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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관점에서 보는 잠재된 한국문화의 양태들
들어가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적'이라는 개념을 잡기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국적 개념이란 인류 보편성을 띤 시공간적 사건들의 집합 중에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로 한국적이라 특정 할 수 있는것들을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와 언어소들은 개념을 만들고 관념이 발생 할 수 있는 단위가 되므로 사실 한국어의
어원이나 어휘 들을 추적해 보아도 어느정도 '한국적'이라는 개념을 잡을 수 있으나 이 작업은 너무
방대하고 안어학적 전문분야여서 제외시키고 가급적 일반적인 분야의 양태들을 나열합니다.
그동안 모든 문화 분야에서 한국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왔던 것들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그 인근
만을 대상으로 하여 국소적으로 축소된 공간 관념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여지고 기술 되어왔습니다.
또한 시간적 관계인 역사가 한때 주권을 잃는 시대를 거치면서 침략자들의 생각대로 너무나 축소 변경
왜곡되어 왔으며, 이에 부화뇌동하여 온 자국인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바로 되질 못한체 유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나 세계적 시각에서 한국적이라는 것이 중국적이거나 일본적이거나 심지어 그들
나라들 변방에 처한 약소적 존재로 인식하거나 인식 되어져 마치 타자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종속 되는 한계 범위에 머물러 도무지 한나라 문화의 독특한 특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편집된 정보들을 수없이 접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하나씩 이라도 개선하여 바로선 한국의 문화의식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의
문화 양태들인 개념들이라 할 수 있는 나무의 잎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고 간추려 그것
들을 하나의 가지와 몸체와 뿌리인 관념에 도달하면 이를 새롭게 정리하여 온전한 문화 나무가 되도록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그리고 잠재한 한국문화란 기록되거나 유산되는 것들의 모태를 이루는 정신문화의 뿌리를 말하는 것
으로 과거로부터 유전되었고 후천적인 삶의 환경에서 시공간적으로 반복하여 획득 하여져 여타의 문화
적 양태에 비하여 한국적문화의식이라 할 수 있는 특징이 도두라진 것으로, 보편적으로 한국인의 무의식에 잠재하여 있어 자연스레 의식되거나 직관 되는 현상, 표출, 형성 되여진 것이며, 여러가지 특화되어진
양태들을 말합니다.
의사전달
기원전 인류는 여러 집단으로 지구촌 이라는 자연에 처절한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어 개인이나 집단
간의 의사전달 수단은 최적화 된 신체언어와 소리 등 여타의 수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적화된 의사전달 수단 중 신체언어나 소리들은 전승되어 오는 것으로 민속놀이나 축제, 제의, 민담,
유물, 유적 등에서 보여지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그 민족 특유의 신체동작이나 표정이나 소리 음성
으로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의사전달 수단에서 다른 종족들과 비교해 볼 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양하고 폭 깊은 수단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사전달이 주로 말과 글이라는 의사전달체계에 의존하는 현대의 고정된 의미체계를 넘어 초월
적인 정신 의식이나 무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잠재된 몸짓, 소리, 등 의사전달 문화는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획일적이거나 단편적이지 않고 다양하며 깊이 삭혀진 결과로서 다른 여러 민족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토록 하는 요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다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인들의 역사와 기질이 유목적이고 정주하는 복합적인 삶의 요소와 일치합니다.
또한 유목 정착시 유라시아의 기나긴 이동의 여정에서 당시마다 문화를 선도하는 역활을 하고 민족
기질상 호혜적인 교류를 끊임없이 하여온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산이 깊다' 라는 표현과 같이 형용을 하거나 부사적 표현의 뉘앙스는 다른 어느 언어에서도 나타
나지 않는 독특한 한국 언어 관습입니다.
또 신체동작에 있어 몸체와 사지 모두를 활용하는 경우에도 타 민족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수천여년간 지구촌 한 냉 온 지역 곳곳 모두의 경험치는 한국 문화를 다양하고 곰삭은 넓이와
깊이로 유전자에 각인 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명
인류의 문명은 정착농경 내지 도시화에서 발생하였다는 정주문화발생론에만 기인하는것이 아니라
정착과 이동 순환이라는 측면을 모두 아우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문명 발생의 우선순위는 당시의 상황을 유추컨대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이동순환하는 집단
이나 정주지 간 소통하는 집단이 정주하는 집단 보다는 정보 획득 측면에서 문명 발생에 더 많이 기여
하였을 것입니다.
뼈로 윷놀이 기구를 만들어 썻다. 훗날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 된다.) 그리고 맘모스를 따라 이동과 정주를 하는 집단들도 존재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냥하던 고래나 맘모수의 크기나 무리져 이동하던 개체수를 보아 추산하면 수백에서 수천명의 인간들을 필요로하는 사냥대상으로 부족인들의 규모나 인구수는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이동에 필요한 수많은 지식들은 정착에 필요한 지식과 비교해 보아도 적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는 거석문화 집단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거석은 크기나 무게에 따른 이동과 구축에는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며 지식 이나 공법 등 관련되는 문화가 존재하였을 것인데 특히 구축 되여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채굴장소 사이 이동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운송수단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거석문화는 기원전 4,000 여년전 세계 해안 곳곳이 산재하는데 유럽 영국의 스톤헨지로부터 한반도 까지 유라시아 해안을 따라 세워진 이 거석군의 70여%가 한반도 부근에 산재하여 있어 한반도 부근이 거석문화의 발원지임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다양한 경로로 전파되고 이동합니다. 선사시대의 대표적 유물군은 세석기, 빗살무늬토기, 거석, 채도 토기로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1만여년 전부터 대륙문화의 산물인 세석기,빗살무늬토기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를 비스듬이 가로지르는 유물군입니다. 이 유물군을 축으로 하여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문화와 문명이 파급 된 것이며 후에 여러 문화 문명군 들이 피어나고 도시들이 만들어 집니다. 이러한 문화는 유목 집단종족의 이동과 겹쳐져 있으며, 거석문화군, 세석기, 빗살무늬토기, 중 두가지 이상의 유물군이 겹쳐지는 곳이 아시아 근동지역으로 한반도와 인근내륙지역이며, 이지역에서 정주 하거나 이동하여 온 자취들이 유물 유적과 함께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어 두 말할 필요 없이 그러한 문화 문명의 주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발 이러한 문명의 축적은 인류의 지식이 서서히 쌓여 지능이 높아진것이 아니라 유전학적으로 지구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지능의 폭발적 증가에 기인 할 수 있었을 것입 니다. 또한 현생인류의 등장 자체가 종의 입장에선 하나의 창발적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상 중간 고리에 해당하는 인류종을 발견하질 못하고 있는 인류생물학적 현실은 모든 것들을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어 창발에 대하여 확실히 주장할수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전자의 돌연변이 도 창발과 유사하게 종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별반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일부는 뛰어난 것으로 인류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쉬운예로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인류의 위대한 선생들인 성인들이 나타난 것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은 보통 사람들 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인류사에 기여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종교 혹은 지혜 로운 선지자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대변혁은 수차례 있어 왔으며 인류 또한 거기에 따라 창발적 혹은 돌연변이적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현생인류가 나타나기 전 유사인류 종들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일부 도구를 사용 할 수 있었을것 으로 보이고, 그들과 현생인류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그들은 서로간 상대가 종이 다른 짐승으로 규정하고 사냥하였으며 제물로 사용되고 식인하였을 것이며, 일부는 노예화 하거나 순장 되었을 것입니다. 