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너럴 셔먼호는 삼신산의 황금도시를 추적하고 있었다.
다음글은 미국상선 져너널 셔먼호의 평양난동사건 전모다.
당시 그들이 침투하였던 대동강은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두번의 대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첫번째가 위만
조선을 한나라가 누상선으로 공격한 사건이었고,
두번째가 수.당나라가 고구려를 칠때 수천에서
만여척에 달하는 배들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러한 사서들이 전하는 기록들을 검증할 여유를
갖지못했던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수천년전의 이러한 기록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를 근대에 일어났던 미국의 무장상선 져너럴
셔먼호를 기준으로
비교 조명하기로 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위만조선을 침략하였던 중국의 대형선박(누상선)들의 대동강 운항이 가능했는가 여부를
밝혀볼 것이고, 일개 무장상선으로서 통상을 트기 위하여 평양으로 침입하였다는 져너럴 셔먼호의 수수께
끼를 풀어볼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대동강의 수로를 분석한 전문학자들의 연구실적을 참고하기로 한다.
대동강은 입해구로 부터 평양까지의 수심은 변화가 심하여 일방적 적용이 불가능하고
크기가 30톤 미만의
배만이 평양까지 들어갈수 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져너럴셔먼호는 80톤이었다고 하니 평소대로라면 이 상선은 평양까지 운항이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홍수로 물이 불어난 관계로 이때를 이용하여 올라갔다가 며칠을 머무르는동안 물이 빠지게 되자
인근
섬에 좌초되어 전소당하는 비극을 맞었던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의 누상선은 대동강 운항이 가능하였던것일까.
그리고 1년 반동안이나 수백척의 배들이
좁은 대동강에 머물러있었다는 사실이 가능했단 말일까.
더구나 본국까지 항해하려면 적어도 수개월동안 바람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을때인데
장기간의
작전동안 군수지원이 가능했단 말인가.모두가 믿기 어려운 의문 투성이다.
한나라 누상선
대동강은 특이하게도 평양성의 하류쪽으로 강의 중간에 콩알처럼 보이는 충적도가 촘촘이 박혀있다.
만약 전쟁이
나서 적군이 이 강을 이용하여 평양을 공격한다면 통행을 완전히 차단당할수 있는 저격지가
많다는 얘기다.
한나라의 누상선이 5만7천명의 병력을
싣고 이 강을 거슬러 오른다고 생각을 해보자.
배 한척당 최고로 5백명을 싣는다고 가정하면 114척의 배가 필요하고 100명을 싣는다고 가정하면
570여
척이 배가 필요해진다.
이때 조선의 방어군이 모두 휴가를 떠나지 않은 이상 이 좁은 항로를 통과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 기간이 1년반이라는 세월을 대동강에서 평양성과 대치하며 싸웠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없는것
이다.
요동까지 진출해있었다는 지상군을 버려두고 무엇때문에 그 어려운 수상전을 치루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와같이 수군을 이용하지
않으면 않되었던 이유는 당시 위만조선은 《한서》<천문지>의 기록대로
바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들이 공격하였던 조선은 대동강 평양이
아니었단 말이다.
져너럴셔먼호가 좌초되어 공격을 받았던 양각도. 양각도는
마치 양의 뿔처럼 생긴 두개의 충적도를 말한다.
넓은강의 중간까지 펼쳐저있어 강의 통행을 저지할수있는 요지이기도 하다.
셔먼호는 장마비로
불어났던 물길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다가 며칠을 머무르는동안 수위가 줄자 양각도에
좌초되어 움직이지 못할때 콩기름을 물에 흘리고 소형배에
나뭇단을 실어 불을지른체 띠워보낸 화공선에
휩싸여 전소된것이다.
그들이 이와같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시도하였던 모험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고조선의 황금도시를
찾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그들은 배에다 구금시켰던 이현익등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쌀 1000석과 황금.은.인삼.호피등을
요구한것
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때의 호피란 발조선의 특산품이라고 알려졌던 해표피를 말한다.
당시 미주대륙은 "골드럿시"를 이루고 있었다.
서부의
인디언들 거주지에서 광산이 발견되자 무자비하게 그들을 몰아내고 황금을 강탈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인 풍조는 에스파니아의 신대륙 발견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중남미대륙을 유린하고 고대문명국인 마야.잉카.아스택등에서 수십톤의 황금을 약탈하였던것이다.
이들로 부터 피해를 본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근래에 그들은 만주대륙에서 베링해협을 건너간 고조선의 유민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에는
황금에 대한 잠재력이 있을것라고 믿었던 추측이 황금을 쫓고있던 서양인들을 자극
하였던것이다.
