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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풀이 4
.信天함석헌
하나 차차 차차 가다보니까 알려진 것은 뭔고하니 “그렇다, 요리 가면 좋은 일이 있고, 저리 가면 나쁜 일이 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게 옳은 일이냐예요. 그건 이미 심성이 도덕적으로 발달한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화가 있다 복이 있다, 화복이 문제예요. 점은 왜 치는고 하니 화를 멀리하고 복을 얻자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화나 복에만 걸려 사는 게 아니라 선악이 있어요. 그럼 그 해석이 뭔고 하니 선을 하면 화도 복이 되는 거고, 선한 생각을 못하게 되면 복도 화가 되고 만다 하고 바뀌는 거예요.『주역』의 발달이 거기 있어요. 옛날에는 점치던 건데, 공자님이 나서, 그런 게 아니고 근본은 사람이 마음을 착하게 가지는 데 있다 했어요. 마음 착한 것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하늘 뜻을 생각을 해, 그 뜻에 내 뜻을 맞춰 순종하는 거다, 그게 바로 아주 큰 진보예요. 그러니까 중국의 모든 경전은 공자님의 손을 안 거친 것이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중국 역사가 오늘날까지 오는데 서양 나라보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것도 어진 것도 그 때문이에요. 또 인도에서 말한다면 힌두교의 훌륭한 이들, 석가 같은 이들 놀랍게 났던 이들이오. 그게 이 땅 위 일이 아니고 다른 차원 속의, 차원이라도 좋고 위의 차원이라도 좋고, 그런 데가 분명히 있다고 말을 해준 놀라운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은 외양으로 보기에는 같지만, “사람이란 나는 이러면 나빠” 그것은 호오(好惡)인데, 좋을 호, 싫을 오, 호·오에만 걸려서, 좋고 언짢고에만 걸려서 사는 사람은 인간에서는 아주 바닥 사람이에요. 동물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바닥밖에 못 돼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자꾸 복만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건 아직도 정도가 낮아 그래요. 예수님은, 난 늘 하는 얘기입니다만, 복을 부정한 분입니다. 말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마태복음」, 5장 1~12절) 했지만, 그 복이란 복이 아닙니다. 옛날의 복은 아들 많이 낳고, 벌이해서 돈도 많이 벌고, 지위에도 올라가고, 병도 아니 앓고 그게 복이었지요. 구약에서 보면 다 그거 아니에요? 그런 게 신약에 와서야 달라지는데, 옛날부터 사람들이 복을 하도 많이 구하니까, 그걸 뒤집느라고 해서 그게 뭐 복이냐, 가난한 것이 복이다 했어요. 가난하니 구할 다른 거 없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의 마음은 높은데, 저 정신의 나라로 갈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하늘나라 그 사람의 것이 아니냐? 그거 다 역리(逆理)로 설명하는 것인데, 과거에 있었던, 화복에 의해서 사는 게 최고인 줄 알았던 복철학의 인생관은 높은 인생관이 못돼요. 그게 동물보다는 낫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안 이상에는 하나님의 자녀 노릇 하자는 목적인데, 그러자면 복보다는 도덕적으로 어느 것이 선하냐 착하냐 하는 것, 또 어떤이들이 생각을 하는 가운데 발견을 해낸 “사람은 착해야 된다, 모질어선 못쓴다” 하는 것, 그건 우리가 아무리 낮은 사람들이지만 그걸 알기는 알잖아요. 그렇지만 그런 것을 분명히 “우리 나가는 길이 이거다” 하고 전심해서 나가야겠는데 아직도 그렇지 못하고, 대부분이 도덕이 있으면서도 화복에 걸려서 사는 사람, 한국의 기독교는 그래서 아직도 샤머니즘의 자리를 면치 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무당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에요. 궂은 것은 물리고 좋은 걸 맞아들이려면 그러려면 이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고. 그런데 성경만이 아니오. 그것도 어느 면 있지만, 뭣이 중요한가? 옛날에는 호랑이를 만난 다든지 병이 든다든지, 도둑을 만났다든지 하는 걸 궂은 걸로 알았을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궂은 것이라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안하는 것이 궂은 거요. 남을 미워하는 것이 궂은 거요. 돈 그게 있으면 다른 게 다 잘못되니까 이래서 일단 종교가 높아진 건데, 그래서 지금 종교의 표준으로 말할 때는 아무래도 물리적인 건 내놓고, 도덕적인, 간디는 아주 종교의 본질을 도덕이라 그랬어요. 그러나 그 보통 의미에서 하는 도덕에서는 그것도 호오(好惡)가 있어서 말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지경에 올라가면 소위 말하는 “선하냐, 악하냐”를 초월한 지경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 지경에 올라가서 선악의 지경을 초월했다는 것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선악이 뭔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다 알고 그보다 더 높은 지경을 하는 건데, 그건 또 말을 하려면 혼동이 일어날 테니까 여기서는 그만둡시다.