현생인류들과 유사종족의 생존 전략 중에는 종족 번성이 일차적인 전략일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종족 번성을 위한 성을 숭배하였고 신성시 하였으며 집단을 이끄는 권력의 상징과도 같았을 것 입니다. 성에 대한 고대 한국인들의 유물 중에는 남여 성기를 상징적으로 남긴다 든지 기호로 남아있는 성 관련 유물들은 한반도와 그 인근에 까지 대단히 많이 남아 있었고 19세기 까지 유물, 유습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를 미루워 보아도 고대 성숭배는 뛰어난 우성 종족번성과 선택되고 길러지는 지도자 선발로 유사인류 종족들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두는 전략으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도의 유명한 성 유적지를 보아도 당시 성에 대한 의식을 였볼 수 있습니다. 개인과 집단 일반적으로 인류 최초의 미술은 암각화나 토기 석기로 남겨진 것으로 이러한 유물 유적은 인간 집단 주의나 집단 제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시기는 개인적인 존재 보다는 집단적 존재로 철저한 이타와 객관화된 삶이 모두였으며,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개적으로 버려진 존재는 자연세계의 도태를 의미합니다. 하나의 집단은 종족간 나름의 신앙과 종족번성이 최고의 가치로 갖지만 둘 이상의 집단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증폭하여 서로간 결속을 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덕교로 불리우는 종교를 갖춘 신정일치 체제인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하는 단군 조선의 출현입니다. 이렇게 성과 신앙은 고대사회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또 한국인들은 소유적 개념인 나, 나의 것, 보다는 존재 공동적 개념인 우리, 우리의 것으로 말합니다. 이를 보면 고대 한국 구성인들의 고대의 삶을 유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한국사회는 왕조나 사회체제를 달리하거나 외래 종교의 유입으로 사회추동의 원리를 달리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적인 요인 보다는 과거로 부터의 신앙적인 인습이 지금까지 거의 변화 없이 무의식적 관념으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로부터 개인, 가족, 친인척, 사회, 국가, 세계적이라는 분류 체계에서 부분적인 가치나 전체적인 가치가 개인선호에 비해 우선 선택되어 진다는 선택 결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체를 위하는 이타적인 사회성은 집단의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천여년 간에 형성된 집단의식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언어의 사용이나 그 빈도에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한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현상학에서 말하는 존재적 사유를 합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소유적 사유나 나에 대한 주체성이 다른 나라 사람들 보다 부족합니다. 한국인들은 나의 것 이란 말보다 우리의 것이란 말을 씁니다. 내 재산이 아니라 우리 집 재산이라 말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단위가 클수록 사용하는 빈도가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드물게 나타날 정도로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존재적 사유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에서는 리더인 아버지가 지역에서는 지역대표가 국가에선 대통령이 중요 관심 대상이 됩니다. 특히 유목적 성격이 짙은 집단일수록 수장에 대한 무한 신뢰나 요구가 많습니다. 가령 도덕적 윤리의식은 물론이고 천재지변이 발생하여도 수장의 책임으로 돌려져 수장이 교체되거나 무리에서 축출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집단에 대한 무한책임을 말합니다. 또한 개인 간 관계나 개인 집단과의 관계는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관계 맺기를 합니다. 이것은 자신과 세계 혹은 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이러한 상태를 최고의 가치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슨한 관계 맺기와는 다르게 다른 집단들은 이것이 매우 구체적이고 계약적이며 호혜적 이여서 불신을 전제로 한 이성적 계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다른 집단 인들은 이익을 전제하는 강력한 관계들이 단합된 집단의식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한국인들의 집단은 이해관계가 배제된 느슨한 집단의식에 단결력 저하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슨한 집단의식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바른 가치관 추구라는 범 인륜적인 명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종의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지구촌 최고의 가치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기원전 삼천여년에 단군조선의 건국을 통상 국가의 시초로 보고 있으며, 이 단군조선의 건국이야말로 북방의 남성적이고 천손강림의 유목적 요소와 남방의 여성적이며 농경 해양적 요소의 결합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대 사건입니다. 이러한 세상 두 축의 결합은 육 세기 중반 신라의 삼국통일로 그 전까지의 북방문화 우위가 남방문화 우위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에게는 강력한 가부장제도나 남성우위 의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라 천년의 영향 으로 인해 모계적 가부장 역활이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며 어머니의 자식지배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 결합의 상징은 단군조선과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에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 오봉도 입니다. 궁중에서는 이를 변풍으로 제작하여 왕이 거하는 곳마다 마다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일월 오봉도는 육지와 해양, 태양과 달, 소나무를 배치한 그림으로 국가 성립의 이념이나 정통성을 여실 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대 중국에서는 용 그림을 배치한 것이나 서양이나 일본이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배치하는 것과 비교 해 보아도 단연 그 상징성의 독특함으로 육지와 해양이라는 것을 단박에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월 오봉도와 유사한 병풍을 사용한 왕조로는 18세기에 강제 일본화 된 오끼나와의 옛 중산국 시절의 유구국 왕조로, 당시만 하여도 조선의 신하국 이였습니다. 그 유구국의 마지막 왕손들과 신하들은 조선으로 망명 귀부하여 지금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남아 있습 니다. 또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해양문화가 얼마나 왕성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한반도와 미국 LA 해안까지의 해안은 세계공인 학명 '귀신고래'의 회유지인데, 이를 따라 사냥하였던 집단이 경유한 곳에서 고래 뼈로 만든 '윷가치'와 거주지로 사용하였던 유적지에 ' 구들'이 발견되었던 구체적 정황이 있습니다. 또 육지와 해양 두 문화의 결합 이후 한반도에서나 아시아 내륙의 해안은 이러한 해양문화가 꽃피웠는데, 이를 주도하였던 세력은 한국 선조 집단입니다. 그들은 막강한 해양세력으로 세계 어디라도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선시대 이전까지 해양문화의 전통은 중국 명나라 초기부터 자국 해안에 산재한 해양집단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거나 추방하고 자국의 해양문화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일종의 해양 세력화에 대한 교육 효과라 할까 중국은 명조에서부터 늦게 해양에 눈을 돌린 것입니다. 결과는 한국 내에서 해양과 관련되는 집단은 뱃놈이라 폄하되고, 국가에서 집행하는 해양관련 일들은 극소화 되었으며, 명나라는 아프리카 까지 항해하는 '정화함대'가 운영 됩니다. 동시에 조선에게는 해양문화 말살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게 압박하여 조선의 국력은 점차 피폐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양을 정복하는 국가가 세계의 강국이라는 말이 우리 역사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한편 조형세계에선 세상을 구성하는 하늘과 땅 두 축의 결합이 획기적인 상징성을 가져다줍니다. 