이후 그들은 고조선의 황금정보를 얻기 위하여
고대사료를 추적하게 되었고, 궁실을 황금으로 장식하였
다던 삼신산 얘기를 발견하였을 것이다.《사기》<봉선서>
"제위왕(齊威王) · 제선왕(齊宣王) · 연소왕(燕昭王) 때부터 사람들을 시켜 바다로 가서
봉래(蓬萊) · 방장
(方丈) · 영주(瀛洲)를 찾아 보도록 하였다.
이 세 개의 신산(神山)은 전설에 의하면 발해(勃海)가운데 있었고, 인간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선인(仙人: 도사)들은 머지않아 배가 도착할 것이 걱정이 되어 얼른 바람을 이용해서 배를 떠밀어 버렸다.
일찍이 그곳에 갔다 왔던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는 많은 선인들 및 불사약(不死藥)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온갖 것들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기어다니는 짐승들은 색깔이 모두 흰색이요,
궁궐은 모두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곳에 아직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다 볼 때는 온통 운해(雲海)처럼 떨어져 있던 것이, 막상
그곳에
다르고 보니, 이 세 개의 신산(神山)은 오히려 물 속에 가라 앉아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배를 대어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이상스런
바람에 의해 배가 떠밀려 끝내 그곳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대의 군주(世主)들 가운데 자나깨나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후, 이 바닷가에 온다는 소식을 기다렸다가 이 같은 일에 대해 말하는
방사(方士)들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진시황은 몸소 바닷가로 가서 이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
나머지, 이윽고 사람을 시켜 동남동녀들을 딸려 바다로 보내어 찾아 보도록 하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배가 바다에 이르렀으나 바람에 떠밀려 그곳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득히 먼 곳에서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
( 自威、宣、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傅在勃海中,去人不遠;患且至,則船風引而去。
蓋嘗有至者,諸仙人及不死之藥皆在焉。其物禽獸盡白,而黃金銀為宮闕。未至,望之如雲;及到,三神山反居水下。
臨之,風輒引去,終莫能至雲。世主莫不甘心焉。及至秦始皇並天下,至海上,則方士言之不可勝數。始皇自以為至
海上而恐不及矣,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船交海中,皆以風為解,曰未能至,望見之焉。)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리기를,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름하여 봉래(蓬萊) · 방장(方丈) · 영주(瀛洲)라 하며, 선인(仙人)
이 거기에 살고 있다.(齊人徐市等上書, 言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仙人居之。)라고 한 대목이
있는데, 바로 여기서 말하는 해중(海中)은 해시신루(海市蜃樓) 현상이 일어나는 오늘날 발해의 장도를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정보를 토대로 대동강 평양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장도가 있는 중국의 산동반도 연태 지부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선의 평양성을 탐색하였으나 장도는 이미 지진에 의해서 평지가 물에 잠기는 변화가
있었고,궁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하여 그들은 한반도로 옮겨진 평양을 추적하여 대동강 평양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무역이 목적이 아니었고,애스파니아가 중남미대륙을 침략하였듯이 상선으로 위장하여 황금
정보를 정탐하기 위한 계략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략에 당시 선교사들의 일부는 현지 정보원의 역활을 겸하였던 사례가 많았다.
저자 김성남 박사의 <에스파냐 잉카제국 정복 전쟁>에 의하면 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정복자)들에게
현재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황금과 땅과 노예에 눈이 먼 에스파냐인들의 ‘탐험’은 계속
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코르테스 이전에도 후안 폰세 데 레온, 발보아 등이 아메리카 대륙 인근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코르테스가
오아차카(Oaxaca)의 총독이 된 후에도 바스케스 데 아이욘은 북미대륙을 들쑤시고 다녔으며 코르테스의
부장이었던 알바라도는 과테말라의 총독이 되었다가 ‘화끈한 모험’을 찾아 남미대륙으로 향했다는것이다.
결국 남미대륙에서 번성하고 있던 잉카도 에스파냐인들에게 ‘발견’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결국 잉카 제국 역시 에스파냐인들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던것 이다.
이러한 시대에 미국인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황금수집과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삼신산의 궁전들은 금과 은으로 지어졌다는 《사기》<봉선서>의 기록과 연계가 되어있는것이다.
삼신산의 황금얘기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인접지에 중국 최고의 금광을 가지고 있었던것이다.
이곳이 래주로서 동래군에 속한지역이었고,바로 고조선지역인 우이지역이었다.