하여간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거는 새 차원이 참으로 열려야겠는데, 문이 열려서, 열린다고 단번에 완전하게 열릴 리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요 실낱만치라도 구멍이 터서 그러면 새것이 시작돼요. 그러니까 그런 줄은 알아야 돼요. 다른 말로 하면 난 대로 있는 지금의 ‘나’ 가지고는 안된다 그 말이오. 이제 그런 말 하면, 첫 번부터 그런 말 하면 내가다 아는 것 같아 잘 생각을 안했을 거예요. 실컷 이럭하고 해야 그게 실감 나지요. 경우로 하면 우리가 그걸 모르겠어요. 다 알지만,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제 “난 그대로 있는 이것 가지고는 못 쓴다” 그 거는 이 말이 너무너무 진보해서 “사람으로선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야지” 그것이 바로 이걸 말하는 건데, 이걸 이 사람들이 잘못 들어가지고 “우리는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해주시는 겁니다” 하는 것은 제법 신앙적인 듯싶은데, 확실히 그런 면도 있긴 있어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또 가려지는 면도 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서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면을 좀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가지고, 난 대로 있는 이 사람 가지고는 안된다는 거, 난 대로 있는 이 사람은 아까 얘기대로 ‘좋다’ ‘언짢다’ 에 대부분이 걸려 있어서, 그러고 또 감정이 앞장서서 “행복하게 행복하게”만 찾아요. 나는 본래 내 마음에 그런 것이 있어서 그러하지만 소위 그 복지국가란 말 아주 듣기 싫어요. 어떡해서 국가 최고이념이 복지국가예요. 사람들이야 배부르게 잘 먹으면 다 좋다 그러니까, 그리고 표를 얻으려니까, 내가 어떡하든 배부르게 해주겠다 해서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그러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한 국민을 이끌어가려는 표어가 그럴 수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세계가 물질주의로 내려오기 때문에 잘못돼 그렇지만, 잘못돼긴 잘못됐지만, 이것은 올라가던 길에 일시 내려오는 것이라서 이게 영 내려가진 않을 겁니다, 다시 올라가야지요. 이걸 초월해서 사람이란 결코 행복에 걸린 것 아니라 하는 걸 알려줘야 해요.
그런 의미에선 난 기회 있는대로 말합니다만, 거 해방이란 것이 왔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특질은 멋을 아는 것이라고 자꾸 강조하는데 난 아주 그거 싫은 사람이오. 멋은 무슨 놈의 멋이오. 젊은이를 다 못쓰게 만드는 게 ‘멋지게 산다’는 거요. 왜 사람이 멋에 살아요. 어느‘의미’ 에서 살아야지. 그거는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멋이 있다면 있지요. 물론 고상한 멋이 있지요.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런 따위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건 천박해요. 알아듣기 쉬우니까, 멋지다 멋지다 그러니까 그만…… 해방 전에는 그런 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족의 특질이요, 자랑거리요, 자랑은 무슨 자랑할 거리가 많아요? 남들에게 그러면 너무 저열감에 빠져 그런다 그럴는지 모르지만 멋이 뭐요? 내가 어느만큼 못났나 그거 알아야지 잘났다만 생각하다 보면 가뜩이나…… 이걸 가지고, 이걸 가지고는 안되는데, 안되는데. 그런데 우리가 그 점에 아주 약점이 있다 그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이 세계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해가는 게 뭘로 되는지 아십니까?
이거 반드시 기독교요 불교 하는 따위 고상한 종교들이 있으니까 되어 가는 면이 있지,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서양 사람들이라고 다 기독교대로 했습니까? 거 안하는 사람들 아니해요. 동양 사람들이라고 다 불교나 힌두교 뜻대로 했습니까? 그도 안 그렇지요. 그런데 그러면서 이렇게 ‘트기’예요. 완전히 기독교적은 못돼지만, 그래도 현실을 유지해가는 것은 서구적인 지성이에요. 이 우리는 그 서구적인 지성이 뭔지도 몰라, 야만 노릇을 해요. 해수욕장에 와서 이렇게 더럽게 할 법이 있어요? 하나님은 못 믿더라도, 서구적인 사회 조직만 알아도 이렇게 더럽게는 안할 거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당최 그걸 몰라요. 그럼 거 서구적인 지성이란 거는 17 세기 18 세기 근대에 오면서 발달한 건 데,그건 사실은 기독교 신앙 아니고는 안됩니다. 기독교신앙에 근본이 있는 거지만, 그것하고 또 다른 이 세상의 중요한 것하고, 거 ‘트기’란 건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된 건데, 그래도 서양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점이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여기 세계에 있어서 세계의 문제를 요리해가는 데 그 서구적인 이성조차도 약해지니까 이렇습니다.
요새 가령 말합시다. 그 폴란드의 높은 것이 어디 있나 그러면 따지고 보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그러고 싶겠지만, 기독교적까진 또 몰라도, 물론 거기서 나온 것이지만, 서구적인 지성 때문이에요. 소련보다 높아요. 높은 거니까 정치적으로 그 약한 것들이 그만큼이라도 버텨가잖아요. 놀라운 사람들이에요. 거기도 저번에 듣는 말로는 우리들처럼 건망증이 있긴 있다고 그럽디다만.
그러나 우리는 건망증이 심해요. 4.19 했으면서도 잊어버리고 5.16 하고도 잊어버리고, 지난해 5월 18일 하고 또 다 잊어버려요. 광주 사람들은 안 잊어버릴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잊어서 걱정이 아니라 다 잊어버려서 걱정이오.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걸 상기도 잊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인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잊어버려서 걱정이오. 그래도 상처가 그만큼 났으면 이것이 얼마만큼 아픈지 그걸 알아야겠는데, 영 잘 잊어버리잖아요? 그런데 폴란드 사람들은 잘 안 잊어버려요. 저번에 누구가 그랬습니다만 “폴란드 사람은 안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라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 뭐냐 하면 그래도, 자꾸 반복하는 말인데,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 그래야겠지만, 유럽에서는 다른 종교 없습니다. 그저 야만적이던 거, 우리 동양이 문명했다 그랬을 때는 그저 야만적이던 사람들이었어요. 유럽 천지에서 거 사냥질해 먹고 살아왔다는데 그거 야만적인 거예요. 그러던 건데 로마제국 통해서 거기 기독교 들어 간 다음부터 이제 야만의 지경을 벗었던 사람들인데, 그래 그거 트기예요. 완전히 기독교적인 건 못돼도 그래도 사람이하고 뭔가란 이성으로 써 깨달으니까.
