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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해외 여행 등반 레저 스크랩 전남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꼬끼오(성기효32회) 추천 0 조회 124 11.02.12 21:4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현재85세대 229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삼한시대 마한땅, 백제때 파지성, 고려때 낙안군 고을터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東軒), 객사(客舍), 임경업군수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에 지정되었다.

조선태조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후 인조4년 (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33세때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동문을 비롯 서,남문을 통해 성안에 들어서면 사극 촬영장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져들며 용인,제주민속마을 같이 전시용이나 안동하회마을과 같이 양반마을도 아닌 그저 대다수의 우리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순천시가지에서 서쪽22㎞거리의 읍성민속마을은 6만8천여평으로 초가는 초라한 느낌마저 들지만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한 정감이 넘친다. 남부지방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섬돌위의 장독과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도 높지도 않고 담장이와 호박넝쿨이 어우러져 술래잡기 하며 뛰놀던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을 연상케 하며 마당 한켠의 절구통마저도 옛 스럽다.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낙안읍성 성문을 들어서면 잠시 타임 머신을 타고 옛날 조선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다.

계절 따라 피어나는 꽃향기가 진동하고 그 숲이 그리워 떠나지 못하고 둥지 틀어 노래하는

소리 귓가에 맴돈다. 잘 보존된 토속적인 분위기와 민속 경관을 누구라도 한껏 느낄 수 있다. 비록 내가 태어난 고장은 아니지만 마음속의 고향으로 포근히 다가옴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초가집과 함께 꼬불꼬불 미로 같은 돌담길과 싸리 울타리가 둘러 처진 텃밭들이 아닌가 한다.

그리 높지 않고 모나지도 않아 예전엔 담 너머로 이웃집과 음식을 넘겨 나누어 먹고 울타리에 호박꽃이 피어나고 지붕위에 달덩이 같은 박이 주렁주렁 열렸다. 골목길 곳곳에 공동 우물이 있고, 동네 꼬마 애들이 골목길 가득히 술래잡기로 해지는 줄도 모르고 누렁이와 검둥개가 함께 뛰어 놀며 우리가 자라고 우리 모두가 걸었던 정든 고샅길이 추억처럼 펼쳐진다.

이곳 낙안읍성의 길을 보면 동문에서 서문으로 통하는 길은 거의 일직선에 가깝고 남문에서 들어오는 길 역시 직선으로 이 길과 연결되어 있어, 마치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있는「우」자 모양의 주(主) 도로에서 작은 골목길들이 흡사 그물처럼 이어나갔다.

머리에 해당되는 곳에 관아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동문과 서문으로 통하는 길과 남문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곳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성내의 길을 내는데도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지혜를 짜아 낸 슬기가 엿보인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집안이 바로 들어다 보이지 않도록 사립문을 달아 차폐를 하였으며 가옥 구조는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일자형 가옥으로 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의 집들이 죽담(흙담)으로 쌓여 있고 집이 낮고 방문이 작게 만들어 진 것이 특징이다. 큰 부자보다는 관에 출입하는 아전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지 않았나 추측이 된다. 마당 옆 우물가에 조그만 장독대가 있고 담장 아래 맨드라미와 봉숭아꽃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고 감나무 대추 모과나무 등 각종 과일 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메주 덩어리와 무 씨레기 등이 한층 고향처럼 정감이 간다.

 

 

 

 

 

 

 읍성안 동내, 남내 마을 하단(남쪽)에 위치한 곳에 낮은 우물들이 있고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주변에 모여 못을 이루는데 이곳을 연지라 한다. 지금은 미나리꽝이 형성되어 있어 미나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으며 2000년 연지를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곳은 옥사(獄舍) 주변으로서 죄수들의 탈주를 막는데도 이 못이 장애물로 이용되지 않았는가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성내에서 사용한 생활 용수가 연지를 거쳐 정화된 다음 수구를 통하여 성밖으로 빠지도록 하였다. (미나리나 연꽃은 오수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함)

 

 

 

 

 

 민속마을의 전경

 

 

 

 우리 나라 전국에 걸쳐서 아직도 많은 성곽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돌 하나 하나에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져 있으며, 우리의 역사와 강토를 지키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호국 의지의 본보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성곽은 대체로 산의 자연적인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흙으로 쌓아올린 토성(土城), 석성(石城), 전축성(塼築城), 목책성(木柵城) 등이 있으며, 그리고 국경을 이루는 장성(長城) 왕궁을 지키는 도성(都城=왕성, 궁성)과 라성, 평산성, 읍성 등으로 구분 할수가 있는데, 성곽의 부대 시설로는 성문(城門)과 기타 시설이 있다.

성문은 일반적으로 홍예문(虹霓門=성문이 반달 모양의 아치형)과 사각형(四角形)이 있으며, 곡행문(曲行門)은 성안과 밖으로 통하는 길을 S자형으로 돌아 들어 가도록 설치된 문이다.