<산동화보사편집출판> 금수산동(錦繡山東)연태편에서
연태는 자고로 상고시기부터 양잠과 목축업이 발달하였고,중요한 소금산지였으며, 송대이후 광산업이
발달하였다.송 황우년간(1049)에
전국년생산량 5000량중 내주의 상산량은 4000여량을 차지하였다.
초원현을 "금성천부(金城天府")라고 불렀다.현재 황금생산량은 전국수위다.
*이곳의 금광소식은 송대이전에는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저너럴셔먼호가 머물렀던 산동의 연태시 지부와 황금산지 초원시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삼신산
1886년6월 져너럴 셔먼호는 중국 산동반도의 연태시 지부산
해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지부산은 고대로부터 삼신산과 신선설화(1)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져너럴 셔먼호에 동승하였던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가 조선의 포교를 위해서
머물러있었다고 하지만 만약 그들이 삼신산의
황금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 있었
다면 당연히 먼저 이곳에
정박하면서 장도의 삼신산지역을
탐색하였을것이다.
그러나 삼신산지역은 이미 저지대가 바다로 윤몰되어있어 원형을 찾기가 어려웠을것이고,
한나라 이후 수.당의
침략으로 황폐된 모습만 확인 하였을것이다.
그들은 결국 옮겨간 평양성을 추적하여 한반도의 평양성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1886년6월 이곳을 출항한 져너럴 셔먼호는 6월6일 쳔진에
도착하여 영국선박회사와
용선계약을 체결한
뒤 영국상인
프레스턴을 싣고 6월16~18일 평양을
향하여 출항하였다.
그들은 백령도.초도등을
거쳐 7월7일 대동강에 도착하여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에
정박하였다.
주(1)진시황은 그 큰물고기(상어?)를 추격하여
낭야대애서 위해 성산두까지 왔으나 놓치고 말았다.
연대 지부산에와서 비로소 그 큰고기를 잡으니 이곳이 바로 지부도에 있는 <진시황
射漁臺>이다.
還過吳,從江乘渡。並海上,北至琅邪。方士徐市等入海求神藥,數歲不得,費多,恐譴,乃詐曰:
「蓬萊藥可得,然常為大鮫魚所苦,故不得至,願請善射與俱,見則以連弩射之。」始皇夢與海神戰,
如人狀。問占夢,博士曰:「水神不可見,以大魚蛟龍為候。今上禱祠備謹,而有此惡神,當除去,
而善神可致。」乃令入海者□捕巨魚具,而自以連弩候大魚出射之。
自琅邪北至榮成山,弗見。至之罘,見巨魚,射殺一魚。遂並海西。<사기 진시황
본기>
장도해변의 괴어척살장면 동상
영국선교사 토마스가 머물렀던 연태시의 지부가(芝부街) 모습이다.
歷至孝文即位,將軍陳武等議曰:「南越、朝鮮【正義】潮仙二音。高驪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即古
朝鮮地,時朝鮮王滿據之也。自全秦時內屬為臣子,後且擁兵阻阸,選蠕觀望。【集解】阨音厄賣反。
選音思兗反。蠕音而兗反。【索隱】蠕音軟。選蠕謂動身欲有進取之狀也。《사기》<율서>
해중(海中)을 설명한 《한서(漢書)·천문지(天文志)의
기록이다.
元封中, 星孛于河戍占曰:
"南戍爲越門, 北戍爲胡門。" 其後漢兵擊拔朝鮮, 以委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
越之象也; 居北方, 胡地域也。)"라고
하였다.
"원봉 연간(B.C 110~105)에 혜성(孛星)이
남하(南河) · 북하(北河)의 성구(星區)에 나타났다.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북하(北河)는 호인(胡人)들의 문호(門戶)요, 남하(南河)는
월(越)나라의
문호라고 하였다.
그후 한(漢)의 군사가 조선(朝鮮)을 쳐서 낙랑(樂浪) · 현도군(玄菟郡)을 만들었다.
조선은 해중(海中)에 있어, 건너다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사는 북쪽은 장수인들이
사는(胡族) 지역이었다.
남월(南越)은 조선을 공략하기 전에 먼저 정벌하였던
광동지역을 말하는데 수군장수 양복(楊僕)이 공을
세운 전쟁은 남월(南越)이란 지명처럼 남쪽으로 건너다보이는 해남도정벌을 말한것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가 골치를 앓았던 이유는 바로 해남도 때문이었다.
남월왕은 번번히 내륙지역에서 반란을 이르켜 황실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먼데다가 진압군이
도착하면 모두 섬으로 들어가 방어를 하였던것이다.