우치무라 선생 성경 해석에 재미있는 거 있어요. 나는 많이 잊어버렸지만, 성경에 그런 것 있잖아요? “하늘나라가 뭐 같은고 하니 겨자씨 같다. 겨자씨가 지극히 작은 물건이지만 그걸 심기만 하면, 어떤 나무보다 커서 공중에 나는 새도 와서 깃들인다”(「마태복음」, 13장 31~32절) 그랬어요. 그런데 이 선생님이 재미있는 거는 뭔고 하니 “그럼 그 나무에 깃들이는 새들은 뭘까? 그중에는 비둘기도 있겠고, 독수리도 있겠고, 올빼미도 있겠지” 그랬어요. 그게 무슨 소린고 하니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기독교적으론 완전히 못돼도 문화가 발달하면 선하고 악한 놈이 다 깃들일 수 있도록 문화가 발달을 한다, 그 말을 하느라 한 말인데, 재미있는 말이에요. 서양 문명인 기독교라고 하는 진리의 나무가 커서 그 가지 사이에 비둘기도 있지만 올빼미 같은 따위도 있는 거요. 그래서, 군국주의도 거기서 나왔고, 제국주의도 거기서 나왔고, 그랬지만 그래도 그게 사람의 속에 있는 이성을 깨워줬으니까 우리 이성이 비교적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이성은 지켜가야지” 하는 게 있어요. 수십 년 전에 오산학교 선생으로 계시던, 미국 유학도 한 분인데, 그분 얘기가 재미있어요. 미국놈들 남의 가게 지나가다가 바나나 도둑질해 먹긴 해 먹어도 바나나 껍질은 쓰레기통에 놓고 가지 그걸 가지고 가진 않는다는 거예요. 거 도둑질해서 훔쳐먹긴 훔쳐먹어도 그걸 길바닥에 버리는 건 도덕적이 아니란 건 안단 말이오. 이러니 그런 게 다 서구적인 이성이에요. 우리는 약점이 뭔고 하니 이성이 없어요. 조금 돋아나려고 하는 요거나마 없애버리려고 그러고, 칼로 무찌르려고 그러잖아요? 이게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러니 그 지성이 옳게 발달을 하려면 신앙이 없이는 안돼요. 아까 내가 하는 말이 “이대로는 안된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성이 제법 발달했다는 사람들도 “이거면 다지. 이거면 됩니다. 그 담 모릅니다” 그런단 말이오. 기독교 믿는 사람들이 하늘나라 이야기 하지만, 그 하늘나라를 정말 내 나라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다면 그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는 안 할 거요.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늘나라에 대해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뭣이 유익하리오” 한 것은 하늘나라 백성 노릇 하라 그 말이라고, 하늘나라 다들 백성이라고 참으로 알았다면 사회 정의가 이럴 수 없어요. 또 데모하는 학생들이, 물론 그중에는 망나니도 더러 있긴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왜 이 학생들이 이렇게 데모를 하나. 왜 공장의 아가씨들이 이렇게 하나” 그걸 생각을 해보고 그걸 알아가지고, 이거 이대로 두면 안돼지 하는 생각쯤은 으례 일어났어야겠는데, 수백만 기독교도라고 그러면서 그거는 마치 보지도 않은 것처럼 그럭하고 있는데, 그걸 일본말로는 ‘버그라시’ 라 하지요. ‘보면서 죽이는 거’, 남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받아서 감사하다” 하는 거, 이건 ‘아편’이지요. 그거야 내 행복철학이 맞바로 나와 그러지, 만일 하나님을 바로 알아서, 하나님은 “내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이다.” “네가 정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할 때까지는 이땅을 그대로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사회 한구석에서 그러고 있을 때 어떻게 편안히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현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당의 큰 건축물이 쑥쑥 올라간다고 하는 거는,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 사람인가? “이거면” 다라 그래요. 이거 말고는 다른 거 있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요한이 강조해서 말하는 거는 “이거, 이 몸만이 아니다” 그거예요. 시간이 있으면 다 읽어봤으면 좋겠지만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집에 가서 한번 읽어보세요.
그래 처음부터 “네가 고쳐 나야 한다”는, 그 고쳐 난다는 거는 실례로 얘길 하는 게 아무리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될 가능성은 여기 있다, 하나님의 모습이 이 속에 있다 하는 걸 증명을 해서, 이제 사마리아의 길가 집에서, 남편을 다섯 번 여섯 번 바꾸었던 갈보네 집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 사람보고 물 좀 달라고 하는 거는 우연이라면 우연이지만, 예수님에겐 우연 없단 그 말입니다. 언제든지 만났으면,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건 내가 이 말로 나도 심판을 받을 것이니까 무서운 말입니다만,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니까 말 안할 수가 없군요. 사람을 만났으면 그저 헤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요번에 뭐라 그러지, 그저 가면 안된다 그랬나? 그저 가면 안되는 건 뭐예요? 요샛말로 하면 그걸 단단히 우려먹고야 놔주겠지 그 생각 할지 모르지만 이건 그것과는 정반대 아니에요?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그 계집을 놓고 뭣할려고 그랬겠어요? 물 달랬으면 한 바가지 얻어마시고 가면 그만이지. “네가 하나님의 선물이 뭔지, 또는 너와 말하는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네가 도리어 내게 물 달라 그랬을 거고, 그럼 나야말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줬을 거다”(「요한복음」, 4장 4~19절) 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높은 도리를 말했겠어요? 예수님은 다른 사람보다는 뚫어보잖아요. 보면 다 아는 건데, 다 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저 놓고는 안 가요. 그저 놓고 갈 수는 없지요. 그저 놓고 왜 가요? 그건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단단히 우려먹고 가야지요. 그냥은 못가요. 그래 그 여자 하나 얻어놓고 뭐라 그랬어요?
