다
구부정한 가로등이 알약 속으로 들어가
어둡고 투명한 병을 만나면
고통도 잠시 별이 될 수 있을까
아침은 불면不眠 밖이 만져져 까칠하다
메말라갈수록 잎 하나에 더 집착하는 화분 앞에 섰을 때
모든 길은 내가 가보지 않은 날들에 가서 시든다
책장 안에서도 맨홀 안에서도
어느 바람 속에서도
이대로 끝나간다는 불안이 말라가는 동안
나에게만 전하기 위해
그때 그 잎이 창문을 떼어낸다
터널 같은 안개 속에서 무시로 미등이 다가와
충혈을 불리며 무게 없이 둥둥 떠다닐 때
죽은 우듬지 촉수에서 정전기가 이는 상상
잊혀진 폐가에서도 새벽엔 사람이 모인다
아직 사라지지 않는 안개에 묻혀 있는 낙엽들이
나무를 향해서 수액을 밀어보냈을 뿐
그 살아 있는 순간을 위해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한다
알약 속에 켜져 있는 안개
창틀에서 뻗어 온 가장 시든 잎이 숨을 몰아쉰다
붐비는 공중
윤성택
밀봉된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판을 누른다
스위치 윤곽이 희미하다 비석처럼
얼마나 많은 습관이 새겨진 것인지
닳아가는 과거 같은 어떤 기판에선
생이 오래 기념되기도 하지만,
먹구름 구르릉거리는 수직통로를 따라
전 주인의 고지서처럼 낯선 누군가도
얼마간 지문을 남겼을 것이다
지붕 없이 창문만 내 것인 볕은 방향이 바뀌고
벽지에도 서서히 금이 생기는
이 아파트에서는 시간도 비틀려 휜다
먼 생의 손끝이 부르는 시공간이 층층이 열린다
그러나 지금은
바람의 심폐가 계단을 깊게 들이마시는 저녁,
한 평 공간 속에서 몸이 솟구치는 동안
거울 안에는 노인이었다가 아이였다가 나였다가
타인이거나 근친인 외면外面이 겹친다
밤마다 가방은 택배처럼 귀가하고
TV는 통속이 머금은 얼굴에 빛을 뿜는다
소음 번지는 콘크리트를 올려다보며
어떤 이들은 박힌 못처럼 잠들지 못하고
가만히 허공에 떠 살다 갈 이력들,
사람을 길어 올려 조금 더 밝아지는 창문처럼
사십 미터 높이 불빛이 붐비는 무덤이 있다
응시
윤성택
여행의 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기차의 속도로 풍경에서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은 그림자에 호기심을 입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삐져나온 것들은 종종, 당신이 조절할 수 없는 나의 조도이거나
공중을 열어 빛을 쏟아지게 한 인상의 절벽
눈目 속에는 깃을 떼어낸 갈매기가 파닥인다
타인이 초면 너머에서 짙은 안경을 벗는 동안
나는 기호가 없어진 이정표를 보며
가을로 가는 이명을 앓는다
기다리는 편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편지이기 때문이다
계절에 착시를 달아준 저녁놀
가뭇없이 스러지는 어둠은, 응시가 편견이다
녹슨 달이 저 깊은 바다로 사슬을 내리는 곳
두꺼운 점자책 무늬처럼 촉觸으로 산란하는 눈目
당신이 새겨놓은 먼지에 대한 위로이다
낯선 포구 폐선 근처 빈병 속에는
떠밀려온 빛이 들어있다
가령 영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윤성택
지금 날씨는 어느 냉장고 속입니다
한 여름날 영하를 떠올리듯
이 저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이
플러그를 꽂고 있는 걸까요
왠지 모를 그리움이 설핏 껴오는 게
이 추위의 겉봉입니다
밤에 편지로 어두워본 적 있는 사람은
당신의 배후를 동봉한다는 것입니다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새로 꺼내
한 줄마다 심장의 피를 흘려보낸 적 있습니다
몇 줄 지나고 나니 사연에 혈색이 돌고
나는 점점 새벽으로 창백해져갑니다
나는 당신에게로 생각이 입혀지다가
당신 안으로 나를 들여놓습니다
북향의 자취방 작은 창으로 깃든 빛줄기를
여기에 적습니다, 가령 영하는 그날의 체온입니다
필체를 나눠가진 주말은 갔고
그날은 푸른빛으로 인화되는 소인입니다
날마다 나는 영하처럼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해후
윤성택
꼭 한번은 누구도 모르게 자신의 일생을 만나고 간
사람들에게 타인을 입힌다, 다시 만난 듯
인상이 호감을 조금씩 떼어내며 서로의 구면이 된다
폭우처럼 밀려오는 말[言]의 기압골에 표류하는 소리 소리들
금을 새기듯 번쩍번쩍 의미가 얼굴을 바꾸는 중이다
이때 가장 빠르게 눈동자로 옮긴 둥긂에서 빛이 스러진다
기억의 뒷면에는 언제나 터널이 있다
그곳으로부터 여행 온 사람이 지금 태연하게 웃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안은 그대로 독하다
아무도 모르는 내가 되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눈을 부릅뜨는 것보다 때론
그 사람의 눈에서 처음 보는 나를 쓸쓸하게
떠나보내주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저녁의 질감
윤성택
새들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는 곳에 날아가 빈집을 낳는다
침목의 결이 커튼처럼 역과 역에 접히면 민박집 창이
