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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둘, 가치와 목표는 철저히 공유하되 게임은 자유롭게
신설 기관의 원장이 되고 보니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직원도 채용하고, 조직도 구성하고, 부서 이름도 정하고, 공간 배치도 하고, 규정집도 만들어야 하고, 심지어 미션(mission), 비전(vision) 그리고 핵심 가치(core values)도 만들어야 했다. 미션, 비전, 핵심 가치 등을 만들어야 한다기에 나는 그날부터 밤잠을 설쳐가며 관사에서 국립생태원의 철학이 무엇인지 골몰했다. 나는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 교수님을 닮아 은근히 조어 작업을 즐긴다. 독자들을 위해 책에 사인을 해줄 때 쓰다가 어느덧 좌우명처럼 돼버린 '알면 사랑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으로 제시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고령사회를 대비한 '인생 이모작', 대한민국을 학자의 나라로 만들자며 제안한 '대한문국', 잎을 잘라다가 버섯을 길러먹는 개미를 '가위개미'라고 부르는 게 못마땅해 개명한 '잎꾼개미'에서 '통섭'에 이르기까지 나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걸 은근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초대원장으로 근무하는 기관의 철학을 정립하는 일을 소홀히 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며칠 후 이 작업은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외부업체에 용역을 주는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한편으로는 민망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우 섭섭했다
용역을 내보내고 얼마 뒤 업체에서 중간 보고를 하러 왔다. 미션과 비전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스크린 가득 핵심 가치를 내걸었을때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수월성', '소통성'등 '성'자 돌림의 단어 네 개를 가리키며 나는 "왜 LG화학 핵심 가치를 우리에게 가져오셨냐?"라고 다그쳤다. LG화학 걸 가져온 게 아니고 국립생태원을 위해 새로 만들었다고 항변하는 업체 연구원에게 나는 "아니, 이 세상천지 어디에 수월성 싫어하는 기관이 있어요? 농협에 줘보세요. 좋아하겠네. 삼성전자도 마다하지 않을걸요"라며 마구 몰아세웠다. 서둘러 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그들로부터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용역을 반납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얼씨구나 싶어 도로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감사실장이 헐레벌떡 원장실로 달려왔다. "원장님 안 됩니다." 내가 원장 일을 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왜 안되느냐 물었더니 국민의 세금으로 사업을 집행했는데 실패해서 회수하면 평가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능력 없음을 자백하고 반납하겠다는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을 불러 내가 따로 모신 자문위원들과 장시간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함께 만들었다. 자문위원회에는 평소 내가 알고 지내던,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될 뻔했던 에이팀벤처스 고산 대표, 하지원 에코맘 대표, 이장섭 액션서울 대표, 허핑턴포 스트코리아 편집인을 맡고 있는 손미나 아나운서 등 참신한 아이디어로 충만한 분들을 모셔 내가 구상하는 여러 생태원 프로젝트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묻곤 했다. 다 만들고 나니 내가 만든 핵심가치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생명 사랑, 다양성, 창발, 멋.'은 연중 내가 그렇게 몰고 갔음을 고백한다.
얼마 전 우리 사회는 '생명 사랑' 정신의 부재로 꿈에도 잊지 못할 아픔을 겪었다. 세월호 침몰은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 핵심 가치로 삼아 마땅한 한 업체의 생명 경시 때문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생명 탄생은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확률의 기적이요, 종교적으로는 한없는 신의 축복이다. 이처럼 고귀한 생명을 받았다면 모름지기 다른 생명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 생태학은 한마디로 '다양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엄청난 생물다 양성이 어떻게 진화해 공존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 국립생태원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재가 모였다.
정부기관, 민간기업, 시민단체, 학계 등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균일 집단의 일사불란보다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창발' 효과에 큰 기대를 건다. 하위 수준에는 없던 속성이 그들이 모여 상위 계층을 이루면서 새롭게 출현한다는 '창발'은 내가 십여 년 전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진 '통섭'의 개념과 맥을 같이 한다.
끝으로 '멋'은 그 뜻을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말이다. '멋'은 감각적 개념의 '맛'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말로, 됨됨이나 행동의 품격이 세련되고 여유로움을 뜻한다. 5,000년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부유해본 적 없지만 우리는 멋을 아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돈 몇 푼을 탐하느라 멋을 잃었다. 국립생태원이 다양함을 창발로 승화하며 '생명 사랑' 정신을 온 누리에 되살리는 '멋' 진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기를 바라며 만들어낸 핵심 가치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국립생태원의 핵심 가치를 나는 진정으로 좋아한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자랑스럽다. '정직, 근면-.' 따위의 영혼 없는 단어들을 늘어놓은 많은 다른 기관의 핵심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장인 나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국립생태원 500명 직원 모두 핵심 가치를 잠꼬대로도 되뇔 정도가 될 때까지 다양한 교육과 이벤트를 계속했다. 핵심 가치의 정신을 전 직원이 공유하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원장으로서 내가 한 일은 여기까지였다. 미션과 비전을 확고히 해 직원 모두가 공통된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게 하고 그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는 핵심 가치를 수단 또는 철학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최고경영자로서 내 전략은 말하자면 '여왕개미 통치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개미 제국에서는 여왕개미가 모든 일을 진두 지휘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왕개미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차세대 인력을 확보하는 번식만 홀로 담당하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전적으로 일개미들에게 위임한다. 국가의 규범을 확립하고 그를 어기는 행위는 단호히 응징하지만 실행 과정은 자유롭게 풀어준다.
