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호구산(虎丘山)에 있는 사찰,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
치마폭처럼 펼쳐진 앵강만 바다를 바라보는 남해읍 이동면의 호구산 (해발 560m) 기슭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호구산은 북쪽과 남쪽에 각기 망운산과 금산을 마주 보는 산이다. 사실 두 산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호젓하고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남해군에서 군립공원으로 지정한 산이다.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망운산을 넘어 하동 일대의 층첩한 산줄기와 광양 백운산, 그리고 멀리 지리산 줄기가 아스라이 보인다. 남으로는 그림같은 앵강만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앞에는 서포 김만중이 유배되어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였던 노도가 보인다. 또한 동쪽으로는 보리암을 품고 있는 금산과 멀리 통영, 거제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창선도 위로는 사천, 고성의 해안마을과 내륙의 풍경들이 보이고 서쪽 여수반도를 향해 시야를 돌리면 여천 석유화학단지나 거대한 광양제철의 인공섬 금호도의 다소 생경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구산 정상의 표지석 옆에는 조그마한 돌탑 3기가 서있는데, 아마도 민속신앙의 발로인 듯하다. 호구산 아래에는 남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용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절로 열 두명의 고승을 배출한 남해 최대의 사찰이다.
역사적 배경과 많은 문화재 외에도 호구산 용문사 주위를 둘러싼 아름드리 소나무와 측백나무 등의 상록수림은 절의 운치를 한층 더 북돋운다. 용문사에서 1시간 가량 걸리는 호구산 정상까지의 오솔길은 울창한 수림에 단풍나무도 군데군데 눈에 띄며 경사가 다소 가파르긴
하지만, 만추의 단풍 감상 코스로도 부족함이 없다. 용문사의 화려한 역사와 앵강만의 절경을 뒤로 놔두고 정상에 올라 너럭바위 위에서 남해바다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흘린 땀을 닦으면 머나먼 남도 끝에서의 여행의 보람을 십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호구산(虎丘山, 618m)은 남해군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유서 깊은 사찰인 용문사(龍門寺)를 품고 있다. 신라시대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錦山)에 창건한 보광사(普光寺)의 후신이라고 전한다. 당시 보광사에는 첨성각(瞻星閣)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660년(현종 1) 남해현의 남해향교와 용문사 입구가 마주하고 있다 하여 유생들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백월(白月) 스님이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에 터를 잡고 용문사라 하였다.
이로부터 절의 역사가 자세히 전하는데, 1661년(현종 2)에는 신운(信雲)이 탐진당(探眞堂)을 세웠고, 상운(尙雲)이 적묵당(寂默堂)을 세웠다. 1666년 대웅전을 지었으며 봉서루(鳳棲樓)를 새로 지었다. 그리고 1708년(숙종 34)에 염불암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든 승려들이 의승군(義僧軍)이 되어 왜병과 싸웠고, 숙종 때에는 이 절을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고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을 세웠다. 당시의 유물로 용문사의 승병들이 사용하였던 삼혈포(三穴砲), 번(幡)과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 등이 남아 있는데, 모두 용문사가 임진왜란 때 의승군이 주둔하면서 구국에 앞장섰던 역사를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이 가운데 번은 세로 147㎝, 가로 32.5㎝의 비단에 ‘南無大聖引路王菩薩(나무대성인로왕보살)’이라고 수를 놓고 그 둘레를 우아한 매듭으로 장식하였다. 또, 수국사금패는 경릉관(敬陵官)과 익릉관(翼陵官)이 발급한 것으로 지름 14.5㎝의 원통형 나무로 되어 있다. 그밖에 숙종 때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와 촉대 1개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연옥등과 촉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빼앗아갔다고 한다. 최근에는 1970년대까지 백련암에 백운선원(白雲禪院)이 있어서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용성(龍城, 1863~1940) 스님이 이곳에 1년 가량 머물기도 하였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과 성철 스님이 머물며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통사찰 제24호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 제1446호 남해 용문사 괘불탱과 함께 대웅전(유형문화재 제85호), 석불(유형문화재 제138호), 천왕각(문화재자료 제150호), 명부전(문화재자료 제151호), 촌음집 책판(유형문화재 제172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입구에 목장승(벅수)이 있다. 사찰의 경계,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앙, 풍수적 비보책으로 조성 된 상징물로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용문사의목장승도 자신의 역활을 다하고 이제는 노쇠한 모습으로 보호각 속에 보존되어 있다.
