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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헤아려 봐요 = 창세기38;1-11(180408)
PW : 믿음 BIW : 헤아려 깨달으라 AG : 수아의 딸, 유다의 아내
TS :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구원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밤에는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에요?
어느 중학교 과학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태양계에 대하여 설명서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있단다.”라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오정이 갑자기 손을 들고서는,
“그런데 선생님! 낮에는 지구가 태양주변을 도는데요. 밤에는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이랑 학생들이 한바탕 웃었다고 합니다.
지구는 낮에만 태양 둘레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밤에도, 24시간, 365일 내내 돌고 있습니다.
지구촌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쉬지 않고 돌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계속 움직이면서 돌아야 합니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면 우리들은 어디를 돌아야 할까요?
우리 동네 주변을 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을 돌아야 합니다.
왜 돌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보혈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여리고성을 돌아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들 주변을 돌면서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면 불신세계가 무너지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 교회와 동네 주변을 돌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과 비전을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P4.
모세가 광야40년 생활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토라를 히브리어로 한 권의 방대한 책으로 기록하게 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구전토라’라고 부른다.
이 구전토라를 토라, 모세5경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성문토라’라고 부른다.
모세가 구전토라를 근거로 하여 성령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대로 성문토라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펼쳐가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순으로 기록해 나간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야곱의 가정, 야곱의 자녀들에 대하여 기록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신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다.
12명의 아들들에게는 각각 아내들이 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들과 12명의 며느리들, 자부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12명의 자부들의 이름을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단지 두 며느리의 이름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첫 번째 며느리가 바로 수아의 딸이라고 소개하는 유다의 아내이다.
두 번째 며느리가 애굽 여인으로 요셉의 아내가 되는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라는 여인이다.
그러면 다른 야곱의 며느리들, 야곱의 아들들의 아내는 어떤 사람들일까?
유다의 아내와 요셉의 아내는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10명의 아들들의 아내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10명의 아내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면 이 여인들은 어떤 여인들이었을까?
아마도 야곱이 족장이기 때문에 야곱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생활을 한다.
공동체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많은 여인들이 함께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 여인들 중에는 여종들도 있을 것이고, 자유인 여인들도 있을 것이다.
간혹 가나안 여인들도 섞여서 살았을 것이다.
야곱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여종들, 자유인들, 가나안 여인들 중에서 야곱의 아들들과 결혼한 며느리들이 있을 것이다.
야곱이 살고 있는 지역이 가나안 땅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나안의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여인들은 가나안 여인들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여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여인들을 야곱의 며느리가 되게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 하나님의 여인들로 삼아주시는 것이다.
어쩌튼 창세기에서는 12명의 며느리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수아의 딸과 아스낫을 기록할 뿐이다.
성경에 기록하는 두 여인 중에서 오늘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여인은 수아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유다의 아내이다.
창세기38장의 기록은 아마도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면서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는 때부터 시작하여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 대풍년과 7년 대흉년을 당하는 과정에서 유다를 비롯한 형제들이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서 애굽을 다녀오는 그 시기까지의 사건을 함축적으로 집약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요셉이 17살이 되던 해부터 39세에서 40세가 되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함축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요셉의 나이로 계산해 보면 근 20여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도록 제안을 했던 사람이 유다이다.
물 없는 구덩이에 가두고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 속에서 요셉을 살리기 위해서 유다는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하면서 차라리 요셉을 죽이지 말고 노예로 팔아버리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면서 유다의 뜻에 동조한다.
결국은 “형님들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팔아버리게 된다.
형들에게서 요셉을 노예로 산 이스마엘 사람들은 다시 미디안 사람들에게 웃돈을 받고 팔아넘긴다.
미디안 사람들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다시 웃돈을 받고 애굽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아넘긴다.
결국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을 수 있었지만, 유다의 제안으로 인해서 죽음은 면했지만 웃돈을 얹어가면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나가게 된다.
유다는 동생을 죽음의 위기에서는 구했지만, 동생을 팔아넘겼다는 죄책감은 큰 상처와 부담감으로 남게 된다.
결국 유다는 더 이상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할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한다.
유다는 아버지의 집, 형제들의 집에서 떠나서 독립하여 홀로 아둘람이라는 지역으로 떠난다.
유다는 아둘람이라는 지역에서 히라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유다는 히라라는 사람과 친구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수아라는 사람과도 친교를 가지게 된다.
히라라는 사람이나 수아라는 사람은 전형적인 가나안 사람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전혀 여호와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아의 세 번째 아들 함의 후손으로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유목민이다.
전형적인 가나안 땅의 전통과 문화를 따라서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민족이다.
유다는 수아라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에게 과년한 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유다는 수아에게 딸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요청한다.
수아는 딸을 유다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딸은 유다에게 시집을 갈 수 없다.
왜냐하면
① 유다는 같은 민족이 아니지 않나?
같은 가나안 족속에게 시집가서 편하게 살고 싶다.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나 혼자 외톨이가 되지 않나?