게임의 룰만 정해줄 뿐 정작 게임 자체는 더할 수 없이 자유롭고 신명나게 하도록 놓아준다. 나는 '일터를 놀이터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핵심 가치와 목표는 모두 확실하게 공유하지만 실제 일은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도록 자율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국립생태원 정문을 들어서면 길을 내느라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깎아 뻘건 흙 언덕이 드러나 있었다.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그 시빨건 흙더미가 눈에 거슬리던 나는 드디어 그곳을 손보기로 했다. 직원들과 상의한 결과 꽃밭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줄잡아 6,000~7,000m2 (약 2,000평)는 됨직한 넓은 언덕에 화사한 꽃발이 만들어지면 그 또한 좋은 볼거리 관광상품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직원들과 토론을 시작했다. 원장으로서 나는 한 가지만 주문했다. 이런 주문도 따지고 보면 독재의 요소를 안고 있겠지만 다양한 꽃을 심어 울굿불긋하게 만들지 말고 한 종류만 심어 단색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연출했으면 좋겠다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일단 원장의 고집이 받아들여진 다음 우리는 여러 차례 공론과 투표를 거쳐 우리 토종인 찔레꽃을 심기로 했다. 철쭉, 개나리, 심지어 장미까지 경합했으나 우리는 끝내 소박한 우리 꽃을 선택했다. 5월과 6월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에 언덕 가득 흐드러진 찔레꽃의 은은한 향기가 생태원을 찾는 관광객들의 코를 자극한다. 해마다 장사익 선생이 오셔서 그의 대표작 <찔레꽃>을 멋들어지게 불러주면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전국의 명소로 떠오를 이곳은 여왕개미인 내가 혼자 결정한 게 아니라 일개미들이 지극히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만들어낸 작품이다. 찔레동산이 풍성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직원들의 자부심과 애착도 함께 커나갈 것이라 믿는다.
내가 썩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원장 동지'라는 별명을 달고 여러 위원회에서 위원장을 해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위원회는 역시 '제돌이야생방류시민위원회'였다. 2012년 3월 12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2009년에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서 혼획돼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하던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야생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어쩌다 나는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이듬해 7월 18일 제돌이를 제주 김녕항 앞바다에 방류할 때까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온갖 다양한 위원회의 장을 맡아 일해 봤지만 이보다 더 힘든 위원회는 없었다. 위원회에는 핫핑크돌핀스, 동물자유연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환경운동연합 바다위원회 등 온갖 동물 관련 시민단체가 거의 총망라되었다 제주도청, 국립고래연구소, 서울대공원 등 관련 기관은 물론 학자와 변호사를 포함해 돌고래 야생 방류에 관한 거의 모든 이해집단이 참여했다. 첫 만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회의가 거듭될수록 그야말로 접입가경이었다. 위원장인 나조차 발언 기회를 얻기가 어려웠다. 온갓 의견이 개진되었고 곧바로 온갖 비난이 빗발쳤다. 과연 이런 위원회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다스려질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딱 한 가지만 주문했다. 모든 발언은 "어떻게 하면 제돌이를 하루빨리 무사히 제주 바다로 돌려보내줄 수 있을까?" 오로지 이 하나만 생각하며 해달라고. 조금이라도 여기서 벗어나는 발언은 위원장 직권으로 가차 없이 저지하겠노라고.
참으로 힘든 위원회였지만 모든 게 끝이 날 때에는 신기한 경험을 얻었다.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으르렁대던 위원들이 제돌이 를 풀어주러 모인 자리에서는 정말 아무런 앙금도 없이 서로격려하며 축하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배웠다. 이게 바로 새 시대의 새로운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것을.
새 시대의 새로운 거버넌스 시스템은 시작부터 모든 이해당사자 혹은 집단의 목소리를 빠짐없이 들을 수 있도록 구성한다.
과정은 힘들고 시끄럽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효율적이고 시간도 덜 든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직접민주제로 시작해 간접민주제로 발전했다가 이제 또다시 직접민주제를 가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얼마 전 촛불을 들고 이 같은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직접민주주의는 이제 오프라인과 온라인 모두 가능하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제도의 변화를 주도한다.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 중에서
최재천 지음
첫댓글 늘 ..감사해요 대구지부장님~~
혹시 저한테?
저는 제주입니다.
@재미(8기 백경미) 늘 감사합니다~
백경미 제주지부장님^^
대구경북지부장은 최혜정입니다ㅎㅎ
@13기 최혜정
죄송요 ㅜㅜ제주 지부장님을 잘못올렸어여 ㅎㅎ
@박종희 괜찮요.
gorgeous한 분으로 착각해 주셔서 감사요!
제주 지부장님 ㅎㅎ
@박종희
일터를 놀이터로 오늘도 열심히ᆢ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