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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평론가이자 역사가인 “토마스 카알라일”은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제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사, 환난으로 인해 저의 마음에 절망과 슬픔이 가득차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심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것과 믿음을 갖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외면한 체, 부정적인 생각과 말 가운데,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하여 불신앙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사마리아 성이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해 포위됨으로, 절망에 처했을 때의 상황입니다. 이 때 그들은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내일 이 맘 때, 아람 군대가 모두 물러감으로 사마리아 성에 평화와 안정이 온다는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왕 곁에 있던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며, 엘리사의 말을 부정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성호를 언급한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가끔, “하나님이 계시다면” 또는, “하나님이 징계를 하신다고 해도 나는 멈추지 않을 거야”등으로 자신의 의지를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장관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였습니다. 지난 주에, 신앙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일반적으로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장관에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엘리사의 말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남을 장관이 목격했지만, 그 때, 사마리아 성의 백성들이 성문으로 몰림으로, 백성들에게 밟혀서 죽었습니다. 엘리사가 말을 할 때, 사마리아 성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로서는 그 고통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바로 이 때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성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 본문을 통해 살피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식으로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들은 희망을 향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심에 있어서, 외면당한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행하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 거주하며, 가족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상황은, 사마리아 성 안에서의 삶도 어려웠기에, 성 밖에 있던 나병환자들은 음식 공급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나병환자들은 “우리가 성 안으로 들어가도 죽을 것이고, 여기에 있어도 죽을 것이니, 아람 군대에게로 가서 항복하자”며, 아람 군대의 진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풍부했기에, 자신들을 죽이지 않으면,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비장한 각오는 에 4: 16을 보시면, 에스더가 왕의 부름도 없이 왕에게 나가기를 결단하며,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상황은 엄연히 다릅니다. 에스더의 맹세는 신앙에 의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지만, 본문의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가지고 나가는 나병환자 네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나병환자들은 희망을 향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에 갇혀서 불만과 불평을 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하길 원한다면, 본문 속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절망의 성 안에서 불만과 불평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병환자들처럼, 희망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시 62: 5절에서 다윗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며, 자신의 품는 소망의 출처가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또, 렘 29: 11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 우리의 한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 55: 8 - 9을 보시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들이 희망을 향해 나간 것처럼, 우리역시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도록 간구하며, 하나님께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 - 7절을 보시면,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합리적 사고를 초월합니다.
성문 어귀에 있던 나병환자들은 성읍으로 들어가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으니 아람 군대에 항복하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아람진영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얻으면 좋고 아니면 죽겠다는 각오로 아람 진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진영에 도착해보니, 아람군인들은 한 사람도 없고, 먹을 것이 지천에 있으며, 불도 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병환자들이 아람 진영으로 올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오셨기에,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아람 군인들은,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연합군이 몰려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황급하게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약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세상이 외면하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가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마리아 성 안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더욱 놀라운 일을 행하셨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내려보낸 사람들이나, 또, 자신의 병든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했던 백부장의 희망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의 희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희망을 가리켜,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 희망은 믿음의 어버이다,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던 사마리아를 아람 군대에서 구원하고, 지키신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주변의 연합군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노력도 아닙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성의 모든 사람들, 모든 가축들, 사마리아 성의 건축물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든 것 또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람으로부터 구원하신 방법을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의 사역에 대해, 우리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 1: 12을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며, 롬 10: 9 - 10을 보시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어찌,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사랑과 그 행하심이 놀라우심을 알고, 오직,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 - 10절을 보시면,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하는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그의 백성들에게 전할 아름다운 소식을 준비하십니다.
아람 진영에 도착한 나병환자들은 도처에 있는 먹을 것으로 배를 채우자 사마리아 성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성으로 달려가서, 성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아람 진영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복음은 빵입니다. 병든 자에게 복음은 치료입니다. 그럼, 영혼이 병든 자에게 복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 40: 9을 보시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가 발전함으로 삶의 양식이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악해져 갑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식보다 두려움의 소식, 죄악의 소식들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성도인 우리가 가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소식들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입니다. 그 일들은 커다란 대형사고에서의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고 세세한 일, 일상의 평범한 일에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평범한 일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소식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귀가, 우리의 눈이, 우리의 생각이 닫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름다운 소식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023년 새해에는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식이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함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희망을 두고, 하나님께로 더욱 더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