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17절-52편 1절.
51편 17-19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52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1절: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51편 19절: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그 때에’ 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마음과 정신과 소원을 가졌을 때, 그러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기준에 그 뜻에 적중했을 때에’ 그 말이다.
그러면 ‘그 때에’가 어느 때냐? 우리가 이미 봤던 17절의 상한 심령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왜 상한 심령이 된 거냐?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면 평생 예수를 믿고 평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것, 신령한 것을 받지 못하게 되고,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지라도 죄 짓는 일만 하게 되고, 사망성공만 이뤄놓게 되니 이것을 알 때 얼마나 속이 상하겠느냐? 이런 상한 심령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롭고 온전한 제사와 번제가 나오는 거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리지식의 귀중함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로 통해서 나올 때 선악과 따먹고 나온 타락되고 저주받은 지식적 소원에서 성경구절을 붙여 말을 하게 되면 이런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신앙의 방향과 목적이 천국으로 올라가겠느냐, 땅으로 내려가겠느냐? 땅으로 내려간다.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의 지식과 소원과 목적은 세상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세상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을 가지게 되면 옛사람이 주격이 된 종교적 사역목적으로 나가게 되고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경구절은 껍데기이고 그 속의 뜻이 알맹이인데, 성경을 액면적으로만 보게 되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돼버리고, 이건 선악과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들어있는데. 이 은밀한 뜻이 바로 진리이치고, 생명이치고, 신적 도덕이치다. 이게 생명과다. 믿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잡고 나갈 때, 성경구절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 지식을 먹을 때 우리의 속 성품이,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이, 영적 기능과 지능 면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닮아진다. 이런 속성 전부는 하늘로 향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의 언행심사가 나올 때 자기의 몸이 의의 병기로 쓰여지는 거고, 이룰구원이 이뤄지는 거다. 이건 죄가 아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걸 잘 모른다. 교회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과, 생명과를 따먹은 지식을 분별 구별을 안 한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려면 먼저 신앙지식이 하나님의 지식, 생명과 먹은 지식으로 바꿔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언행심사는 서서히 바꿔지는 거다. 지식조차 바꾸지 못해서 여전히 선악과 따먹은 정신 사상을 가진 상태에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의행을 해도 그 지식 자체가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행동들이기 때문에 이건 이미 죄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해도 신앙 믿음이 성장이 안 된다.
상한 심령이란 어떤 심령이냐? 세상에서 얻어터지고, 욕먹고, 남편에게 얻어맞고, 사업이 망하고 해서 마음이 아픈 게 상한 심령이냐? 이런 건 일반적인 거고,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거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의 진리지식이 없는 것을 깨닫고 이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상한 심령이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각 사람마다 하나님의 것이 들어있는 양이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것이 지식적으로라도 많이 들어있는데 이게 텅텅 빈 사람도 있다. 그러면 텅텅 비어있는 이 사람 속에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 거냐? 세상 것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 속이 세상 것으로 채워져 있으면 이 사람의 언행심사는 세상 것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것이 없는 것을 한탄할 줄 알아야 한다. 믿어갈수록 주일마다, 달마다, 해마다 자꾸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일 년을 믿어도 ‘예수 믿어서 복 받아라’, 십 년을 믿어도 ‘예수 믿어서 복 받아라’ 하고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것이 없는 자기를 발견하고 이에 대해 상한 심령이 될 때 의로운 제사가 나오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는 수준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안 믿는 사람들과 수준적으로 같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과 비교를 할 때 그 수준이 달라야 하고, 믿는 사람들끼리 비교를 해도 수준이 달라야 한다. 높아야 한다.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의로운 제사와 번제’란 제 멋대로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맞춰진 제사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제 멋대로 드리느냐? 의식 면으로도 식순에 따라 드린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 갖는 정신도 제 멋대로 가지면 안 된다. 또한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목사 제 마음대로 말하는 거냐? 사상과 정신이 성경의 기준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성도가 주님의 의사와 밀착이 된다. 목사 자기 기준에 맞춰서 가르치고 교회를 운영한다면 이건 목자 자기 교회지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맞춰진 제사를 드려야 한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 지식의 옳음, 지혜의 옳음, 선의 옳음, 사랑의 옳음, 사랑도 옳은 게 있고, 잘못된 게 있다. 또한 진실의 옳음, 거룩의 옳음, 주권의 옳음에 맞춰진 제사라야 한다. 정신 사상의 뜻이 하나님의 의에 맞춰진 것이 의로운 제사다. 의로운 제사와 번제는, 즉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우리의 모든 삶은 전부가 신령천국으로 올라간다.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앞서 말한 제사와 번제는 수소처럼 힘 있는 제사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사로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 기뻐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이런 제사를 기다린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오전에 말한 것과 연결을 해서 생각하면 어느 것이 힘이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냐?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다. 그러면 무엇이 상한 심령이냐? 자기가 어리석어서, 몰라서 얻어터져서 마음이 아픈 게 상한 심령이냐? 그게 아닌 그동안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줄 알았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자기에게 하나님의 것이 없음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상한 심령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지 않으면 상한 심령을 모르는 거다.
