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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왕 르호보암의 죄 / 열왕기상 14:21-31
어느 동네에는 지역 주민의 안전과 치안을 위하여, 동네 요소요소에 CCTV 카메라를 설치했더니, 사고가 현저히 줄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또, 하도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골머리를 앓던 어느 지역 주민들은, 그곳에 CCTV 카메라를 설치했더니,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CCTV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는데요.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매장, 동네 슈퍼나,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고객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CCTV 카메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곧 긍정적으로 범죄를 줄이고, 자신의 재산과 주민들을 보호하는 차원도 있지만, 반대로 주민들이나 매장을 찾은 고객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지금은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습니다만, 목욕탕, 화장실, 수영장이나 탈의실 등에 설치된 CCTV 카메라가, ‘은밀한 엿보기 카메라’가 되고, 또 그것을 녹화하여 인터넷에 떠돌게 하거나, 불법으로 판매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불법 동영상을 판매하는 상인들의 비밀 창고를 급습해보니,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는 개인의 사생활들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풀러 신학교 교수인 김세윤 목사는 강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어지간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가정의 은밀한 대화를 언제든지 엿들을 수 있으며, 앞으로 미국 CIA는 사람의 머리에 갖다 대기만 해도, 그의 생각을 다 읽어낼 수 있는 기계장치를 개발해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제 더 이상 나만의 공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지켜볼 수 있고, 나의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으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나 또는 공공장소에 대해서까지, 불신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 나는 누구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자 있든 사람들 속에 있든’, 또는 ‘공개된 장소에 있건,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거기가 어디든,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 될 수 있고,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람의 눈을 피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렸다’, 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하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성도가 항상 잊지 말고 의식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보신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여호와를 향해 선한 뜻을 품은 자였습니다(13절). 그런데 하나님은 아비야의 죄가 아니라,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아비야를 죽이십니다. 이것은 여로보암의 핏줄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거부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비야의 죽음을 통해서, 여로보암 집의 운명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이 먼저 죽든지, 아니면 환란을 당하든지 하면, 대개 ‘하나님을 잘 믿어도 별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여호와께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사람을, 죽이실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선한 사람은 잘살게 하시고, 어려움도 없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정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라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선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는, 그 가문이 끊어지는 심판이, 오늘 이 순간에도 벌어질 것이라는 거울로 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인 것입니다. 제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을 향한 말씀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얘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내용으로 삼으며, 말씀으로 항상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유다가 다윗의 계통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유다에 대한 얘기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은데, 성경은 유다보다는 북쪽 이스라엘, 곧 여로보암에 대한 얘기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게 있었던 일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유다를 경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마음대로 보통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산당을 만들어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었으나, 하나님의 사람 역시 늙은 선지자로 인해 말씀을 어기고 되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병이 들어 죽게 됩니다. 이 일들이 유다에게 경계가 되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하나님의 경계하심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도 죄악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22-23절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유다 역시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갑니다. 여로보암의 길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신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보이셨으나, 유다는 하나님의 경고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누가 더 많은 죄를 범하는 가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25-28절 “르호보암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르호보암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대장의 손에 맡기매,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유다도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깊은 죄로 인해 썩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 르호보암이냐 여로보암이냐, 유다냐 이스라엘이냐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씀을 행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다윗언약에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살아난 자로서, 긍휼을 바라보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말씀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긍휼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기 마음대로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산당을 만들어 제사를 행했던 것이고, 유다 역시도 긍휼에 관심이 없었기에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곧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도 이스라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이 심판을 받을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싸웁니다. 30절에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두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아무리 경쟁하고, 서로 잘났다고 싸운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둘 다 썩은 나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누가 말씀 아래 있느냐 입니다. 유다가 크냐 이스라엘이 크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부강한 나라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다도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24절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가증한 일을 본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증한 일이 가증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증한 일이 가증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것보다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믿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쫓아낸 민족들의, 악한 행위를 본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며, 그대로 성취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가는 길이 곧 망하는 길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과 유다가 걸었던 길,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졌던가에 대해 소홀히 여긴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생각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서 생각한다면, 말씀이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헛되지 않음을 말씀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은연중 말씀을 무시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도, 말씀의 성취라는 것도, 말씀의 신실함이라는 것도 무시하면서, 말씀이 나를 인도해 주기를 원하는 것도 그냥 생각일 뿐, 실제의 삶은 내 마음대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말씀으로 인해 경고를 받으면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말씀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벗어난 자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면서,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삶을 뜻합니다. 언약 안에서의 삶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곧 긍휼과 자비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뜻함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면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를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하심을 믿으면서 그것으로 감사한다면, 보이는 것은 모두 헛된 것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경고하시고 책망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알게 하셔서,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여러분 속에 굳게 세우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돈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돈이 나를 굳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굳게 세운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으면서, 자신의 길을 살펴야 합니다. 과연 말씀을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인지를 살피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영생이 있는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힘써 걸어가야 할 인생입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참되고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바라보고 계시며, 지켜보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될 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보시고 있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카메라나, 도청장치, 또는 우리의 머리 속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는 기계가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생생하고 분명하게, 오늘도 우리가 홀로 있는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나의 모든 것이 촬영당하고, 또 도청된다고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 동일한 삶,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거나, 또는 홀로 있을 때 일지라도, 한결 같은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나는 부족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나홀로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주님이 지휘관이 되셔서 싸우는 전쟁입니다. 그렇다면 내 대신, 하나님을 앞세우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앞장서시면 아무도 대항해서 승리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내 인생의 지휘봉을 맡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 있어야만,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믿음의 백성들의 전쟁은, 하나님과 바른관계가 설정되어 언제나 승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좋아하실만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절경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들, 하나님이 거저 바라보시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