바로 원,방,각, 이라는 셋으로 남성적이고 하늘모양인 원의 형상과 여성적이며 해양이고 대지인 사각 형상과 둘의 결합으로 생긴 자식인 삼각형 입니다. 삼각형은 젊은 사람의 정기가 위로 솟구치는 동적인 형상이며, 주거지나 가마 등 신이 거하는 곳에는 항상 이러한 형상을 지붕구조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후에 이 불문율은 동양 전체의 집들의 지붕들이나 가마 등이 하나같이 삼각형 구조로 만들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양의 건축물들의 지붕은 대다수 삼각형으로 이루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형상의 출발지는 두말 할 필요 없이 과거 한국문화를 만든 신정체제 집단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불문율 처럼 지금까지 동양 전체에 주거 혹은 구조물 구축에 영향을 주었으며, 유럽도 예외 없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형상은 신들의 관모로 사용한 것이 집단에 까지 퍼져 종족구성원 거의 모두가 착용하는 모자의 나라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이나 신속들의 문화가 집단 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이되기에 이릅니다. 과거 한국인들의 모자 애용은 방한이나 미용 여타의 목적도 있겠지만 그보다 정신 안정에 목적이 있었 습니다. 머리와 위 하늘 사이에 모자가 무었을 차단하기에 땅의 삶(살림)에 충실하라는 것으로 봅니다. 쉬운 예로 'ㅅ'은 산다 등 위로 솟구치는 형상이지만 'ㅈ'은 'ㅅ' 위에 모자처럼 'ㅡ'을 언져 아래로 눌러 죽다 라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원,방,각 형은 기하적인 것들로 서구에서는 독립된 학으로 발전하지만 우리에게는 훈민정음의 자음으로 또 하늘과 땅의 측지나 풍수지리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문자의 형상에 대하여는 쓸 수 있는 것들과 쓸 수 없어 터부시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양의 문자 중 고대 한국문자라 할 수 있는 가림토에서나 고대 한국에서 만든 초기 한자에선 'ㅇ'이 있었으나 한자를 자신들의 문자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중국 제후국들에선 'ㅇ'를 사용하질 못하였 는데 이는 고대 신정을 담당하던 한국에서 사용치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천' 즉 하늘이나 천자국의 허락 없이는 하늘을 상징하는 'ㅇ'를 사용 할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이처럼 신정시대로부터 신앙은 무의식 깊숙히 한국인들의 정신문화 속에 폭넓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계는 곧 자연이자 신이며 외부이자 타자입니다. 그것은 문화 분화 전 인문과 자연과학적 지식이나 무의식 속에 잠재 태로서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정시대의 모든 문화나 문명들은 삶의 구석구석 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후엔 불문율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서양의 인문과학정신이 세계 혹은 신과는 다르게 '인간 자체로서 고유성'을 가진다는 실체의식과는 다르게 한국인들은 세계 혹은 신에 '접촉'하는 집단 인들로 말하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양권인 중국은 '동화'하는 집단으로, 일본은 '음미'하는 집단으로 말하여지므로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같은 아시아 지역 국가 인들의 동화나 음미 보다는 오히려 유럽지역 인들인 서양과의 유사 성이 있다 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세계나 신이 되려거나(초월) 화하여 음미(응축)하려는 것에 비하여 세계나 신과는 별개로 존재 하는 사람이 그것을 접촉하는 것이 더 가깝다는 말입니다. 또한 서양의 편협한 인간을 위주로 하는 사유태도 보다는 신계나 인간계 모두를 아우르고 열리고 원만한 사유태도를 갖는 한국인들은 과거로부터 다양성 있는 사유 성향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개인과 집단 간 관계는 전해지는 금문으로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로 고운 선생의 한자로 된 것의 원형으로 보고 있으며, 평양 법수교 아래 다리에 새겨진 명문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진으로 전해집니다. 해석은 '구길수'선생이 하셨습니다. "하늘 (정신)이 물질(육신)에 둘리어져 사내를 세우고 겨집을 세워서 땅 위에 세웠으니 어미(번성) 되어 하라! 일구어나가니(씨족을 일구는 사내) 열매(처자식의 집) 이 되어 (아홉)압 (개인완성, 씨족완성, 씨족 울타리) 이 되거든 열고 나가라." 위 해설은 집단 인들의 일종의 삶의 지침서로 사내와 여자는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두고 열심히 살림을 살고 그것이 차서 충분하면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 교류하고 자유롭게 살아라 라는 내용으로서 이러한 심리는 현재 한국인들의 삶에서도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국 내에서나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고, 어디에 종속하는 것은 기피합니다. 집단에 속하는 것은 본 태생적인 것이 자연스러우나 다른 종족 원들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 가능하였을 것이며, 집단을 반하는 것은 그 집단내의 기억에서 잊도록 하거나 퇴출하는 것으로 혹독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령 신라에서는 연중 신격화된 조상 제의에 삼사 중에 '운사'는 제외하고 '우사'와 '풍백'에게만 제사하였 습니다. 그것은 운사인 '헌원'이 집단을 배신하고 '치우천왕'과 탁록에서 전쟁을 치루는데 연유한다 합니다. 인류의 종족 유추하면 현생인류가 나타나고서도 여러 종의 인류가 지구상에 상존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종족간 치열한 생존경쟁을 거쳐 현생인류만의 세계가 된것으로 봅니다. 현생인류는 유사인류군에 비하여 신체적 열등을 우수한 두뇌나 조직 결속력 우위 도구의 발달이 경쟁 우위에 있을 수 있었을으나 무었보다도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집단의식과 성을 집단 결집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란 사실이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대부락이나 국가 단계의 거대 인구 집단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필요 조건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국의 초기 준국가 단위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은 초기 환인이나 환웅으로 대표되는 거대 종족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전 대륙으로 이동과 정주를 순환적으로 반복하면서 점차 세력을 넓혔는데 그 이유중 하나가 일종의 인종 정리일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당시에도 남아 있었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유사인류들과의 관계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보는데 당시로는 현생인류 구성원들에게는 삶에 직접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세력군들과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친 세력군들은 곳곳에 거대 피라 밋을 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용도를 확정지울 수는 없는 세계에 산재한 거대 피라밋들은 필자의 조사로는 우상화 된 종족 지도자들의 생사와 관련하는데 특히 생명 탄생과 관련된 성스러운 의식을 가진 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북서쪽 만주 집안에 산재하는 피라밋군을 둘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반출된 성 관련 기호문자는 현대의 의료수준에서나 생각 할 수 있는 유사 인공수정을 상징하는 정액, 췌치용기, 인간의 신체 등의 모양 등의 그림문자로 당시 성에 관련한 지식의 수준이나 종교화한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자류의 유물은 현재 미국 박물관 지하에 관람불가로 보관되어 있다 합니다. 또한 피라밋은 아니지만 부락 도시시설 외곽에 세워졌던 거대한 방어벽과 제의 시설들은 아메리카대륙 곧곧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워낙 방대하고 그 잔제만 구릉형식으로 남아 있어서 지상에서는 관측이 불가능하고 항공편으로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합니다. 이러한 시설들을 보면 당시에도 현대 도시설비에는 미치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규모나 인구수를 갖춘것 같습니다. 또하나의 사례는 기록물로서 고대 산해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시에 웅상이라는 나무에서 씨놀음(씨름)을 통하여 최고의 남성에 뽑힌 지도자의 씨를 받아 지도자급의 인재로 키워 여러 부족의 수장으로 삼았는데 팔대에 걸쳐 이루워졌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키워진 인물들은 아시아 고대의 삼황이나 제왕에 해당한다라는 것으로 당시 모계사회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합니다. 