현문(懸門)은 평상시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를 들어 올려 두고 필요할 때 다리를 내려 사용하는 조교(釣橋)가 있고, 암문(暗門)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지원병이나 무기 식량 등을 운반하기 위한 비밀 통로이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반원형이거나 사각형으로 성문 앞에 돌출 되어 설치된 성곽의 일부분이다.

현안(懸眼)은 성벽에 바짝 다가선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미석(眉石)에 구멍을 내어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하였다.

성우(城隅)는 성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쉽도록 성곽을 돌출시켜 쌓은 성으로 반원형이면 곡성(曲城), 사각이면 치성(雉城)이라 부르며 일명 초소나 망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여장(女墻)은 성 가장자리에 쌓은 성곽 일부로 평 여장과 불록(┻)여장이 있다.

해자(垓字)는 성곽 주변(안과 밖)에 자연적인 고랑이나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기도 하고 인공적으로 호를 파거나 고랑을 내어 적으로 부터 침입을 일차적으로 차단하거나 성곽의 방어력을 높이는 성곽 시설의 하나이다.

그 외에 총안 또는 사구(銃眼=射口), 미석, 공심돈, 포루 각루등이 있으며, 또한 읍성의 기능은 관아와 민가가 성내에 함께 하는 지방 행정과 군사적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고 본다.

이곳 낙안성도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보면 조선조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의병들과 함께 쌓은 토성(土城)으로 그 후 1626(인조4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 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그리하라 하였으며,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낙안읍성 동문 입구와 남문과 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고 매년 정월이면 훼손된 장승을 새로이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 왔다.

예전엔 길 양편에 장승(벅수)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으며 이곳을 장승(長丞, 장생)거리 또는 벅수거리 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은 옛것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장승과 솟대를 세웠다.

장승은 길 양편에 세워졌는데 오른쪽은 남 장승으로 천하 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하고 왼쪽에 있는 장승은 여 장승으로 지하 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한다. 원래는 신라 소지왕때 옛길을 넓혀 관도(國道)를 사방으로 넓혀 닦고 우역(郵驛)을 두어 사람과 물품을 보내기 위해 10리마다 흙이나 돌무더기 또는 기둥을 세워 표시하였는데 이때 나무 기둥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두었던 것이 장승(長丞)이라 하였다.

한편으로 사찰이 황폐되어 가자 사찰(절) 입구에 세워 절을 수호하는 보살 법수(法守)로 불리게 되었고 또한 이 법수보살이 절을 수호하듯이 마을을 수호하여 주기를 바라는 신앙심에서 마을 어귀에 법수를 세우고 마을의 각종 재앙이나 병마로부터 이를 막아 주기를 기원하였다. 마을에서는 이곳에 음식물을 차리고 제(祭)를 지내며 법수가 퇴락하기 전에 새로운 법수를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돌림병(전염병)이나 또는 어떤 불의의 사건이 발생 하였을 때 마을을 지키지 못하였다 해서 벅수(멍청이 바보로 비유)로 이름지어졌고 우리가 흔히 사람이 미련하고 바보스러우면 이 사람을 '벅수'라고 놀림을 주기도 한다.

솟대는 긴 장대 나무 위에 기러기 또는 오리가 있는데 이는 태양신의 사자로 죽은 영혼을 기러기가 하늘로 인도한다고 하는 믿음에서 유래하였다. 오리는 물에서 사는 짐승으로 농경 사회에서 물의 부족함이 없이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오리는 알을 많이 낳았던 데서 유래함) 기원하고 화재 예방을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 멀리서 잘 보여 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조선 왕조때 지방관아 건물로서 감사(監事), 병사(兵使), 수사(水使), 수령(守令)등 이 지방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중앙 마루는 송사(訟事)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당초 건립 연대나 퇴락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수 없으나 옛 자리에 정면 5간, 측면 3간, 37.51평 팔작 지붕에 가운데 청 마루를 두고 뒤편에 적은 마루가 있다. 그리고 청 마루 양편에 큰방을 두었으며 서쪽 방은 가운데 열문을 두어 둘로 나누도록 되어 있고 방마다 작은 고방이 안쪽에 있다. 동헌 서쪽에 내아로 가는 협문이 있으며 한단 아래 아랫 마당이 있고 삼문과 양편에 각 창고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으며 1990년 복원이 되었다.

 

 

 

 

 

 

 

 

 

 

<낙안객사(客舍)=낙안지관(樂安之館) (지방 유형 문화재 제170호)>
 

 

 

 

객관이라고도 하며 고을의 가장 으뜸되는 건물로 고을의 가장 중앙 상단에 위치 하는게 보통이다.