열렸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날의 연한을 모르는 낙서와 같은 고백이
빈방에 남아 시들어가는 노을을 걸어둔다
수첩 속에는 휘청거리는 문장들이 닻을 내리고
저녁의 심지 같은 쓸쓸한 몽상만이 끝없이 흔들린다
가까이 만지기 위해 손 내미는 회색 테트라포드,
삐죽빼죽한 새벽이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나는
내 빈틈으로 드나들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등대는 하얀 기둥을 열었다 닫으며
물결에 열주를 드리운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조난신호처럼 불빛을 축조하는 밤
나는 심해로 가라앉는 피아노를 생각한다
검은건반의 음은 더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썰물이 휩쓸고 간 해변에 장갑이 떠밀려가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은유가 운명처럼
나를 데려간다고 믿는다
안개가 꿈꾸는 부두 너머 길이 있고
가보지 못한 날이 열려 있는 가방이 있다
모든 길이 사라진 저편, 맹렬하게 소멸해가고 있는
한 점은 다시 누군가의 눈目이 될 것이다
신파
윤성택
때로는 삼류 쪽으로 에돌아야 인생이 신파스러워
신신파스처럼 욱신욱신 열이 난다
순정을 척 떼어내자 소나기가 내리고
일제히 귓속의 맨홀로 고백이 휘감겨 들어간다
청춘에서 청춘까지 비릿한 것이 많아서
기억의 수위에는 밤들이 넘치고 편지들이 떠다닌다
뜨거운 이마에 잠시라도 머물 것 같은 입술,
알싸한 그 접착을 지금도 맹세한다
내내 뜨거울 것, 그리고 내내 얼얼할 것
신파란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을 쏟는 것이므로
누군가 나의 눈으로 너를 본다 오래도록,
우리의 날들이 철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아직도, 열이 난다
데자뷰
윤성택
나에게 스미면서 쇄도하는 새벽
빛은 운명을 가볍게 액세스하며 전원 속
비밀의 순간들을 인증한다
진실은 소멸의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
모니터의 검은 점을 통과해 쏟아지는 이메일의 활자들, 점멸하는 입자의 배열이 공중으로 흩날린다 문을 열면 아주 먼 곳일지라도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우리의 시간은 종종 다른 곳에 있다
마음은 생각이 광속도로 지나가는 경치이다
나를 데리고 가요 그리고 벌판에 세워두는 거죠 돌 더미 위 색색의 깃발처럼 흩날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거예요 깊은 숨을 쉬며 당신과 나는 초당 스물네 번의 깜박임으로 알아볼까요 나의 낮은 당신의 밤이 되어 촤르르 지나고 있어요
무거운 잠수종을 뒤집어쓴 바닥의 수심은 깊다 지상에서 내려온 고무호스로 피가 흐르는 소리, 푸른 기포가 열렸다 닫히면 수면으로 떠오르는 물방울이 씨앗처럼 발아한다 눈동자의 실핏줄이 압력에 불거지며 뿌리로 옮아가는 동안 세계는 점점 사라지는 것일까
눈물이 밀려드는 예감에는 방향이 있다
마지막 지점을 관통하는 실루엣
주위는 나를 읽어들인다 직진하는 빛처럼
기억이 막을 뚫고 소리를 끌어모은다
휘감기는 허공에서 차츰차츰 이뤄지는 형체,
나는 이제 그곳에 있다
떠도는 차창
윤성택
조금씩 말라가는 것은 금 간 화분 같은 상점,
휘감던 뿌리들이 틈틈마다 창문을 틔운다
누구나 타인을 데려간 시간 속에서
그리운 이름이 자신을 데리고 나올 때가 있다
창문은 산화된 필름처럼 하나의 색으로
한 장면만 비춰온다, 빛에 갇힌 거리를 바라보지만
가깝거나 먼 네온에 잠시 물들 뿐
기억에게 이 도시는 부재의 현기증이다
몇몇이 버튼을 누르듯 과거에서 내리고
종점까지 밀려가는 버스를 탄 사람은
머지않아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는 밤
당신은 눌러줄 때에만 붉은빛이 스미는
심장이거나 기다림, 벽이었다고 어느 손이
나를 불러들인다 몇 년 전 바람에도
잠시 잠깐 먼 거리에 붉은빛이 돈다
모든 길은 무심하고 쓸쓸한데
어느 따뜻한 멀미가 길을 멈추게 할까
아직 지나치지 못한 정류장을 위해
불 꺼진 창문처럼 과묵한 나무들이
구부정하게 줄 서 있는,
막차
윤성택
밤이 길을 보낸다
속도와 속도의 빗줄기는
텅 빈 시간 속에서 쉴 새 없이
먼지로 흩어진다
길의 끝에는 내가 기억하려 한
저녁이 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생은 위태로우나
그저 쓸쓸한 점멸로
길 위를 추억할 뿐이다
나는 멀리서 이 밤을,
이제 막 당신을,
통과하는 것이다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
윤성택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지도 어디쯤에서
한쪽 눈을 감고 이곳 장면을 저장해 간다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끄면 아늑한 무덤이다
어느 민박집에 두고 온 칫솔이 잊혀지지 않는다
칫솔모가 눌린 채 닦아내고 있을 한때의 적요
과속 방지턱이 다가올 때마다 글자는 삐걱거리지만