천왕각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이며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물은 상량문에 따르면 1702년(숙종 28)에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안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데, 북방 다문천왕의 경우 대체로 왼쪽 손바닥에 보탑(寶塔)을 올려놓고 있는 예가 많은데 용문사 천왕각의 다문천왕은 창을 잡고 있어 이 역시 특색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사천왕은 불법을 호위하는 신장으로 잡귀와 악귀를 막는 역할을 하므로 무기를 잡고 무서운 얼굴 표정을 하고 있게 마련이다. 천왕각의 천왕들 발 밑에 깔려있는 생령좌(괴상 혹은 귀상)는 다른 사찰의 것과 달리 조선시대의 양반 형상을 한 탐관오리들의 모습이다.
봉서루(鳳棲樓)는 누각이자 출입문 역할을 하며, 맞배지붕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대웅전 쪽에서 바라보면 단층이지만 천왕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보면 중층(重層)의 건물이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지 가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각의 형식이다. 봉서루 내부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고, 실내 법회나 강의가 열릴 때 집회 장소로 활용된다.
범종루에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대웅전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다. 허튼층쌓기로 만든 높다란 축대 위에 자리하며, 10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과 측면 각 3칸씩이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다소 볼록하게 나온 배흘림 기둥을 하고 있다.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多包)식으로, 앞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2구씩 공포를 배치하였다. 처마 밑의 가운데 칸인 외부 어칸(御間)에는 양쪽에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좌우 양쪽으로 각각 2기가 한 조를 이루는 괘불대(掛佛臺)가 있다. 괘불대란 야외 법회 등을 열 때 대웅전 앞마당에 괘불을 걸기 위한 시설물을 말한다. 현재 남아 있는 괘불대는 조선시대 중기의 것이 가장 오래 되었는데, 대체로 2기가 1조를 이루어 양쪽으로 간격을 둔 채 2조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2기가 서로 마주보는 면에는 구멍을 아래 위로 각각 2개를 뚫어 이곳에 괘불을 받치는 버팀목을 끼울 수 있도록 하였다. 형식으로 볼 때 조선시대 중후기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용문사 대웅전 후불탱은 석가여래가 영축산(靈鷲山)에서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그림 하단에 있는 화기(畵記)를 통해 1897년(광무 1)에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림의 구도는 화면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 보현, 미륵, 제화갈라, 관음, 지장의 6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의 대중들을 3단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석가여래를 화면의 반 이상 되게 커다랗게 표현하고 나머지 대중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내었다.
대웅전의 삼존불좌상은 가운데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각각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1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불 좌상은 이마와 머리 끝에 각각 육계를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중기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두 어깨는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내려와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이며, 수인(手印)은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짓고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서 협시(脇侍)하고 있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전체적인 크기 및 보관의 형태 등에서 서로 비슷하고 보관의 경우 극락조(極樂鳥)가 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 서로 같다. 손의 모습은 관세음보살이 지물을 들지 않고 두 손으로 수인을 짓고 있는데 비하여 대세지보살은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두 손의 위치가 반대인 것은 가운데 아미타불을 양쪽으로 협시하고 있는 시각적 안정감을 고려한 것이다.
탱화는 삼장탱(三藏幀)인데, 그림의 중앙에 천장(天藏)보살을 놓고 그 좌우에 지지(持地)보살과 지장보살을 각각 배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불화로 알려져 있다. 용문사 삼장탱의 구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 보살을 화면의 상단에 중심되게 커다랗게 그리고, 보살의 주위와 하단에 여러 신중과 권속(眷屬)이 표현되었다. 권속이라는 것은 시자(侍者)의 일종으로 보며, 특정한 불보살에 각각 소속되어 표현된다. 이 탱화에서 천장보살은 진주(眞珠)보살과 대진주(大眞珠)보살, 지지보살은 용수(龍樹)보살과 다라니(陀羅尼)보살, 지장보살의 권속은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을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림의 하단에 배치된 팔금강과 같은 신중들은 대부분 지지보살의 권속들이다.