그야말로 수군이 없으면 난공불락이었다.
하여 한무제는 누상선을 동원하여 많은
병력을 상륙시켜 그들을 진압한것이다.
이로서 남월은 왕 위타(尉陀)가 건국한 이래 5세 93년만에
(bc112)망하였다.
수군대장 양복은 반우성을 격파한 공으로 장량후(將梁侯)를 제수받았다.
이후 한나라는 남월을 무너트리고 9군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3년후(bc109) 똑같은 조건으로 위만의 우거조선을 침략하였지만 1년반이 걸리는 작전끝에 점령은
하였지만 전쟁에 참가했던 장수들은 거의
참수당하고 수군장수 양복만이 많은 벌금을 내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겨우 연명하였다.
[위성으로보는 해남도] 해남도는 내륙과 사이에 좁은 해협이 있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좁은 해역은 물흐름이
급하다.따라서 무동력 소형선박으로는 건너기가 어려웠을것이다.
[위성으로 보는 장도] 바다의 폭이 거의 해남도와 유사했던 등주수도다.
지금도 물흐름이 강하여 7키로의 폭을
동력선으로 약 40여분이 걸린다.
한나라때는 현재보다 물이 낮고 흐름이 빨라 무동력선으로는 도해가 불가능하여 발해의 북쪽으로 약
1000여리를
돌아와야 했다.
조선은 이러한 조건을 해자로 이용하여 방어를 하였고,이를 험독(險瀆)이라 불렀다.
등주에서 북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사문도(현 장도) 《한서》<천문지>에서 말하는 "朝鮮在海中 越之象也"
조선은 바다안에 있는데 건너다보이는 모습이다.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 낙랑조선이 등주 북쪽에 위치한 《수경주도》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의 낙랑군이 등주북쪽 해중에 위치한 지도
*胡地域(호지역)이란 단순히 오랑캐라는 뜻이 아니라 삼신산과 불사국 또는
군자국으로서 장수인들이
사는곳을 말함.(필자 주)
胡字의 뜻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장수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임.
오랑캐 이름. 진(秦)
이전은 흉노(匈奴)만을 일컬었으나 뒤에는 새외(塞外) 민족의 총칭(總稱)이 되었음.
멀다. 장수하다. 크다. 어찌.
창날 가지. 하(夏)의 예기(禮器) 등.. (출전 다음백과)
대동강의 역사적 통설과 내륙수운
현황
이 강은 고조선시대에는 열수(洌水), 고구려시대에는 패수(浿水)·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고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후 대동강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 고종 때 문신인
최자(崔滋)는
"여러 물이 모여서 돌아 흐르므로 대동강이라 이름했다"(洌水所匯名爲 大同)고 그가 지은 시구(詩句)에서 명칭 유래를 밝히고 있다.(중략)
내륙 수운(水運)도 일찍부터 발달하여 하구에서 260㎞ 상류에 있는
덕천(德川)까지는 소형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고 평양까지는 30t급, 하구로부터 63㎞ 상류에 있는 보산포(保山浦)까지는 2,000t급, 송림까지는
4,000~5,000t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다.
현재 대동강과 그 지류에는 제방들이 축조되고 수로가 정리되었으며 수많은 중소형 발전소 등과
미림갑문
을 비롯한 각종 구조물들이 설치되었다.
대동강은 관개용수·공업용수·생활용수·수력발전·뱃길[水路]·담수어 양식 등에 종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李炯石 글 <출전:다움백과>
1866년(고종 3) 8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면서 대동강으로 올라와 해적질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태워진 사건.
1866년(고종 3) 6월 18일 미국상인 프레스턴이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톈진[天津]
에서 출발했다.
제너럴 셔먼호에는 대포 2문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과 통역자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가 타고
있었다.
7월 7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서서히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 앞에 정박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대원군
정권하에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던 터라 외국과의 교역 및 기독교
포교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 황주목사 정대식(丁大植), 역관
이용숙(李容肅) 등이 프레스턴 일행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나, 제너럴
셔먼호는 7월 13일 평양부 신장포까지 올라갔다.
이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제너럴 셔먼호로 중군 이현익(李玄益)과
서윤(西尹) 신태정(申泰鼎)
을 파견하여 즉시 퇴거할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프레스턴 일당은 물러가지 않았고, 야간에는 상륙하여 약탈까지
자행했다.
그리고 폭우로 수위가 높아진 대동강 상류까지 나아가 16일 만경대 부근에 정박했다.
