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와 고고학]
엄밀히 말해서 한국사의 현실은
그 지정학적 현실이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조국을 떠나거나 잃고 세계를 방랑하는
미국이나 소련 안의 히브리민족(곧 유태민족)에게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현장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이마 소련 땅의 출토물이 히브리 역사의
실증 자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본토나 중동지방이 아니고선
이스라엘의 고고학은 지정학적인 한계성 때문에
성립될 수 없음은 굳이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터이다.
한국 고고학의 현실이 꼭 이와 같다.
한반도의 절반 곧 半(반) 반도라는 제약된 지정학적
조건 밑에서는 고고학이 설 자리가 없다.
가끔 지상에 오르내리는 고구려의 광개토경호태열제의
훈적비 비문에 관한 논쟁도 현재로선 현장이 없는,
허공의 관념적 논쟁이 되거나
고작해야 비문 해석상의 논쟁에 시종할 뿐,
제대로 고고학다운 연구나 논쟁이 되지 못한다.
<현장이 없는> 고고학의 비애라 할 것이다.
한편 우리의 상고사는 <중국대륙+ 몽고 대륙+
만주 대륙+ 시베리아 대륙+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전개된 역사이지 결코 한반도만의 역사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한반도의 남쪽 반 반도에만
학문적 연구와 고고학적 현장이 열려 있을뿐이라는
엄청난 제약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약이 거의 없었던 광복 전의 일제시대에는
반대로 이를 연구할 학문적 주권이 또한 없었다.
때문에 현재 한국 고고학계가 하늘처럼 믿고 있는
학문적 자료 고고학적 자료들은 모두 지난날의
왜인들의 손에 의하여 이룩된 업적들 뿐일 수밖에.
심지어 고고학의 地表(지표)나 年表(연표)마저도
일본 사람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순수한 우리 학계의 힘만으로는 성립되질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왜색 자료들이 과연 정확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생각키로 한다 해도,
현재 돈이라면 ㅇㅇ도 팔아치울지 모르는 골동품 업계에서
저 낙랑 유물 와당 자기들이 어떤 푸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보면
한심하기 더할 바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패전 후 또다시 경제대국으로 등장하여 값나가는 것이면
쓰래기라도 거둬가는 일본의 관광객들에 의해
한때는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강상파부)의
이른바 騎馬民族說(기마민족설) 때문에서
울 인사동의 말(馬,마)그림이 어처구니 없는 고가로 팔리더니,
낙랑시대의 와당이나 도자기들은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가질 않는 푸대접을 받았다.
일본 식민사학이 날조한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이른바
<한사군>의 범죄가 산산조각이 나서,
국사 시험지에 어김없이 오르내리며 어린 학생들의 뇌리에
처박히게 했던 소위 한사군설이 이젠 원자폭탄의 낙진마냥
떨어지고 있는 것은 웃지 못할 현실이다.
그렇지만 「樂浪太守之章(낙랑태수지장)」이라는 글이 들어간
樂浪封泥(낙랑봉니)라는 진흙덩이가 저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요즘 돈으로 아파트 열 개나 될
높은 보상금으로 매입되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낙랑와당이라고 해서 傳家(전가)의 보물로 알고,
모서리 한곳 떨어져 나간 곳 없는 완전한 와당을 해방 뒤에도
국보급 이상으로 아끼던 어느 골동품 애호가가 이를 처분코자
70년대에 인사동에 들고 나왔으나,
낙랑 유물은 값이 형성되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거뜰떠 보지도 않는 한낱 진흙덩이로 취급되었다.
이에 한업자의 충고로 작고한
모 박물관장을 찾아가 감정을 의뢰하니,
「낙랑 유물의 황금기는 지났다」고 하는
푸념 한마디로 감정조차 거부하는지라,
전래의 가보라 믿어 온 낙랑와당을 땅에 내어던져
가루로 만드는 서글픈 촌극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한국 고고학이 일본 고고학 자료를 믿을 것인가
불신할 것인가의 기준이 될만한 일화이다.