말씀을 듣고 보니 ‘내가 수 년을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 헛 믿었고, 헛 노력했고, 헛 헌금했고, 헛 전도했고, 헛 밥 먹었고, 헛 살았구나’ 라고 깨닫는다면 이런 원통한 노릇이 어디 있느냐? 예수 믿으면서 한 모든 것이 다 죄가 되었으니, 사망성공이 되었으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 자기에게 하나님의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면 앞으로 또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겠느냐? 하나님의 것이 없는 자기를 쳐다보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채워준다고 했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신앙으로 올라가게 된다.
52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마스길’이란 ‘교훈의 시’라는 뜻인데, 이 교훈의 시는 보통의 교훈의 시가 아니라 성령으로 신중하고 지혜롭게 살라는 교훈을 주는 시다.
도엑의 사건은 삼상21:5-22:19까지에 나오는데, 다윗이 블레셋장군 골리앗을 죽인 후 사울 왕의 부하가 되었고, 왕의 아들 요나단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왕의 딸 미갈이 다윗의 아내가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윗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사울 왕이 그만 왕 자리가 염려가 된 것인지 다윗을 시기 질투를 하여 미워하게 되니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갔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면 이 사람에게 악신이 들어간다. 절대로 시기 질투하지 말아라.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사울 왕이 부하들을 시켜서 다윗을 죽이라고 했고, 이로 인해서 다윗이 계속 피해 다니자 사울 왕은 다윗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의로운 다윗이기 때문에 이 다윗을 죽이도록 하나님께서 허용을 하시지 않는 거다.
자기를 따르던 일행들과 함께 도망을 다니던 다윗이 어느 날 배가 고픈지라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진 거룩한 떡과 다윗이 전에 골리앗을 죽였던 칼을 얻어서 나오는데 에돔사람 도엑이 이 장면을 봤다. 이 도엑은 사울 왕의 목자장인데, 이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해 바쳤다. 이에 사울 왕이 신하들을 시켜서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을 다 죽이라고 하니까 신하들이 벌벌 떨며 죽이지를 못하자 다윗을 고해바친 목자장 도엑을 시켜서 제사장과 그에 속한 가족들을 다 죽이게 했다. 그래서 도엑이 85명을 학살을 했다. 다윗이 이 일을 전해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다윗과 사울 왕과 도엑은 다 같은 인간이지만 삶의 목적적인 면은, 각자가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르다. 그런가 하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길이 완전히 다르다. 원칙상 달라야 되는 거고 다르게 살아야 하는 건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그렇지를 않다.
