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호를 펴내면서
黃砂
박방희
봄 되면 오신다
임들은 오신다
황사 붉은 진토로
넋이 되어 오신다
천군만마 거느리고
바람 타고 오신다
한강의 푸른 물 보러
황해 건너오신다
몽매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강토
조국 산천으로 돌아오신다
하나에서 둘이 되고
전쟁까지 치른 땅
동강난 삼천리로 가쁘게 오신다
아직도 죽지 않은 혼 찾아
산 넘고 바다 건너
수만 리 길을 오신다
해마다 봄이면 산천 곳곳
자욱이 내려앉으며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 떨쳐라!
두견이 피맺힌 울음으로
오신다, 오신다
넋들이 오신다
----박방희 시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박방희 시인의 [황사]는 이 땅의 애국지사들을 찬양하는 시이며, 영원한 과제인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건설을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건설은 그의 염원이 되고, 이 염원은 너무나도 간절한 기도가 된다. 황사는 봄이 되면 찾아오는 임들이며, 이 임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비명횡사해간 애국지사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무리를 짓는 동물로서 무리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 이 민족의 침략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자기 땅과 자기 영토를 잃어버린 것처럼 더 서럽고 억울한 일도 있을까?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민족은 민족도 아니며, 그 어떤 안전장치나 보호장비도 갖추지 못한 떠돌이--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떠돌이--나그네는 남부여대와 유리걸식의 노예민족이며, 이민족에 의하여 개같이 학대를 받고 신음해야 할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몽매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강토/ 조국 산천으로 돌아”와도 그 임들을 맞아주는 것은“전쟁까지 치른 땅/ 동강난 삼천리”뿐이고, 따라서 죽어서도 죽지 못한 임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해마다 봄이면 산천 곳곳”“일어나라! 일어나라!”“두견이 피맺힌 울음으로”그토록 서럽고 원통하게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사란 중국의 북서부와 몽골의 황토지대에서 날아오는 모래먼지를 말하지만, 박방희 시인은 이 황사를 애국지사의 넋으로 받아들이고, 그토록 간절한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꿈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가락의 민요형식으로 시를 쓰며,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자기 자신의 혼을 불어넣고“피맺힌 울음”을 울고 있는 시인의 절규는 너무나도 안타깝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애국지사인 임은 시인이 되고, 시인은 두견이가 된다. 임과 시인과 두견이가 하나가 되는 이 삼원일치의 드라마 속에는 그러나 죽어서도 죽지 못한 임들의 준엄한 정신과 그 질책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빨없는 독설이 물어뜯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수천 년 동안이나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과 개같은 학대에도 불구하고 오직 저주로 밖에 복수를 하지 못한 것처럼,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건설은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중의 최고의 전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듯이,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건설은 미제국주의를 어떻게 다스리고 몰아내느냐가 그 첫 번째 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첫 번째는 대한제국의 건국이념과 그 목표를 분명히 하고, 미국보다 더 고귀하고 더 아름다운 도덕으로 전인류의 찬양받는 국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더 강력한 적을 친구로 만들 듯이, 미국을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열광적인 옹호자로 만드는 것, 바로 이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이 우리 한국인들의 영원한 선결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도 불가능은 없었고, 나폴레옹 황제에게도 불가능은 없었다. 소크라테스에게도, 플라톤에게도 불가능은 없었고, 칸트에게도, 마르크스에게도 불가능은 없었다.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의 건설은 우리 한국인들의 절대적인 권리이며, 미국이 이 절대적인 권리를 빼앗거나 유린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우리 대한제국의 영원한 주인이며, 우리가 이 삼천리 금수강산을 전인류의 지상낙원으로 건설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한국인들이여! 과연 당신들이 그토록 오랜 숙원인 남북통일과 대한제국을 어떻게 건설해나갈 것이란 말인가? 낙천주의 사상가인 나의 대답은 아주 쉽고 간단하다. 앎의 투쟁에서 미국과 중국과 일본과 그 모든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한국정신과 한국문화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마르크스, 니체, 플라톤, 뉴턴, 아인시타인 등과도 같은 전인류의 스승이 되면 되는 것이다.
‘기획특집: 논쟁문화의 장’은 여든 네 번째로 애지문학회편과 반경환의 명시감상, 그리고 이형권의 [청년 임화-보성고보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시](두 번째)를 내보낸다. 애지문학회편은 애지문학회 열다섯 번째 사화집인 {문어文魚}에 참가한 39명의 회원들 중, 남상진 유계자 이병연 최병근 이선희 강정이 이수 김진열 김도우 김명이 김선옥 조영심 정해영 조성례 김정웅 이정옥 조순희 조옥엽의 시를 내보내고, 반경환 명시감상은 남상진 유계자 강정이 정해영 조성례의 시를 조명한 글이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는 박방희 시인과 이인원 시인, 그리고 안현심 시인을 초대했다. 박방희 시인의 시, [지상의 방 한 칸]과 신상조의 작품론 [시는 자연처럼, 삶은 시처럼], 이인원 시인의 시, [분홍 입술의 시간]과 박수빈의 작품론 [아픔과 이웃하는 사유들], 그리고 안현심 시인의 신작시, [새벽에 쓰는 시] 외 4편과 황정산의 작품론 [시에 대해 시가 생각하다]를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는 이병연 시인과 김은 시인, 그리고 김종겸 시인의 신작시들을 내보낸다. 이병연 시인의 [누릉지를 끓여 먹는 아침] 외 4편과 권혁재의 작품론 [살아가는 심미적인 한 방식에 대한 주문呪文]과 김은 시인의 [다리] 외 4편과 이승희의 작품론 [순정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삶의 허기들], 그리고 김종겸 시인의 [수담手談 사활편]외 4편과 최은묵의 작품론 [한 편의 시가 혼자 날개 하려면]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나는 왜 오른쪽을 편애하는가] 외 4편을 응모해온 이원형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오늘날 요양원과 요양병원은 아우슈비츠와 스탈린 체제의 수용소 군도라고 할 수가 있다. 살 권리보다는 죽을 권리가 더 필요할 때, 마치 황금알을 낳은 퇴계退鷄처럼, 자본가와 의료인들에게 인질로 잡혀 사육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딸들도 몰라보고, 대소변도 못 가리고, 하루하루가 지옥같고 혼수상태인 이 노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시대적 사명이자 의무가 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 즉, 자연의 죽음을 봉쇄한 자본가들에게 내린 하늘의 형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은 인간의 죽을 권리와 존엄성을 빼앗고, 다 산 노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며 돈을 버는 반인륜적인 자본가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죽고 싶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 즉, 하루바삐 인간수명제와 더욱더 아름다운 존엄사를 실시하라!!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