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칭 회로
이시경
비명 소리에 내 회로에 불이 켜졌다.
여자는 밤마다 낯선 사내에 쫒겨 사방이 막힌 어느 폐 공간에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자의 날선 비명 소리가 어둠을 뚫고 내게 꽃힐
때마다 나는 황급히 코드 번호를 입력한다. 그러나 그 공간으로 연결되
는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여자는 만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어느
그믐밤 여자의 방이 몸시 궁금해 여자를 따라 몰래 낯선 회로에 들어갔
다. 거기는 천길 어둠에 잠긴 바다, 사람들이 그 위로 시간 속을 자유롭
게 떠다니고 있었다. 낯선 사내를 이번에는 실컷 두들겨 주려다 되레 기
억을 잃고 그곳에 갇혀 버렸다.
굵직한 토네이도 같은 사건들이 잡귀 소리를 내며 지면 위를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놀음판을 전전하다가 끝내 빛과 자포자기만을
데리고 카인이 최후에 택한 것은 유산을 노린 살인, 결국 돈이었다. 모
래 속에 숨어 개미를 노리는 개미귀신들, 원점에서 마이너스 무한대로
떨어지는 로그 함수처럼 우주 공간에 널려 있는 무수한 허방들. 뉘 집
딸인지 얼굴 화장을 고치며 술집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든다. 혼외 아들
문제가 검찰 청사를 태우고 활화산으로 번질 때 아이의 아빠는 몇 번이
나 다른 공간으로 숨으려 했을까. 가까이 갈수록 더 궁금해지는 불구덩
이. 무너져 내리는 절벽을 붙들고 누군가 잠시 망설이더니 어둠 속에서
절벽 아래로 쏜살같이 사라진다. 먹이를 공격하는 코브라처럼 불꽃이
위로 솟구친다. 허수로 된 입력코드 판을 아무리 두드려도 영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폐회로 속에서 아우성이다. 꿈이 유일한 해결책인 사건들
이 회로를 갈아타려고 하고 있다
현대인 - 투명유리
나루터에 다가가자
어디서 보트가 하나 앞에 나타났다.
삯도 받지 않았다. 대신 내 정보를 하나 요구했다.
여러 항구를 거치는 동안 항구마다 새 정보를 하나씩 줘야 했는데 깊
숙이 내항으로 들어갈 때 쯤 이미 그들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
다. 뱁새눈에 충청도 말씨는 기본이고 내가 근래에야 머리를 빗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더니 나를
빼닮은 얼굴들이 항구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는 항구 분기점에서 n개로 나뉘었다. n개의 보트에 실려 n개의 항
구로 가는 사이 멀리 외항에서 들어온 핵 주식 먹거리 정보들이 야윈 내
배를 달래주었다. 더러는 보트 사고로 사라졌지만 나의 분신들은 계속
달렸다. 오대양을 누비며 질식사를 면하려고 m명으로부터 정보를 긁어
모았다. 희미한 정보는 디지털 기술로 갈무리했다. 허기지면 휴게소에
들려 카메라에 찍히고 초콜릿 정보를 깨물었다.
문자와 기호를 늘 지니고 다니다 친구를 만나면 얼굴을 맞댔다. 내가
정보를 하나 줄 때마다 그들도 정보를 하나 주었다. 거듭거듭 항구를 거
치고 친구를 만나는 동안 나도 그들의 머리털 개수까지 셀 수 있었다.
그물 같은 항해 網 속에서
나는 너의 너는 나의 투명 유리 속이다.
2014『현대시』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