한국 고고학의 현장은 없다는 이 소박한 공식을
믿을 일이지 결코 다른 구실을 찾을 수 없다.
고고학의 현장을 찾기 위해서도 한국은 발전해야 한다.
한반도는 결코 고고학의 대상 강역이 아닌 셈이다.
일만 년의 기나긴 역사 중 극히 일부분의 출토품 밖에
나올 수 없는 반반도 안의 고고학의 현장을
고고학도들은 직시할 필요가 잇다.
경연차 충북의 어느 대학엘 간 적이 있다.
나의 상고사 강의가 끝난 다음 그 지방 대학
박물관장이라 칭하는 모교수의 대접을 받으며
박물관의 진열실에서 돌덩이 하나를 기증받았다.
이 돌덩이가 단군 이전 수천년의 역사를 웅변하는데
임교수(필자)의 노력이 아깝다고 동정한다.
나는 농지거리로,
「이 돌 어느 구석에 한웅천황의 신시개천의 역사가
적혔으며 천부경의 경문이라고 적혔는가?」고 했더니
「아니! 그런 것은 비석이고, 이 돌은 거금 만년 전의
인간들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지요」라고 한다.
「당신은 이 돌 덩어리를 보고서야 겨우 그걸 믿는가?
난 보질 않고도 믿는데 고고학과 학생들은
골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이라고 대꾸했다.
사실 이 대학교수에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고학의 역활과 학문의 기능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한서> 지리지에는 산동반도에
<百支(백지) 萊王之墓(래왕지묘>라고 하는 고적이 있다고 했다.
단채 신채호의 추측으론 <백제 東城王(동성왕)의 무덤>이라고 했다.
산동반도에 가서 이 무덤을 조사하여 그 사실 여부를 밝혀야 한다.
단재의 추측이 맞는지,
혹은 중국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의 뼈인가를 밝혀야 한다.
바로 그것이 고고학의 사명이요, 또 고고학의 본분이다.
고고학 사명은 거기서 끝난다.
동성왕의 무덤이 사실이라면 그가 그곳에 묻히게 된
동기나 배경 및 역사는 역사학이 규명할 일이다.
또 양자강 남쪽 건강시(지금의 남경) 교외에는
공주의 무령왕능보다 규모는 크면서 양식은
같은 무덤이 300여 개가 있다.
한국 고고학 학자는 그것을 개발하여 정체를 밝혀야 한다.
과연 종래의 주장처럼 이들 무덤이 梁(양)나라의 무덤들 인가,
아니면 백제의 무덤들인가를 밝혀야 한다.
백제인들이 양자강 남쪽에 무덤을 남겼으리라는 추정은
<北史,북사>의 [白濟(백제).... 據江(거강) 左右(좌우)....
라는 글로써 가능하다.
이를 설명할 학자는 사학자이며,
고고학자가 물론 아니다.
고고학은 그 역활이 사학자의 주장을
고고학적으로 뒷바침하는 방계과학이다.
고고학은 그 학문의 출발점이 <사학의 방계학과>이라는
제약 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사학과 고고학은
그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고고학이 자기 본분을 잊고 사회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일본 고고학의 때묻은 자료들을 빌미로 해서
현장 있는 학문이 아니라 관념적 고고학이라는
엉뚱한 방법론을 즐기도 있는 것이다.
<교양국사>라는 인쇄물이 있어 내용을 흝어 보니
국사가 아니라 안압지의 출토품, 조선조 중기의
건축 양식 등 고고학 일색의 책이었다.
kBS라는 국영방송국이 편집자다.
국사와 고고학의 역활을 이렇게 몰라도 되는 것인가?
공연히 짜쯩이 난다.
교양 고고학이라면 몰라도 교양국사라는 표절은 곤란하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의 구조식은
<삼독 +고고학의 횡포>라는 해독으로 요약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