② 소문에 듣자하니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소문이 들리더라.
자기 형제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살라고 유다에게 시집을 가야 된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③ 소문에 듣기로는 형제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유다는 형제들이 싫다고 떠나서 혼자 살고 있지 않나? 그러니 형제들과 의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부부의 인연을 맺어서 살아갈 수 있나? 나는 형제들과 의좋게 사는 사람이 좋더라.
④ 유다는 여호와라고 불리는 신을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민족이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이 다르지 않나?
그러니 서로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같은 민족도 아니고, 같은 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형제들을 떠나서 외롭게 살고 있는 나그네에게 시집가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서로 닮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나?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부부의 인연을 맺으면서 살란 말인가?
그러니 난 유다라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
D4.
① 위로와 격려해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민족, 모든 족속들의 주인이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 수아의 딸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생활하는 야곱 족속의 하나님으로만 한정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가나안 땅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온 중동지역뿐만 아니라 전 지구촌, 우주계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전 중동지역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수아와 히라 친구의 마음에 감동을 넣어주시면서 수아의 딸을 유다와 혼인하게 하신다.
지금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는 하지만, 형제들과 더불어 동생을 죽이려고 하다가 동생을 노예로 팔았던 사람이다.
유다는 결국 동생을 노예로 팔아야 되는 아픈 현실 때문에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이런 아픈 상처와 아픈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유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아의 딸을 통해서 유다를 위로해 주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유다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수아의 마음과 그의 딸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다.
그래서 수아의 딸은 유다와 혼인한다.
수아의 딸은 자신과 같은 민족인 가나안의 청년과 혼인하여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폭적인 역사하심에 의해서 유다와 혼인한다.
하나님은 유다 부부에게 엘과 오난과 셀라 이렇게 3형제를 자식이라는 기업으로 주신다.
유다와 수아의 딸은 3형제를 건강하게 잘 키운다.
하지만 유다와 수아의 딸과 세 아들은 제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유다도 잠시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의식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의 가정을 행복하게 아들들을 잘 키우도록 은혜를 주시면서 위로받게 해 주신다.
②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장자 엘이 어느 정도 장성하여 며느리를 맞이하게 된다.
엘의 결혼은 그 당시 가나안 지역의 일반적인 결혼보다 조금 일찍 하게 된다.
유다와 수아의 딸은 가나안의 여자, 딤나 사람 다말이라는 여인을 엘의 아내로 맞이한다.
장자 엘은 다말과 혼례식을 거행하고 첫날밤을 지나게 된다.
엘과 다말은 가나안 족속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신혼살림을 차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엘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 엘이 다말에게 행하는 어떤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의 생명을 거두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고고고고대시대에 중동지역에서 대(代)를 이어가는 방법으로 시행하던 수혼법, 계대법, 형사취수제에 의해서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 다말을 통해서 아들을 낳아서 형의 아들로 입적해 주어야 된다.
오난은 형수에게 아기씨를 주어서 형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형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형수에게 아기씨를 주려고 하지 않고 밖에 설정하고 만다.
이런 모습은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멸시하는 행위가 된다.
오난이 형수 다말에게 아기씨를 주지 않는 것은 형의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가야 되는 수많은 생명들의 씨앗을 빼앗아버린 결과가 된다.
하나님은 오난의 생명도 거두어버린다.
그러자 유다는 덜컥 두려움에 빠져 들어간다.
셋째 아들 셀라가 아직 장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며느리 다말에게 아기씨를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세워주지 않고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쫓아내고 만다.
유다가 셀라를 다말에게 아기씨를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주지 않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모습이 된다.
수아와 유다 가정의 모습은 온통 죄악에서 시작하여 죄악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의 생명까지 거두어 가신다.
아내의 생명까지 거두어가셨는데도 여전히 유다는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며느리 다말의 마음을 움직여 가신다.
유다는 아내 수아의 딸이 세상을 떠나자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 아둘람에서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간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말에게 창녀처럼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아기씨를 받을 것을 감동하신다.
며느리가 창녀로 변신하여 자신에게 찾아온 줄도 모를 정도로 유다의 영적인 상태는 최악의 상태이다.
유다는 순전히 창녀인 줄로 알고 며느리 다말에게 아기씨를 준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말에게 쌍둥이를 임신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다.
시간이 흘러서 며느리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유다는 다말을 정죄하면서 죽이려 한다.
그러자 다말은 시아버지에게 받은 징표를 보여주면서 징표의 주인이 아기씨를 주었다고 밝힌다.
그때서야 비로소 유다는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깨닫게 된다.
유다는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고백한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아기씨를 받아서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다.
유다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자신의 아들을 낳은 며느리 다말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성경에서는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낳은 셀라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며느리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세라를 유다의 아들로 세운다.