물결 소인消印처럼 수첩은 어디론가 페이지를 열어 둔다
오래된 소읍에서는 바람이 묵어간 뒤뜰에도 수취인이 있다
떠나지 못한 날들 속에서 문장은 위독해지고
카메라는 나의 한쪽 눈을 목록으로 만들 것이다
차창 커튼을 스치는 소리는 여행의 첫 줄
누군가 뒤척인다
다가오는 나무들은 저를 흔드는 바람에
빛을 털어내다 뒤편으로 사라져간다 요약하면
어떤 간이역에서는 그늘과 슬픔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
내 눈으로 바라본 희붐한 새벽을 편지라 명명할 때
그 주소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시간의 오지다
화가
윤성택
말이 사라진 날부터 표정에 물감을 들인다
조용히 지나온 길이 비치는 날에는
내막을 알지 못하는 배경만 환해진다
너무 선명한 느낌이 진득해서 생각이 곳곳에 개어 있다
저녁은 방금 켜진 가로등의 입자를 만져본다
편지는 밤마다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포교하는 것이어서
글자에 스며 나온 수만 번 심장의 깜박임이 색으로 수신된다
기다림의 명도는 예감보다 강렬하다
첫 문장을 따라 섞이는 활자들의 질감처럼
운명의 바깥에서 습기와 바람을 넣어주면 그 운명은 표구된다
문득 자기 시선을 깨닫는 어느 날의 지점,
그때는 눈을 열고 다가가 붓으로 그려낼 수 있다
빨려오듯 빛을 기워 넣는 터치를
경계의 근처까지 온 색은 그렇다
아주 어둡고 말이 없는 제 안의 추상
은하
윤성택
그녀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 밤
이름이 몸의 외피에 잠시 깃들다 간다는 걸
자백하듯 서로가 알게 되지만,
다만 어느 시간에서
어느 장소에서
분포된 확률과 마주한다 문득
수천억 개 빗방울과 같은 부호들,
파문은 기억을 비추는 별점(占)이다
귓속 진동을 가로질러 이동한 당신의 범람
희미하게 번지는 암흑이 은하에 이르러 보인다
처음 걷던 길 우리는 우산 촉을 벽에 대고
촉촉한 약시의 거리를 녹음했다
그 곳에 핀 문장에 나무가 자라면
은하는 아직 발음되지 않는 과거로 뿌리내린다
혀의 골짜기에서 죽어가는 새가
내 몸 안을 움켜와 행간에도 천체가 떠간다
별들이 모여 사는 운세처럼
잊는다는 건 우연에게 순전하기 때문이다
궤도를 따라 이 밤,
그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생각이 태어나고 죽는 그 느낌
은하
빗소리
윤성택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건 그 때 내가
오늘 내리는 이 빗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
우산 없이 걸었던 수많은 장면이
환등기 안처럼 환해지고
그 빗소리에 음音이 흐른다
그곳이 있어서 생은 비릿하다
기억에 빗소리를 오버랩시킨다는 것은
빗속 너머 시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거기로 나를 지나게 하는 것이다 빗소리는
빗방울의 부서짐이라기보다는
흩어지면서 이루는 하나의 공명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
그 인에는 반복되는 리듬이 들어있다
빗소리가 음유에까지 읽히면, 비는
기온과 풍경에 따라 톤을 달리하면서
제 자리를 찾아 시간을 열어간다
떠올리는 사물, 그때의 습기까지 조용히 복원해낸다
생각이 생각 위에 떨어져
마음에 왕관 같은 문양이 이는 것이다
구름의 전원을 사용하여 누군가의 순간을 재생한다
거기에는 조용히 머리를 기대고 있는
창문과, 문득 잠에서 깬 의식이 수록되어 있다
비망록
윤성택
시간을 겹겹 접으니 견고하게 뚫립니다
생생한 과거를 이제 펼칠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에 이르는 속성은
당신에 의한 것이니 내 청춘은 고백에 가깝습니다
이 불안하고 어리숙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모한 기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고 이해하겠습니다
한때의 결의도 사랑도
헌책에서 뜯겨져나간 속지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곳의 공기에게 예감은 선물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기억이란
운명을 은유하면서 일생을 떠돌게 마련이니까요
태연한 그 여백을 오늘이라고 적겠습니다
정류장
윤성택
이 눈부신 햇빛의 제목
잎잎은 승차권 같은 바코드를 잎맥에 입혀 환승중이다
실눈이 좁게 우회하는 길 밖으로 꽃들을 부빈다
서로에게 흔들리면서 목걸이처럼 찰랑이는 오후
정류장은 종일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전 빗방울 습기 한 점이 나였던 적이 있다
나는 그곳을 다녀간 내 수많은 성향이다
햇빛은 습기를 공중에 적는다 기억할수록
점점 타인이 많아진다
버스에 올라 정류장 푯말을 바라볼 때
텅 빈 시간의 기압에서 느껴지는 비의 냄새,
어느 길에서는 먹빛 구름이 차창이다
사랑에 대해 점괘를 확신하고 있으면
