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도 윤회를 믿느니 차라리 기독교를 믿겠습니다?
뿌리 깊은 단멸론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 시리즈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과학을 탐구하는 학자의 글로서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여 불교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렇게 물질을 기반으로 하여 설명하다 보니 오로지 현실적 삶에 가치를 부여 하게 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단멸론’으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다.
의외로 불자들 중에는 단멸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스님들이나 학자들 탓도 있다. 불교계의 리더들이라 볼 수 있는 스님이나 학자들이 공공연히 법문이나 글에서 공공연이 단멸론적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적 근거가 없다. 자신의 생각한 바를 표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감각적 인지에 의존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 등 육감으로 접한 깜냥(感量)과 과학적 상식에 기반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단멸론적 견해를 접하면 악취가 풍긴다. 마치 오물장에 온 것처럼 악취가 나는 단멸론을 사이버상에서 접하기는 어렵지 않다. 소위 단멸 사이트라 하여 자신의 깜량으로 새롭게 해석한 불교를 보면 대부분 유사하다. 그것은 단멸론이 매우 뿌리 깊은 것임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단멸론은 기승을 부려 왔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절반의 성공을 향한 단멸론자들의 도박(2012-07-04)’라는 제목의 글이 그것이다.
댓글을 받았는데
댓글을 받았다. 어느 법우님이 육도윤회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법우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내용은
2. 괴로움을 줄이지 못한다. 초선정에도 못 들어간다
(C법우님)
법우님은 글의 말미에 “육도 윤회를 믿느니 차라리 기독교를 믿겠습니다.”라며 폭탄선언을 하였다. 일개 개인적 선언이라 하지만 이런 현상은 가르침을 잘못 접한 것이고 왜곡하는 세력이 있음을 말한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지혜
C법우님은 “부처님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내용은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자(sabba??u)이다. 그래서 법을 펼친 것이다. 육도윤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모르지만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삼명을 말한다.
삼명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 경전 도처에 나온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지혜를 말한다. 이 삼명으로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 숙명통으로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보았고, 천안통으로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지혜를 얻어 업과 과보를 보게 되었고, 누진통으로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여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이렇게 내생과 윤회, 그리고 업과 과보 등을 설명하였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다면 불자로 볼 수 없다.
근거를 제시해야
부처님은 내생과 윤회와 관련하여 초기경전 도처에서 육도윤회를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이를 부정한다면 이는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자신의 깜냥으로 가르침을 재단하였기 때문에 경전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개인적 견해로 본다.
어떤 주장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근거를 가져야 한다. 육도윤회를 믿을 수 없다면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든지 또 다른 근거를 제시 해야 할 것이다. 근거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나열한다면 이는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육도윤회가 믿느니 차라리 기독교를 믿는다’고 천명하였다. 이는 가르침을 몰라서 ‘구업’을 지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십선행이 있다. 그 중 마지막 열 번째를 보면 잘못된 견해에 대한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견해일까? 그것은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는 정형구이다.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보시를 하여 공덕을 쌓으면 선과보를 받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악행을 하여 악과보를 받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현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래서 단멸론자들도 인과를 인정한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내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현세에서 인과론을 인정하면서도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현세만을 이야기 한다. 이는 죽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고,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어서 알 수 없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따른 깜냥과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여 내생과 윤회, 특히 육도윤회에 대하여 부정한다. 강병균교수류와 같은 단멸론자들을 말한다.
단멸론자들은 인터넷 시대에 사이버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고 전 시대에 걸쳐 있었다. 그것도 나라와 지역을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어떻게 될까? 초기경에 따르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M60)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단멸론자들은 육도윤회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을 보면 1950년대 미얀마에서도 단멸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법문집에서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전법륜경 5장)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단멸론자들의 특징이 오로지 현세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세에서 즐기는 삶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단멸론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말하는 것이다. 내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까지 왜곡한다. 바로 그 말이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런 말을 단멸론자들이나 단멸사이트에서 많이 본다. 과연 부처님은 현세적 가르침만 설하였을까?
