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석야 신웅순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간송미술관 소장.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한강변에 높이 76m 정도의 궁산이 있다. 원래 이 산정에는 중국 동정호의 이름을 딴 악양루가 있었으나 소실되었고 1737년 풍류 문사였던 이유가 거기에 소악루(小岳樓)를 세웠다. 경치가 동정호 악양루에 버금가는 누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소악루도 소실, 1994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궁산은 그 옛날 선비들이 한강 뱃놀이로 풍류를 즐겼던, 서쪽의 개화산, 오른쪽의 탑산, 쥐산 등과 함께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가서 양천현을 보지 못했다면 조선을 보았다하지 말라고까지 할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또한 조선의 도성을 방비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때에도 군부대가 주둔하였던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양천 현령에 제수된 것은 영조 16년(1740년) 겨울 그의 나이 65세였다. 정선은 궁산의 소악루에 자주 올랐다. 궁산은 한강변의 절승을 조망하고 사생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여기에서 「소악후월」,「목멱조돈」,「행호관어도」,「안현석봉」등 한강변의 아름다운 진수산경들을 낳았다.
소악후월(小岳候月). 가양동 궁산에서 바라본 한강에 뜨는 달
「행호관어도」는 정선의 33점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하나이다. 경교 명승첩은 겸재 정선이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에 의해 양수리 근교에서 행주산성에 이르는 서울 주변의 풍경을 그린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첩이다.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으며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하첩은 이보다 10여 년 뒤에 그린 그림들이다.
목멱조돈(木覓朝暾) 가양동 궁산 소악루에서 바라본 남산 일출
상첩은 양천팔경을 비롯, 한강과 남한강변의 19폭의 그림이 들어있다.「독서여가」, 「녹운탄」,「독백탄」,「우천」,「미호」,「석실서원」,「미호2」,「삼주삼각산」,「광진」,「송파진」,「압구정」,「목멱조돈」,「안현석봉」,「공암층탑」, 「금성평사」,「양화환도」,「행호관어」,「종해청조」,「소악후월」,「설평기려」,「방천부신」등이 그것이다. 하권은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그로부터 받아두었던 시찰을 화제로 한 서울 주변의 14폭의 그림들이 들어있다.「인곡유거」,「양천현아」,「시화환상간」,「홍관미주」,「행주일도」,「창명낭박」,「은암동록」, 「장안연우」,「개화사」,「사문탈사」,「척재제시」,「어초문답」,「고산상매」,「장안연월」등이 그것이다.
『경교명승첩』은 그의 나이 60대 중반에서 80세경에 그린 것들로 진경산수의 변모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한강과 서울 인근의 모습들이 당시 그대로 남아 있어 한국회화사 및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오면, 행주 앞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春晩河腹羹, 夏初葦魚膾,
桃花作漲來, 網逸杏湖外.
「행호관어도」의 이병연의 제시이다. 고양사람들은 한강을 행호라고 불렀다. 한강물이 행주산성의 덕양산 앞에 이르러 강폭이 넓어져 강이 마치 호수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덕양산 자락에는 경치가 좋아 서울 세도가들의 별서들이 즐비했다. 또한 행호(杏湖)는 서해의 조수와 한강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많은 어류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행주 별서 지대 아래에서 어부들의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음력 4월 말이면 행주나루는 온통 웅어잡이 배로 가득했다. 이병연의 시가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1741년 어느 맑은 초여름 겸재는 소악루에 올랐다. 멀리 덕양산 자락 행주나루에 웅어 잡이가 한창이었다.
우측에 북악산, 삼각산, 견달산을, 좌측에는 고봉산을 앉혔다. 멀리 파주 교하의 심학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처리했다. 한강 중간 중간에 모래섬들도 그려넣었다. 2,3명이 탄 14척의 돛대 없는 웅어잡이 배를 그렸고 한강 넘어 행주나루엔 초가집, 기와집, 산위에는 정자도 앉혔다. 소나무, 기암절벽, 버드나무, 행주산성, 덕양산 기슭도 배치해놓았다. 고양땅의 산수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행어관어도는 이병연의 제시와 함게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웅어는 고양지역의 진상품으로 맛이 뛰어나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물고기였다. 조선말기에는 아예 행주에 위어소를 두어 왕가에 진상하였다고 한다. 웅어는 갈대 속에서 많이 자라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葦魚, 갈대고기)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우여’, ‘우어’, ‘웅에’라도도 부른다.
이제는 초여름 행주나루를 가득 메웠던, 지난날의 웅어잡이 고깃배들은 사라졌다. 행호를 바라보며 붓을 잡았던 겸재의 그림만이 남아 옛 한강의 웅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고양시는 덕양구 행주외동 한강변에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를 토대로 300여년 전의 행주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으로「행호관어도」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예술은 지난날의 향수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지 않았는가.
- 월간서예,2017.4,123-125 쪽.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항상 기다려지는 글 입니다
春晩河腹羹--> 春晩河豚羹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