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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10
9월6일 [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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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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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z4DHwMcJWc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564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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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수감된 형제들, 그리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저렇게 정이 많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는 느낌입니다.
'저렇게 순박하고 의리있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일로…'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요. 다들 어찌 그리 단순한지 모릅니다. 다들 어찌 그리 잘 생겼고 또 어찌 그리 마음 씀씀이가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욱'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담장 바깥에 있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적 결함 중 하나가 한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스스로를 잘 조절해 나가다가도 단 한번에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평소에 그리도 여유있어 보이고 유유자적하던 우리지만 단 한순간에 내적 상태가 돌변하는 체험을 하지요. 딱 1분만 참았어도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깁니다.
한번 비위가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즉시 싸늘한 냉기를 띱니다. 머리 위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느낌입니다.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열을 받습니다.
그런 상태는 분명히 비정상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 꼭 다물고 시간을 버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또 우리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내뱉게 됩니다.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따놓은 점수를 완전히 다 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간들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계셨기에 '뚜껑이 왕창 열리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한 박자를 늦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논리적, 단계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게 몹쓸 말을 하는 사람, 기본이 안 된 사람, 눈꼴사나운 사람, 덜 되먹은 사람,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가다듬어야겠지요. 심호흡을 몇번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 좋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참으로 소중한 덕입니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약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노력, 이보다 더 큰 형제애는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지닌 한계를(특히 스스로 바라보지 못하는 취약점)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미성숙한 대화기법이나 대화 문화로 많은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숙한 대화 문화, 바로 예수님의 대화기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이면서도 단계적, 이성적 접근,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생활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괴로운 것이 상처지만 결국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에서 받는 상처는 상호성장의 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상처는 상호 성화를 실현하는 장입니다.
성령께서는 상처와 고통을 당신 활동 장소로 선택하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당부를 이번 한 주간 묵상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 혀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다치게 하는 말, 형제 가슴에 비수를 던지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 혀는 이제 봉헌된 혀이니 매일 주님께 찬미 노래를 드립시다. 앞으로는 우리 혀로 거룩한 말씀만을 선포합시다. 격려와 위로의 말만을 사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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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의 의미>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5ndJG-qV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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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도 작은 교회라 하고, 소공동체도 작은 교회라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이기 때문에 굳이 가톨릭교회에 속해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70년 당시 잉글랜드는 400년이 넘게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민간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직자인 제리 콘론은 지붕을 뜯어내 파는 좀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으로 영국군을 저격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또 도망가는 중에 독립 시위를 하는 틈에 끼여 폭동 주동자 혐의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잉글랜드에 있는 작은어머니 집에 보냅니다. 아버지에게 제리는 나이 먹고도 철없는 어린애 같고, 제리 입장에서 아버지는 잔소리와 억압을 하는 존재입니다.
제리는 배에서 폴이라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제리는 작은어머니 집에 가지 않고 폴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히피족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피들조차 아일랜드인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런던 시내를 방황하던 제리는 길에서 우연히 화류계 여자의 집 열쇠를 줍고, 그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때 런던 길포트 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리는 훔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폴이 경찰에 잡혀갔고, 영국 경찰이 제리의 집에도 들이닥쳤습니다. 영국 경찰은 아버지를 쏴버리겠다는 협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공범으로 몰려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힙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기에 종신형을 받고 제리는 아버지와 함께 수감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교의 힘으로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렇게 14년이 흐릅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데, 그가 15년 전 런던 길포드 식당 폭탄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일로 제리는 지금까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리는 변호사 가레스에게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녹음해서 보내고, 변호사도 애초에 사건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냅니다. 가레스는 끈질기게 진실을 파헤쳤고, 결국 1976년에 항소심에서 제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제리 콘론은 한 마디로 동네 양아치였습니다. 물론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밖에서 사나 감옥에서 사나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은 괜찮으나 죽은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이 무죄를 받아내야 아버지도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아버지의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분의 명예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명예란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으로 살라는 것은 곧 당신으로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명예가 교회를 통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당신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제리 콘론의 노력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었듯,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본성이고 권한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정하였고, 교회를 통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까지 부정하였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그런 권한을 부여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교회의 사제였을 때부터 죄를 자신의 고행으로 용서받으려고 했지 교회에 부여한 그리스도의 권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빠진 교회라는 것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죄를 사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 권한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나 소공동체 등을 작은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톨릭교회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분의 명예와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예이고 권한이고 본성입니다.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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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신자 공동체의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할 사랑의 두 가지 관점으로 오늘의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것이다.