사울 왕은 베냐민의 후손이요, 베냐민은 야곱의 아들 중에 마지막 아들이다. 도엑은 그 조상이 에서요,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이다. 그러니까 이 도엑은 조상 에서의 세상 물질성적 소원 목적적인 정신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거다. 우리가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우리 부모님들은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부모님의 신앙이 아들딸들과 자손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의 지도를 받는 왕은 그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도엑과는 달라야 하는 것인데 사울 왕이 왜 이런 도엑을 등용해서 자기의 목자장을 삼았을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장사나 사업을 할 때는 되도록이면 예수 믿는 사람을 등용해야 좋다. 만일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을 목사로 세운다면 어찌 될까? 이 목사가 뭐라고 외치겠느냐? ‘세상에서 부자 되라’ 라고 하며 세상의 소원 목적을 말할 거다. 그러면 교회 안이 어찌 될까? 교인들의 정신과 사고방식이 어찌 될까?
사울 왕이 제사장과 그 가족을 모두 죽이게 된 것은 도엑을 자기의 목자장으로 삼은 것이 불씨가 된 거다. 우리는 이게 보여져야 한다.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사건의 시초가 된 불씨가 무엇인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다윗의 입장에서 자기로 인해 제사장과 그의 가족이 몰살당한 사건만 보면 ‘내가 왜 부하들을 데리고 하필이면 그 시각에 그리로 갔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사울 왕이 도엑을 왕의 목자장을 삼은 것이 비극적인 사건의 불씨가 된 거다.
사울 왕이 에돔사람 도엑을 자기의 목자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울 왕이 벌써 옛사람을 주격으로 하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기 고집대로 하고자 하는 정신 사상이 깡아리처럼 박혀있었던 거다. 오늘날 자기 속에는 이런 게 없는지 살펴봐라. 사울이 평소에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살았기 때문에 에돔사람 도엑을 맞아들여서 목자장이라고 하는 직분을 준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도엑을 자기의 목자장으로 삼을 리가 없는 거다. 가령 내가 세상적으로 나가는 목사를 우리교회의 부목사로 세운다면 내 속에 뭐가 들었다는 거냐? 세상정신이 잔뜩 들었구나. 이게 불씨다. 이런 사람을 교회에 세우면 그 다음은 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세상을 보면 살려야 할 불씨가 있고, 죽여야 할 불씨가 있다. 과거에 성냥이 귀할 때 아침에 불을 땐 아궁이에서 숯을 꺼내서 화로에 담아 그 위를 고운 재로 덮어서 불씨를 잘 간수했다가 저녁에 밥을 지을 때 화로의 불씨를 가져다가 아궁이에 넣어서 불을 땐다. 이 불씨를 꺼뜨리면 큰일이다. 이 불씨는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산불이 나서 불을 다 끄고 돌아갔는데 불씨가 남아 있다가 다시 불이 붙으면 큰일이다. 이런 불씨는 다 꺼뜨려야 한다.
도엑이 사울 왕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갔었다는 것을 말을 했는데, 이 도엑이 왜 사울 왕에게 온 거냐? 무슨 마음을 품고 왔느냐?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왔느냐, 아니면 아무런 이유가 없이 왔느냐, 아니면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왔느냐? 그리고 사울이 도엑의 말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였을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까지 미워하게 된다. 진리말씀을 싫어하면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있는 거다.
도엑처럼 세상정신이 들어있는 사람은 도엑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옛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사람에게 누가 그 옆에서 살짝만 부추기면 이 사람은 그만 마음이 동요가 되어서 더 크게 죄를 짓는 사건을 만들고 만다. 이렇게 되면 사건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은 마음이 문제다. 여기에서 더 들어가면 마음을 다스리는 지식이 문제다. 세상지식이 자기의 기준으로 되어있으면 그의 마음도 세상 쪽으로 가 있는 거다. 이럴 때 누가 옆에 와서 ‘어디에 가면 먹여주고 입혀주고 한 달에 5, 6백만 원을 준다고 하더라’ 라고 하면 그만 그곳으로 가서 안 좋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세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세상적인 지식을 자기의 주격으로 하고 살 가능성이 많다. ‘세상’ 하면 대표적으로 돈인데, 세상적인 지식을 자기의 주격적 지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돈이 많은 곳으로 자꾸 따라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돈이 어디에 있는 거냐? 사람이 돈 주머니 속에 있느냐, 사람의 주머니 속에 돈이 있느냐? 후자다. 그러니까 그 돈을 누가 가지고 있는 거냐? 사람이 가지고 있다. 돈은 사람의 주머니 속에 있기 때문에 돈은 사람을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사람이 돈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 이건 이치가 어그러진 거다. 여기에서 안 좋은 사건이 터지는 거다.