제자들이 “선생님 점심 잡수시오” 할 때 “난 먹었다” 대답했어요. 그래 제자들이 누가 갖다줬나 했을 때 “난 먹는 양식이 따로 있어.” “뭐요?” “그건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거다.”(「요한복음」, 4 장 31~34 절) 하늘 아버지의 뜻이 뭔가? 이 헤매는 딸 하나가 세상에 와서 하나님 찾으란 거를 잘못 찾아가지고, 사랑한다는 게 잘못 알아가지고 남편을 다섯 번 여섯 번 갈아가면서 그러다보니 낡은 신짝이 됐어요. 세상에서 짓밟으니까, 자기 것을 또 자기가 짓밟아버리니까, 그게 비극이에요. 개인에도 그렇고, 그 ‘나’를 짓밟을 때 “나를 왜 이래” 하면 괜찮은데 “그래 나 같은 건 사람이 아니지” 하고 자포자기해버려요. 갈보들 보면 불쌍한 것이 그거예요. 사람들이 자기를 그저 고깃덩이로 알고 그걸 이용해먹으니까 “좋아. 우리 같은 거야 뭐, 그런 거지 뭐” 하고 그런 식으로 자기를 부정해버린다고 하면 일어설 기회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연히 만났던 것 같은데, 그걸 그냥 놓고 갈 수 없지요. 육신의 목이 타는 것은 내 목이 타는 거지만, 그 여자야말로 영혼의 목이 타서 죽게 됐어요. 얼마나 어리석으면 저렇게까지 됐을까. 그걸 그래도 목을 축여 주고 가야지. 그래서 끈질기게 끈질기게 문답을 하는 거 아니오. 그렇게 해서 종래 그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는 말이 뭔고 하니 “가서 네 남편 데리고 와” 하는 거예요. 그 여자의 제일 약점, 제일 아픈 데가 뭔고 하니 그건데, 그걸 지적해주니까 양심이 깨버렸잖아요. 깼으니까 “우리들은 여기서 예배봐야 한다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이라 합니다” 하고 진지한 토론이 나오잖아요? 이제 속에 있던, 제가 짓밟아서 죽었던 것이 깨기 시작한 거예요.
그럼 이제 새 차원이 나와요. 얼마나 그 사람이 다른 차원인가 이제 보세요. 아주 놀라운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 산에서나 저 산에서 예배라는 그런 따위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며, 영으로 예배하니 일체 형식이 없다 그 말이에요. 일체 형식이 없는 그런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세상에 그런 높은 차원이 어디 있어요, 그런 높은 차원이 그렇게도 타락했던 그 여자가 즉석에서 살아날 수 있게 하는 차원이, 그건 니고데모보고 “네가 고쳐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 갈수 없다”던 그 말을 말씀하신 건데, 이걸 기록한 사람이 일부러 계획적으로 넣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2장에 물이 포도주 되는 가나의 잔치 얘기 해놓고, 그담에 니고데모에게 문제 제시해놓고, 그담에 이 여자에게 그 실례를 보이고. 그런데 예수님이 “너 이젠 들어가서 전도하라” 그런 말은 안했어요. 다만 영혼이 살아나는 말 한마디 말해주니까 그 여자 스스로 물동이 그만 놔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해주러 가잖아요.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목이 타는 사람들인데 어서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줘야지.” 그래 전도하면서 “세상에 이상한 사람 있다. 내한 일 얘기 안해도 다 아는 사람 있다.” 거 보통사람 아니란 말이에요. 이 땅의 사람 아니란 말이오. 그래 “이 사람이 메시아 아니냐” 해서 사람들이 나와서 믿게 됐다는 실례. 그런 게 4장에 있다는 거 그걸 생각하고 보시오. 뭐 계획을, 프로그램을 짜신 것 아니겠지만, 어쩌면 우리 보기에 일부러 계획을 짠 것같이 보여요. 우리가 보기에 그렇단 말이에요.
