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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일요일 작은형의 칠순 잔치 때 모든 가족의 앞에서 |
내가 할려고 했던 얘기 였는데 그 날 묘하게 분위기가 뭘 진행 해야 하는 지 |
깨닫지 못하고 그냥 저냥 흘려 버린 사태에 오늘 이라도 작은형의 칠순에 따른 소회를 전했으면 해서 적은 글이다. |
나는 이 글이 우리들 뿐 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 곧 그 날의 주관자 였던 혜진이, 김서방 그리고 우진이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조카들도 |
읽어 줬으면 한다. |
새삼 얘기지만 그 날 그자리에서 이를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음을 정말 죄스럽기도 하고 일생에 다시 없는 칠순 이신 작은 형 한테도 |
두고두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
병곤형은 수재 이셨다.좋은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릴적 더불어 같이 살아봤던 나는 그 천재성을 |
진작에 알았고 나도 따라 해보려 했으나 나의 타고난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 |
할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 중학교 2학년 어린 아이가 주산 4단의 실력으로 해보인 부조금 계산에 동네 이른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
아버지의 확신이 찬 자랑하며, 고등학교 때는 전학년을 장학생으로 가난한 부모님의 학비 걱정 없이 공부 했다는 얘기하며 |
그 덕분에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다는 얘기하며..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훔쳐본 성적표는 언제나 전교 1등 이셨다는 사실로도 그 천재성를 다 설명 할 수 없다.. |
성적표를 내가 훔쳐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한번도 성적표 보이며 자랑 한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나중에 더 설명 하겠지만 형의 그 천재성을 청년기 까지 주욱 이어 와서 궁극적으로는 전국 겨우 200여명 선발하는 |
공인 회계사 시험을 대학 3학년 때 이미 합격한 사실로도 입증 될 수 있기도 하다. |
병곤형은 미래를 내다보며 준비 한것도그 천재성에 기인 한 것인가 생각 할 때도 있었다. |
대단히 어려운 시골에서 부모님이 힘에 부쳐 자식들 공부 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울 때 |
일반적인 사람은 대학 갈려는 엄두가 안 날 지경이고 그냥 좋은 상고에서 은행가서 집안 살림에 보탤 월급이나 챙길 생각이었을 텐데 병곤형이 그 때 대학 진학을 도모했다는 게 |
지금 아이들을 보면 상상 하기 어려운 일이다. |
내가 부산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형의 판단을 부모님께 설득한 덕분이었다. |
뿐 만 아니라 대학 가기전 삼촌 집에 지내면서 모이고사 시험비가 없어 친구가 대신 내줬던 |
사실하며 차비가 없어 삼촌집 식모 한테 빌려야 했던 것도 형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의지에 기인 하였음을 인정 하게 된다. |
병곤 형은 일생을 관통해 우리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며 살았다. |
지금 에사 반성하며 밝히건데 나는 한번도 우리 가족의 문제를 풀어 보려고 애쓴적이 거의 없다. |
기껏해야 형의 다그침에 겨우 발을 담그는 정도 였을 것이다만 형은 언제나 가족의 문제에 |
온 몸으로 지켜냈다. |
아주 중요할 뿐 만 아니라 깊이 알아야 할 사실은 어떤 상황 에서도 불평하거나 하서연 하거나 다른 형제들 한테 떠 넘기거나 피한적이 단 한번도 없다. |
이는 인격적으로 일반인이 따라 할 수 없는 위대하기 까지 한 형의 성격이다. |
부모님의 경제적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맡고 풀어 주셨고 형제들을 지휘해 지금도 너무도 슬기롭게 운용되고 있는 |
형제 회비도 형의 아이디어 에서 출발 했음은 우리 모두가 인정 하는 바다. |
또 나의 케이스를 얘기 하는데 내가 방위 할 때 형은 좋은 보직으로 옮기도록 부모님 한테 |
로비 하시라고 돈을 주셨는데 여의치 않아 나는 그 돈으로 좋은 시계를 사서 끼고 다녔다. |
병곤형은 앞의 여러 경우에 보듯 정말 과묵하셨다. |
언제나 어려움 속에 가족을 염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어려움을 누구한테 토로 하거나 불평 한 적이 없으셨다. |
