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발명 Sentience: The Invention of Consciousness>
-니컬러스 험프리 지음/ 박한선 옮김
나는 빨간색을 본 경험을 나중에 회상할 때 느낄 수 있는 것보다, 빨간색을 보는 순간에 그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영 미심쩍다. 분명히 더 안전하고 경제적인 가정은 당신이 가진 빨간색에 관한 경험적 지식은 바로 그 시점에 당신의 태도에 의해 구성되었고, 다시 당신의 태도에 의해 바로 소진되었다는 것이다. 빨간색을 처음 본 사람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고 느끼겠지만, 고개를 돌리면 사실 그 이전의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적 경험에 관한 당신 경험의 한 측면을 보며, 그것을 좀 더 똑똑히 보고자 하면 그 경험이 나에게서 스르르 미끄러져 벗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감각 경험의 이상한 특징이다. 현재의 순간, 감각 경험의 ‘지금’은 시간적 깊이의 역설적 차원을 가진다. 각각의 감각은 실제보다 조금 더 오래 지속된 것처럼 느껴진다. 결과적으로 감각은 더 영구적인 존재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그 존재를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시인 로비 번스Robbie Burns는 이렇게 노래했다. 존재의 순간은 “흐드러지게 핀 양귀비처럼, 꽃을 쥐면 이내 꽃의 향기가 사라진다. 혹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눈처럼, 일순간 하얗게 빛나고,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그럴 만한 심리적 이유가 있다. 감각 경험이 자아 감각 지지에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이다. 지지가 깨질 위기라면 지속적으로 재확인해야만 한다. 시인 콜리지Coleridge는 한밤중 잠에서 깬 세 살짜리 아들이 엄마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말했다. “엄마, 손가락으로 나를 만져줘요.”, “왜 그러니?” 라고 엄마가 물었더니 “제가 여기 없는 것 같아요.” 하고 아들이 외쳤다. “엄마, 나를 만져줘요. 그래야 내가 여기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 우리는 아무래도 거기 있는 것(자아가 희미 해지거나 잊혀진 느낌) 보다는 여기에 있는 쪽(지금 여기 몸을 가진 ‘자아’라는 게 존재한다는 믿음)을 상상하고 싶어한다.
…빨간색을 보는 순간에는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바로 그런 지식, 비록 금세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라도, 뭔가 조금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많은 이가 공감하는 직감이다. 뭐, 아무튼 이러한 막연한 느낌 때문에 당신이 당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적 경험으로서 자신이라는 느낌(이것이 바로 유신견, 아견이다)이다. 불가피하게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신의 그 경험은 방금 사라졌다.
-p142~145에서
*(알아차림이 없는, 자각이 없는)감각은 자아가 있다는 믿음(아견, 유신견)을 지지하고 증폭한다. 그러니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보되 볼 뿐, 들을 때 들을 뿐, 감각할 때 감각할 뿐, 생각할 때 생각할 뿐. ~할 뿐에서 마침표를 찍어라. 그러지 않으면 곧” ‘내’가 봤다, 보는 ‘내’가 있어서 보이는 것을 봤다.”라고 본 경험을 해석하고 집착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아관념은 유지되고 지속되고 증장된다. 감각경험이 자아관념을 밀어주고, 자아관념이 감각경험을 끌고 당기면서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