그러면 왜 그래? 진리가 트이기 시작하면, 모든 일 그래요 모든 일이. 그래 ‘도가 뚫린다’ ‘도가 통한다’는 건 알 걸 하나를 알면 무슨 문제에 가더라도 그냥 쓱쓱 “그렇지, 그렇지” 그렇게 돼요. 해수욕장엘 가도 믿는 마음으로 가면, 하나님이 분명 계시다 하는 걸 믿는 마음이 내게 있다면, 그렇다면 이처럼 도덕이 문란하거나, 지저분해지진 않았을 거요. 전쟁판엘 가도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을 거기서 봤을 거요. 틀림없이 봤을 거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깨서 일어나나 그게 문젠데, 요한이 얘기하잔 건 이걸 깨워주잔 거였어요. 겉에 있는 예수님은 이렇다 하고 말해주는 것도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든 살리고 고치는 그 기적 같은 것보다는, 그 기적을 함으로 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그걸 말하려는 거예요. 예수님이 바리새 교인들과 무엇을 논쟁을 했다, 옆에 보는 유대 사람들이 어땠다, 그걸 주로 말하려는 데 있어요. 「요한복음」의 특색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말한 비유 정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째고 수술하는 모양으로 알려주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가다가 유명한 6장이 나와요. 6장을 얘기할 때 돌아가신 유영모 선생님은, 거 6장이 “여섯 육(六)”자 6장이지만, 그걸 “고기 육(肉)”자 6장이라고 그래요. 이 이야기가 뭔고 하니 “이놈들아 너희가 나를 따라온 것은 기적을 한 것 보고 놀라서 따라온 거냐? 겉으로 본 그거 아니라, 실컷 먹여줬으니까 배가 불러서 왔지. 그러니 세상에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혼이 죽지 않는 올바른 양식을 위해서 일하란 말이야” 그랬어요. 이건 먹었다는, 빵이란 걸 가지고 새 차원을 열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로 내려가다가 뭔고 하니 결국엔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먹지 않으면 안된다”(「요한복음」, 6장 53~58절) 이건 정말 참 무서운 말인데, 우리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그 자리까지 갔느냐 하면, 못 간 경우가 많이 있지 요. 그런데 예수님은 얼마나 하면 자기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을까? 제자들도 그 말을 감당하거가 어려워서 떨어져나가기도 했다잖아요. 유대 사람들에게 살을 먹고 피를 먹으라고 하면 그건 죽는 거보다 더한 일이에요. 그러니 제자들도 “이런 어려운 말은, 이게 무슨 소리냐? 이걸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는 말일까” 하니까 “아, 그래? 너희도 그걸 모르느냐? 너희도 그럼 다 버리고 갈 거냐?” 그랬잖아요. 거 얼마나 하면…… 그래 그걸 풀어서 가르치니까, 깨닫잖아요? 말씀하셨던 예수님 속을 얼마만큼 아는가가 중요해요. 겉에 있었던, 손만 대면 살아나고, 귀신보고 나가라면 나가는 그 현상들을 보고 놀라와했던 그것도 있을 수가 있지만, 그것이 나온 것이 어디서 나온 건지 그건 풀어서 말씀을 안하면 안되는데, 이이는 이런 점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걸 자료로 토론을 한 게 많이 있어요. 토론을 하는 동안에 참 자 기가 계시는 세계가 어떤 거란 걸 말을 하잖아요. “내 피를 먹어라, 내 살을 먹어라.” 그리고 그담에 뭐라 그러셨지요? “내가 이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9장 5절) “내가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다”(「요한복음」,6장 48절) 그랬다가 “내가 하늘에서 나온 샘물이다. 목마른 이는 와서 마셔라”(「요한복음」, 7장 37~38절) 그런 거를 따라 내려가면서 보셔야 해요.
그런데 차차 충돌이 돼가요. 충돌이 돼가니까, 바리새 교인하고 논란이 자꾸 나오잖아요. 그래 안식일 문제가 나와요. 이놈들은 형식화된 그 종교를 가지고 예수를 몰아치려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그런 거 두려운 거 없어요. 아주 태연하게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일부러 안식일을 골라서 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일부러 골라서 한 것은 아닐 거요. 그건 자기 속에 확신이 있으니까 “저 사람들이 이걸 뭐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가르쳐주는데, 제자들도 그랬지요. 뭐랬지요? “선생님 저 사람이 눈이 먼 건 저의 죄로 그렇습니까, 부모님 죄로 그렇습니까?” 그건 보통 종교의 토론이에요. 굳어진 종교도 종교가 아닌 건 아니지만, 아주 형식화된, 교리화된 종교예요. 그런데 그것 가지곤 안돼요. 그러니까 놀라운 대답이, 예수님도 뭐 그런 생각이 있지 없겠소만 “아니다. 그거 하늘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 그런 거다”(「요한복음」, 9장 1~3절)예요. 이게 새 차원에서 주시는 말씀이오. 세상의 이성의 논리로는 통할 수가 없는 말이에요. 그 차원에 올라가려면 화냐 복이냐 그걸 초월해야지, 그래야만 선이냐 악이냐의 차원이 나와요. 그러나 이것도 정말 높은 것은 아니고, 그보다 좀더 높이 올라가면, 가령 “제 죄로 그럽니까 부모의 죄로 그럽니까” 하면 그건 상당히 도덕적으로 높은 차원이 아니에요? 모든 교리는 그런 곳에 머물러 있던 거요. 그러나 예수님의 본 뜻은 그런 게 아니오.