초기경전은 매우 방대하다. 오부니까야를 모두 모아 놓으면 책장으로 가득하다. 금액적으로 따졌을 때 백만원이 넘어 간다. 이렇게 방대한 초기경전에 대하여 팔만사천법문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수 많은 설법을 하였다. 후대 제자들이 이를 기억하여 구전하였다. 이후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되어 온 것이 현재 볼 수 있는 오부니까야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음이라 한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경전이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지 않는 내용이 삽입되고 보충 되고 추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증거를 제시 하지 않는다. 후대에 윤회론 등이 삽입되었다면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나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이 실험과 실증에 의하여 이론이 확립되듯이 육도윤회가 도중에 삽입 되었다면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도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멸론자들은 한결같이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지금 철학이나 과학하자는 건가?
불교는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교를 철학이나 과학으로 격하 시키려는 시도를 볼 수 있다. 만일 불교를 철학이라 본다면 팔만사천 법문 중에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불교를 과학이라 본다면 더욱 좁혀서 근거가 되는 경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학자들은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내생과 윤회가 부정되고, 육도윤회는 황당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불교는 철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다. 종교라는 말이 의미 하듯이 으뜸 가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자들은 가르침으로서 종교, 진리로서 종교를 신봉한다. 철학이나 과학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서 삶의 해답을 찾고 가르침 안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육도윤회를 부정한다. 육도윤회가 고대인도의 윤회관임에 비롯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육도윤회를 재해석하였다. 그래서 으뜸 가는 가르침, 즉 종교로서 육도윤회를 받아 들여야 한다. 불자들이 불교철학하자고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불교과학자하자고 믿는 것도 아니다. 만일 불교를 철학이나 과학으로 본다면 강병균교수를 믿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금 지금 철학이나 과학하자는 건가?
윤회를 멈추려면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50년대 미얀마에서도 육도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과 결부시키려는 자들을 말한다.
단멸론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시도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갈애가 있는 한 윤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멸론자들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남아 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S56.11)라고 규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영원히 존재하고픈 존재에 대한 갈애나 단멸하고픈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자아를 기반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된다. 공덕을 지어 때로는 천상에 나지만 공덕이 다하면 악처에 나기도 한다. 이것이 육도윤회이다.
존재가 윤회하는 원인은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즉 갈애 때문에 윤회한다. 갈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육도를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갈애를 소멸시켜 버리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초에서 볼 수 있는 ‘아라한선언’이다. 그래서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 j?ti natthid?ni punabbhavoti)”라는 지견이 생겨 났을 때 비로소 윤회가 멈추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범천계에서 밝게 빛나더니, 돼지우리에서도 즐거워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육도윤회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것은 “범천계에서 밝게 빛나더니, 돼지우리에서도 즐거워한다”라는 미얀마 속담에 대한 것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王舍城)로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어린 암퇘지를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치아에서 하얀 빛이 반짝하는 것을 본 아난다존자는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지으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어린 암퇘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저 어린 암퇘지가 보이느냐? 저 암퇘지는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의 가르침이 행해지고 있을 때 인간계의 한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죽어서 한 사원의 부엌 근처에 사는 암탉으로 재생했다. 그 후 그 작은 암탉은 독수리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암탉은 바로 그 직전 명상주제를 가지고 수행을 한 비구가 읊조린 게송을 우연히 들었고 거기서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공덕의 과보로 그 작은 암탉은 왕가의 웁바리라는 왕녀로 재생하게 되었다.
웁바리 왕녀는 나중에 가정을 떠나 떠돌이 수행자(流行者)가 되었다. 떠돌이 수행자들의 거처에 머물던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변소의 구더기들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 벌레들은 벌레가 들끓는 시체의 혐오스러움에 대한 관찰이나 흰 대상에 대한 관찰이라는 명상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힘입어 초선初禪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서 초선천初禪天의 범천으로 재생하였다. 범천계에서 목숨이 다하고서 인간계의 부유한 사람의 딸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지금의 돼지로 태어났다. 나는 이 모든 사실들을 보았기 때문에 미소 지은 것이다.”