잘 알다시피 한국 고대 삼국을 통일한바 있는 신라의 왕통은 철저히 모계 우선 원칙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현생인류의 기원설은 여러 가설들이 있으며, 심지어 여러곳에 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필자는 현생 인류의 바이칼 호수 기원설을 말하고자 합니다. 한국인들의 애초 선조들의 집단이 빙하기에 얼지 않았던 바이칼호수 부근 분지에서 부락을 이루며 살아 오다가 남,서부의 빙하 일부가 녹아내린 지역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고, 일정기간 이곳에 정착 하면서 서서히 북방을 가로지르는 지대로 동진하여 동북아시아로 진입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 다른 무리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북유럽지역 까지 진출하고, 또다른 무리는 남방으로 진출하여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로 혹은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유적과 유물인 고인돌과 빛살무늬토기 출토 지역이 겹치고 있고, 인도 등 동남아시아인들과 한국인들의 언어와 관습에서 그 유사성을 꼽을 수 있어서 입니다. 북유럽 서편에서 아메리카 북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자취는 광범위한데 유독 아프리카 대륙 중남 부는 이러한 문화자취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기원설이나 문명의 전파를 아시아 북방에 기원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몇 년전 미국 하버드대 박물관장인 스티븐 르블랑 박사가 경기도 문화재단에 기원전후의 미국 모골론 문화 산물인 밈브레스 토기45점을 기증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하여 미국 원주민 문화를 꽃피운 주 종족이 한국선주 종족임을 증명한 바도 있습니다. 신앙과 성 또 자연에서부터 태어나 살아가고 있으나 자연은 자연의 법칙하에 몸담고 살아가는 인류의 의사와는 별개로 변환 되고 있음으로 인류에게서 신앙이란 자연과 함께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각 개인 이나 종족간 유사한 경험치들이 자연신앙으로 만들어지거나 합쳐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형성은 계층적인 구조로 하나의 집단에서 상부층을 형성하고 종족간에서도 우위에 있는 종족의 신앙이 상위에 위치하여 복합되거나 습합되는 양상으로 신앙에서의 연생이 이루어 집니다. 자연을 대상으로 신앙한다 하더라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범우주적인 단일적인 하늘을 상징하는 신앙이 되었으나 고대에는 하늘과 해양 대지나 산 심지어 나무나 바위에 이르기 까지 범신적 신앙이였 습니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자연이나 그 작용하는 원리를 몰라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선행되어 숭고한 믿음으로 신앙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계사회에서의 사회가 부계사회에서의 사회로 바뀌면서 우선시 되는 신앙도 달라지게 되는데 고대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하늘과 대륙 그리고 강이나 해양가의 신앙이 범신적으로 다양하게 신앙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구전 혹은 기록에 나타나는 고조선 생성시에는 범세계 신앙을 유추할 수 있는 용어들이 많이 나타납 니다. 가령 '신단수' 란 용어에는 당시를 전후하여 식물숭배 신앙이, '신시'란 용어에서는 지명숭배 신앙이, '웅녀' 라는 용어 에서는 동물 숭배 신앙이, 범세계적으로 신앙 되었던 것을 본다면 세상의 모든 신앙을 망라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신앙을 공유되었거나 확산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고조선의 탄생 주역인 환웅 세력과 웅녀 세력은 하늘과 대지, 해양세력으로 아울러 상징되는데 범세계적으로도 신앙의 흡습 융합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에 산재한 종족들의 부계우위가 진행됨에 따라 종족의 수가 적은 해양신앙 쪽이나 대지 신앙쪽은 열성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역사 중기에 이르르면 남성 우위의 북방 고구려 위주의 통합이 아니라 남방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해양과 대지의 신앙이 주요 신앙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신화나 설화에는 사건 전개의 구조에서 원줄기와 곁가지들이 존재 하게합니다. 그것은 식물구조를 이루고 있어 마치 리좀과 같은데, 인류의 이동경로나 종족들의 전파경로 등을 유추 할 수 있는 인류의 대표적인 무형문화 유산입니다. 특히 종족 집단의 이동은 종족의 소멸을 담보하기 때문에 미리 체험된 기억과 지식 그리고 신앙으로 무장한 리더쉽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과의 관계가 개인이나 종족의 위계가 결정됩니다. 그것은 신앙하는 신들의 위계에 따라 신앙하는 종족이 다르고 그 위계가 직계와 방계,형제 등 우리의 가족관계와도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신과의 관계에서 친밀성에 따라 자생 신앙 종족과 이전,전파된 신앙종족이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근원적으로 절대지위를 상징 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이데아'란 용어는 다른 종족의 신이 이전된 아주 먼거리감의 표현이며, 다음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신의 이야기나 형상이 무섭거나 잔인 하다면 신과의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의 존재를 부정할수록 곁가지에 해당하는 종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표현하여 말할 때 친밀하게 말한다면 그 종족은 핵심적인 종족이며 원가지에 해당 할 것이며, 이상적이거나 멀게 말한다면 가지나 줄기 잎에 해당하였던 종족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대표하는 유물은 '탈'이나 모자 입니다. 탈을 사용한 역사는 유구한데, 대체적으로 제의에 사용하다가 종족을 상징하기도 하였고 변신욕구나 숨김 등으로 쓰여 왔으며, 모자는 신의 지위에 있었던 지도급 사람들로부터 신분이나 종족 상징 또는 방한 방풍 사냥의 용도 등 다양하게 사용 되었습니다. 고대 한국인들은 이 탈이나 모자를 의복 만큼이나 줄곳 사용하여 왔습니다. 19세기 후반기 모자사용은 남녀노소 모두 사용하여 왔고, 축제가 성행하였던 옛날에는 탈 또한 자주 사용하였던 일종의 신앙 대체물이였습니다. 한국인의 신앙의 출발일 수 있는 신화의 시작은 '있음'에서 시작하는 '무엇 무엇이 있다'로 부터이고, 후에 없음이 있게 됩니다. 가령 '하늘나라가 있었고 그 아들인 환웅이 있었다.' 이고, 도가에서나 불가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무었이 나왔다 라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점입니다. 창세신화나 홍수신화와 같이 다른 나라의 신화와 유사한 신화들도 전승 되고는 있지만 단군신화가 탄생하는 대표적인 존재의 유무는 하늘나라가 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없음'이나 '혼돈'에서 출발하는 신화와는 반대적 속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없음으로 인한 두려움이나 소외의식 혹은 허무주의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에서 출발하는 숭고의식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신화의 시작은 신의 존재가 있고서 이고 신의 가계로부터 신속이나 직계 집단임을 암시합니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신이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왜냐하면 가족관계에서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가족이 직계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과는 고대에 직계 형제 관계인 터키의 고대유적 궐특근비가 고대 튀르크 문자로 새겨진 거대 비석이 비교적 최근 중앙아시아 오르콘 강 유역발견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내용이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단군에 관한 내용이였습니다. 판독 된 내용은 '이인화' 선생의 저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천삼백여 년 전에 터키 왕조에서 글을짖고 비석에 새긴 글 내용은 마치 어버이가 자식들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긴 문장 말미에 ... " 너희는 창공처럼 걸림이 없고 누구에게나 구속당하지 않고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라 "...입니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단군에 대한 글로서 단군과 단군조선이 막연한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서 신의 직계이자 신속집단의 종족인 천손 즉 신의 자식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한국의 샤먼문화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샤먼은 본래 신을 섬기던 신속으로 신계와 지상을 중계하며 신과 접하고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일명 신병이라는 육체적 체험으로 신에게 선택되어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체험 되어 지며, 그들 중 대부분은 단군이나 웅녀(여성 신)의 신을 섬기며 현세적입니다. 