객사는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영접하고 머물게 하였으며 왕명을 받고 접수하였다. 객사 중앙 마루는 전청(殿廳) 또는 정당(正當)이라고 하며 마루 안쪽에 전폐(궐폐)를 안치하고 새로이 고을 수령이 부임하거나 또는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날)과 국경일이나 고을에 좋은 일이 있거나 궂은일이 있을때 군수 이하 관속들이 나와 향궐 망배하던 곳이다. 즉, 임금님을 가까이 모신듯 충성과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 할것을 약속하던 곳이기도 하다.

낙안의 객사 역시 낙안읍성 내(內) 가장 중앙 상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건립 연대는 1437년 조선조 세종 19년이라고 하나 확실한 기록이 없고 성내 관청 건물은 1397년 신원절(愼原節)이 옛터를 따라지었다고 하며, 그 뒤 누추하고 퇴락 하여 1450년 세종 32년 군수 이인(李茵)이 중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후 1857년(철종8) 군수 이명칠(李明七)이 수리하였다고 전한다.

또는 1547년(명종2) 양악군 당시 부사(府使) 오성(吳誠)이 건립하였다고도 하며 1536년에 건립되었다고 순천 승주 향토지에 나와 있기도 하다. 객사 좌우의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익사(翼舍) 동쪽 방은 문인(文人)이 서쪽 방은 무인(武人)의 숙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객사 본전은 1908년 낙안군이 폐군이 되고 나서 낙안 초등학교 교사(校舍)로 그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1983년 사적 302호로 지정이 되면서 복원 사업과 함께 초등학교를 성밖으로 이주하고 1986년 원형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건물 규모는 정면 7간, 측면 3간에 50.94평 솟을형 고설(高說)집으로 본당은 3간의 맞배형이고 익사(翼舍)는 한단 낮은 지붕의 팔작형으로 된 익공 집으로 전면에는 장대석 기단을 두고 초석은 덤벙 구조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단청은 모로 단청과 긋기 단청이 혼재 되어 있고 삼문 양편에 각기 방이 하나씩 있다. 또 대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들어오는 입구에 흥살문이 설치되어 있다.

낙안읍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오년(慶五年)에 하빈(河濱) 이공(李公) 인(茵)이 군수로 와 정사가 잘 다스려저 송사가 간략하니 백가지 폐했던 것이 모두 일어났다. 그 이듬해 무리를 모아 묻고 의논하여서 옛 제도를 더하고 새롭게 했다. 재목을 구하고 기와를 빚어 이에 공관(公館)을 짓는데 세로 몇 칸이고 가로 몇 칸이어서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사신을 대접하고 교령을 시행하며 아전과 백성들의 모임을 다 여기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 경사롭게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신중에 허종(許琮)의 시(詩)에

"맑은 가을 경치 날마다 새로우니 강호에 한가한 몸이 되었으면 하네 사업은 만년을 전하지 못하나마 문장만은 단지 삼신(三臣)을 움직이리 당년 관해(關海)에 아기(牙旗)를 세운 손은 옛날 승명전(承明殿)에서 조서(調書)의 초를 잡던 신하일세 혜강(康)에 백안(白眼)이 많다고 묻지 말라 예로부터 세상엔 거짓이 참으로 행세한다네” 라고 하였다.

이러함에도 낙안객사의 당호를 알 수가 없더니 조선 환여승람(朝鮮環與勝覽) 순천군(順天郡)편에 보면, 이석형(李石亨)이 팔도 도제찰사로 순찰하는 도중 본군에 들려 쓴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위를 보라「낙안객관」기(樂安客館記)가 있다 낙안은 대단한 읍이다. 동쪽엔 개운산이 있고, 북쪽은 금전산에 근거했다. 땅이 넓고 백성을 생각하며 일구(一區)가 이불을 펴듯 평평해 남방의 형승이다. 여기는 가장 왜구의 침략을 많이 받아서 살던 백성들이 도망가 버려 기름지고 풍요로움이 쑥밭이 되고 실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도둑의 넘나듬이 너무 심해 복구할 겨를이 없었다. 어찌 당사(黨舍)란 것이 있으리요. 이미 비록 그 땅에 백성이 돌아오게 하더라도 읍인을 아직 모이지 못했다. 절제사 김빈길이 부민을 거느리고 토성을 쌓았고 군수 신원절이 이 때문에 옛터에 해우를 지었다. 그래서 그때를 당해 처음으로 제도를 창설했는데 비좁고 더러웠다. 금년에 이르러 시대가 오래되어 무너졌다. 풍년이 든 경오년에 하빈(河濱) 이공(李公) 인(茵)이 이군에 군수로와 군정을 닦고 송간해 기와를 넣었다. 그래서 공관을 열고 직기 영하고 횡기 영하니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살피건데 화려하게 화평을 베풀게 하니 이민(吏民)이 모두 지어 이렇게 되어서 서로 경매하지 않았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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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2.13 09:13

    첫댓글 낙안 읍성 구경 잘보고 갑니다 20여년전 단체로 낙안읍성 송광사로 관광 갔던 기억을 되세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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