이 다양한 존재로 반복되는 재생의 이야기를 들은 아난다 존자와 다른 비구들은 크게 놀랐고 종교적인 감동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탁발을 잠시 멈추시고 길에 서신 채 여섯 개의 게송으로 된 법을 설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첫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Yatha-pi mu-le anupaddove dalhe, chinnopi rukho punareva r?hati eva?pi ta?h?nusaye anuhate nibbattati dukkhamidam. punappuna?
그 뿌리가 손상되지 않고 굳건하면 잘린 나무라도 다시 자라나듯 갈애의 잠재성향이 뽑히지 않는 한 이 괴로움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 게송이 전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웁바리 왕녀였을 때 그녀는 세상을 버리고 떠돌이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명상수행을 해서 그녀는 억압에 의한 버림을 통해 ‘중간 단계 번뇌’를 제거하는 초선初禪을 얻었습니다. 초선에서는 오직 의문意門에 나타나는 감각적 사고思考인,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제거합니다. 억압으로 번뇌를 끊는 선정禪定은 일정시기에 일정한 한도까지만 번뇌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선을 얻었을 때 그녀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몰아낼 수 있었고 나중에 범천계로 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세계의 부유한 사람의 딸로 다시 태어났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성스러운 도로 뿌리뽑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녀가 초선을 얻었을 때에도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가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범천계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가 돼지가 된 것입니다. 갈애가 남아있는 한 이렇게 다양한 존재로 윤회를 되풀이 합니다.
범천계에서 돼지의 존재로 떨어진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옛 사야도들은 이러한 금언을 남겼습니다.
“범천계에서 그녀는 밝게 빛났고 돼지우리에서도 그녀는 즐거워했다.”
그러나 범천계에서 직접 돼지나 다른 동물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아귀계나 지옥으로 직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 근접집중 수행(우빠짜라 바와나, upac?ra-bh?van?)을 해서 이미 선정을 얻은 사람만이 사람이나 천상계에 재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의 어린 암퇘지는 부유한 사람의 딸로 태어나 사람의 삶을 거쳤습니다. 그녀가 부유한 사람의 딸로 살다가 나중에 돼지의 존재로 떨어진 것은, 사람으로 있을 때 마땅히 존경할 만한 분을 오만방자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얻은 악업이 원인이었습니다.
어린 암퇘지는 죽어서 대강 미얀마의 타똔지방으로 추정되는 수완나부미(金地國)의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불기 1500년경의 데와빨라 왕에 의해 만들어진 청동비문을 근거로 수완나부미가 인도네시아의 수마뜨라 섬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수완나부미의 왕녀에서 다시 인도 바라나시의 한 여자로 태어나고 그후 뭄바이 남동쪽의 와나와시의 한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죽어서 뭄바이 북서쪽의 숫빠라까라는 항구도시의 말 상인 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엔 인도반도 최남동부의 까위라 항구의 선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예전에 다밀라라고 하던 타밀 사람들이 거주하는 해안지방입니다.
그 삶을 다하고 그녀는 지금의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정부관리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다음은 아누라다푸라의 남쪽마을 복깐따의 수마나라고 하는 한 부유한 사람의 딸로 재생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수마나라고 불렸습니다. 나중에 수마나의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디가와삐 지방의 마하무니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하루는 우연히 두타까미니 왕의 장관인 라꾼다까 아띰바라가 어떤 볼일이 있어 마하무니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묘령의 수마나 아가씨를 보고는 그만 한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장관은 그녀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는 자기 마을 마하뿐나로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따웅손 사원에 머물던 마하 아누루따 존자가 우연히 탁발을 하기 위해 수마나가 사는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존자가 수마나의 저택 문 앞에서 시주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를 보고는 비구도반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입니까?! 세존 당시의 그 어린 암퇘지가 이제는 라꾼다까 아띰바라 장관의 부인이 되어 있군요.”