이 신앙적인 소양은 오래된 것으로 현재에도 한국인들에게는 유입된 다른 종교와 함께 신앙 되어 집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에서 신체험은 신에게 접촉하는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며, 그들은 어떠한 환경에 의하여 쉽게 접신에 이른다 합니다. 신체험은 단선율과 홀수 단위의 음계를 사용하는 음악을 동반하는 환경에서 심장과 호흡이상 신체 떨림 등의 현상과 현상계와는 다른 정신적 체험을 한다고 하며, 이러한 생명현상은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뇌의 변연계와 연결되어 각종 심리적 상황에 이르게 하는데, 신을 느낀다는 것은 실제로 소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실임을 현대 신경과학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변연계 내 화학작용이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중추신경계 등 외부정보가 뇌와 차단될 때 황홀경이나 범 우주적인 경지를 느낄 수 있음을 실험으로 입증하였다 합니다. 한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자국 내 문화는 정체성을 가질 기간이 부족하고, 아시아 내륙이나 일본으로 부터의 외래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는 환경에 처해있었습니다. 그중 고대로부터의 신앙은 정신문화에 있어서는 하나의 큰 축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현재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이러한 고대로의 신앙정신으로 인하여 큰 다툼 없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선사시대는 역사시대에 와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이나 유물 유적을 통하여 보면 신화의 시대 라 명명할 수 있을만큼 신앙의 시대였으며, 동시에 종족간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종 의 번성이 일차적인 목적이겠으나 집단을 결속하기 위하여서도 성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혈연으로 뭉쳐진 하나의 집단이 거대해지거나 다른 집단과의 결합에는 성의 교환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신앙통합이 이루워집니다. 성유적인 카마수트라나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창작력의 원천이 성이라는 이론은 이미 일반적인 사실이 되었습니다. 거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작품의 바탕을 성에 관한 것이라 논술한 학자도 있고 보면 인간의 성이나 성의식에 관한 연구가 더욱 진전 될 것입니다. 거주지 선사이전 시대로부터 인류는 나름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며 살았는데, 고대 우리조상들의 주거는 주로 자연동굴에 거주하다가 차츰 지상에 인공 굴을 조성하기도 하고, 움집의 형태로 변한것 같습니다. 움집 형태의 거주지도 거주공간을 파내어 반지하의 상태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부락 외곽은 방책이나 토담을 두루거나 토담 외곽은 깊이 파내어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방비하는 구조를 하였습니다. 중국 기록상에는 동이족 이전에 불리웠던 '구리','구리족'이라는 말도 이 '굴'에서 살아 왔다는것을 반증 하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한민족들은 고대로부터 인공적인 구조물을 선호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구조를 활용하여 거주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래된 유목생활로 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여 자연을 훼손하지 아니하고 거주 최적지를 찾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던 것이라 볼 수 밖에 없음이 현재의 거주지들을 보아 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주공간, 접근로, 식수, 사냥, 어로, 농사, 채집, 훼피처, 등 모든 조건을 갖춘 곳에는 거주지가 있기 때문인데 세계 어떤 곳 보다 이상적인 거주지인 셈입니다. 또한 거주지나 뜰,담장,마당, 심지어 구조물의 상태에 까지 최소한의 인공 작용과 최근접 자연 접근 그리고 완벽을 회피하는 홀수 선호 등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과의 친화는 자연이 곧 신들이이라는 범신적 사고 없이는 설명 할 수 없을만큼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겟습니다. 덧붙여 자신들이 이 신들의 자식들이란 관습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거석문화 세계 거석문화 분포에서 선주 한민족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현재 까지 발견된 고인돌은 세계 해안 부분에 6 만여기가 분포되어 있고, 그중 한반도 인근 지역에 4만여 기가 있으며, 조성 연대 추정 BC4,000 - BC550년대의 것들 인데, 상위 연대일 수록 상고시대나 고조선 권역대 인 것들이 대부분이여서 그 기원과 전파 경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에 와서 연대추정의 과학성이 정밀해지면서 조성 연대가 올라 가고 있어 한반도 인근 동북아 거석문화 기원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ㅡ. ㅣ. □ . 형 이러한 거석유물의 초기 형상은 사각을 기본으로 받침석을 괸 '고인돌' 이거나 세운 '선돌' 모양이고, 초기형에서 발달한 덮개돌과 세움돌의 결합으로 발전합니다. 이 모양은 기록에도 나오는데,(단기고사: "제천단으로 사용한 개석(蓋石: 天一)과 지석(地石: 地二)이 있었다".) - 이러한 거석 유물들은 조성 초기에는 제천의식용으로 사용 되다가 훗날 돌무덤으로 바뀌게 되는데,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 합니다. 이 모양들은 조형상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각이 기본형 입니다. ○. □. △. 형 조형상 기본형이 되는 원형은 언제부터 인가는 모르나, 하늘을 섬기는 토템을 가진 종족으로 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 혈거생활이나 땅의 토템을 갖는 종족의 결합에 의해, 초기 사각에서 원형이 결합 되는 원(하늘),방(땅),각(수직,사람)인 고대 한국인들의 조형 기본형태가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용 되여지는 기본형은 원과 사각인데, 사람의 모양은 높이(수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기본 모양은 고조선 건국 신화에서도 '천부인'이란 신물로 등장 하는데, 신물이란 청동거울,작두칼, 구슬,북,곡옥,사각이나 원형의 옥,등 많은 신물인 유물로 이야기하는 사례가 많은데,지금까지는 확정된 것이 없어 게속 연구 분야로 남게 된 부분이나 그 본래형은 원(○),방(□),각(△),의 조형상 기본 모양을 이룹니다. 한국 고대 단군조선은 남성(신)과 여성(신)의 상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그전후의 제의는 신정일치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유적으로 나타나는 제단의 기본형이 하늘 천제는 원형의 제단으로, 땅의 지신제는 사각 제단으로, 또 사각과 삼각이 결합된 피라미드 형상으로 나타나, 실재로 그러한 행사를 하였음이 확인 된다 하겠습니다. 또한 한글의 원형이라 할수 있는 가림다에선 · ㅡ ㅣ 기본형과 ○.□.△.형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데, 이 가림다는 지금 까지는 학계 공인은 없으나 그원형을 신지녹도문인 금문에서 찾을 수 있고, 일본의 유물중 청동 거울이나 칼에 세겨진 신대문자가 이를 뒷받침 하고 있어 한국인들의 조형의식의 근간임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훗날 이 가림다와 형태가 유사한 훈민정음이 세계적으로도 인간의 글자중 최상의 문자로 불리게 된 것도 모음의 ·,ㅡ,ㅣ와 자음의 ○.□.△.형이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계화 되었던 전방(□)후원(○)의 원,방,각, 특히,이 고대 이후 세계 도처에서도 사각형과 원형태의 집단 주거지역이나 제의지역으로 발견되는데, 고조선 영역은 물론 한반도내,일본에 까지 전방후원(앞쪽은 사각형,뒤쪽은 원형) 형태의 고분 형식이고, 북미 지역의 오하이오주 뉴악시 호프웰 인디안의 거대한 주거지역, 웨스트 버지니아주 크레이브 크릭 팔각 주거지, 미시시피주 노치 에메랄드 지역, 등이 있고, 남미 아마존 유역 엘도라도 지역, 켈틱인 들의 전방후원 등 대부분 기원 전후로 조성된 것들이고, 처음은 원과 사각형에서 팔각,원과 사각의 겹침, 팔각형태가 원형의 대용으로 나타납니다. 또한,울산 반구대 암각화지역 인근이나, 잉카문명의 마추피추 푸투쿠시 지역 등 물도리형 지역은 향유 고래를 닮은 전방후원 형상입니다. 이러한 고대의 기본 조형 구조는 중세이후에도 거의 모든 조형 원리로 작용하는데,신라 경주 나정의 박혁거세 탄생지는 원을 대신하는 팔각정을 보더라도 기존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이 음택용 으로만 알고 있었던 전방후원형이 제단에도 적용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굴암 역시 그러합니다. 원형인 돔 부분은 죽은자(부처,신,하늘)의 후원 공간이고,앞 사각 공간은 산자(신도,땅에 사는 사람)의 공간입니다. 대한제국의 황궁우(팔각 건물),원구단은1897년 고종황제 대한제국 건국을 하늘에 제사한 천제지인데, 팔각정 황우궁이 둥근 원추형인 '후원'을 대신하고 있어 팔각안에 원이 포함된 것을 의미합니다. 북악산의 원추형의 원과 사각진 팔대문이 있는 서울성곽 구조는 사각과 팔각의 겹친 형입니다. 북악산과 청와대 등은 우리 민족의 전통인 전방후원 양택의 풍수 명당의 기본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분 중심의 전방후원분에만 집착해 오다가 일본의 거대 전방후원분의 고분 에만 집착하고, 한반도에는 그만한 크기의 전방후원 유적이 없다는 콤플랙스 빠지다보니 한양성의 구도인 서울의 성곽과 북악산의 '전방후원 도읍지'를 간과한 것입니다. 