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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왕산, 북악산
2025년 02월 16일(일요일)
산행코스 : 광화문광장(08:45) - 사직단(09:25) - 황학정(09:30) - 범바위(10:00) - 인왕산(10:10) - 기차바위(10:30) -윤동주문학관(11:30) - 창의문(11:35) - 북악산1번출구(11:50) - 군견훈련장터(12:15) - 청운대(12:20) - 백악정(13:00) - 효자동(13:20) - 청와대(13:30)
산행거리 : 14km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사적 제171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는 1903년(광무 6) 9월 2일에 세워졌습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의 나이가 60세를 바라보게 된 것과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직접 글을 썼습니다. 원래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해는 1902년이었지만, 나라 형편이 어려워 한 해 늦게 세우게 되었습니다.
비를 보호하는 건물인 비각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2중기단 위에 정자형 건물로 짓고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고색창연한 이 비전은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 건축 양식이 잘 남아있어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습니다.
남쪽 정면에는 돌기둥 위에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을 만들고, 그 양 옆에는 해치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떼어가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만세문과 담장을 찾아다가 1954년경에 일부를 보수했고, 1979년에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와 만세문
비석은 통례대로 받침대인 귀부와 몸돌, 지붕돌로 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紋章)인 오얏꽃과 용무늬를 새겼으며 몸돌 위쪽에는 전서체로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碑)'라고 쓰여 있다는데 아마도 비석 네 면을 돌아가며 이어 쓴듯합니다.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고 되어 있는데 순종이 무엇을 썼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비석의 제목인 전액의 첫머리에 예필(睿筆)이라고 쓰인 것을 보면 황태자인 순종이 제목을 쓰고 비신의 문장을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기념비전 남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고 상단에는 '만세문(萬歲門)'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 글씨는 영친왕이 6살에 썼다고 하니 순종과 영친왕의 친필 글씨가 있는 귀한 문화재입니다.
기념비전(紀念碑殿) 편액
우측에 예필(睿筆)이라 하여 왕세자가 쓴 것임을 나타내고, 좌측에 광무육년 임인 구월 일(光武六年 壬寅 九月 日) 1902년 9월 순종이 세자때 쓴 편액 글씨입니다.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광장 중앙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왕으로, 그의 동상은 높이 6.2m, 폭 4.3m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동상 앞에는 측우기, 해시계, 혼천의 등의 과학기구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대왕의 과학적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경복궁 광화문과 그 뒤로 북악산
광화문과 월대
2023년 10월 15일에 경복궁의 월대 복원공사가 마무리되고 광화문 편액도 교체되었습니다.
월대(月臺)는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단을 높여 설치한 넓은 공간을 말합니다. 국가 중요 행사, 임금과 백성이 만나 소통하는 장소 등으로 활용됐고, 현재는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종묘의 정전 등 일부 건축물에 남아 있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 월대 전체 규모는 남북 길이 48.7m, 동서 폭 29.7m. 광화문 중앙문과 이어지는 너비 약 7m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던 길)의 자취도 확인됐습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소장했던 동물 조각상이 월대 중 어도의 맨 앞 부분을 장식했던 서수상(瑞獸像·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이었음이 밝혀져 유족이 이를 기증한 일도 있었습니다. 난간 양쪽을 장식하던 각 석조물이 고증과 발굴을 통해 제자리를 찾은 것도 의미 있는 성과입니다.
광화문 편액
광화문의 편액은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任泰瑛 1791∼1868)의 친필 글씨입니다.
광화문(光化門) 편액은 묵질금자(墨質金字)로 되어 있어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새롭게 제작하였으며, 광화문은 '왕의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라는 뜻입니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4276과 1138mm이며, 재료는 강원 양양군 등에서 벌채한 수령 200년이 넘은 적송입니다.