그건 뭔고 하니 그건 정말 이 위에 올라간 그 차원인데, 그런 걸 이제 차차 알려쥐요. 알려주면 줄수록 “말씀이 육이 돼서 자기 세상에 왔는데 세상이 몰라보더라”(「요한복음」, 1장 11절) 혹은 “빛이 어둔데 비쳐도 받아들이지 않더라.” 받아들이는 일부 사람이란 말은 내가 하는 말이지만. “그건 믿는 것인데 그걸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한복음」, 1장 12절) 목적이 거기 있어요. 자녀 되는 그 힘을 주시게 된다. 그럼 이제 화복의 차원 선악의 차원 그런 것도 떠나서, 위로 올라가서 정말 모든 게 하나님에게 나가서 하나님 뜻대로 된다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는 그 차원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을 해줬는데, 말해주는 고로 인해 이쪽은 더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아주 결정적으로 틀어져요. 물론 거기까지 내려가는 동안에 “내가 양의 우리의 문이다”(「요한복음」, 10장9절) 그런 말도 해주는데 그것도 많이 생각해보셔야 돼요. 어쩌면 사람이라 그러면 “네놈도 좋다. 그놈도 좋다. 다 들어오너라” 그런 무차별로 부르는 거지만, 그러나 또 그것만 알면 안돼요. 예수님 말씀 “내가 양의 우리의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목자지만, 다른 곳으로 들어오는 자는 목자가 아니고 도둑놈이다. 나보다 전에 왔던 자는 절도요 강도다.“(「요한복음」, 10장 8절) 참 이해하기 어렵다면 어렵지만 그걸 이해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께 간다면 그저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무제한으로 그러는 줄 알지만 꽉 지켜야 하는 거요, 지켜야 해. 그런 점은 각자가 잘 깊이 생각해서 하실 거지. 우리가 외양으로 뭘 이렇게 결정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저마다 다르니까 어느 의미에서 하면 어떤 분들은, 여기서도 얘기됐던 거니까 합니다만, “술 먹을 줄 모르면 목사 아니다” 그건 까닭이 있어서 하는 거예요. 목사가 되려면, 술·담배 따위의 깨끗함을 구별해가지고는 하늘나라 복음을 전할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는데, 내가 목사연해서 “술도 담배도 안 먹는다” 하고 아주 이렇게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여늬 사람이 열고 올 수가 없어요. 왜? 이 세상에 도덕이란 것이 잔뜩 있어가지고, 고자세가 돼가지고 이러고 있는 건, 오는 길을 막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새 교인들 보고 “야 이놈들아. 네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어서 너도 안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잖느냐”(「마태복음」, 23장 13절) 하는 건 어느 의미로는 지금 있는 교회도, 우리도 교회라고 할 때 나를 빼놓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어느 의미론 그런 역할을 해요. 천국문이 있는데, 열쇠를 쥐고 있긴 있는데, 그럼 참의미로 말한다면 문을 개방해서 다 들어 갈 수가 있어야겠는데, 못 들어가게 하는 그런 면이 있어요. 그것도 있지만 또 반대되는 면도 생각하면 그렇다고 해서 또 양쪽 문다 활짝 열어놓고 “누구나 그저 좋습니다” 하면, 말은 좋아요. 그래 우리가 각계 각층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려고 하면 괜히 내가 도덕주의로, 정결주의로, 깨끗하게 요렇게 아주 고답주의로 해서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그러는 건 도리어 교육자가 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막걸리라도 같이 마시면서 민중의 한품 속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건 좋다면 좋은 의미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또 문제점이 있어요. 그것도 뭐 신약에 와서만 있는 것은 아니고 옛날에도 다 있었어요. 이러면 여러분들 이제 유교의『맹자』를 읽어보면 알지만, 옛날에 성인이라 하던 분들이 같지는 않아요. 백이(伯夷), 숙제(叔齊)란 분들이 있고 이윤이란 이가 있었고 노한이란 이가 있었어요. 다 훌륭한 이들인데, 그걸 이제 맹자가 설명을 하잖아요. 백이란 사람은 맑고 맑은 사람이오. 동네 사람들이 모자만 조금 비뚤어지게 썼어도 “에이, 저사람 못 사귈 사람이야” 하고 못 견뎌 한다는 거예요. 그래 그런 사람을 싫어하길 내가 깨끗한 예복을 입고 진창에 앉는 것처럼 싫어했어요. 백이는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긴 해요. 지위를 주겠다고 해도 폭력을 해가지고 하니까 줘도 싫다고 그러잖아요? 이놈의 세상 내 뜻에 맞지 않으니까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 고사리라도 캐먹으면 먹었지, 더러운 것 받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거 얼마나 높은 자리예요? 그러니까 깨끗하고 좋은 이지만, 맹자가 말하기를 “그거는 좋긴 좋은데 너무 좋아 못쓴다. 내가 깨끗하려고 하니까 너무 좋아 못 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하면 막걸리라도 한잔 들이켜면서 “여보시오. 요새 일하기 얼마나 힘이 드오” 하고 그 사람의 아픈 데를 이렇게 알아주고 하여 신앙으로 이끄는 일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거는 일률로만 얘기할 수가 없어요. 술과 담배를 왜 반대하는고 하니 그걸 마시는 그 일시는 모르지만 이제 들어가면 정신을 그냥 있게 안합니다. 이건 마취를 시키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 정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그런 면도 있기는 있지만,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감옥에 있으면서 보니, 아 세상에 도둑질하고 들어와 간수에게 두들겨 맞고 벌레벌레 기어들어오면서도 꽁초를 도둑질해 들어와요. 들어와서는 “옛다” 하면서 저희끼리 나눠먹는데, 매를 맞으면서까지, 그게 얼마나 매력이 있으면 그래요? 그건 담배에 매력이 있으니까 그러겠지만, 양심을 지키지 못 하게 한다면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지요.
술이 싫으면 술집 멀리 하는 게 좋지, 일부러 가까이 가 있으면서도 “견디어볼래” 하는 건 못쓰는 소리예요. 그건 괜히 해보는 소리요. “나도 뭐 술이 어떤가 실험해서 알아보려고 그럽니다” 그것도 못쓰는 소립니다. 그건 아주 한번 들어가면 정신을 흐리게 해요. 아무리 좋던 친구들도 술 마시게 된 담에는 딴 사람이 돼요. 그런 걸 아니까, 또 일반으로 하면 우리나라는, 중국 같은 나라선 술로 사람은 잘못되지 않아요.