정류장에서 그날은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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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은 아름답다
그런 추억일수록
현실을 누추하게 관통해야 한다
모든 기억은 추억으로 죽어가면서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윤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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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詩集 [※감感에 관한 사담들※]
[ 해설 ] -
중력과 부력 사이를 떠도는 우울한 파장
엄경희(문학평론가)
1. 불연속적 미궁이 이루어내는 내면 풍경
‘나’의 내면을 포함해서 세계(타자)를 설명하는 가장 친숙한 방식은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의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바가 토대가 되었을 때 그 이야기에는 몸과 감각의 생생함이 내포된다. 한편 실제 경험하지 않은 환상을 통해 우회적으로 세계를 설명할 경우에도 비현실적이지만 감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 상(imagery)의 구축은 필연적이다. 이와 같은 설명 방식과 달리 개념적 설명은 언어를 추상적 체계 안으로 귀속시킨다. 윤성택 시인의 시세계는 이 모두를 포함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모두를 비껴간다. 시에 동반된 이미지와 비유와 상징 들이 강한 애매성을 동반하면서 불연속적인 맥락을 이루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편의 시에 파편화된 전언들이 산종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때로 유기적 맥락을 우회한 채 부유한다. 이때 제목이 시의 내용을 하나의 통일체로 묶어주기도 한다.「푸른 음악」「여행」「현금 자동지급기」「신파」「몸」등 비교적 맥락의 명료성을 지향하는 작품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통일된 맥락을 지연시키거나 불연속적 특질을 강화하는 현상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그의 시에 가장 빈번하게 반복되는 시어는 ‘기억’(혹은 추억, 과거)이라 할 수 있다. 기억에 관한 서술을 모아보면, “아직도 떠오르고 있는 기억 속으로 금이 가는 말들/ 그것은 내가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고백의 두께.”(「숨」), “기억은 드라이플라워로 서걱거려/누구도 미라인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바람미술관」), “불행이 채록을 멈출 때 우울은 음반처럼 기억을 산책한다”(「GRB 101225A」), “바닷속 석조 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아틀란티스」), “기침처럼 만져지는 어둠이 쓸쓸히 잠기고/잊지 않기 위하여 좀더 뿌리를 뻗는 기억들”(「숲을 걷는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기억이란/운명을 은유하면서 일생을 떠돌게 마련이니까요”(「비망록」), “기억의 뒷면에는 언제나 터널이 있다”(「해후」), “불안에게 기억의 종점은 유배지이다”(「마지막 병동」), “주위는 나를 읽어들인다 직진하는 빛처럼/기억이 막을 뚫고 소리를 끌어모은다”(「데자뷰」) 등이 그것이다. 인용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의 기억은 무겁고 우울하며 어둡다. 아울러 ‘기억’이라는 시어 사용의 빈도수를 볼 때 그에게 과거 기억은 현존에 관여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의미화할 수 있다. 다른 시「일기」에서 “몇 줄 일기를 쓰고 오늘을 뜯는다/뒷장의 어제가 내일까지 이어진다”고 쓰고 있다. 과거의 시간이 미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는 독자는 그 기억의 실체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밖에 없다. 기억을 구성하는 실제 내용을 시인이 뚜렷이 문면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기억들이 그를 우울과 외로움으로 내몰고 있는 것일까? 그는 왜 자신의 기억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기억에 매달리는 자아를 수없이 드러내는가? 분명한 것은 기억으로부터 촉발되는 고통의 지시체를 감춤으로써 시의 맥락이 자주 미궁으로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기억과 더불어 간혹 사랑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이 또한 불확정적 상황으로 미끄러진다.