복음: 마태 18,15-20 : 용서하고 화해하라
오늘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죄짓게 하거나, 또 공동체인 교회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서는 형제가 잘못을 하더라도 그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일련의 판단절차에 따르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얻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은 그 방법이 세심하고 우애적이어야 한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이것은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더 멀어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어떤 애정의 공감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되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말씀은 모세법의 소송절차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형제를 얻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고 하신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도까지 실패할 때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고 하신다. 이때에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의 특별한 ‘권한’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는 베드로의 권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규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복음은 ‘너’라고 하면서 교회의 의미를 단수로 표현함으로써, 각자가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공동체는 각자 개인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공동체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며, 또 그 잘못은 나의 잘못인 것이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 책임이 있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 노력하면서 ‘맺고’ ‘풀어나가는’ 충만한 삶이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복음에서 더 내면화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한의 숫자이다. 공동체는 군중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합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 교회의 힘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에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기도’의 능력에 있다. 사목의 실천 방향이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교회가 생겨날 수 있는 뿌리를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룰 수 있을 때,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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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본디 하늘은 숭상의 대상이고 땅은 겸허함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지요. 하늘을 우러러 감히 따져 묻지 못하며 땅 위에서는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꼿꼿이 쳐드는 일을 금기시해 왔지요. 그럼에도 오늘 복음은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솟아오르는 천지개벽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맞닿을 수 없는 하늘과 땅이 마주 보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고작 두세 사람이 모인 땅의 뜻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천지개벽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은, 탓을 하고 비판하는 데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마저 함께 안고 가자는 공동체 정신을 강조합니다. 땅이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을 디디고 사는 모든 이를 형제로 생각하는 것, 그 형제의 아픔과 실수를 제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고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말하는 교회는 거룩하고 흠 없는 이들의 고상한 모임이 아닙니다. 어찌 저런 인간이 성당에 나올까 싶어 혀를 끌끌 차는 그 순간에, 그럼에도 형제, 자매라고 불러야겠다는 다짐과 결단이 있는 곳이 마태오 복음의 교회입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심정으로 하늘만 쳐다보는 일은 그만했으면 합니다. 그 ‘감히’라는 생각과 시선을 우리가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긴 땅의 사람들에게 되돌리는 일, 그것이 천지개벽의 일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입니다. 하늘과 맞닿아 거룩해지는 일은 우리의 편협한 잣대로 만들어 놓은 자칭 ‘거룩함’이라는 우상을 부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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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좋아하라는 뜻도 아니고, 무조건 서로 잘해 주기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과 선의 실현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았다면(알고 있다면), 그 죄를 막아야 합니다. 무관심과 방관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죄와 악을 막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니라,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용서와 자비도 있고, 원수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것도 있고, 그를 꾸짖거나 타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에서, ‘너에게’ 라는 말은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이 말은, 아마도 필사 과정에서 잘못 들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개인 사이에 사적으로 잘못한 일이 생긴 상황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지었을 때의 상황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단둘이 만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신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 회개하고 보속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도 처음부터 그 죄를 공동체 전체에게 공개해 버리면, 그가 회개하기는커녕 더 나쁜 쪽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타일러라.’ 라는 말은, “그것은 죄다.”라고 깨우쳐 주는 일과 “그 죄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회개하여라.”라고 권고하는 일을 모두 포함합니다. (부드럽게 타일러야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강하게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그의 구원을 위한 ‘사랑 실천’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형제에게 사랑을 실천하려고 가서 사랑은 주지 않고 상처만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를 타이를 때, 산상 설교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라는 말씀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라는 말씀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죄 없는 의인이라서 죄인인 그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그가 나의 형제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에 있는 죄인의 입장에서, 구원의 길로 함께 가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은 “그가 네 말을 듣고 회개하면”입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는 말씀은, “잃었던 형제를 되찾은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과 같고,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 지은 형제를 회개시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일이고,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 18,16)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있고, 아니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 전체의 사랑으로 그를 타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수의 힘으로 개인을 압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고, 한 지체가 병이 들면 몸 전체가 병든 것과 같기 때문에 공동체가 나서는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7-18)