이 감탄의 말을 들은 장관의 부인 수마나에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이 지혜로 수마나는 자신이 살아온 전생들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윤회의 바퀴에서 계속해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장관인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그녀는 비구니 사원으로 가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수계식후 수마나는 띠싸 대사원에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염처경念處經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 경의 말씀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도과의 첫 단계인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두타가미니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고향마을 복깐따로 되돌아 왔습니다. 거기서 수마나는 깔라 대사원에서 독사경(毒蛇經 ?s?visopama Sutta)을 듣고는 넷째 과를 얻어 번뇌(아사와, 漏 ?sava)와 애욕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수마나가 살아온 열두 생을 사려 깊고 유심하게 살펴본다면 종교적인 감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까꾸산다 부처님 때의 이 젊은 여인은 죽어서 가족과 재산과 자기 몸뚱이를 남겨둔 채 떠났습니다. 유족과 친구들은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암탉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암탉으로 재생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 암탉도 가족과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암탉은 독수리에게 붙잡혀 부리로 맹렬하게 쪼여져서 목이 잘리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상에 대한 게송을 들은 공덕으로 그녀가 왕녀로 태어나났다는 것은 참으로 위안이 되는 일입니다. 암탉은 물론 법(Dhamma)을 알지는 못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게송을 경청하였고 그 공덕으로 인해 왕녀로 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법문을 듣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얻는 것도 많습니다.
왕녀의 삶을 살고 난 뒤에 선정을 성취하여 범천에 태어났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범천계에서 내려와 인간세계의 부유한 가정에 재생한 것도 만족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 재산을 뒤로 한 채 아쉬워하며 암퇘지로 재생했다는 것을 알면 너무나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범천계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와서 다시 더 낮은 돼지의 축생계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끔찍합니다. 성스러운 도를 확립하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악처(ap?ya)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은 놀라움과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종교적인 감격을 불러일으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법을 닦으라는 의미에서 암탉의 연속적인 윤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암퇘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경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날처럼 사육자에 의해 도살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암퇘지는 틀림없이 자신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 남겨놓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나중에 수완나부미에서 아누라다푸라까지 줄곧 여섯 생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그래도 위안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 각각의 생애를 마감할 때마다 그녀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슬픔, 비탄, 정신적 고통에서 오는 크나큰 괴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마지막에 비구니인 수마나 장로니가 된 것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고무적인 부분입니다.
그녀가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연속해서 재생한 원인은 갈애 또는 괴로움의 원인인 집제集諦 때문이었습니다. 갈애를 아직 제거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한 생에서 죽어 또 다른 생으로 재생하는 윤회를 거칩니다. 그래서 갈애, 즉 집제를 제거하기 위해 성스러운 도의 수행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마나 장로니는 처음에 염처경念處經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방법에 따라 알아차림 수행을 하여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독사경毒蛇經을 들은 후, 수행에 더욱더 열심히 매진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여성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갈애, 다른 말로 해서 일어남(集, 사무다야. samudaya)이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더 이상의 재생이 없고 지고의 행복인 완전한 열반에 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마나 장로니는 도반들에게, 현생의 생명력인 수명의 업(壽行)이 다하고 나면 반열반에 들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비구와 비구니 도반들은 그녀에게 전생이야기를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나는 까꾸산다 부처님 당시에 한 여인이었습니다. 거기서 죽어 암탉이 되었습니다. 독수리에게 목이 잘리고 잡아먹혔습니다. 그리고 인간계에서 왕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복깐따 마을의 마지막 생까지 자신의 전생을 계속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각각의 생에서 삶의 오르내림과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열두 생을 살아왔습니다. 이 마지막 생에서 나는 윤회에 염증을 느껴 비구니가 되었고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같은 고결한 비구와 비구니 모두에게 알아차림으로 정진해서 계· 정· 혜를 완성하여 확립할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로 이루어진 사부대중의 마음속에 종교적인 감격을 불러일으키며 입멸入滅하였습니다. 이 어린 암퇘지 이야기는 법구경」주석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 집성제)
이 이야기는 법구경 338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다. 이는 ‘어린 암퇘지와 관련된 이야기(sukarapotikavatthu)’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인연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육도윤회와 관련시켜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범천이 암퇘지가 되기까지 여러 생을 전전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속에서는 꿀꿀 거리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윤도윤회가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알려준다. 범천이라 하면 하늘의 지배자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 등에서는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Eso hi bhikkhu brahm? mah?brahm? abhibh? anabhibh?to a??adatthudaso vasavatt? issaro katt? nimm?t? se??ho sajjit? vas? pit? bh?tabhavy?na?.)” (M49)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범천을 빠알리어로 브라흐마라 하는데 이를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이다. 왜 하느님인가? 경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라고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다. 이렇게 창조주라 불리는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 거린다고 하였다. 이것이 육도윤회이다.
