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3일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대부보다도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오늘 그를 떠나보낸지 3년이 되는 날 이었지요.
그 날도 오늘 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그를 외롭지 않도록 아버지 산소 앞에다 묻고왔지요.
어찌도 비는 그리 지독스럽게 퍼붓던지~~~~~
서럽던 그의 마음을 하느님이 달래주고 씻어주듯!
청담성당 마당에서 허수산나 천사랑 동생 현숙씨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혼자 외롭게 시립병원에서 투병중 세상을 떠난
나의 대자 권빈첸시오를 위해 과천 허수산나씨가
그 때도 장례의 모든 과정을 총괄해 도와 주셨었는데,
오늘도 3주기 미사를 함께 봉한토록 이끌어 주셨네요.
청담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후 성모님상 앞에서
오빠의 3주기를 맞아 뉴질랜드에서 혼자 한국에 온 동생.
그는 어제 오빠 묘소도 참배하고 왔다 했습니다.
천주교우는 아니지만 허수산나씨의 권유로 오빠의 장례를
치렀던 청담성당에서 오늘 3주기 연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청담동성당에서 왼쪽부터 권현숙씨, 허수산나씨 필자
대부인 나도 잊고 있었던 대자의 기일.
허수산나씨의 연락을 받고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수산나씨는 대자 권빈첸시오 매형의 누나랍니다.
그러니까 사돈지간인데도 친 언니처럼 동생 현숙씨를
자상하고 따스하게 보살피고 챙겨주었습니다.
청담성당에서 봉사하시기로 다짐하신 차도균씨부부
나는 오늘 같이 주일미사를 봉헌한 대자 차도균베드로
부부에게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오늘이 먼저 하늘에 오른 대자 권빈첸시오의 기일인데
하느님안에서는 한 형제이고, 그의 여동생이 오빠기일을
맞아 이곳에 왔으니 함께 인사나누고 같이 식사합시다."
여동생 현숙씨가 오빠를 대신해서 대부인 나에게
점심을 대접한다기에 나는 우리일행들도 동행
근처의 식당으로 갔습니다. 이곳에서도 두사람은
친 자매처럼 얘기꽃이 그치질 않고 피어오릅니다.
여동생 권현숙씨와 허수산나 자매님
슬픔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함께하면 증폭되지요.
어렵고 힘겨운 긴 터널을 홀로 거쳐왔던 대자 권혁진!
그는 떠났지만 가면서 이렇게 좋은 인연을 선물했습니다.
덕분에 수산나천사도 알게 되었고, 매형친구 김도호형제도
알게되어 지금은 소금창고 사진봉사자로 맺어졌지요.
식사 메뉴를 고르시는 차도균베드로님 부부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청담성당에서 갓 태어난 막내대자 차도균형제에게
하늘에 있는 형 빈첸시오가 여동생을 불러들여 영적으로
동생인 차도균베드로형제 부부에게 식사를 대접하는구나.
하고 느껴졌습니다.
소금창고가 있는 금호동에 그날 처럼 비가 내립니다.
유월의 세찬 빗줄기 내리는 오늘
그를 처음 만난 3년 전 그 때가 불현듯이
회상됩니다.
2011년 새봄이 솟아나는 4월 어느 날.
서울의료원[구:강남시립병원] 429호실
원목봉사자의 권유로 병실을 노크했다.
그곳은 의료진과 간호요원외에는 출입이
통제되는 1인용 격리병실이었다.
노크해도 응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보호자도 간병인도 없었으니~~
살며시 병실문을 밀고 들어갔다.
30대 중반의 스포츠형머리를 한 젊은
형제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마주보이는 벽면에선 보는이 없이도
TV는 마냥 화면을 바꾸어가며
소리를 낸다.
난 조용히 그의 침대 곁에 앉아
살며시 그의 손을 포개잡고 속으로
예수님께 기도했다.
뭔가의 인기척에 그가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 묻는다.
"나를 아세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반사적으로
튕겨져 나갔다.
"네, 그럼요. 아주 오래 전부터요."
원목수녀님이 형제님에게 찾아가 보라해서
이렇게 오게되었다 하고 말했더니
그가 안심하는 듯 하였다.
이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나는 그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는 병실을 자주 찾게 되었다.
어느 날은 병실에서 담배냄새가
심하게 코를 찌른다.
내가 농담을 던졌다.
"혁진씨, 유일한 벗과 데이트하고 왔군?"
그가 겸면쩍은듯 나를 보며 빙긋이 웃는다.
낙심과 절망, 외로움을 달래주는 약으로
친구처럼 그는 담배를 피웠었다.
그 무렵 그는 병실에서 천주교 봉사자를
통해 개인교리를 받고 있었다,
지방에 내려가 봉사하던 어느 날
원목수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보고 429호 환자가 세례를 받는데
대부를 서 달라고하기에 지금 난 멀리
지방에 있어 어렵다 말씀드렸더니,
수녀님이 거절할 수 없는 그의 얘기를
전해준다.
자기한테 가끔 놀러오는
머리하얀 아저씨가 대부가 되어준다면
세례를 받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그는 나의 대자가 되었다.
그로인해 그에게서 많은 이야길 듣게되었다.
누나는 미국에, 여동생들은 뉴질랜드에
있다는 얘기도, 자기가 호주에서 있었던
일도 나에게 털어 놓았었다.
그곳에서 잠시 성당에 나갔던 이야길하며
이담에 영세를 받게되면 세례명을 그곳의
신부님이 빈첸시오라 하라며 정해 주셨단다.
그래서 '빈첸시오 성인이 누군지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가 내게 대답하기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들어 알고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빈첸시오로 세례를 받게되었고
그의 못다한 짧은 삶을 대신 살아내고자
하느님은 대부인 나를 가난한 이들 곁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셨다.
그는 죽었지만 살아있다.
성남화장장 15번 화구에 들어가 자신을
불살랐지만 다른이들 안에서 부활하였다.
그 대자 권혁진 빈첸시오! 그를 통하여
알게 된 몇몇의 사람들이 소금창고를
통하여 거듭 달라 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는 하느님께서 나의 성화를 위해
이 땅에 보내주신 고독한 예수님이셨다.
그의 3주기를 맞아 기도합니다.
주님, 권빈첸시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