사직단
사적 제121호. 면적은 43,587㎡.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킵니다.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입니다. 조선시대 사직단을 관장하던 관청은 사직서(社稷署)였습니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사직단을 보면, 한가운데에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자이고 높이는 3자였습니다. 유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步)였으며,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사직의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으며 부속 건물 가운데 재실(齋室)로 쓰이던 안향청과 정문만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의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봄·가을 납일(臘日)에 제사를 지내고, 기고(祈告) 제사도 사직에서 지냈습니다. 주현에서 지내는 사직 제사는 봄·가을 두 번 지냈으며, 국왕 대신 그 지역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습니다.
사직단 돌담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당군성전
단군왕검을 모시는 신전으로,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단군성전은 우리나라 최초로 당군성전이란 명칭으로 사용한 곳입니다.
단군성전(檀君聖殿) 편액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의 글씨입니다.
황학정
국민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은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종황제의 뜻에 따라 지어진 유서깊은 활터입니다.
인왕배드민턴장 230m, 사직단 710m
인왕산 호랑이상
한양도성 외부 순성길, 인왕산 자락길, 인왕산 정상
인왕산 성곽초소
선바위
당겨본 선바위
뒤돌아본 한양도성과 남산타워
북악산과 서울시 종로구
당겨본 청와대
범바위
인왕산은 1968년 1.21사태 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김영삼 문민정부때인 1993년 개방되었습니다.
인왕산 정상 방향으로 한양도성 성곽이 구불구불 뱀처럼 쭉 뻗어 인왕산 정상까지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멀리 안산이 보입니다.
인왕천약수터 갈림길
옥개석
성곽 위에 올라가는 돌을 옥개석이라고 합니다.
인왕산 정상이 보입니다.
인왕산 정상
인왕산(338m)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입니다.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습니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인데, 조선 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입니다. 서울의 성곽은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서 북악산길과 연결됩니다. 조선 초기에는 도성을 세울 때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안산,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습니다.
인왕산 정상
기차바위
당겨본 문수봉, 보현봉
기차바위와 북한산 비봉능선이 보입니다.
뒤돌아본 인왕산
기차바위 갈림길
기차바위 260m, 무악재하늘다리(안산) 1.6km, 창의문(자하문) 1.4km
기차바위
정면 방향은 세검정, 상명여대이고, 우측 방향 가까이는 부암동, 멀리는 평창동입니다.
좌측으로 비봉능선 족두리봉, 중앙에 비봉이
인왕산과 안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방향 파노라마
북악산
서울 종로구 방향
당겨본 청와대
경복궁과 남산
당겨본 경복궁
한양도성 부부소나무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이어져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연리지'라고 합니다.
수성동계곡 갈림길
기차바위
당겨본 기차바위
북악산으로 가기 위해서 윤동주 문학관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한양도성(인왕산정상) 1.14km, 숲속쉼터 400m, 청운문학도서관 270m, 인왕산자락길 70m, 윤동주문학관 320m
서시정
서시정은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인 '서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윤동주 문학관에서 약 10분 거리입니다.
서시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서시정(序詩亭) 편액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1943~2024) 선생 글씨입니다.
북안산
북악산 가는 길목에 있는 1.21사태 당시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 동상
창의문(보물 제1881호)
창의문(彰義門) 뜻은 '올바른 의(義)를 드러내는(彰) 문(門)'으로, 조선 초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었다고 합니다. 창의문은 북문이면서도 정북방이 아니라 서북쪽에 있는데,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 창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밝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현재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 구간의 한양도성 성벽일부가 붕괴로 인한 탐방로 공사로 통제(2024. 07. 09~통제 해제시)되어 곡장가는 우회길로 올라갑니다.
창의문
창의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문입니다. 일면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며, 서울의 4대 소문 중 북소문(北小門) 입니다. 1396년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지시하에 축조된 관문이었습니다. 이후 3대 왕 태종 때에 당시 풍수지리 학자들이 왕조에게 불리함을 준다고 주장하면서 민간의 출입이 폐쇄되었다가 11대 왕 중종 때에 들어서 재개 방되었습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있습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창의문(彰義門) 편액
북악산1번 출입구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북악산 산행을 진행합니다.