불교의 만다라 구도도 원형과 사각의 조화를 지닌 전방후원의 일체화된 원시제단의 형식이고, 후일 전통 불교의 탑파 구도와 성곽 구조로 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흙으로 쌓아올린 유적들인 고분 보다 오히려 더욱 거대한 토곽 유적들은 고대 아메리카 인디안 들의 토성 도읍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오하이오주와 남미 아마존 유역의 '엘도라도' 마운드에서 드러났으며, 그 형태는 오히려 우리의 서울 장안과 북악산의 전방후원 모양에 까까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 축소형이 대한제국의 원구단일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도 바티칸의 전방후원, 파리 개선문의 도로망구조.워싱턴DC광장, 동양 만다라 구성에서 차용 된 것들임을 서양의 학자들도 언급한 바있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명이 태어날 때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원,방,각,의 조형의 원형은 고대로 부터 비슷한 시대별로 세계 곳곳이 산재 분포하여 조성 되였는것을 살펴보면 인류의 번성과 이동,문명의 전파 등을 유추 할 수 있을 것이며,그 중심부에 한국인들의 고대 선조들이 문명의 주역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방,각의 조형 원형은 지금도 활용 되고 있으며, 서양 유럽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하학 으로 정립되고, 그리스의 '연역적'증명 공리체계(유클리드)는 서양 학문에서 진리 발견 방법론의 모범 으로 까지 간주되면서 서양문화의 기초 중 하나로 인정되었으며, 훗날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정형화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조형의식의 원형인 원,방,각,의 수학적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대 추상미술을 선두한 바실리 칸딘스키도 형태 문제를 다루는 첫 단계로 면을 세가지 기본요소 인 삼각형,사각형,원형으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 되어야할 것입니다. 공간감각 현대 공간개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의 된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인류가 모르고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고정되고 광활하다거나 막연히 없는 빈상태라고들 말하여 지곤 하였으나 사실은 확정적으로 어떻것이라 특정 지울 순 없습니다. 다만 현대 과학에서 공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양자화 된 무었이 끊임 없이 생성 혹은 소멸을 무한 반복 하는 요동치는 양자장의 곳이라 말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또 초끈이나 다양체 처럼 떨리고 동적이며 구조이면서 사건이 되는 가능성의 공간들이라 말하기도 합 니다. 이러한 현대의 공간은 고대 한국의 씨름장면이 있는 고구려 각저총 고분벽화에는 공간에서 생성되는 용의 존재가 몇 가닥의 선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용은 물을 상징하고 있고 생명탄생의 자궁임을 강우방 선생은 논술하고 있음으로 결국 공간에서 생성하는 물, 물에서 모든 생명이 탄생되는 무언가 있음으로서 가능성의 공간임을 말하는 지혜를 옛부터 말하고 있어 현재의 양자역학적인 사고와 유사성을 알 수 있게합니다. 유목생활에선 이 방대한 지구촌에서 자신들이 어디쯤에 아는것이 생존에 절대적 능력입니다. 그들은 주로 자신들의 위치를 하늘에 있던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을 통하여 자신이 거하는 위치와 계절 심지어 날씨 까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시야에 보이는 근거리나 원거리에 따라 길이 개념도 예측할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공간관념이라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활쏘기나 골프와 같이 화살이나 골프공 처럼 포물선을 그리는 궤적을 예측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데 한국인들은 너무나 잘할 수 있는 소양이 있어 삼차원적 공간감각, 지각 능력들은 이렇게 수천 년간에 걸쳐 생겨납니다. 이는 두말 할 필요 없이 유전적 소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성, 이질성들의 결합 한국을 있게한 고조선은 인류역사상 유래 없는 일대 사건입니다. 그것은 천손강림 신화를 표방하는 북방 유목적 요소와 난생신화를 표방하는 남방 해양문화의 결합으로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집단이 탄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탄생된 문화는 의,식,주,언어,관습,신앙,등 여러 문화적 요소에서 다양성을 띠게되고 지적 능력 또한 높아집니다. 특히 한국인들의 언어의 표현단위는 세분화 되어있어 그 세분화 하는 감각의 단위를 판별하는데 대단히 우수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분화능력 또한 기저에 깔린 양극단의 문화가 서로 상승적으로 작용하므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인의 지적 능력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이 누차 증명된 바 있습니다. 고대의 신들은 살아있었다 고대의 신앙집단은 순례하였고 그들은 가장 우수한 선지식 집단이였을 것입니다. 불가사이한 거석문화는 이들 집단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이들이 알고 있었던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였 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유사인류들을 내치며 현생인류들을 교화하며 유라시아 해안을 끼고 순례하면서 거석문화를 조성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주 세력권이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이곳이 먼저 문명화하고 방계 세력권역은 동서로 나눠짐으로 서구 문명사의 모태가 되는 지증해 문명과 아메리카 문명은 늦게 형성 되었을 것입니다. 지증해 문명의 시작은 흑해를 위시한 중동,서남유럽,북부아프리카의 문명이 길러낸 것인데, 특히 중동 지역은 지리상 거석문화 집단과 만날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이 거석문화 집단의 종족과 함께 신앙이 유럽지역과 인도로 끊임없이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파 된 그들의 신앙은 자신들의 신이 아닌 것이기에 신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계약적 서약 관계로 변질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과의 거리가 의붓 아버지와의 관계로 신을 섬기는 적통집단이 아니라 이질적 종족 집단이라는 것이며 신을 섬기는 적통집단의 신은 그들의 직계 부모의 관계이므로 불신이나 계약이 필요 없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에 까지 이어지면서 각종 분쟁과 이단 배교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살아 있었음은 박용숙 선생의 '장언원의 미학 담론'을 인용하겠습니다. 장언원은 중국 당(唐)나라 때 미술사가(美術史家)로 미술 평론서인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로, 당나라 때 까지의 중국 회화사(繪畵史)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입니다. 법서요록(法書要錄)에서는 고인(古人)의 서론(書論)을 집성하였는데, 이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는 중국미술사에서 사마천의 '사기'에 비견 되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글 중 몇 대목을 살펴 봅니다. 서화지 원류(敍畵之 源流) 중.. "그림은 원천적으로 글(書)과 동일한 근거에서 출발 하였다. 그림이란 교화(敎化)를 이룩하여 인륜(人倫)을 돕고,신섭(神燮)을따지고 유징(幽徵)을 잰다. 이러한 의의는 육경(六經)을 아는 것과 동일한 노력이며, 아울러 사시(四時)의 운행(運行)을 겸하는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독서에 의해서라기 보다 자연 발생적이다." 이 글에서는 그림이 글처럼 하도(河圖) 낙서(落書)에서 출발 하였다고 하면서, 그림을 미개한자들을 교화 시키고, 사람이 윤리와 도덕을 갖추게 도와주고, 신의 섭리(神燮:신의 움직임,동태)가 무었인지 파악하고 그 신들이 거하는곳인 유징(幽徵:신의 거처인 산속의 정황)을 가늠해 보는 것이 그림이라 하였습니다. 동서양에서는 다같이 그림이 처음 그려질 때에는 일반 백성이나 귀족계급 까지도 그려지질 않았고 주로 그 집단의 최고 지도자나 신들만이 그림의 대상이 되여 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옛 산수화에서 그려진 신선들이나 시중드는 동자 어부 등은 모두 일반 백성과도 별로 다름 없는 사람들이것 같으나 사실 이들은 고대의 신격화 되여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그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섭을 따진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신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유징(幽徵)을 잰다는 말에 유(幽)는 '설문해자',전서(篆書)의 풀이를 빌리자면 두개의 징물(徵物 : 영묘한, 작은,씨)이 산(山)에 포용되어 있는 형상입니다. 