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6일,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 사망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0년 7월 4일 ~ 1971년 7월 6일)이 심장마비로 1971년
7월 6일 사망했다. 암스트롱이 죽었을 때 미국 매스컴은 `문화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추도했다. 그는
재즈의 역사였다.
루이 암스트롱은 1901년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아주 가난한 흑은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너무도 찢어지게 가난해 7살 때부터 돈벌이에 나섰을 정도였고 신문팔이에서 석탄 나르는 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루이 암스트롱
그러던 암스트롱은 11살 때 새해맞이로 하늘에 대고 총을 쏜 일이 있는 데 그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
소년원에 보내졌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트럼펫과 비슷한 ‘코넷’이란 악기를 접하게 되었다.
하도 코넷을 잘 불어 암스트롱은 소년원 악단의 으뜸 연주자가 됐다. 어쩌면 소년원에 들어간 게
암스트롱의 일생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암스트롱은 훗날 어린 시절의 혹독한
가난과 고생을 얘기할 때면 “내 인생에 가장 멋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아무튼 암스트롱은 18개월에 걸친 소년원 생활을 마칠 때쯤이면 이미 상당한 경지의 연주 실력을 갖췄다.
그러던 그는 자기가 살던 뉴올리언스의 번화가 스토리빌의 술집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킹
올리버를 만나게 되었다.
암스트롱이 고향인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1920년대 당시 가장 잘 나가던 킹 올리버가 이끄는 악단에
18살의 나이로 합류할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보여 대활약을 보였다. 이처럼 킹 올리버가 이끄는 악단인
‘크레올 재즈 밴드’에서 큰 활약을 보인 암스트롱은 당시 시카고 다음으로 재즈가 흥했던 동부 뉴욕으로
진출해 당대 최고의 흑인 악단이었던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 들어가게 된다.
Younger years: Armstrong is pictured in 1921, when he was 20, with his mother and sister
Beatrice. After leaving the home, he started playing gigs and eventually moved to
Chicago and then New York City
하지만 암스트롱은 1년 정도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서 활동하다가 1926년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 이번엔
자기 이름을 딴 악단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름이 처음엔 루이 암스트롱 핫 하이브(Louis
Armstrong & His Hot Five)였다가 나중엔 루이 암스트롱 핫 세븐으로 바뀌었다. 헨더슨 악단을 떠나
다시 시카고로 금의환향했을 때 암스트롱은 “세계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였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재즈는 루이 암스트롱이 연주하고 노래한 식으로 정의되기 시작됐을 정도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는다. 암스트롱을 빼놓고는 재즈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히 그의
신명 나고 맛깔스런 연주 못지않게 연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신명 나는 노래로 관중을 휘어잡았다.
각종 라디오에 출연해 연주와 노래를 했는가 하면 영화에도 출연할 정도로 명사가 됐다.
Louis Armstrong is pictured front row center during a 1931 visit to a New Orleans
boys' home formerly known as the 'Colored Waifs Home'. He was first sent to the home
in 1910 when he was arrested age nine
He is pictured third left during his visit in 1931 with his former music teacher, Peter Davis
(second left), and the owners of the home, Captain Joseph Jones (third right) and his wife
Manuela (left)
그는 트럼펫, 트럼본, 클라리넷의 대위적 선율을 주축으로 삼는 뉴올리언즈 재즈의 리듬과 아프리카의
블루 노트를 유럽의 음악유산으로 완성, 1930년 이후 태동한 스윙재즈의 빅 밴드스타일로 넘겨준
사람으로 재즈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는 무지막하게 커다란 입이라는 의미의 슬랭인 `사치모
(Satchmo)`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즉흥연주의 대가로 초창기의 재즈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거목 루이 암스트롱은 `블루베리 힐`(1949)
`맥 더 나이프`(1956), `헬로 돌리!` 등의 명곡을 남겼다. 훗날 재즈의 황제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재즈가 무엇이냐"고 묻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봐, 뭘 알려고 드나, 영원히 모를 걸세"라고
대답했던 일화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