신중탱(神衆幀)은 대웅전 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97년에 그린 것으로 구도를 보면 하단에 무장(武裝)을 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12신이 배치되었고,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동·천녀가 협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대웅전의 대들보 위에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용(龍)이 눈길을 끈다. 원래 대들보 위의 용은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목조건물을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되는 용인데, 특이하게도 발가락이 5개로 표현되어 있으며 양 팔을 힘껏 벌리고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동종(銅鍾)으로, 종 몸체에 아무런 명문이 없어 조성 시기와 배경을 알 수 없으나 17~18세기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뉴(龍紐, 종고리)는 신라시대의 형식을 이어받아 한 마리만 표현되어 있고, 그 옆에 막대 모양의 용통(甬筒)이 있으며, 천판(天板) 위에는 앙련(仰蓮)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종신(鍾身)의 가장 위쪽, 곧 천판과 접하는 부분을 종견(鍾肩, 종의 어깨)이라 하는데 천판과 종견의 경계는 굵은 돌기선(突起線)을 돌려서 구분하였다. 선 아래는 원(圓) 안에 범자(梵字)를 새겨 넣은 무늬띠 12개를 배치하였다. 이 무늬띠를 상대(上帶)라고 부른다. 그 아래는 유곽(乳廓) 4개와 보살 입상 4위를 번갈아 가며 새겼다. 유곽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인데, 이것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유곽 안에는 유두(乳頭, 鍾乳) 9개를 배치하였다.
탐진당(探眞堂)과 적묵당(寂默堂) 건물의 지붕은 대웅전 쪽으로는 맛배지붕을, 봉서루 쪽으로는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명부전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고, 건축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안에는 불단 중앙에 지장보살과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하였고, 그 좌우에 시왕상을 배열하였다.
영산전 안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석가여래 삼존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 삼존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현재 흰색으로 개분(改粉)되어 있다.등 위에 살짝 오무러든 연잎을 지고 있는 영산전의 사자상.
칠성각의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안에는 치성광여래탱을 비롯하여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에는 칠성탱 3폭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그림이 구도상 다소의 차이는 있는데 대체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하여 칠원성군(七元星君)과 그밖에 권속(眷屬)들이 배치되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치성광여래와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칠원성군을 그렸다. 이 그림의 특징은 칠원성군 가운데서도 의자에 앉아 있는 탐라성군만 마치 주존(主尊)처럼 그림의 중심에 커다랗게 그린 점인데, 다른 칠성탱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6성(별)을 각각 3위씩 배치하고 하단에 칠원성군 가운데 4성군을 그렸다.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상단 오른쪽에 28수(宿), 왼쪽에 삼태성(三台星)과 좌우로 칠곱 분의 여래 가운데 두 분, 그리고 하단에는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칠원성군 가운데 세 분의 성군을 그렸다.
칠성각에 봉안된 산신탱 ,칠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
봉산(封山)이란 왕과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거나 기타 특수한 목적을 위해 벌목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해 특정한 산을 지정하는 것을 말하며,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란 그러한 봉산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패를 뜻한다. 용문사에 전하는 이 봉산수호패는 용문사가 숙종 때 수국사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보호하는 사찰이 되어 금패를 받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으므로 용문사가 자리한 호구산의 벌채를 금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봉산수호패는 위 양쪽에 모를 주었고, 그 밑에 둥근 구멍을 파 끈을 매달아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앞면에는 ‘남해용문사(南海龍門寺) 향탄봉산수호총섭(香炭封山守護總攝)’을, 뒷면에는 발급자인 ‘예조(禮曺)’와 그 수결을 새겼다.
수국사 금패(守國寺 禁牌)
용문사는 조선시대 숙종(재위 1661~1720) 때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사찰인 수국사(守國寺)로 지정되어 경내에 축원당(祝願堂)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 금패(禁牌)는 용문사가 수국사로 불렸을 때 국가가 인정하는 사격(寺格)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으로 나라에서 내려준 것이다. 금패란 지방의 관청이나 관리가 사찰을 함부로 부리지 못하도록 금하는 표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