“교회에 알려라.”라는 말씀은, 교회 직권자에게 고자질하거나 밀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처분에 맡기라는 뜻입니다. (이미 두 번째 단계에서, 죄 지은 사람의 상황을 공동체가 모두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공동체의 문제가 됩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이 교회의 공적인 회개 권고도 거부하면”입니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그를 파문하여라.”입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회개할 때까지 신자 자격을 정지시키는 일입니다. 회개하면 다시 받아 줍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땅의 결정을 하늘이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이 땅에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결정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파문과 같은 중대한 일은 더욱더 기도하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 말씀을 앞의 말씀들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죄 지은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은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일이라는 것, 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함께하기를 바라신다는 것, 등을 나타냅니다.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또 죄 지은 사람 자신이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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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9월의 첫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보내는 시간만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위해서 쓰는 시간만큼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작년에 호주는 6개월간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산불이 발생하였고 많은 생명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중국에는 엄청난 비가 내렸고, 한국에도 비가 내렸습니다. 중국은 이재민만 5,0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도 홍수로 인한 피해가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도 계속되고 있는데 기상 이변에 의한 피해까지 겹치고 있습니다. 기상은 크게 날씨와 기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해야 합니다. 밝은 날이 되면 좋지만 계속되면 폭염이 되고, 몇 개월씩 이어지면 가뭄이 됩니다. 비 오는 날이 하루면 좋지만 계속되면 장마가 되고, 몇 개월씩 이어지면 홍수가 됩니다. 그러기에 날씨는 자주 변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후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온대기후, 열대기후, 한대기후, 사막기후, 몬순기후와 같이 일정한 틀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는 그런 기후에 맞게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기후가 바뀌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기후가 바뀌면 생활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열대기후가 한대기후로 바뀌면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건축양식도 기후에 맞도록 발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기후는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기후의 변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어난다면 이는 준비하고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의 변화가 인간의 영향(지나친 자연개발과 탄소배출)으로 갑자기 다가온다면 이는 상상 할 수 없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올랐다고 합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의 체온으로 비유하면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이 1도 올라가면 피로감이 오고, 활동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 몸이 2도 올라가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구의 온도도 1도가 올라가면 날씨와 기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만일 지구의 온도가 2도 올라가면 지구는 날씨와 기후에 대한 복원력을 상실 할 수 있고, 이는 지구의 생태계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당연히 인류가 지금가지 쌓아온 문화와 문명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날씨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토착화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신앙을 수용해야 합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미신으로 여기고 금지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지만 결실을 맺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다른 문화와 접목이 되어서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기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서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 앞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뛰어넘는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으면 산적한 지구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환경문제, 난민에 대한 보호, 전쟁의 종식, 종교에 대한 적대감, 감염병에 대한 예방과 치료는 한 국가만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나가야 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국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연못이 썩으면 물고기는 살 수 없습니다. 지구가 황폐해지면 강대국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가 묶어야 할 것은 연대와 협력, 나눔과 화해입니다. 우리가 풀어야 할 것은 시기와 질투, 교만과 욕망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이웃의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진실한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보초”를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슬기롭게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괭가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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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사람>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늘 땅 사람>
하늘이 있습니다
땅이 있습니다
땅이 있기에 하늘입니다
하늘이 있기에 땅입니다
그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이 땅에 드리웁니다
땅이 하늘을 우러릅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늘이
사람을 통해
땅으로 내려옵니다
땅이
사람을 통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과 땅을 이을 때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서
땅과 하늘을 이을 때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땅과 하늘 사이에서
하늘과 땅을 갈라
하늘이 하늘일 수 없고
땅이 땅일 수 없게
하늘과 땅 사이에
그저 끼어 있을 때에
사람이어도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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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모든 갈등의 원천은>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생활하다보면 소위말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공동체가 잘못되었을 때, 부모님 혹은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와 자비를 강조해야 하는 입장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꼭 필요한 말인지,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인지 고민해야 하며 개인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는 것은 아닌지 거듭 되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저는 항상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는가?” 이 질문은 싫은 소리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타인에게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언제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저 역시 싫은 소리 보다는 좋은 소리만을 듣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역시 저는 생각합니다. “상대가 하는 말에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는가?” 만약 사랑과 애정이 담겨져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무엇보다 상했던 마음이 금방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말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고칠 때 저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 마저 듭니다.