범천은 왜 돼지 우리에서 꿀꿀거렸을까? 이는 갈애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그래서 법구경 게송에 따르면 “갈애의 경향이 뽑히지 않으면 그 고통은 거듭해서 난다. (eva?pi ta?h?nusaye anuhate nibbattati dukkhamidam punappuna?)”(Dhp338) 고 하였다. 이는 마치 나무를 잘라 내어도 뿌리가 남아 있어서 다시 자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갈애는 뿌리와 같은 것이다.
천진불사상에 대하여
갈애의 경향이 남아 있으면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 이는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도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라 하였다. 이런 갈애의 경향은 어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경향은 마음의 상속 가운데 잠자는 것으로 태어남이나 발생의 조건으로 이어진다. 마치 쥐에 물려 쥐의 독이 몸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아무 때든지 심각한 질병으로 발현되는 것과 같다.” (Dds.147-148) 고 하였다. 그런 갈애의 경향에 대하여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즉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경향, 2) 존재의 경향, 3) 분노의 경향, 4) 자만의 경향, 5) 사견의 경향, 6) 의심의 경향, 7) 무명의 경향”을 말한다.
갈애는 뿌리와 같은 것으로서 뿌리가 뽑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다. 지금 아기가 천진해 보이지만 갈애의 뿌리가 잠재 되어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발현된다. 특히 사춘기 때 발현되면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 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천진불사상’이 있다.
천진불사상은 외도 사상이다. 부처님이 “그 아기에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M64)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외도들이 어린아이의 천진무구성을 이상을 삼은 것은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동자승과 아누사야(잠재성향), 천진불사상은 외도의 견해(2014-04-2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잠재성향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천진한 아이들에게 순수함을 볼 수 있다. 아무런 번뇌가 없어 보여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천진불사상은 부처님 당시 외도의 견해이었다. 이는 아기에게 숨겨져 있는 잠재성향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라면서 서서히 발현되는 것이다.
잠재성향은 기본적으로 갈애를 뿌리로 한 것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큰 경(M43)에 따르면 재가신자 위사카가 “존귀한 여인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적 경향이 따르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따르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지의 잠재적 경향이 따릅니까?” (M43)라고 묻는다. 이에 아라한 담마딘나 비구니는 “벗이여 비싸카여,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적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따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따릅니다.(Sukh?ya kho ?vuso vis?kha vedan?ya r?g?nusayo anuseti. Dukkh?ya vedan?ya pa?igh?nusayo anuseti. Adukkhamasukh?ya vedan?ya avijj?nusayo anuset?ti.)” (M43)라 하였다.
