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44】 8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 44권 중(中)
二十九, 십인품(十忍品)
▶강설 ; 열 가지 인(忍)의 인(忍)이란 일체 법의 실상을 안으로, 또는 마음으로 깨달아 앎을 뜻한다. 등각위(等覺位)의 보살지위에서 일체 법의 실상을 어떻게 깨달아 아는가를 열 가지 인으로 밝힌 품이다.
일체 법의 실상을 안으로, 또는 마음으로 깨달아 앎을 왜 인(忍)이라고 하는가. 인자(忍字)의 정확한 뜻은 참을 인자다. 사람에게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심한 고통이 있더라도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참는다[忍]고 한다. 이와 같이 속으로, 또는 마음으로 일체 법에 대한 실상을 깨달아 알더라도 속으로, 또는 마음으로 알 뿐이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없더라도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고통은 분명하듯이 존재의 실상을 깨달아 앎도 밖으로 드러난 것은 없으나 너무나 분명한 것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일체존재 현상[相]의 이면에 있는 실상[理]도 그와 같기 때문에 깨달아 앎과 존재의 실상을 모두 인(忍)이라 한다.
청량스님은 “인(忍)이란 인해(忍解)와 인가(印可)이니 곧 지혜로 비추고 관(觀)이 통달함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치를 음성인(音聲忍)과 따라주는 인[順忍]과 생멸 없는 법의 인[無生法忍]과 환술 같은 인[如幻忍]과 아지랑이 같은 인[如焰忍]과 꿈과 같은 인[如夢忍]과 메아리 같은 인[如響忍]과 그림자 같은 인[如影忍]과 허깨비 같은 인[如化忍]과 허공 같은 인[如空忍]이라는 열 가지로 나타낸 것이 십인품(十忍品)이다.
二十九, 십인품(十忍品)
1, 수승함을 찬탄하고 이름을 열거하다
爾時에 普賢菩薩이 告諸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忍하니 若得此忍하면 則得到於一切菩薩無礙忍地하야 一切佛法이 無礙無盡하나니
그때에 보현보살이 모든 보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에게 열 가지의 인(忍)이 있으니 만약 이 인을 얻으면 곧 일체 보살의 걸림이 없는 인의 지위에 이르러 일체 불법이 장애가 없고 다함이 없느니라.”
▶강설 ; 보현보살이 십인품을 설한다. 이 열 가지 인이란 등각위에 이른 보살이 “만약 이 인을 얻으면 곧 일체 보살의 걸림이 없는 인의 지위에 이르러 일체 불법이 장애가 없고 다함이 없다.”라고 그 수승한 덕을 찬탄하였다. 인이란 일체 법의 실상을 깨달아 앎이다. 그러므로 일체 불법이 장애가 없고 다함이 없다.
何者가 爲十고 所謂音聲忍과 順忍과 無生法忍과 如幻忍과 如焰忍과 如夢忍과 如響忍과 如影忍과 如化忍과 如空忍이니 此十種忍을 三世諸佛이 已說今說當說이시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음성인(音聲忍)과 따라주는 인[順忍]과 생멸 없는 법의 인[無生法忍]과 환술 같은 인[如幻忍]과 아지랑이 같은 인[如焰忍]과 꿈과 같은 인[如夢忍]과 메아리 같은 인[如響忍]과 그림자 같은 인[如影忍]과 허깨비 같은 인[如化忍]과 허공 같은 인[如空忍]이니라. 이 열 가지 인을 세 세상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고 장차 설하느니라.”
▶강설 ; 십인(十忍)이라는 열 가지 이름을 열거하였다. 그리고 이 열 가지 인이란 불법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너무나도 중요한 법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들이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고 장차 설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2, 음성인(音聲忍)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音聲忍고 謂聞諸佛所說之法하고 不驚不怖不畏하야 深信悟解하며 愛樂趣向하며 專心憶念하며 修習安住가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一音聲忍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음성인(音聲忍)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을 듣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깊이 믿고 깨달아 이해하고 즐거이 나아가며, 오롯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닦아서 편안히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첫째 음성인이라 하느니라.”
▶강설 ; 첫째 음성인(音聲忍)이다. 즉 모든 부처님이 일체 법을 설하신 내용을 듣고 그 법문의 음성에 대해서 깨달아 알고 깊이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서 밝혔다. 즉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깊이 믿고 깨달아 이해하고 즐거이 나아가며, 오롯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닦아서 편안히 머무는 것.” 이것이 곧 부처님의 설법의 음성을 깨달아 앎이다. 만약 법문의 음성을 깨달아 알지 못한다면 반대의 현상으로서 놀라고 두려워하며,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그 법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고 수행하여 그 법에 머물지도 못할 것이다. 법문을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마음에 큰 변화와 울림과 감동이 있으므로 나아가고 기억하고 그 법에 안주하는 것이다.