리로이드 존 오길비라는 영성가는 그의 저서 <하느님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하여 먼저 나의 귓속을 청소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내 귓속의 귓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지장이 없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떡이 되면, 그때에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신앙인처럼 귀머거리가 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만 볼 때 우리는 한순간의 일이나 사고로 귀가 머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으면, 특히 하느님의 가르침을 명심하지 않으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장애에 이르게 됩니다.
문제는 앞서 말씀드렸듯 누구나 싫은 소리 보다는 좋은 소리만을 듣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쉽게 악과 미움이 담겨있는 소리를 함부로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복음은 충고와 경청에 대한 지혜를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나에게 죄를 지은 누군가 혹은 충고를 듣지 않는 타인이 생각나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나 역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른 이의 충고를 얼마나 잘 듣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이의 형제가 되는 것이 가능하며 더욱 더 발전적인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써 창조되었기에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 찾아서는 발전이 없음을 기억하며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유용한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 받는 싫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소리들에 사랑과 애정이 담겨져 있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른 이에게 충고를 보낼 때는 반드시 애정과 사랑을 담아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분명 죄를 지은 형제를 “지적하고 꾸중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타일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담지 않고 미움을 배제한 채 상대방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 하듯,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으며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충고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즉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싫은 소리를 하고 듣는 일은 분명 마음이 불편한 일입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것 같고 상대방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갈등은 뒷담화에서 시작되며 말 안에 악과 미움이 있을 때에 생겨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시작되어 “사랑”으로 끝난다면 지혜로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말에 권위를 세워주실 것이며 세상은 한결 아름답게 변해갈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이 사랑을 이토록 강조하나 봅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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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현신 요셉 신부님]
<너나 잘하세요>
전 세계 크리스천의 수는 얼마나 될까? 여러 형태와 방법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숫자는 전 세계 인구의 거의 4분의 1은 족히 될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인 ‘사랑’ 을 실천하며 선하게 산다면... 어쩌면 세상은 오래전에 천국이 되었어야 맞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자인 우리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참 슬픈 일이겠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의 행복’ , 그리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사는 것’ 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총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들은 ‘절대 권능의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는데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냐?’ 라고 말하곤 한다.
지금 지구(세상)의 시간이 1분 전 12시라는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일이지 우리가 하느님께 따질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하느님은 애당초 그 대책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좀 더 자주 기억하면 좋겠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관심” 이라는 병이지 싶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평소와는 정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는 역설적인 표현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그 병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른들은 자녀나 아이들에게 ‘괜히 쓸데없이 남 일에 참견하지 말라’ 며 그 병을 더 깊게 키워나간다. 요즘 어린 학생들마저 주변 친구들에게 끔찍한 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뉴스를 접할 땐 놀라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오늘 복음 말씀은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형제적 충고”에 대해서 말한다. “어떤 형제가 죄를짓거든, 어떻게든 타일러서 고쳐라.”