산이란 신화적으로 신(神)들이 거하는 곳이고, 또 이 幽徵을 '반훈법칙(反訓法則)'으로 보더라도 유(幽)는 형태언어이고, 징(徵)은 질료언어(質料言語) 이므로 당시 인간사를 제도하였던 신들의 신전은 크지 않고 작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림에서 산속 조그만한 초가와 몇 안되는 사람이 등장 하는 등,신들이 거하는 곳이 거대하지 않 았다는 것이며, 그 신들은 현대 처럼 보이지 않는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 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신들이였 습니다. 또한 그 신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선진 문명인인 우리(동이:東夷)의 지도자급인 신들인 것입니다. 신들이 정치를 함께한 시기는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수천년 이상 존재하였던 것이였으나 단지 당시는 현재의 문자가 아닌 '신의 문자'로만 기록되어 지금은 신화나 설화로 전해져 온 일입니다. 이러한 신정(神政)의 이상향은 제정 분리의 시대를 만나 실제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세력과 이를 반대 하는 사람들간의 갈등과 지지 사이에서 그동안 신들을 섬기고 봉사 하여온 예술 지식인들은 대체로 인간 들의 정치에 반대하여 왔으며, 그들은 이상향인 신정을 구가하고 동경하며 향수 하였음은 이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보고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삼대(三代 : 夏.殷.周)의 이주(異主)를 보고 비분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이글에 삼황오제란 신정체제를 말하고, 삼대의 이주란 이 신권정치(神權政治)를 반대하고 인간적 권력을 행사하였던 왕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삼황오제란 우리의 '삼극'을 중국식으로 말한 따름입니다. 중국의 고대 많은 학자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공자'이래로 삼황의 존재는 실재하지 않게 관념화 시켜 실존이 아닌 전설로 취급하게 되였습니다. 공자가 만든 유교는 암시적으로 천(天)이라는 말로 신을 표현 할 뿐 공자 자신 부터 신의 현존을 배격하고 인간 위주의 이상향을 설파한 것이고, 그들에게도 기준이 되어 왔던 선진 삼극사상 체계를 애매 모호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제도 여러 설이 있으나, 오제중 요.순 만을 중시 여기면서 그들의 시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요.순 의 역사야 말로 중국의 역사임을 말할 따름이고, 대체로 그보다 앞선 신정시대에 신정을 옹호하여 온 선진 문명국의 지도자들은 철저히 배제 시키고 격하시킨 것이 공자 이래 중국의 고대 역사 기록물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정치의 이론에 반대하는 장언원 으로서는 '비분한다'란 말을 쓰면서 자신의 이상향은 삼극(신의집단, 매개집단,인간집단)이 균등히 자리잡고 만민에게 호혜하는 신정(神政)의 이상향을 그리워 한다는 말입니다. 이상과 같이 고대 동아시아를 이끈 신정의 주된 세력은 고대 한국인들이였으며, 이웃하여 같이 살아 간 중국인들 조차 이상향이라 칭할 정도의 삶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이집트나 중동의 피라밋(인공산)이나 올임프스의 고산들도 아시아의 산들 처럼 고대 신들의 거주처여서 그 범 세계적인 고산숭배사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고산숭배사상'은 김상일 교수의 논으로 일독을 권합니다. 음악 한국인들의 후예들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러 갈레로 나눠져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생인류에 속한 그들은 빙하기 바이칼호수 주변 얼어붙지 않은 곳에서 살다가 해빙되는 지역을 따라 남하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혹은 흑해 주변에 살게 됩니다. 이들은 수천 년에 걸쳐 수십 혹은 수백 명의 단위로 정착하거나 수시로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유목적 삶을 살아갔으며, 이들중 일부는 서북진하고, 일부는 남진하여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옵 니다. 또한 일부는 해안을 따라 아메리카 지역으로 까지 이동합니다. 기원전 12000년 ~기원전10000년은 선사인류의 세석기문화에 해당하고, 지사는 홍적세 말기에 해당 하며, 온난화와 간빙기로 빙하가 녹으면서 대륙과 붙어있던 곳들이 섬이 되거나 융기와 침하 홍수 등 지표의 변화가 있었던 때여서 현생인류들의 이동이 잦은 시기로 봅니다. 이러한 지질환경은 음악에서도 나타나는데, 인류에게 음악이라는 문화가 생겨나는 시대에 지각변동이 심하고 화산활동 등으로 유년기 지표 지역인 유럽은 호흡의 제약으로 단순히 반복되는 심장의 고동과 맥박에 의한 평균율적 음악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렇지 않은 아시아 지역은 폐를 통한 호흡이 음악의 중심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본래 심장박동과 맥박 패턴, 평균율을 중시하고 직선적인 서양음악과는 다르게 한국인들은 옛 부터 허파운동인 호흡을 중시하고 단선율 자연적 곡선적인 음악이 됩니다. 특히 고대 한국의 신정체제에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종교의식에 있었던 바른 호흡법이 일찍부터 있어 온 존재인 모든 소리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이나 몽골의 옛 소리 전통은 이러한 맥락에서 읽혀집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개체에서 전체로 지향하는 서구인들은 심장박동과 맥박의 패턴을 중시하는 음악 으로 발전 하여 왔습니다. 동양인들은 이와 다르게 허파운동인 호흡을 중시하는 음악으로 발전하여 왔는데, 서구 유럽에서는 후에 인위적인 화성이 가미 되면서 리듬과 선율과 함께 음악의 세요소가 정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구와 동양의 음악의식의 지향점이 다른 이유는 지질의 형성이 다르기 때문인데, 유럽지역은 중생대 지질로 수천년간 지각 변동이 잦아 화산재나 여타의 공기 문제로 호흡에 의지하는 음악에 한계를 갖게 되었을 수 있었겠고, 아시아대륙은 고생대지층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각조건이 호흡을 의지하는 음악으로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한국의 음악은 단선율과 홀수 단위의 음계를 사용하여 왔습니다. 세계 민속음악들도 대부분은 단선율에서 다성으로, 홀수 단위의 음계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의 대리하거나 중계하는 집단이 이러한 단선율적인 음악을 사용하여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전승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또한 한국인들은 아시아 극동지역에 위치하여 있으나 개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인근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여타의 기예 분야에서 음악을 가장 으뜸으로 보고있으며, 음악의 모든 요소에서 세상 전체를 아우르려고 하는 잠재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음악을 다른 나라의 음악과 구분짓게 하는 데에는 농현의 기능, 2박자 계통의 장단이 드문 반면, 3박자 계통의 리듬이 많다는 점, 강박이 음악의 첫머리에 나온다는 점이 있으며, 전승의 틀에 얶메이지 않는 파생 즉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설화에 있는 세상은 율려라는 음이 먼저 생겨나고 빛이 생겨나며 만물이 생겨난다 라는 패턴과 함께 세계의 여타의 음악에 대하여 거부감 없이 모두를 포용하고 뒤썩어 새로운 다른 것들을 만들어 내거나 파생 즉흥적 창작 정신이 직능 또한 단기간 내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유목적인 삶들 고대 한국인들은 유목적인 삶을 살아 왔습니다. 유목적 삶이란 성과 신앙으로 강력하게 집단을 형성하며 지금의 유목과는 다르게 막연한 미지의 땅으로 이주와 정주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집단이였습니다. 당시는 지금과는 다르게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독자적인 삶이란 자연 도태 되고말아 집단생활은 생존을 위한 삶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흔적을 남겨 이정표로 사용하고 상징물 혹은 부장물로 남겼으며 그 흔적은 지구 곳곳이 있습니다. 그중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유적,유물은 세석기와 빗살무늬 토기,채도,거석 문화군으로 기원전 일만 여년에서 기원전년도에 해당하며, 빙하기나 간빙기, 해빙기를 거칩니다. 문화의 다양한 것들 중 시각예술의 시작은 암각화로 봅니다. 유럽의 암각화는 면 위주로 하는 채색 형식이 많고, 아시아는 주로 선묘가 대다수인데, 그러한 이유는 암석의 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럽 북부는 강도가 강한 고기 암이 분포하지만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고기 암이 섞인 유년기 지표로 지각변동이 크고 무른 석회암인 대리석입니다. 반면에 아시아는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대륙이 한 덩어리여서 지각변동을 많이 겪지 않은 강도가 강한 퇴적암 위주로 면 처리 보다는 얕게 패인 선묘가 대부분입니다. 고대 한국인들이 있었던 곳에는 유독 암각화가 많았는데 대다수는 하늘의 별자리를 새겨 놓은 성혈과 전쟁을 암시하는 발굽문양 이나 갑주형상 등 가지수도 많지만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상열차분야 지도는 세계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크나큰 가치를 지닌 것들입니다. 이러한 암각화는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까지 왕성하게 만들어 지다가 이후 까지 지속 됩니다. 이러한 문화의 주인공들이 바로 한국인들의 선조 집단입니다. 