지금껏 살아 오면서 우리 형제중 가장 질병에 시달리셨는데 그 누구도 형의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몰랐다. |
위암 수술 떄도 너무 답답하게도 아주 간단한 병처럼 말을 아끼셨고 갑상선병으로 눈 수술을 |
받은 사실도 거의 최근에사 우연히 알게 된 거 하며 회계사 시험 때 손 이 떨려서 |
크나큰 고민 했다는 것도 안지 오래 되지 않았다. |
병곤형이 70년 살아오면서 우리 가족에게 보여준 이런 입지적적 위인 전에나 나오는 |
스토리 만으로 형의 인생을 논 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껏 형이 살아 오면서 견지해온 하나가 있는데 |
시대에 형은 정말로 편승 하는게 아니라 끊임 없이 공부하고 습득 하는 습관이다. 시챗말로 얼리 어답터 셨는데.. |
샤무엘을 비롯한 누군가가 알려주는 새로운 정보를 빨리 습득하고 생활에 적용하는 놀라움 뿐 만 아니라 청년 이상으로 호기심이 충만 하셨다. |
또한 온갖 잡기 까지도 쉽게 놓치지 않는 순발력도 두루 갖추고 있음에 더러 놀랍기만 했다. |
그래서 아직도 형은 청춘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그래서 그런지 얼굴도 여전히 젊다. |
나의 경우를 얘기 하자면 언제나 형과 같이 다니면 내가 형인줄 사람들은 착각하는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
형이 나보다 젊어 보이는 것에 기분이 좋기도 하고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내가 기분 나쁘기도 하다.ㅎ |
이 밖에 내가 느껴 왔던 형의 특별함은 다 말할수 없이 많은데 작심하고 체계적인 자료를 미리 갖추고 있지 않아 많이 미흡하다. 아울러 이 기회에 나는 깊이 회개하고 반성 하는데.. |
나는 이런 분을 형으로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자랑 스러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
언제나 시기 질투 하면서 살아 왔다.이런 마음으로 지은 보이지 않는 형에 대한 |
나의 불충과 더불어 같이 따라 가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좋은 날 내가 형에 대해 어릴적 부터 이 나이까지 저질렀던 숱한 모든 잘못에 대해 형의 너그러운 용서를 구한다. |
또 다른 말로 이런 시기와 질투가 좋게 혹은 아니게나 간에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끊임 없이 |
형을 따라 가려는 노력이 더러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
요즘 형한테 내 골프가 우위에 있다는 걸 자랑 하고프다. |
말을 맺으려 한다. |
병곤 형은 우리들의 정신적 대부이고 우리 형제 뿐 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
자랑스런 핏줄이심을 다시한번 새기며 골프에서의 나이와 같거나 적은 숫자의 타수를 기록하는 에이지슛의 성취를 이루는 |
건강한 형으로 지내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정말 좋으신 형수님과 형이 바라는 대로 잘가꿔진 혜진이, 우진이와 사위들 그리고 도연이 민경이와 더불어 오손도손 스위트 홈을 오래오래 가꿔 나가시길 빈다. 형! 사랑해요.그리고 존경합니다. |
첫댓글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어느 집이든 보이지 않는, 또는 보이는 리더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집은 그 역할을 병곤형이 잘 하시어 균형을 잘 잡아 낸 것
인정합니다.
그간 마음 고생도 많으셨어요~~
무슨일이든 그 적절한 시간이 있는데 당일날 하려던 얘기를 때늦게 하자니 마감에 쫒긴 기자처럼 서둘러 썼다.또 글 써본지도 오래되고 책도 읽은적이 없어 글이 좀 두서없네.이해 바란다.
내 얘기를 병무가 칠순소회의 이름으로 올렸는데~
당사자인 내가 읽으려니 과한 표현이 여러군데 있고 너무 미화해 놓은것도 있어 좀 거북하다
형제지만 제3자인 병무가 쓴글이니 내가 나를 돌아다보는 계기가 된점은 있다
제일 과한 표현은 "천재성"운운인데 요즘 말로 가짜뉴스이다
그리고 회계사 합격자수는 펙트인데 1972년에 65명 1973년에 12명 1974년에 10명이었다
돌이켜보면 시험은 운이 7할이상이었고 그 당시 내가 수전증으로 시험보는거 조차
불안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한것은 그 시험기간동안 내글씨 쓰기가 완벽했다는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우째 그렇게 됬는지 모르겠다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