예수 믿어오면서, 살아오면서 자기가 잘못해서 사건이 생긴 일은 없는지 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살아오면서 자기로부터 좋지 않은 사건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사고방식을 가지지 말아라. 그러려면 진리지식을 자기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이를테면 사람을 볼 때 겉모양만 본다면 이 사람은 좋지 않은 사건이 터질 수 있는 불씨를 품에 앉고 있는 거다. 사람은 껍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알맹이다. 알맹이는 그 사람이 살아가게 하는 정신 사상이요 기둥이다. 이걸 봐야 한다.
내가 옛사람 주격으로 살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또 끌어들인다. 질이 같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다. 끌어들여서 그 다음에 단체를 만들어서 그에게 일을 맡기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 자리를 얻은 자는 그 자리를 사수하려고, 또는 여기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된다. 세상은 그렇다. 그러나 결과에 가서는 심판을 받게 된다. 옛사람이란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1절: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강포한 자’라고 할 때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강포한 자가 있고, 신앙 면에서 보는 강포한 자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강포한 자는 사람을 해치고 돌아다니듯이 신앙 면에서 보는 강포한 자는 성도의 신앙이 성장이 되지 않게 해치는 자다. 신앙 면에서 보는 강포한 자는 직위도 있고, 권세도 있고, 부요도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악한 짓을 한다.
목사가 신앙 면에서 강포한 자로 되어있다면 이 강포한 자는 옛사람이 주격이다. 성경을 아무리 이용해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가 없는 거다. 이런 자들도 성경구절을 말하는데 자기 주장에 맞는 것을 뽑아서 뱅뱅 돌린다.
우리가 도엑과 사울 왕을 보면 서로가 이용을 하고 있으면서, 또 보면 서로가 이용을 당하고 있는 거다. 옛사람 주격으로 살고 있는 도엑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사울 왕을 이용하고 있다. 이 도엑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작정을 하고 자기 신분을 속이고 들어온 것인데 사울 왕은 이 도엑을 자기 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도엑이 사울 왕의 옳지 못한 감정을 이용해서 왕을 등에 업고 악한 일을 꾸미고 악한 일을 하는 거다.
우리는 어떤 일이 되어나갈 때 그 일을 하는 주격이 누구인지를 빨리 캐치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을 세워놓고 볼 때, 하나님의 뜻을 세워놓고 볼 때 ‘누가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갔느냐, 누가 제일 가까우냐’가 있는 건데, 이것에 따라 주격이 달라지는 거다. 도엑과 같은 정신 사상이나 마음을 가진 자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 들어와서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으면 이 자가 주격이 되어서 어떤 일이 진행이 되면서 사건이 터지는 것은 빤한 거다.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엑과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 여기에는 반드시 좋지 않은 사건이 생기는 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어느 교회로 가더라도 설교를 들을 때 ‘아, 이건 누가 주격이구나’ 이걸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어느 정신이 주가 되어있구나.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지금도 교회 안에서 물질성적인 요소를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박해하고, 고난을 주고, 영인성장 면을 완전히 망하게 하는 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역사는 도엑과 같은 악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성도 다윗에게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도엑과 같은 자가 사건의 주동자라 할지라도 이런 자는 진리 신앙자에게 오히려 이용물이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그 사상이 무슨 사상인지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성경은 이걸 다 밝혀낸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런 걸 알아야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거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폭도들이 아무리 의인을 죽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붙잡고 마지막 날까지 중단 없이 구원역사를 진행하신다는 거다. 악한 자들이 아무리 영적 이스라엘 속에서 날뛰어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의인은 구원하시고 악한 폭도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하신다는 거다. 결국에는 악한 폭도들은 다 죽이고 의인을 건지고 승리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