조선의 이현익은 부하 박치영(朴致永)·유순원(兪淳遠)과 함께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배에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 붙잡혀 감금당했다.
이에 신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이현익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석방조건으로 쌀 1,000
석과
금·은·인삼 등을 요구했다.
19일 아침 제너럴 셔먼호는 총 등을 난사하면서 황강정 앞까지 이르고, 일행 중 5명이 작은 배에 편승하여
조탄(鳥灘)으로 올라갔다.
이 무렵 강변에는 평양군민이 운집하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이현익 송환교섭의 실패사실을 듣고
격분한 군민들은
활과 소총을 난사하고 돌을 던졌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프레스턴 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하류로 내려가기 시작하여 양각도(羊角島) 서변에
이르렀다.
이때 퇴역장교 박춘권(朴春權)이 배를 타고 제너럴 셔먼호에 돌입하여 이현익을 구출했으나 유순원과
박치영은 살해되었다.
그 동안 대동강의 수위는
줄어들어 대형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를 조용하게 퇴거시킬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박규수는 22일 철산부사
백낙연(白樂淵)을
평양중군에 임명하고 화공·포격을 명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처음에 공격을 피했다가, 점점 탄약이 떨어지고 배는 여울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측은 24일 썰물 때 작은 배에 연료를 싣고 불을 지른 다음, 그 배를 제너럴 셔먼호 쪽으로
내리띄움으로써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시켜버리고, 2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이때 제너럴 셔먼호의 승무원은 전멸되었으며, 조선측에서는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양선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에 접한 대원군은 박규수·백낙연·신태정의 품계를 올려주고
중국에 양이쇄멸(洋夷殺滅)의 사실을 알렸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황해도 및 평안도 연안에 무장선들을 파견하여 제너럴 셔먼호의 소식을 조사했으나,
큰 성과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미국은 1871년
대한포함외교정책을 수립하여 조선침략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백과사전
제너럴셔먼호
포획: 1863년 1월 29일 / 미국 정부의 구매: 1863년 3월 18일 / 취역일: 1863년 2월 4일
민간에 판매: 1865년 8월 17일 / 배수량: 614톤 / 길이: 38.81미터 (127피트 4인치) /
/선폭: 10.5미터 (34피트 6인치) / 흘수: 503센티미터 (16피트 6인치) / 추진방식: 요트(Sail)
/승무원: 150 명 무장: 4 X 8" Sg. 16 X 32 pdrs
원래 영국 군함이었는데, 1863년에 포획되었다. 남북전쟁에 북부군 군함 USS Princess Royal로 사용되
었으며, 이후 공경매로 민간에 팔려서 제너럴셔먼호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미 해군이 보유한 기록
과 다르다.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의 민간 판매 시점이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
난 지 2년 뒤인 1868년이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 대동강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제너럴셔먼호 탑승자
선장 페이지(Page, 덴마크인) . 일등 항해사 윌슨(Wilson, 미국인) .
선박 소유주 프레스턴(Preston, 미국인).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 영국인)
13명의 중국인 . 3명의 말레이인 .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통역으로 탑승하였다.)
위안부12명
통상요구와 거절 톈진(天津)에 머물던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셔먼호는 영국의 메도스(Meadows)
상사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적재하고 프레스턴을 비롯하여 윌슨(Willson),
선장 페이지(Page), 영국인 호가스(Hogarth) 및 런던 선교회 소속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Tomas)를 통역으로 삼아 19명의 말레이시아인 및 청국인을 태우고, 중국 정크선의(선장 유화태--Yu
WauTai) 인도로 음력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유화태는 1865년말 토마스가 황해지역에 왔을 때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이며 토마스에 의하면 20년 이상
조선인과 무역을 하였다.
위의 지도는 지나 사학계에서 나온 현 요녕성 지역의 장성도인데. 요녕지역의 장성이 명대장성이라는
논리가 신뢰성과 설득력이 없으니 추가 된 것이 요(遼)장성이다.
지도의 녹색선이 청(淸)대의 유조변 책성이고, 그 안쪽의 홍색 'M'자 형 장성이 요(遼)와 명(明)이 각기
축조한 장성이 어우러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앙부의 푸른선으로 표시한 장성이 지나측은 고구려 장성이라고 하나 고려장성이다.
(지도 우하단의 범례참조)
고구려를 한반도 북부로 한정시킬 때 가능한 고구려 장성이지, 재야에서 그 동안 연구된 성과로는 현 하북
성 중,북부가 지나와 고구려의 주 전장무대 였다는 것이 사실이고, 이는 절대로 고구려 장성일 수가 없음을
말한다.