그 나라는 어째 풍속이 그렇게 돼서, 술 먹을 때는 예법을 꼭 지켜야 돼요. 그 사람들은 말이 그래요. 술 한잔에 절 백번이라 그래요. 요만 한 잔에다 받아놓고는 절하고…… 술을 마시지는 않아요. 입에다 이렇게 대지. 영어의 ‘드링크’ (dringk)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사람은 꿀꺽꿀꺽 그저 마시지만, 커피를 줘도 꿀꺽꿀꺽 마시지만. 아 세상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그래 서양 사람들이 흉을 봐요. 커피란 입술에 대고 맛을 보며 얘기하는 맛에 마시는 거예요. 십(sip). 이걸 뭐 다 마시려 그러면 두 잔도 먹고…… 남의 걸 흉내내는 사람은 그런 거예요. 속알이 없어 그러는 건 좋지만, 그래도 지킬 것 있는 거는 지키고 그래야 돼요. 중국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는지 술을 마시는 법은 없어요. 그저 요만한 잔에다가 맛보고 절하고 맛보고 절하고 하다보니 취하는 법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 일본 사람, 러시아 사람들은 주정뱅이오. 그저 뒹굴어 먹어요. 지금 대낮에도 뒹구는 사람 있잖아요? 그래 술 먹으면 사람이 그렇게 되는데, 나만은 안 그렇다하고 술 먹을 수 있어요? 거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이 피해가, 이 사회가 술로 인해서 이런 피해가 있다, 이젠 금주란 소린 하지도 않아요. 옛날엔 금주 소리나 했지만. 폐해가 그렇게 있는데 그걸 보고 “나는 고자세는 안되니까. 민중과 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러는 건 좋긴 좋지만, 그건 어느 정도는 자기 아첨이 들어 있는 거요. 못써요. 난 반대해요. 젊은이들에게는 더구나 그럽니다만 아예 술 먹는 거는 그만두자 해요. 이때까지 했더라도 그건 그만두는 거예요. 그러는 게 좋을 거요. 담배도 한번 빨게 되면, 그건 이 신체의 건강에도 나쁘다는 걸 다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뭐 내 의지를 얼마나 믿어서 적당하면 그만이지에요? 말이 적당하면 그만이지,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러니까 아예 그런 거는 연약한 사람인 척하고 안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건 이제 말하다가 사회에 이렇게 문제가 있는데 어쩌면 그런 건 못 보고 나 혼자만 자신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러는 걸 좀 분명히 말해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말입니다. 사회 전체를 보면 개인이 아니라 일반으로 보면, 바울 모양으로, “나야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술을 먹을 수도 있고, 그래도 내 신앙에는 까딱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구 바울 선생이 어쩌면 제사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난 안 먹어도 좋다.” 그게 정말 사랑이고 그렇잖아요. 그런 마음씨를 가져야 할 건데, 그렇지 못한 데가 많이 있어요.
얘기가 옆으로 많이 나가서 안됐습니다. 이제 시간이 이 시간밖에 없으니까 이 소리 저 소리 많이 나가서 이렇게 됐습니다만, 아까 그 양의 우리라는 거, 그 우리, 우리엔 문이 있는 거 분명 알아야 돼요. 예수님 그 말 하신 거 뜻이 있어서 하셨을 거니까, 그저 문도 없이 확 개방해서 이러는 거 아니란 거. 양은 착한 짐승이지만 양에겐 그 약점이 있어요. 헤매요. 또 그건 순하니만큼 도둑을 만나기 쉬운 거니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울타리는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노상 믿음이란다고 해서 길도 없고 아무 거 없이 한다는 건 그건 이상주의로만 그렇지 실지로는 안 그렇습니다. 그런데 순, 순복음이란 걸 강조하는 사람들일수록 도덕 적인 무슨 지킬 것을 말을 하면 “그건 도덕주의지, 인간의 교만 아닙니까” 하는데, 그건 그런 거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 용서해 주는 걸 믿을수록 나대로 지킬 걸 지켜가야. 물론 지킨댔자 한계가 있지, 사람이 완전히 지켜낼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뭐 다 용서해줄 거요? 난 아주 듣기 미운 소리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하라고 하니까, 기독교 믿는 사람이 신사참배 하는 것은 우상숭배 하는 거란 걸 알긴 다 알면서도, 그거 안했다가는 잡혀가서 매맞을 테니까 그게 무서워서, 가서 하고는, 말이 뭐란고 하니 “뭐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다 아시니까 용서해주실 거야” 하는데 아주 나쁜 소립니다. 제가 뭐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설사 용서를 해주신다고 하더라도 그럴수록 “죽을 죄를,잘못했습니다. 지옥 가도 좋습니다. 지옥이라도 보내주시오.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이랬으니 살아가지고 뭣합니까”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를 하겠지만 “하나님이니까 다 용서해주실 겁니다” 그러는 건 용서해 주려다가도 안해주실 거요. 그거는 용서고 뭐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고하는 소립니다. 이런 말이 다 잡담 같은 얘기지만 우리 신앙계가 우리 사는 이 주위가 하도 어지럽고 이러니까 그래 하는 말입니다.
그래 그담은 하는 얘기가 포도나무 가지를 가지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내가 참 포도나무다. 너는 내게서 떠나선 안된다” 그거 분명히 알아야 돼요. “내게서 떠나선 안된다.” 우리는 이론으로 하면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은 사람이에요. 동양 도덕으로 한다면 “하늘이 준 천성,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성격이 여기 있다” 그러니까 “그 천성에 따라서 하면 된다.” 그래서, 그대로 따라가면 될 것 같은데. 실제 그 이론대로 안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쓰고 하면 그건 “네가 교만해서 의롭다”고 하여 그런 거 아니냐 그럴는지 모르지만,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참 마음은 아버지가 용서를 해서 그거 안본 체하면 할수록 그 아들 편에서는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한데 아버지가 책망도 없으시니, 참 더 어렵다” 그렇게 생각해서 주의하는 것이 아들 된 도리지요.