3, 순인(順忍)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順忍고 謂於諸法에 思惟觀察하며 平等無違하며 隨順了知하며 令心淸淨하며 正住修習하며 趣入成就가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二順忍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따라주는 인[順忍]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법을 생각하고 관찰하며, 평등하게 어김없이 따라서 알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바로 머물러 닦으며 나아가 성취함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둘째 따라주는 인이라 하느니라.”
▶강설 ; 두 번째는 수순하는 인[順忍]이다. 무엇이 수순하는 인인가. 불교의 교설에서 가장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 모든 법[諸法]과 일체 법(一切法)이다. 이 법이란 일체 모든 유형한 존재나 무형한 존재나 물질이나 정신이나 이 모든 것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치이며 실상이다. 또 그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의 가르침이다. 위에서 음성인(音聲忍)을 설하면서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라고 할 때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진리의 가르침을 뜻하였다. 일체 존재와 존재의 실상과 그 가르침을 함께 생각하고 관찰하며, 평등하게 어김없이 따라서 아는 것이 따라주는 인[順忍]이다.
수순하는 진리를 모든 법에 적용시키기에 앞서 먼저 인연과 인과의 원리를 수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 관계와 물질 관계와 의식주와 부귀공명에 대해서 인연의 이치를 철저히 믿고 깨달아서 수순하고 창조하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 앞서 행해야 한다.
이 시대에 가장 훌륭하신 분 중에 한 분인 성엄(聖嚴, 1930-2009)스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성공의 삼박자는 인연에 순응하여, 인연을 파악하고, 인연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108자재어’에서 밝혔다. 부귀공명을 많이 누리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인연의 이치를 알아 인연에 순응하고, 인연을 파악하고, 인연을 창조하면서 살 줄 아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뜻이다.
4, 무생법인(無生法忍)
(1) 작은 법도 생기고 사라짐을 보지 않는다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無生法忍고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不見有少法生하며 亦不見有少法滅하나니
“불자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생멸이 없는 법의 인[無生法忍]이라 하는가.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이 조그만 법도 생기는 것을 보지 않고, 또한 조그만 법도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강설 ; 무생법인(無生法忍)은 모든 法忍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말이다. 사전적인 해석으로는 “불생불멸하는 진여 법성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체 존재, 즉 미세 먼지에서부터 삼라만상과 천지만물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현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면서 모양을 달리하지만 그 본질은 추호의 변화도 없다는 진리이다. 육신도 그르려니와 마음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보살이 조그만 법도 생기는 것을 보지 않고, 또한 조그만 법도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실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은 새롭게 생기거나 끝까지 없어짐이 없다.
(2) 그 까닭을 밝히다
何以故오 若無生則無滅이요 若無滅則無盡이요 若無盡則離垢요 若離垢則無差別이요 若無差別則無處所요 若無處所則寂靜이요
“무슨 까닭인가. 만약 생기지 않으면 사라짐이 없고, 만약 사라짐이 없으면 다함이 없고, 만약 다함이 없으면 때를 여의고, 만약 때를 여의면 차별이 없고, 만약 차별이 없으면 처소가 없고, 만약 처소가 없으면 고요하다.”
若寂靜則離欲이요 若離欲則無作이요 若無作則無願이요 若無願則無住요 若無住則無去無來니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三無生法忍이니라
첫댓글 “또 만약 고요하면 탐욕을 여의고, 만약 탐욕을 여의면 지을 것이 없고, 만약 지을 것이 없으면 소원이 없고, 만약 소원이 없으면 머물 것이 없고, 만약 머물 것이 없으면 가고 옴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셋째 생멸이 없는 법의 인이라 하느니라.”
▶강설 ; 보살마하살이 조그만 법도 생기는 것을 보지 않고, 또한 조그만 법도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는 까닭을 밝혔다. 생기지 않으면 사라짐이 없고, 만약 사라짐이 없으면 다함이 없으며, 나아가서 고요하면 탐욕이 없다. 탐욕이 없다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할 일이 없는데 바라는 바가 있을 수 없다. 바라는 바가 없으므로 머물러 집착할 것이 없다.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으므로 가고 오더라도 가고 옴이 없다. 이것이 생멸이 없는 법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