그것은 이 문화들이 그들의 이동 경로와 겹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육만 여기의 거석문화군 중 한반도와 인근에 사만여기의 거석 문화군이 존재하는 것이 이들의 자취 를 증명하고 있으며, 빗살무늬 토기 군들과 세석기 유물들 등이 있습니다. 오래된 유목생활과 이주는 하늘의 뭇 별들을 관찰해야 하는 습관을 만듭니다. 특히 고대 한국인들이 새겨놓은 암각 성혈들 중 유독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많이 등장하고 심지어 매장 하기위한 관 뚜껑에도 이러한 북두칠성을 새겨넣어 옛 한국인들의 믿음인 삼신에서 태어나고 죽어선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 라는 삶과 죽움 까지도 유목적 관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또 이들은 성을 숭배하는 유적과 유습을 갖게하는 특정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현생인류와는 다른 유사 현생인류 군들도 살고 있어서 이들과의 생존경쟁은 치열하였을 것 으로 생각합니다. 종족들의 이질성이란 피아가 판가름 나고, 상대는 사람이 아닌 짐승이므로 먹이가 될 수 있고, 노예나 부장품이나 전리품이 되였으며, 당시의 유습은 역사시대를 지나서도 계속 됩니다. 우리는 쉽사리 곰족, 호랑이족, 등 당시 부족을 상징하는 것들을 설화를 통하여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생인류들은 유사인류들이나 다른 부족인들에게 우위를 취할 수 있는 생존경쟁의 수단으로 우수한 종족번성을 생존 전략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명체로서 생존능력이 현생인류 보다 떨어지는 종도 있겠으나 우수한 종도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일례로 유럽지역에 있었던 상당수의 '네안데르탈인'의 인골이 현대에 발굴되고 있어 당시에는 현생인류들 집단이 유럽으로 진입하기가 상당기간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이질집단 모두를 제압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족수의 우위는 반드시 필요 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종족번성에 대한 의식은 성에 대한 숭배의식으로 나타납니다. 한국인들과 유사한 선조집단을 가진 터키나 남미인들 등의 국민들에게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타 납니다. 또하나의 성에 대한 전략은 우수한 지도자나 종족을 선택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우수한 지도자는 신체와 정신이 월등한 능력으로 종족전체를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유습은 나중 국가발전에 필요한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한국인들의 선조들은 이러한 전략으로 머나먼 유목의 여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있습니다. 당시의 유물로서 거석유물군 부분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성이 소재가 된 기호(문자 ?)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이 기호에는 성기와 정액을 상징하고 이를 보관하거나 인공수정 시키는 그릇 등이 기호로 그려진 서판 여러 점이 미국 내에 보관되고 있는데, 성에 관한 지식수준이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옛 기록에 '당시 한국인 선조들의 씨름이 우수한 혈통을 번성시키는데 쓰일 남성을 뽑는 행사 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덧붙여 인도 초기에 유입된 아리아인들의 성에 대한 고전 카마수트라도 동일한 맥락일 것으로 봅니다. 당시에는 지금의 가족제도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의 집단 안에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집단과 남성으로 구성된 집단이 있고, 남성 집단은 일반 남성 들과 '서자'라 불리우는 성인식을 거친 청년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씨름이나 여타의 시험에서 선발 되어 우수종족의 씨를 제공합니다. 또 여성 집단에서도 성인식과 시험을 통과한 우수한 여성도 선발되어 씨를 길러내는 일에 충실하게 됩 니다. 그래서 씨름은 씨 놀음이라 하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중국의 최초 지리서인 '산해경'에 나오는데, "안호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산해경의 기록을 잘라 말씀하였습니다. 즉 '北有樹 名曰雄 常 先八代帝 於此取之' 라고 雄과 常을 갈라놓고 '북에 나무가 있는데 이를 雄 이라 한다. 늘 앞서는 8대의 임금들이 여기서 이를 취해갔다'로 한 것이다... (중략) 이 말은 당시 '웅'이라는 신령스러운 나무가 있는 곳에서, 씨름 등의 행사를 통해 나라의 8대에 걸쳐 임금의 씨를 받아 지도자급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기를 데려가서 왕으로 삼았다 라는 말로 8대에 이르는 임금의 출생이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부계나 모계의 전통이 없어 아이는 유전되는 성이 없으며 장성하면서 이름만 붙여졌습니다. 이러한 유습은 마을에 있는 당산나무에 오색천을 두룰때 '옷을 입힌다'라 하며 인격적으로 지칭합니다. 그러나 지금은'웅'에 대한 말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또다른 성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중국 곡부에서 출토되었던 고조선 유물인 코뿔소 모형 술두루미 제기 안쪽에 있는 명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구길수 선생의 해석이 있습니다. "해의 정기를 받은 하늘아래 땅위 가장 큰 이가 빛과 얼을 살피시어 물건을 구하려 더듬고 살피며 다녀서 노적가리에 싸안고 하늘아래 땅위 가장 큰 이를 빛을 탄 세 신하(우사 운사,풍백)가 위아래에서 받들어 환숫이 구멍 뚫린 빈 배를 타게 했다. 더 물건을 구하고 더듬고 살피러 다니며 서로들 얼루니 새 임금이 되실분이 오셨네. 항상 해 아래 멈추어 있었으니 백성들이 새 임금의 탄생과 같이 숫이 열리길 빌고 또 바라니 하늘과 땅이 교합하듯 사내 부족과 겨집 부족이 빛을 위로하여 얼루는 해였다." 위 명문은 단군조선 당시 건국주체 지도자 제의에 쓰인 청동제기 안쪽에 있는 명문으로 당시의 성풍속이 신성하였음을 나타내며, 성의 신앙과의 결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유물은 미국 시카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창성 조적서 비문에도 위와 유사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비는 (기도하는, 바라는) 개울과 (여음, 겨집) 비는 (기도하는, 바라는) 뱀 (男根, 사내)를 땅 위에 세우니 얼루는 도다 빛을 향하여 둘이 열고 나아가 씨를 심고 둘이서 비니 빛과 땅과 얼루어 아기가 나오네 열고 나가 어미 되니 자식을 낳고 씻기어 터에 세우고 곡식을 갈무리 하여 달아매니 빛 받는 밝달(배달)에 집(나라)을 세우는 도다 내용은 일종의 단군조선 건국축하의 시로 당시의 집단의 모습을 길이 남기고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 니다. 비문은 중국 섬서성 백수현에 있고 글쓴이는 고조선 신지의 제자이거나 관속으로 한자를 최초로 만들었 다는 '창힐'입니다. 문화 문화의 사전적 정의는 '도구의 사용과 더불어 인류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되며 구성하는 요소에는 언어·관념·신앙·관습·규범·제도·기술·예술·의례 등이 있다. 문화의 존재와 활용은 인간 고유의 능력, 즉 상징적 사고(언어의 상징화)의 능력에서 기인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대사회 당시의 문화로는 우선 신정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 이라는 조건 하에 읽어야 하며, 모든 문화의 기준이 되는 척도는 신들과 관계된 모든 것들입니다. 특히 저는 최근에 현대 과학이나 철학을 접하면서 현대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전하고 싶은 핵심 요소들이 이미 우리 속에 있어 온 것들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는 서양 과학 철학의 방법론의 구조주의나 해체주의 등 서양의 인간 주체와 실존의 해체와 판단정지 등 의 것들이 마치 우리의 무의식에 근접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라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의 사례들은 너무나 광범위한 분야이고 범위 또한 방대하여 뒤로 미루고, 서양철학의 모두라 할 수 있는 초기형성 철학의 요점인 '이데아'와 '너 자신알기'와 과학에 있어서 있다 없다의 존재 물음을 우리의 무의식에 내재한 것들과 우선 비교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재 태인 무의식은 겨우 이천여년의 역사시대 보다는 수천 년에 이르는 고대로 부터 위와 같이 전술한 작은 부분들의 집합일 것이라 생각하며 위에서 약술한 것들 보다 더 많은 문화 양태들에 대하여는 독자분들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일례로 태평양 북부 연안에 고래의 행적을 따라 이동하였던 집단들 (이 집단들은 구들을 사용하고 고래
인간계의 입장에서 지구 대재앙을 여러차례 극복하고 살아남은 일군의 종족들의 지능은 현대인들과
인류는 혹독한 자연환경에 의하여 이동하면서 자연을 알게 되고 적응하여 왔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되는 설화는 세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신앙하던 인간이 종종 신을 기만하거나 빙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이나 터키 등 고대 아시아를 유목 정착한 나라에는 지금까지 성숭배 유물이 남아있고 인도 힌두교
이러한 성에 관한 의식은 동물이나 인간의 미의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