유다는 근 20여 년 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집, 아버지의 집, 형제들에게서 떠나서 죄악된 세상에서 죄악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으로 떠나서 죄악된 삶을 사는 유다를 심판하고 징계하셔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다 대신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의 생명을 거두어가시면서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유다의 삶을 깨닫게 하면서 돌이키게 하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내와 두 아들의 생명을 거두어가시면서 유다의 생명까지도 거두어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다른 가족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 것처럼 유다의 생명도 거두어 가셨더라면 유다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다를 통해서 진행하시려는 구원의 계획과 섭리를 이루어가시기 위해서 유다의 아내인 수아의 딸과 두 아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서 유다의 삶을 돌이키도록 감동을 주시고 계신다.
자신의 죄악된 삶을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 유다는 20여년의 삶을 청산하고 다말과 베레스와 세라를 데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때 마침 온 중동지역에 큰 가뭄과 기근으로 인하여 굶주림에 빠지게 된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의 명을 받아서 형제들과 함께 애굽으로 곡식을 구입하러 가게 되면서 은 20에 팔아넘긴 요셉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된 유다는 모든 일에 다른 형제들보다 앞장서서 일을 처리해 나간다.
수아의 딸은 유다와 혼인하여 엘과 오난과 셀라 이렇게 3아들을 낳았지만, 엘과 오난은 이미 죽었고, 셀라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인정받는다.
창세기46:12에 보면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수아의 아들 셀라를 통해서 유다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하지 않는다.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낳은 베레스를 통해서 유다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아버지 야곱을 떠난 유다를 20여년 만에 언약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수아의 딸을 회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에 유다가 수아의 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수아의 딸의 생명을 먼저 거두어가지 않았다면 유다는 위로받기 위해서 딤나로 갈 일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며느리 다말을 사용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유다에게 모든 죄악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20여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 수아의 딸과 혼인하게 하시고, 세 아들을 낳아 잘 키우게 하시고, 딤나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맞이하게 하시고, 엘과 오난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고, 수아의 딸의 생명까지 거두어가시면서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낳게 하신다.
이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폭적인 주권에 의해서 진행되어져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다말이 낳은 베레스를 통해서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를 이 지상세계에 보내시기 위해서 이렇게 전폭적인 주권에 의해서 하나씩 하나씩 진행시켜 나가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렇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시고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깨달았을까?
야곱도, 유다도, 수아의 딸도, 유다의 며느리 다말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
몇 세기가 흘러간 다음에 유다의 후손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들으면서 “아하...그래서 그랬구나.”라고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구원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비전의 세계를 깨달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고 있다고 자랑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실 뿐이다.
신앙인의 기본자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고 떠벌리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사역을 진행시켜 나가시는가? 하는 모습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인식하고 고백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L4 & B4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가정과 자녀들을 통해서 앞으로 어떻게 사용해 가실 지 아무도 모른다.
목사인 나도 모르고, 아빠인 나도 모르고 동역자인 나 자신도 모른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져 갈지,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할 수도 있고, 슬프게 할 수도 있고, 울게 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쁘고 행복하게 웃게 할 수 있을런 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도해 가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 구원의 섭리, 은혜와 축복의 원리,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뜻을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①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하게 읽으면서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역사해 가신다.
성경 66권 안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려는 구원의 섭리, 생명의 말씀을 이미 다 주셨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성경 66권 안에 이미 다 주셨다.
그러기에 성경을 소설책 읽는 것처럼 읽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고 계시는지를 세세하게 읽고 하나하나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인도되어가고 있구나.’하는 것을 깨달아질 때까지 계속 반복하면서 연극 대본이나 드라마대본처럼 써보면서 읽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문제덩어리 하나를 가지고 끙끙거리면서 풀어나갔을 때 느끼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안 풀리던 문제덩어리가 풀렸을 때,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박수가 터져 나오게 된다.
② 성령 하나님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읽어야 한다.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이 우리의 성령님이시다.
성령 하나님께서 40여명의 성경의 기록자들에게 일일이 감동을 주시면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도록 완벽하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시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아야 되는 우리들도 성령 하나님께 감동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며 묵상해야 한다.
언어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학자들이 아무리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 헬라어로 성경원문을 분석하면서 읽으면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면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닫지 못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과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만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언어로만 기록하지 않았다.
성경은 언어와 문화와 기후와 지역과 다양한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묵상하고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히브리서4;12-13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우리의 피부로 느껴지고 만져지고 고백되어지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야만 하나님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면 몸은 부부로 살아가지만, 마음은 이미 남남이나 다름없다.
신앙인이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하늘 아버지의 마음도, 우리 예수님의 마음도, 성령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다면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아주 강하게 선포하신다.
호세아6:1-3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되 힘써서 알아가라고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하신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으로, 온 영혼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과 꿈과 비전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뜻과 의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앙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은 얼마만큼 하늘 아버지의 마음, 우리 구주 예수님의 마음,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요 도움처가 되어주시는 성령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깨달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늘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신앙인,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와☺우리교회 (WA☺WOORI)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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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말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깊이 깨달음을 주신 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계획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는 영적 지혜와 분별력을 주옵소서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