유화처럼 덧바른 기억이 말라
부스러지고 그 색들이 먼지가 되어버린 지금
사랑은 타인이라는 대륙을 건너는 혹독한 여정이다
만년설 속에서 발견되지 못한 당신의 유적이다
-「타인」부분
시인은 유화처럼 덧바른 기억과 연동된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사랑이 혹독하다는 것과 미지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 이상의 전언은 생략하고 있다. 그는 “한때의 결의도 사랑도/헌책에서 뜯겨져나간 속지 같을 때가 있습니다”(「비망록」), “우리는 조금씩 다른 표정의 날이 많았다”(「당신의 밤과 음악」), “그녀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 밤/이름이 몸의 외피에 잠시 깃들다 간다는 걸/자백하듯 서로가 알게 되지만”(「은하」),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추악한 곳으로 흐르는 유속을 지녔다”(「일기예보」)와 같은 구절을 통해 지난 사랑의 아픔과 환멸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대상인 ‘그녀’ 혹은 ‘당신’의 실체를 서사적 사건의 집중성을 통해서 전면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울러 그 대상의 구체적 성격이나 그에 대응하는 자신의 태도 또한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보다 자신의 내면 풍경을 통해 일종의 분위기로서의 시를 만들어 가는 데 초점을 두는 듯하다. 다시 기억에 관한 한 편의 시를 읽어보자.
바닷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막막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으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을 달고서
뿌리는 숨이 차는지 후욱 향기를 내뱉는다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고 덤불로 끌려다닌 길도 멈춘
땅 속 어딘가, 뼈마디가 쑥쑥 올라왔다
차갑게 수장된 심해의 밤
나는 별자리처럼 관절을 꺾고 웅크린다
먼 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틀란티스」전문
이 시는 심해의 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바닷속 석조기둥에 기억이 해초처럼 흔들리고 있다. 화자는 그곳을 미끄럽게 유영한다. 거기 유적이 있고 미련이 있다. 이 같은 심해의 상상은 9행에서 갑작스럽게 땅속의 상상으로 대체된다. 석조기둥은 아까시나무로, 해초는 가지 혹은 뼈마디로, 해초의 흔들림은 꽃과 향기의 번짐으로 대체된다. 독자는 심해와 땅속이라는 이질적 공간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기억에 대한 화자의 의식성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별자리”나 “사라진 빛들”이라는 시어에 의해 시적 공간은 다시 밤하늘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원관념 기억은 해초→유적→가지→향기에서 다시 ‘빛’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상상의 구도에 등장하는 심해와 땅속 그리고 밤하늘이라는 초현실적 공간은 불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세 차원으로의 공간 이동이 모두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간의 불연속성은 구체적인 의미의 생산보다는 그만의 독특한 내면 풍경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풍경의 빛깔은 전반적으로 우울하다.
2. 세계 바깥에서 조직된 자아의 중심
그렇다면 우울한 기억의 고통에 압도되어 있는 시적 자아는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촉발되는 것은 윤성택의 시에서 밥을 먹고 노동을 하고 누군가를 몸으로 사랑하는 등등의 일상 체험이 대부분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윤성택의 시에 기억과 더불어 자주 발견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사이보그(cy-borg)적 자아-세계 혹은 안드로이드(android)적 자아-세계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일생을 기계 속으로 전송시킨다면/바코드로 된 영혼을 얻을지도 모르는 일”(「현금 자동지급기」), “빛은 운명을 가볍게 액세스하며 전원 속/비밀의 순간들을 인증한다”(데자뷰), “통화권을 이탈한 핸드폰처럼/혹사한 몸이 나보다 더 외롭다”(「몸」)고 말한다. 바코드로 된 영혼, 빛으로 복사된 운명, 베터리가 방전된 몸 등은 모두 기계와 접목된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세계는 이러한 개별 존재의 작동 혹은 작용을 조절하고 감시하는 거대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또 다른 시에서 “이제 모두 지구로 보내졌으므로/나를 이루던 중심이 바깥으로 조직된다/나는 매일 나를 바꾸고/광활한 네트워크로 거리를 연결한다”(「거리의 시냅스」) “나는, 송수신이 두절된 탐사로봇처럼/결함을 복구하느라 껐다 켰다를 수십 번 반복하는/누군가를 떠올려본다”(「다운로드」)라고 말한다. ‘나’의 중심을 광활한 네트워크로 전송시킨 자아와 스위치로 조작되는 타자는 모두 유기체적 몸의 질서를 멋어난 존재성을 드러낸다. 이때 ‘나’는 피와 땀과 감정을 가진 생명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신호이거나 암호로 세계 내에 존재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문을 지나쳐왔을까