담마단니 비구니는 느낌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이,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적 성향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경향이 숨어 있을 때 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발현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의 잠재적 성향이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잠재적 성향은 갈애를 뿌리로 하고 있다. 갈애를 소멸시키지 않는 한 육도를 윤회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감각적 인지에 따른 깜냥에 의존하는 한
마하시사야도의 육도윤회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황당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특히 강병균교수류와 같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따른 깜냥과 과학적 상식에 따르면 인연담에서의 수마나가 살아 온 열 두 가지 윤회의 쳇바퀴에 대하여 대하여 도저히 받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갈애에 기반한 윤회를 설명하였다면 받아 들일 수 있다. 갈애가 소멸 되지 않는 한 잠재적 성향으로 이곳 저곳에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르침은 철저하게 사성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안다면 육도윤회를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육도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도 된다. 그럼에도 단멸론자들은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강변 하면서 오로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육도윤회에 대한 실감나는 법문
육도윤회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설명한 법문을 보았다. 원담스님의 ‘마음의 육도윤회-아귀도와 아수라도’법문이 그것이다. 이런 법문에 대하여 철학불교 또는 과학불교를 신봉하는 이들, 그리고 단멸론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만 의지 하는 자들은 육도윤회를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은 겸허하게 수용할 것이다. 법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윤회도에 대해 알아보자. 여섯 갈래의 삶으로 벌어져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존재의 흐름이 윤회(輪回, samsara, cycle of rebirth)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모두 이 거대한 바퀴에 의해 굴려진다. 그들이 주인이 되어 바퀴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바퀴 밑에 깔려서 굴림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바퀴살에 끼여 바퀴 따라 돌고 도는 게 너무도 익숙하여 고통을 고통인 줄도 모르고 굴러간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묶음의 바퀴살이 축에 꿰어져 돌아간다.
그 축을 돌리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탐욕, 진심, 무지, 탐진치(貪瞋癡)이다. 돼지, 뱀, 닭이 삼독심을 상징한다. 삼독심이 굴대를 굴리는 동력이다. 아, 굉장하구나, 이 거대한 윤회바퀴를 돌리는 힘이 바로 삼독심이라니! 윤회바퀴에 걸려들어 몇 천 억겁의 세월을 돌고 돌았는가?
인간에서 복을 지어 천상으로 올라가면, 천상에서 즐기다가, 다시 복력이 다하면 지옥이나 인간으로 떨어진다. 고생 고생하여 다시 천상에 올라가거나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혹은 천상에서 오랫동안 즐기다 보니 복력이 다하여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한없는 세월을 고통 속에 보내다 겨우 벗어나면 축생이나 아귀로 태어난다. 다시 업이 감해져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돌고 돌기를 멈추지 않는 삶의 흐름이다. 그래서 폭류(暴流)라고 하기도 하고 고해(苦海)라 한다.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늘 제자리걸음이다. 올라갔다 해도 수레바퀴요, 내려갔다 해도 수레바퀴다. 당신이 세상을 다 가지고 놀고, 세상을 맘대로 할 수 있다 해도 수레바퀴 안의 일이다. 전륜성왕이 되고, 제석천왕이 되고, 대범천왕이 되고, 조물주나 유일신, 하느님, 옥황상제, 알라, 여호와, 브라흐마, 비쉬누, 쉬바가 된다 해도 수레바퀴 안의 일이다.
염라대왕은 수레바퀴를 칼날보다 날카로운 이빨로 물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의 여섯 갈래가 염라대왕, 즉 죽음의 신의 입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호구리추천(虎口裏鞦韆), 호랑이 이빨에 그네를 달아놓고 그네뛰기를 즐기는 중생이여, 가소롭도다. 인생백년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호랑이 이빨사이에서 그네뛰기를 하는 꼴이다. 천하의 영웅달사와 권세가와 재력가여, 염라대왕의 입속에 든 먹잇감인줄 아는가, 모르는가?
