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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세렛트4
성경본문 : 레위기 8: 22-29
21. 물로 내장과 정갱이들을 씻고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22.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쌔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23.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르고
24.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25. 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우편 뒷다리를 취하고
26. 여호와 앞 무교병 광주리에서 무교병 한개와 기름 섞은 떡 한개와 전병 한개를 취하여 그 기름 위에와 우편 뒷다리 위에 놓아
27.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고
28. 모세가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29. 이에 모세가 그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았으니 이는 위임식 수양의 모세의 응식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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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혼한 이유는, 자식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기보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자녀 삼기 보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하여,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관계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가 아버지가 되어야 하며, 또한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한다. 자녀를 낳았지만, 교제가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행복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잃어버리고, 부모님과 관계를 나누지 못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육체적 고아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영적 고아다.
간교한 마귀는, 인간을 자기 자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인간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다'고 속삭인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면 행복하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집에서 나오라고 유혹한다.
그래서 집을 스스로 떠나가, 영적인 고아로 살아가게 만든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상실해서,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 영원한 죽음을 맞도록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좇아가 마귀의 품에서 성장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도, 교제도 끊어져 버리고, 죄의 종이 되고 말았다.
마귀의 자녀, 죄의 종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환난과 근심, 질병과 고통, 절망과 좌절, 시기와 질투…, 죽음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한 자기 자녀를,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자신이 지으신 자녀이기에,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빼앗긴, 자기 백성을 찾기로 작정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거룩한 곳이기에,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다.
죄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죄인인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1. 죄의 종인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킬 수 있나?
하나님은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결했다.
먼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셨다.
언제 죄를 짊어지셨나? 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때, 죄인들과 연합되었다.
침례의 가장 큰 의미는 연합이다(롬6장).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주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했다.
침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모든 인류는 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 일은 성령이 아니고는 알 수 없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성령 받기 전에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고전12:3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성령이 아니고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부활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영적 전쟁의 승리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믿을 필요가 없다. 주님은 죽음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교제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그런데 신분이 회복되었다고, 교제를 나누지 않고 살겠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을 복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다.
오직 구원이 목적이 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 할 일이 없다.
목적이 이루어졌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심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2. 그런데 수많은 성도들이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실패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실패하기에, 자라지 못하고, 영적 어린아이로 계속 머물고 만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외적인 성장에만 매달려, 교제를 너무나 소홀히 해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신분은 절대 변할 수 없지만, 교제의 관계는 끊어질 수 있다.
오랫동안 교제가 끊어지면,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영적 공허함과 답답함이 엄습해 온다.
하나님이 자녀들이,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면, 교제가 단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단절된 교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제사 제도를 만드셨다.
본문은,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장면인데, 제사장이 되려면, 속죄제, 번제, 화목제를 드려야 했다.
(1) 속죄제(14-17)
속죄제는 죄를 용서받는 제사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의 중재자로서, 남을 위하여 속죄를 드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한다.
제사장은 수송아지 머리 위에 안수함으로, 자신의 죄를 송아지에게 옮기고, 짐승을 죽여야 했다.
하얀 양들이, 그 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며, 비명소리에 죽어가고, 사지가 잘리며 온몸이 각떠진다.
내장이 헤쳐지고, 살과 기름이 분해되며, 콩팥과 쓸개가 나누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끔찍한 방법으로 제사의 규례를 정하신 것은, 죄 없는 짐승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우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결해야 됨을 마음에 결심하게 된다.
이 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성도는 예수님이 속죄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기억하고, 성결에 힘써야 한다.
성도의 꿈은 '복을 주옵소서, 축복해 주세요, 성공하게 하소서' 보다 거룩을 구해야 한다.
(2) 번제(18-21)
번제는 짐승을 죽이고, 각을 떠서, 다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온전한 헌신하는 상징한다.
제사장이 되어 맡은 직분을 감당하기 전,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인 하나님과 성도는 섬기는 자, 봉사자가 되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높여야 한다.
내가 양보하자, 내가 종이 되자, 주는 자가 되자, 져주고 손해보자, 이런 생각이 있어야 한다.
(3) 화목제(22-29)
제사장은 화목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피를 귓부리에 발랐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데, 이 귀를 사용하겠다는 결단 의식이다.
오른손 엄지가락에 피를 바른 이유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뜻이다.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고, 백성들을 축복하는데 사용하겠다는 결단이다.
오른발 엄지가락의 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 의식이다.
구약의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화해의 도구가 되었듯이, 영적 제사장인 우리는,
무엇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후5:18). 제사장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다.
본문은 히브리 원전 모세 오경에 나타나는 살세렛트 기호, 그 4번째 말씀이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르고"
여기 '잡고(바 잇스하트, )'라는 동사에, 살세렛트 기호가 붙어 있는데, 그 의미는 "제물을 죽이다, 속죄를 위하여 도살하다, 양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리다"는 뜻이다.
구약의 예배는, 흠이 없는 동물을 희생제사로 드렸다.
3.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일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감격하며, 죄를 뉘우치고 은혜를 경험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생활에 연결되어질 때, 그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남이 사라진 예배는, 모든 방종한 삶의 원인이 되어왔으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임재를 느낄 수 없는 형식적인 예배야말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예배시간에 들은 설교의 본문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교회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빨리 예배당 문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혁시키러 나가는, 영적인 군사의 용맹스러움을 볼 수 있는가?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만남을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하신다.
저는 커다란 건물을 가진 교회나, 값비싼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교회, 수많은 인파가 예배당을 메운 교회가 부럽지 않다.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교회는,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성도들의 사랑이 살아 있는 교회를 마음에 갈망한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예배의 거룩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배자의 가장 큰 제물이, 하나님을 향한 상한 마음이며,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다.
(1) 예배의 종류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육적인 예배로 나누어진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모두가 영적 예배를 드린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만 올바른 예배가 된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가정에 왜 문제가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하는 사람은, 대부분 예배에 실패해서 그렇다.
예배는 내 마음에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2) 어떠한 예배가 영적인 예배인가?
피(희생)이 없는 예배는 육적인 예배이다.
가인은 육적인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아벨은 영적인 예배를 드렸다.
왜 육적 예배인가? 자기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형식적이다.
희생이 없는 가짜 예배, 형식과 의식에 사로잡혀 내용 없는 공허한 예배, 아무리 떠들고 소리지르고 법석을 떨어도, 하나님은 그곳에 안 계신다.
진정한 예배란 "자기를 잡고" 나를 쪼개고 자르고 분해해서, 내 모든 진상을 고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행위가 된다.
자기 희생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오락이요, 광란이며, 공허일 뿐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라.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애타게 기도하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예배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자기 만족이나 놀음이 아니다.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잡아, 쪼개고, 자르고, 분해해서, 자신의 모든 진상을 고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행위가 된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에 성공해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살세렛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기호이다.
우리는 살세렛트가 붙은 말씀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심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