문은 사각의 틀로 암호화된 나를 읽는다
그리고 비릿한 숨결로 몸을 불어낸다
문을 넘으면 과거의 내가 사라지고
불확실한 내가 만들어진다
한 겹 한 겹씩 시간을 두르고
둥둥 어디로든 흘러다닌다 한때
오래도록 문턱에 있던 적도 있다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있으나
위태롭게 커가는 희망 끝에는
터질 듯한 공포가 번들거린다
때가 됨변 문과 문을 통과하며
나를 이동시켜야 한다
의식은 끈끈한 점성으로 버틴다
수많은 문을 지나며 내가 나를 믿지 않을 때
눈물 같은 막 안으로 뜨거운 것이 스민다
봉분은 관을 품고 밤하늘을 떠다닌다
나는 원본이 해체되고 문으로 복사된
한낱 비눗방울이다 웅크려 늙어버린 내가
문의 망막으로 스캔되는 그 짧은 동안
시간의 테를 두른 새로운 내가 나타난다
-「텔레포테이션」전문
이 시에서 ‘문’은 ‘나’를 읽고 복사하고 스캔하는 인터케이스(interface)를 상징한다. 그 문을 통과하면 존재의 내부에 축적된 시간성은 사라지고 불확실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원본을 해체하면서 진행되는 문 통과하기는 ‘나’를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시키고 ‘비눗방울’처럼 위태로운 존재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아울러 문을 통과하며 ‘나’는 늙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나’는 태어나면서 늙어버리는 역설을 품고 있다. 이와 같은 자아를 시인은 밤하늘을 둥둥 흘러다니는 관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기억이 한 존재의 통일된 감각과 자기 정체성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시간의 단서라면 문 통과하기는 기억을지우거나 훼손하는 과정과 연결될 수 있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윤성택 시에 ‘기억’이라는 시어가 수없이 많이 반복되는 이유를 원본의 해체에 대한 존재론적 저항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이러한 저항이「텔레포테이션」에는 의식의 ‘끈끈한 점성’으로 문턱을 넘지 않으려고 버티는 시적 자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원격이동은 불가피하다. 이것이 윤성택의 시적 자아가 위치해 있는 세계이다. 그는 매일 문을 통과하며 자신의 중심을 전송시킨다. 그는 수십 개의 채널 속으로 파편화되면서 밤의 네트워크를 따라 이동한다. 이 이동로는 “기호가 없어진 이정표”(「응시」)이다. 이 같은 세계는 새로운 공간의식을 낳는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에 발을 붙이고 집을 짓고 경작을 해왔던 존재들이 공중의 전파체로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곧 새로운 공간과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를 “중력과 부력 사이를/쉼 없이 오가는 이 느낌이/몸의 빈틈을 다 메우고 솟는 눈물 같다는 것”(「가라앉는 꽃」)이라고 말한다. 이제 존재는 하나의 신호이거나 암호일 뿐이다. 다시 말해 손과 발이 필요 없는 무형의 존재로서 공중을 배회하는 것이다. 이때 신체 기관 가운데 남는 것은 브라운관이나 액정 화면을 읽어낼 눈이라 할 수 있다.
각기 한 방향에서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브라운관 바깥은 화소 같은 눈알뿐
사람들은 화분처럼 앉아서 주광성을 띤다
-「채널」부분
늦은 밤 저리 환한 침묵으로 서 있다
나를 요약하는 한 뼘도 안 되는 조각
천천히 밀어넣는다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동태를 살피는
무인카메라가 거울 속 한 점으로 뚫려 있다
거래는 늘 일방적이다
-「현금 자동지급기」부분
브라운관을 판독하는사람들의 눈알인자 ‘나’의 정보를 들여다보는 무인카메라의 눈은 모두 이 세계의 표면을 검색하고 검열하는 감시체를 함의한다. 이때 관찰자와 대상 간의 소통은 일방적이다. 대상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을 거부할 수 없으며, 거기에 관여할 수도 없다. 즉 대상화된 존재는 자신의 고유성을 온전히 보전하거나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살핀 시 「텔레포테이션」에서 보았듯이 대상을 스캔하는 문을 통과하는 순간 대상으로서 ‘나’는 해체되고 늙어버린다. 그런데 관찰자와 대상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 둘은 언제나 역전될 수 있다. ‘나’는 “화소 같은 눈알”이면서 동시에 관찰되는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계를 이와 같은 ‘눈’의 세계로 요약한다면 우리 모두는 ‘눈’으로써 서로를 해체시키는 가학과 피학을 노정하게 된다. 윤성택이 인식한 세계와 존재 인식은 이에 기반한다. ‘눈’으로 축소된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 대해 일방적으로 작용력을 실행할 때 존재는 하나의 원자화된 파장으로 화한다. 이러한 존재성을 시인은 “(전략) 나는/아무 정처 없는 단서이면서/탁한 환멸의 무게, 그 속성이며 취비”(「시간의 환부」)라고 고백한다. 뜨거운 피와 피부 감각과 표정을 상실한 존재의 변환 속에서 시인은 기술시대의 우울을 토로하는 것이다.