어떻게 해야 이 거대한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누릴 것인가? 염라대왕의 오른 쪽 어깨 위에 부처님이 달을 가리키고 있다. 내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하신다. 수레바퀴를 굴리는 힘이 삼독심이니 탐진치를 내려놓으면 수레바퀴가 멈추고 사라진다. 수레바퀴가 사라지면 염라대왕도 사라진다. 윤회가 사라지는 그 때가 달이요, 열반이다. 영가현각(永嘉玄覺)대사가 말하길, 꿈속에서 육도윤회가 그렇게 생생하더니만(몽리명명유육취夢裡明明有六趣), 깨달은 뒤에 보니 온 우주가 다 비어 있구나(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
인도에서 전해온 다르마(Dharma)여, 탁월하고(panita) 극묘하여라(sudassa), 자기 마음을 맑히면(sacittapariyodapanam) 열반(nibbana)이라 적정하고(santa) 안온하구나(khema), 어디에도 집착되지 않는다네(analaya), 산하대지가 그대로 담마(dhamma)로 밝게 드러난다네.
西來祖意最堂堂, 서래조의최당당 自淨其心性本鄕; 자정기심성본향 妙體湛然無處所, 묘체담연무처소 山下大地現眞光. 산하대지현진광 <無常偈>
최후로 비결 한 마디: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모든 것이 ‘일어남, 사라짐’일 뿐. 그 외는 도무지 없다.
(원담스님 , 마음의 육도윤회-아귀도와 아수라도, 2015-11-09)
원담스님 글에 따르면 윤회의 원동력에 대하여 탐진치 삼독이라 하였다. 이는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연료로 하여 불타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은 탐진치라는 오염원이자 잠재성향이 소멸 되지 않는 한 계속 타오를 것이라 하였다. 이는 연소의 법문에서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Vin.I.3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육도 윤회를 믿느니 차라리 기독교를 믿겠습니다?
탐진치 삼독이 불의 연료가 되어 불 타오를 때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공덕을 지어 때로 천상에 나기도 하지만 공덕이 다하면 악처에 태어나기도 한다. 반대로 한량 없는 고통을 겪다가 업이 다하면 이전에 지은 약간의 선업으로 인하여 선처에 나기도 한다. 그러나 선업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낮은 지위로 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업에 의하여 뭇 삶이 차별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는 한 바라문 청년이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M135) 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라 말씀 하셨다. 이것이 ‘정견’이다.
얼굴이 다른 것에 대하여 유전자로 볼 수도 있지만 성향이 다른 것에 대하여 또는 능력의 차별에 대하여 물질적 기반의 유전자로 설명하기 힘들다. 이는 행위(kamma: 業)에 따른 것이다.
만일 강병균교수 말대로 유전자가 윤회 하는 것이라면, 만일 유전자에 따른 진화연기론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짓이 된다. 부처님은 업에 따라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 세계가 삼계육도이다. 그런데 삼계육도는 반드시 물질을 기반으로 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네 갈래의 태어남에 대햐여 말씀 하셨다. 이는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M12)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화생에 대하여 “신들이나 지옥의 뭇 삶들이나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 생겨나는데, 사리뿟따여, 이것을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이라고 한다.”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화생은 ‘자발적 태어남(spontaneously born)’이라 하였다. 그것도 부모 없이 곧바로 태어남을 말한다. 이런 태어남은 천상이나 지옥과 같은 악처에 적용된다고 하였다.
화생은 유전자 없이도 태어나는 것이 된다. 왜 강병균교수가 그토록 육도윤회를 부정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런 사생에 대해서도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강변할 것인가?
육도윤회 하는 것은 물질적 기반을 가진 유전자가 아니다. 행위에 따라 태어나기 적합한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천상에 나기도 하고 지옥에 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태어남에 화생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반드시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에 따라 태어 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대로 행위에 따라 뭇삶의 차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갈애를 뿌리로 하고 있다. 갈애를 소멸시키지 않는 한 육도를 돌고 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아무리 과학에 기반하여 불교를 재해석하여도 그것이 존재론적 물질에 기반한다면 필연적으로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이 늘 하는 말이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몰라서 한 말이다. 경전을 읽어 보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더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육도윤회를 부정하며 “육도 윤회를 믿느니 차라리 기독교를 믿겠습니다.”라고 천명하였다면 그 구업을 어찌 할 것인가?
2015-11-11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