한양도성 곡장 1100m, 화장실 680m, 창의문 450m
나무사이로 한양도성 성벽이 붕괴 된것이 보입니다.
한양도성 곡장 870m, 화장실 300m, 창의문 680m
구 경계초소
지금의 터는 북악산 및 인왕산, 청와대 외곽경계를 담당하는 '제1경비단'에서 사용하던 경계초소입니다.
위 초소는 1968년 1월 21일 , 당시 대통령 암살임무를 띤 북한 무장공비 31명의 '1.21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이후 북악산 지역이 특정경비지구로 설정되면서 경계작전을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2006년 4월 1일 북악산 탐방로가 부분개방(숙정문 권역)되면서부터는 사용하지 않는 초소가 되었습니다.
이후 2020년에는 북악산이 확대개방 되면서 탐바오 상 일부 철책과 초소들은 재단장을 통해 기억의 공간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한양도성 곡장 500m, 화장실 30m, 창의문 950m
백사실계곡 990m, 북악산 정상 570m, 곡장 550m, 한양도성 백악구간
옛 군견훈련장 터
창의문 1.0km, 북악산 정상 390m, 곡장 370m, 화장실 100m
한양도성 축성연대
자세히 보면 성을 쌓은 돌들의 모습이 약간씩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돌의 모습에 따라 태조대에 쌓은 돌들은 자연석을 조금은 순서 없이 쌓아 올려져 있고, 안전을 위해서 약간 비스듬합니다. 태종, 세종조의 석축은 장대석 위에 궁글린 돌을 옥수수 알처럼 쌓아 올린 방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까지는 일반국민 또는 농민들이 동원이 되었고, 농번기에는 사찰의 중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이후 숙종조에는 군졸들이 축성에 참여하면서 성돌은 잘 다듬어지고 규격에 맞추었으므로 직각으로 쌓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때부터 이미 서양 각국의 무기가 대포로 변하고 있어서 튼튼한 성이 필요하기도 한 때문이었습니다.
청운대 쉼터에서 북악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한양도성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정상 방향은 통제중입니다.
북악산 정상이 보입니다.
청운대
청운대
곡장
당겨본 곡장
삼청안내소 갈림길
창의문안내소 1.1km, 청운대쉼터 160m, 화장실 1.1km, 삼청안내소 810m
만세동방 약수터
바위 아래 맑은 샘이 솟아 고종 임금께서도 마셔보셨다는 만세동방 약수터의 물입니다.
만세동방(萬世東方) 성수남극(聖壽南極)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변 계곡을 만세동방 계곡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으나 글자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나라의 번창과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방(東方) 삼천갑자를 산다는 전설 속의 동방삭
성수(聖壽) 임금의 수명
남극(南極)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의 별로 무병장수를 뜻함
삼청안내소(화장실) 900m, 삼청쉼터 650m, 청운대쉼터 650m
청와대전망대로 가는 데크길
청와대 전망대
남산과 서울시내, 청와대가 보입니다.
백악정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만세동방 400m, 칠궁안내소 730m, 백악정 60m
백악정(白岳亭)
백악정(白岳亭)이라는 글씨는 서예가 인증 이정화(1988~ ) 글씨입니다.
만세동방 440m, 청와대전망대 230m, 칠궁안내소 580m
효자동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인왕산과 기차바위
백악산
칠궁(사적 제149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어머니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즉, 칠궁은 법적 어머니인 왕비에게 바치는 효와는 별개로, 사친인 생모에게 바치는 사적인 효를 위해 세운 곳입니다.
청와대 정문
영빈관
춘추관
침류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향나무
인수문
인수문(仁壽門) 편액
청와대 관저
주목
청와대
청와대 본관
2층 접견실
경복궁 돌담길
정부종합청사
첫댓글 깜짝 이벤트 서울 인왕산 산행 즐거웠습니다 총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서울나들이 수고하셨습니다
담아주신 멋진사진 잘보고갑니다
서울나들이 하면서 역사 공부도 다시하고 세삼세롭네요
함게하여즐거운 하루 되었어요
남긴영상 즐감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