3.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정념의 끈
윤성택의 시에서 이러한 우울의 상징물로 등장하는 것이 ‘창문’이다. 그의 창문은 세상을 내다보는 확대된 ‘눈’의 일종이다. “창문은 산화된 필름처럼 하나의 색으로/한 장면만 비춰온다”(「떠도는 차창」), “카메라 액정 같은 창문에는 불면이 저장된다”(「타인」), “알약 속에 켜져 있는 안개/창틀에서 뻗어온 가장 시든 잎이 숨을 몰아쉰다”(「안개」), “어떤 것도 관음증으로 둘러싸인 창들의 피로를 열지 못한다”(「저녁의 선택」)와 같은 구절에 보이는 산화된 필름, 불면, 시든 잎, 피로 등과 같은 시어는 쇠락하는 세계의 단면을 암시한다. 이러한 병적 세계에서 존재의 분열은 불가피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한 평 공간 속에서 몸이 솟구치는 동안
거울 안에는 노인이었다가 아이였다가 나였다가
타인이거나 근친인 외면(外面)이 겹친다
밤마다 가방은 택배처럼 귀가하고
TV는 통속이 머금은 얼굴에 빛을 뿜는다
-「붐비는 공중」부분
어느 꿈이 황금음반을 틀어주고 있다는 샐각
탐사선이 태양계 끝에 가 있는 것은
방안에 떠 있는 어떤 입자 속 제국에
내가 기류하고 있다는 것, 비 오는 밤
막막한 공간에 음악이 퍼지면
몇백억 킬로미터 밖 동체가 느껴진다
나는, 이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서 보내온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기류(寄留)」부분
어딘가 비문(非文)으로 남겨진 당신
나는 악(惡)하게 서술되어 결속되지 못한다
의식하면 할수록 나로부터 강파르고 태연하다
나는 서서히 그림자로 부패해갈 것이고
자글자글한 어둠 속에서 표정을 바꿀 것이다
불현듯 또 다른 내가 생각을 입을 때마다
내 뜻으로 버려지는 나는, 검은 가면을 쓰고
불경한 무대 위에서 독백을 시작한다
나를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극적으로
추억을 무모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시간의 환부」부분
시「붐비는 공중」에 등장하는 거울에는 “노인이었다가 아이였다가 나였다가/타인이거나 근친인 외면(外面)”이 겹쳐있다. 노인과 아이, 타인과 근친이라는 대립항이 하나의 얼굴에 결집되는 ‘나’는 누구인가? 대립항의 겹침은 모순과 분열로 얼룩진 존재의 초상을 의미화한다. 한 존재가 질량과 부피를 버린 채 수많은 채널 속으로 전송될 때 자아의 정체성은 찢기면서 와해된다. 이러한 존재 확인의 순간 ‘가방’은 택배처럼 낯설게 귀가한다. ‘가방’은 한 존재의 욕망과 꿈을 담는 주머니라는 점에서 존재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윤성택의 시에 가끔 ‘가방’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여행의 공간(「여행」)이나 미지의 시간 (「저녁의 선택」)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외로움과 결합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TV가 놓여 있는 일상의 공간에서 ‘나’의 분신인 가방은 택배라는 비인간적 차원으로 화한다. ‘나’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순간 ‘나’의 꿈과 욕망을 실어 나르던 가방의 정체성 또한 낯선 사물성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시「기류(寄留)」는 꿈의 생생한 체감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시적 자아는 황금음반이 들려주는 우주의 음악 속에 몸을 띄우고 있다. 그런데 시적 자아는 음악 속에 떠 있는 자신의 동체가 “몇백억 킬로미터 밖”에 있음을 느낀다. 일종의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시간과 공간의 분열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 분열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내게서 보내온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꿈과 현실의 간극이 만들어놓은 존재의 찢김과 비애를 읽을 수 있다. 우주의 음악 속에 기류하는 ‘나’는 상상 속의 ‘나’이며 실제의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상상 속의 ‘나’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자아의 분열을 초래할지라도 '나‘는 황금음반의 음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윤성택이 현실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앞서 살핀「붐비는 공중」이 일상에서의 분열을,「기류(寄留)」가 꿈(환상)에서의 분열을 각각 드러낸다면 시 「시간의 환부」는 의식의 분열을 나타낸다. 이 시에서 ‘나’는 누군가에 의해 악(惡)하게 서술된 채 “강파르고 태연”하게 본래적 자아와 맞서 있다. 이때 본래적 자아로서 ‘나’와 악하게 서술된 ‘나’의 위계가 뒤바뀐다. 본래적 자아는 ‘그림자’가 되어 부패하면서 자신의 ‘표정’ 즉 정체성을 잃어간다. 내가 아닌 ‘나’를 버리고자 하지만 ‘검은 가면’을 쓴 ‘나’는 “불경한 무대 위에서 독백을 시작한다”. 이 같은 검은 가면의 ‘나’는 나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또 다른 내가 생각을 입을 때마다” 생겨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다.