그러니까 난 그 점 논리가 잘못된 거라고 그래요. 결코 하나님이 다 하시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것과, 내가 나 할 노릇을 힘을 써서 해야 된다는 것과 혼동을 하지 마세요. 내가 그걸 해서 그 공로로 하늘나라 들어간다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내가 노력 할 것은, 되고 안되고는 별개 문제라도, 내가 적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해보려는 노력은 해야지, 노력도 안하면서 뭐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사람인 걸 아시니까 용서해주실 거라 하는 건 믿음이 뭔지 모르는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좁은 길’ 가려는 태도가 아니에요. ‘좁은 길’은 왜 있겠어요? 내가 좁은 길로 들어가니까 좁은 길이지. 내가 가려고 하니까 좁은 길이지, 드러누워 “하나님이 끌어다주시겠지” 하는데 좁은 길이 될 리 있어요? 내가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내가 내 발로 걸어 들어간다니까 어폐라면 어폐가 있지만, 내가 그 좁은 길이라도 가려고,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이길 건 이기고, 버릴 건 버리고, 참아야 할 건 참고 가야 한다면, 있는 걸 모두 버리고 날 따라오라 그랬는데, 그게 어떻게 내맡겨두고 하나님이 무조건 될 거라는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될 수가 있어요? 그거는 이 신앙을 생활한다는 그 점을 생각해보지 않는데서 나오는 잘못일 겁니다. 그래 옛날 있던 ‘화복’ 하던 때 머물러있던 그 종교에 있기 때문에 은혜 받는다고 하는 소리만 강조해서 그렇지,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명령이 오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서 해야지, 아버지의 뜻이 뭔지 알아봐야지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아마 그런 소리는 안 나올 겁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서 갸륵하게 그런 데에 마음을 써서 노력하려는 걸 보면 그걸 교만주의라, 바리새주의라 인간주의라 이러고 비난하는 건 난 아주 찬양을 할 수 없어요. 그래 좋은 실례를 든다면 간디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거기 있는 기독교인들이 간디를 기독교인을 만들려고 힘을 아주 많이 썼어요. 그런데 간디가 왜 기독교인이 못 됐나 그러면, 주일 날 가면 자꾸 그런데요. “당신 그저 아무 고민하지 말고 모든 우리 잘못을 하나님한테, 예수님한테 내맡기시면 평안이 온다” 그러는데, 그럼 감사해서 그럴 수가 있지만 그담에 보면, 주일날 교회 가서는 감사한다고 그러고 그담에 가서는 또 나쁜 짓을 다하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 이 하나님의 죄 사함을 입는다는 은혜란 또다시 죄를 짓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더라” 그랬어요. 그래 간디는 “죄를 짓고 그것이 괴로워서 없어지길 바라는 것보다는 잘못됐으면 잘못된 대로 그것 때문에 그걸 이겨보려고 고민을 하는 게 차라리 낫지, 그걸 잊어버리려고 하는 건, 나는 영 그러고 싶지 않더라” 그래 간디는 종내 기독교인 못된 겁니다. 그러니 그거는 간디에게 전도하던 그분들이 부족해서 그랬지, 간디가 안돼서 기독교인이 못됐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간디를 옆에서 바로 잘 안 사람은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 사람은 타고난 기독교인(Natural Christion)이다” 했어요. 스탠리 존스 목사가 한 말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하기를, 예수님의 뜻대로 비교적 충실하게 해서 훌륭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준 이가 간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제 그런 점의 높은 차원을 알아서, 여기서 실지 내 살림에 사랑과 참을 실천해보려 해도 물론 잘못되는 거 많이 있지요.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포기하고 하나님이 용서하는 데 무조건 의지하는 것 그건 하나님 뜻을 모르는 거지요. 그런 고로 나는 우리 기독교가 정신력이 이렇게 박약하게 되었다고 그래요. 사람이 가다가 실패를 하고 고민하는 면이 있더라도 힘껏 내가 내 몸에서 실현해보려고 노력을 할 때, 잘못은 했더라도 어느 무슨 빛을 보는 것이 있지, 그런 건 없이 그저 예수님 충실히 믿고, 돈은 쓰다 남은 거 있으니 충실히 연보는 내고 하면 하늘나라에 저금통장이 있는 셈이니까, 하늘나라에 문제없이 가겠지 하는 것은 안일한 종교지,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그래 너무 쉽게 됐던 안일한 길을 걸으려고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닌가 그럽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은 이「요한복음」13장 이하를 특별히 다루려고 하다가 맘에 대중이 없이 이렇게 됐습니다만 13장 이하는 왜 그런고 하니 그렇게 그렇게 하면서 12장까지 오는 동안에 무슨 결과가 났다고 하니 예수님이 가르쳐주면 가르쳐줄수록 자꾸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와 결렬이 돼요. 마지막엔 그대로 파탄으로 가요. 그러니까 예수님 편에서 하시면, 덮어놓고 정면충돌하자 그런 분은 아니에요. 나는 이 점은 데모요, 뭐요 하며 싸우자는 분들에겐 좀 말하고 싶은데, 일부러 내편에서 도전을 해서 상대편을 자극을 시킬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러니까 요새 날보고 무력하다고 그러는데, 그런 소리는 괜찮아요. 뭐 욕은 먹을 줄 알고 하는 소린데, 저번 주일에도 젊은 사람들이 날보고 힘이 왜 그렇게 빠졌냐고들 합디다만, 난 그걸 알고서 그래요. 예수님은 정면충돌하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 사람들이 신경이 바짝 날카로와져서 “저놈이 어떤 놈이냐” 하니까, 제자들보고 “여기 있지 말고, 가자” 했어요. 그러나 죽이려고 그러니까 죽는 것이 무서워서 피해간 이는 아닙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