고려 쇠퇴기에, 고려-원 시대 이전에 축조한 고려장성 중의 하나이다.
이 지도상의 요,명대 장성이라고 지나가 주장하는 'M'자 형 장성영역은 러시아측의 자료에서 보이는 노란
부분 즉, 명나라 영역과 똑 같다.
요녕지역의 서부를 관동, 동부지역을 요동이라는 근대 개념으로 구분할 때, 위 세 종류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유조변 약 절반 정도인 동부지역
즉, 요동지역은 말기 조선의 영토 였을 뿐만 아니라, 제일 상단 고
지도에서 조선의 서쪽 경계가 요,명대 장성의 동쪽변을 넘어간 것을 아래 장성도에서 비춰볼 수 있는데,
고지도가 1780년에
제작된 것을 상기하면 조-청간의 국경은 오히려 조-명시대 보다 조선영역이 넓혀진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고려가 강성할 때 에는 세 번째 자료상의 고려장성을 훌쩍 넘어 갔을 것이나
조-원,조-명 당시엔 밀렸다가
조-청대에 요양과 심양을 거점으로 하던 청(淸)이 천도를 하면서 조선이 약간의 서진(西進)을 한 것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조선말기의 최소 영토영역이 위 고지도에서 처럼 실제한 것이 사실이라면, 백두산과 그 경계비의 위치
는 물론, 간도(間道)의
위치가 훨씬 더 북쪽으로 제고 되어야 할것이다.
영고탑 북쪽, 흑룡강과 만나는 송화강의 하류지역인 합이빈(하얼빈) 북부일대에는 아직도
조선족 마을이
여러곳 존재함이 무엇을 말하는 지와 함께.
충강공 이징옥(李澄玉)과 오국성(五國城).
함길도 도절제사 재직시 1453년 계유정난을 맞아 수양이 소인배 무리들과 합세하여 왕권 야욕의 거사를
실행하면서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을 주살하고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 장군이 크게 장애가 되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직위를 파직하였다.
파직당한 이징옥 장군은 문종 왕께서 국변이 없는 한 경을 부르지 않겠다는 어명을 상기하며 수양의 음모로
알고 후임 박호문을 군재에 의해 처형하고 불사이군이란 충절을 명심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해 수양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기회에 여진족은 오랜 세월 동안 영토 수복권을 주장하고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부족 자치국의 존재성을
내적으로 유지하고 열망하던 영토 수복을 때를 맞춰 태양처럼 추앙하는 영도자 이징옥 장군을 황제에
추대하여 대국가 건설에 앞장서자며
오부족 대표 건주여진 추장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까가 주창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과 합의 대금황제국(大金皇帝國)을 건국, 영토를 만주 전역으로 선포하고 도읍을 오국성
(五國城)에,만주땅(혁도아랍),건주여진에 본거지를 정하고 대금제국황제(大金帝國皇帝)에 이징옥 장군을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징옥 장군은 나라 걱정을 하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게 되면 앞뒤로
적을 맞게 되는 중대한 귀로에서 난세
로 판단, 하기로 결심하고 이징옥 장군은 많은 장정들의 대열 앞에 높이 서서 엄숙하게 우렁찬 목소리로
수양이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들을 주살하고 백성을 버리니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큰 나라를 세워 사필
귀정을 맹세하자 하며 대금제국(大金帝國)대금황제(大金皇帝)에
제위하였다.
민족의 한을 품고 만주 요동 땅을 기점으로 천하통일의 야망으로 대금제국(大金帝國)건국을 선포하였다.
대민족 건설에 대금제국의 깃발을 들고 대금제국 만세, 대금제국 만세 함성의 소리는 북방천지 만주 땅
요동을 진동시킨 장엄한 대금제국의 행렬이 오국성(五國城)입성 전야에 수양의 밀지를 받은 정종, 이행검
의 흉계로 야습을
당해 백일몽으로 대금제국의 운명은 역사의 비극으로 일생과 같이 밤이슬로 막을
내렸다.
4군 6진 개척에 위명을 떨쳤으며 북방 국토 방위 수호에 일생동안 전념한 이징옥 장군의 공은 우리가
재평가 해야 할 것이며 오천 년 역사상 황제로 추대된 단 한 사람이란 인물로서 누군가 '난, 자칭 황제'라
했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
대금제국 건국은 민족 동질성 회복,민족사 재창출의 계기였으며 이념과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충강공 이징옥 장군께서는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영월 장능 단종 배식단 사우에 사육신과 더불어 충신
으로 모셔 지난 역사를 되새겨 주고 있다.