윤성택의 내적 자아는 이처럼 무수한 분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한다. 이러한 자아 분열의 근원에는 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현대 기술 문명의 메커니즘이 자리해 있다. 여기서 다시 시「거리의 시냅스」의 “이제 모두 지구로 보내졌으므로/나를 이루던 중심이 바깥으로 조직된다/나는 매일 나를 바꾸고/광활한 네트워크로 거리를 연결한다”라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의 중심이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조직될 때 그 중심은 내부적 동력을 상실한 중심이라는 점에서 온전한 의미의 중심이라 할 수 없다. 자신과 무관한 중심이 바깥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매일 나를 바꿔야 하는 존재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나’와 다른 불확실한 ‘나’(「텔레포테이션」)는 생성과 사멸을 거듭하면서 광활한 네트워크에 편입된다. 시인은 이를 “나는 헝겊이 되었다가 검은 유체가 되었다가/사라진다”(「뉴스」)라고 말한다. 이것이 윤성택의 존재일반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불확실한 ‘나’의 생성을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 메커니즘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오로지 무채색 페이지에 적혀”(「우연한 일기」) “아무 정처 없는 단서”(「시간의 환부」)로 공중을 떠돌아야 하는 이 실존의 사태를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나’와 불확실한 ‘너’ 사이에서 태어나는 사랑과 믿음은 모두 허위적이거나 기만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모니터의 검은 점을 통과해 쏟아지는 이메일의 활자들, 점멸하는 입자의 배열이 공중으로 흩날린다 문을 열면 아주 먼 곳일지라도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우리의 시간은 종종 다른 곳에 있다”(「데자뷰」)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진실한 감정은 오로지 분열된 ‘나’를 바라보는 자의 외로움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핀 시「아틀란티스」「기류(寄留)」를 포함해 윤성택의 시 전체를 휩싸는 외로움과 그와 연동된 우울의 서정은 이러한 존재론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전자가 고요를 밀어올리며
달그락거린다 넘칠 듯 넘치지 않는
생각들, 물 끓는 소리
방안을 적신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저녁
문득,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얀 오선지 위 빽빽이 채워진 악보처럼
수놓은 음들
노란 가로등 아래 누군가 있다면
내가 켠 성냥
바람 막아줄 따뜻한 손이 있다면
주전자 뚜껑을 비스듬히 열어놓고
커튼을 내리고
쓰다 만 편지를 적는다
잔기침이 난다, 차 한 잔
향기가 행간을 밀고 가는 밤
한쪽으로 몸을 기댄 나무들
그 품에서 일제히 멀어져가는 잎새들
닫혀 있는 유리창 경계를
자꾸만 넘나드는 바람 소리
-「쓰다 만 편지」전문
주전자 물이 끓고 음악과 차향이 스미는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저녁”의 시간 속에 홀로 앉아 있는 ‘나’는 사이보그적 자아나 안드로이드적 자아와는 전혀 다른 친근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는 따뜻한 손을 그리워하며 잔기침을 하고 차향을 음미한다. 그가 있는 실내는 외로움의 공간이지만 한편 수분과 온기를 간직한 인간적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성택의 ‘외로움’은 한 존재가 인간적 감정의 깊이로 잦아드는 휴식의 순간이기도 하다. 다른 시에서 보이는 “여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은/간신히 내 이름을 잊어가는 사람이다”(「우연한 일기」), “아무도 모르는 내가 되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해후」), “나는 지하 카페 뒷좌석이거나 눅눅하게 젖어버린 노트”(「비에게 듣다」)에 묻어 있는 쓸쓸함과 외로움은 시인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충실해지는 순간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력과 부력 사이”(「가라앉는 꽃」)을 쉼 없이 오가야 하는 존재상황을 가로질러, 검은 가면을 벗고, 내가 비로소 ‘나’일 수 있는 외로움의 순간은 비극적이지만 진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윤성택의 우울과 외로움은 바깥에서 수없이 재조직되는 거짓 자아의 중심을 벗어나 본래적 자아에게로 귀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의 끈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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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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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시인∥
∙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 2001년『문학사상』신인상에「수배전단」외 2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시집으로『리트머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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