위의 글문을 인용하면 함길도(咸吉道)는 요녕성과 만주 대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이였고, 이 함길도 이북에
북방 5부족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함길도 밖이자 북방 5부족의 구심지 이고, 이징옥 장군이 황제로 추대되어 세워진 대금제국(大金
帝國)의 수도였던 오국성(五國城)은 어디 쯤 위치하고 있을까.
18c 초,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는 그 오국성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는데, 바로 흑룡강 북안 밖이다.
다시 말하면 흑룡강 남안 까지가 이징옥 장군이 도절제사로 있던 함길도의 권역이였으며,
흑룡강 넘어 이북에 북방 5부족들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오국성의 위치가 어떻게 왜곡 되었나를 보여 주는 고지도가 있다.
1785년 일본제작, 조선팔도도의 일부.
위의 고지도는 일본에서 天明 5 年(1785년)에 제작된 "조선팔도도"라는 이름의 지도로
이 지도에는 오국성이 압록강 상류, 현재의 백두산 아래에 있는것으로 왜곡하여 그렸다.
뿐만 아니라 여진의 위치도
흑룡강 이북에서 현재의 두만강 북안으로 왜곡하여 그리고 있다.
1806년 일본제작,朝鮮世表幷全圖 의 일부.
*이징옥(李澄玉)
본관(本貫)이 인천(仁川)이며 호는 원봉(圓峰)시호는 충강(忠剛: 正祖15)으로써1399년에 태어나 1453년
서거했다. 조부 이조판서 인천군 이만영( 李萬英)의 자 전생(全生)세종 때 양산군봉 양산부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형 석(澄石)아우 징규(澄珪)삼형제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무용이 특출하였다
이징옥은 13세 때 서당에서 돌아오던 중 오십여 명의 도적 떼를 만나 삼형제 합세하여 모두 사로 잡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후 도적떼가 없어 마을이 평온하였다 한다.
14세 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의 성장 과정에서 놀라운 일들이 많아 걱정하시면서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
있는 멧돼지를 보고 싶다 하시자 징석과 징옥은 급히 산으로 올라가 높은 산 깊은 계곡을 헤매면서 형 징석
은 그 날 멧돼지를 잡아 살아있는 놈을 끌고 올 수 없어 결국 죽여서 메고 돌아왔다.
징옥은 3일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행여나 호사나 당했는지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태산같이 걱정을
하던 차에 징옥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효심으로 큰 송아지만한 멧돼지를 사로잡아 칡넝쿨로
다리를 묶은 채 어깨에 메고 집 앞 마당에 내려 놓았다. 이를 본 어머니는 너는 장래 대장군이 될 것이라
하시자 어머니 저는 장차 대황제가 되겠습니다라는 그 시대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들의 대단한 포부를
들었다.
징옥은16세 때 호사나 호환으로 민폐가 극심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속수무책 이었다.
호사나 호환으로 인한 민폐를 막기 위해 김해 부사 정종을 찾아 청을 드렸으나 시골 소년이라며 문전박대
하자 화가 난 징옥은 한걸음에 높은 산에 올라 대호를 잡아 관가에 들어서니 정종은 기겁을 한 채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하였다.
징옥은 말하기를 호랑이를 잡아 민폐를 돌보지 않는 부사는 호랑이 밥이 되어
마땅하다며 굴복시켰다. 그 날 날이 저문 귀가길에 산 아랫마을에서 여인의 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 찾아가
보니 여인의 남편이 호식당했다는 말에 대밭 속으로 달려가 포식을 하고 있는 대호를 단숨에 잡아 여인의
원수를 갚고 가죽을 팔아 장례를 잘 치르게 하였다. 사서 야사에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삼형제 이징석,이징옥,이징규는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소년 절제사 이징옥
이징옥은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태종16년(1416)에 부거책장(수비대장)역임,18세에 무과 친시, 별시,
장원급제하여 영북진 절제사,소년 절제사가 되었다. 소년 절제사 이징옥은 북방 천하에 무예를 과시하는
한편 그 후 경원 절제사,경원 병마절제사, 회령 북진절제사,경상도 도절제사,평안도 도절제사,함길도 도절
제사,지중추원사,판중추원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태종16년에서 단종에 이르기까지 사군 육진 개척의 국토 방위의 임무에 전념하였다.
(세종실록)세종대왕께서는 삼장수를 낳아주신 부 전생에게 어주를 하사하며 삼형제에게 주연을 베풀어
주면서 경들이 남북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었으니 국태민안이라 또한 임금이 나랏일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하시면서 만대에 그 공을 잊지 않으리라 하시었다.
사군 육진 개척의 공을 치하하다.
(문종실록)문종2년 사군 육진 개척에 용감히 위명을 떨친 공과 청렴결백의 숭고한 정신을 함양하고자 왕의
특령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당대
무신 제일의 從一品의 품계를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이징옥은 여진족들이 고구려 후예 영토와 지도자를 잃고 명나라에 핍박 받고 살아가는 동족임을 인식하고
여진족과 친선 수렵 대회를 자주 개최하며 호랑이를 잡아 무릎을 꿇게 하여 무위를 과시하였다.
심지어 여진족들은 이징옥 장군이 나타나면 십 리 밖에서 하마하여 무릎을 꿇고 이사 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군 육진 개척의 위업은 만주 땅 요동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여진족을 무위와 덕과 지혜로 승복
시켰다. 이징옥 장군의 위풍과 무용에 감탄한 여진족은 신의 존재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참조:조선왕조실록, 사서, 논문, 야사, 비사 외 문헌. 황의돈 박사, 김성준 교수, 박종화, 김영곤,방기환,
이상옥, 유은영, 누르하치 전기 작가(중국)외 자료.
(이상 상기글의 출처 ;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eid=pa3tZq/gGl
3PnXp3FR/0K54edWIRCHI2&qb=5+nP0ODy)
만주(滿州)의 황제릉(皇帝陵).
땅에 묻혀있던 광개토태왕비가 처음 발견된것은 1880년경 일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후, 1882년 첫 탁본이 떠져서 이듬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일본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5년 동안 내로라
하는 일본내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연구케하여 변조작 작업을 진행한다.
이렇게 태왕비가 일제에 의해 변조작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접어두고,
이 비의 발견으로 현재와 같이 장군총,또는 장수왕릉이라고 부르게 된것인데
이 동북대륙 최고, 최대의 능은 비를 발견하기
이전엔 뭐라고 불렀을까?
흔히, 실록등에서도 이 능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더우기 청의 봉금지역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에
비가 발견되기 전 까지는 누구의 무덤인지 조차 몰랐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능의 존재가 18c-19c의 조선이 관찬한 여러
고지도에 "황제묘" "황제릉(皇帝陵)"이라고 표기했
었던 사실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황제릉이라 표기한 가장 이른시기는 1706년 관찬한
'요계관방도'에서 보인다.
18c 전기 경에 제작된 해동지도집의 평안도 강계군 지도와 조선여진분계도에도 표기되어 있고( 이점은 일전
에 게시한 서양고지도상의 평안도 경계가 현재보다 훨씬 북쪽으로 그려진것과 일치한다.)
이후 19c 초엽까지 편찬된
여지도,광여도,지승등의 여러 지도집에 각기 수록된 '조선여진분계도'에도 표기
되어 있다.
이런 여러 표기들은 '皇帝陵'과 함께 '皇帝坪'을
표기하고 있는데,
이 황제평을 국내성터로 보는 서길수 교수의 견해에는 동의 하지 않는다.
황제평이란 일전 솟대님이 보신데로 황제릉을
관리하는 집단이나 지역민에 내려진 경작지역을 말하는 것
이라 봄이 옳을 것이다.
19c 전기 편찬된 '광여도'집의 조선여진양국경계도 일부 (규장각 소장)
전체보기 http://blog.daum.net/sabul358/13708581
과거 조선의 입장에서 황제라는 칭호는 함부로 갖다 붙힐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조선말의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와
더불어 조선조의 2대국치이며 삼전도비로 대표되는 병자국치(병자호란,
1639년)를 겪고 난 조선이 관에서 편찬한 지도집에 "황제릉"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은 만주왕조인 청(淸)도
그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이 된다.
비록 조선이 누구의 능인지도 몰랐고 중원까지를 장악한 청왕조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그와같이 표기 했다고
하더라도 만주왕조인 청이 옛 부터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든 규모의 측면에 의한 것이든 "황제릉"이라는 것를
인정했기에 여러 지도상에도 표기될 수 있었던 것이고,
현재 장수왕릉이라 부르는 대총은 적어도 조-청 시대엔 '황제릉'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청이 이 대총을 황제급의 능이라 보고 황제릉이라 칭했다면, 동북대륙에서 그들 자신이 황제라
부를 만한 존재가 누구일까
정도는 생각해 봤을 것이다 라는 결론에 이른다.
(향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