이유는 명확하다. ‘형제적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충고’는 매우 어렵다.
여러 해 전, 당시 딸을 결혼시킨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된 일이 있었다. ‘딸은 시집가서 잘 지내지?’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너나 잘살아라’ 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쭙잖은 충고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충고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참 어렵다. 또 해봐야 사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타이름을 당한다는 건 불쾌한 일이다. 어쩌면 충고하란 말씀은 나 자신부터 더 열심히 살라는… ‘나에 대한’ 또 다른 충고가 아닌가 싶다.
사회생활도 신앙생활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게 가장 효과적인 충고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세례 때 받는 ‘예언직’ 의 소명이다. 이 직분에 많은 이들이 충실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앞당겨질 것이다.
악인이 자기 죄 때문에 죽을 수 있겠지만 그 죽음을 강 건너 불 보듯 지켜만 본다면 그 책임은 바로 ‘너’ 에게 있다. (제1독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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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재경 요한 신부님]
<귀를 기울여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5절)
누군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우리는 타이르거나 충고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충고를 들으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죠.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호의적이다.' 라는 것을 본인이 느낄 때입니다.
충고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낀다면 상대방이 본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알기 때문에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충고나 타이름이 조선시대 사또가 주리를 틀면서 '니 죄를 니가 알렸다' 라는 식이라면 이 충고가 아무리 옳은 소리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타이르고 충고하는 사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충고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충고를 잘하는 사람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충고는 듣기 싫어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위에 있으니까, 나는 너보다 더 잘 사니까, 나는 너보다 더 나이가 많으니까, 나는 너보다 더 잘났으니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결코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교만하면 들을 귀가 닫히고 상대방의 옳은 소리를 멀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가족과 이웃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누구도 자신에게 충고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올바른 길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해주는 충고를 내가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95장 7절-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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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우종선 라우렌시오 신부님]
<타이름과 고자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사고, 생각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누구 하나 잘못되기를 원하시지 않는 분께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살아가야 하기에, 주님과 우리의 차이점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5절~18절)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미안해할까 봐 또는 심한 반발로 큰 싸움이 일까 봐 그냥 조용히 넘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제를 포기해 버립니다.
두세 사람과 교회에 알리면 괜히 고자질한 것 같고, 그 형제의 반응은 "조용히 말해 주면 들었을 것을 왜 고자질하느냐?"고 말하고 기분 나빠합니다.
교회의 원로나 성직자들에게도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상관하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내 방식대로 살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원합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형제 여러분,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랑에서 멀어진다면 하느님은 슬퍼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 오늘 복음 이후에 '용서'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용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깨닫도록 타일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사랑의 충고'를 '고자질'로 받아들이지 말고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인 것'을 풀려고 노력해야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며, 하느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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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처음 사람들 앞에서 강의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옆 본당의 견진성사 교리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하는 강의였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되었습니다.
그 본당의 신부님께서는 1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그 1시간도 너무나 길게 느껴졌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저였기 때문에, ‘내가 신자들 앞에서 특강을 해도 될까? 자격도 없는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강의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강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항의하지는 않을까?’ 등등의 걱정이 제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렇게 긴장을 하는 제게 선배 신부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습니다.
“걱정할 것 없어.
첫째, 못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둘째, 안 듣는 사람이 손해일 뿐, 네 손해는 없다.
셋째, 네가 그 자리에서 제일 전문가다.
넷째, 유명 강사도 실수는 많이 한다.
마지막으로 청중은 너를 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면서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강의 내용이 너무 좋았다면서 강의록을 청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강의를 시작으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강의를 듣는 분들이 저의 감시자가 아니라 함께 해주고 도와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니 항상 힘차게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살기 때문에 웃을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일치와 화합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소망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결국, 함께 하는 삶, 일치와 화합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율법을 완성하는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리되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닐까요? 이제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함께 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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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싫게 하는 일은 피하세요.>
하루를 뿌듯하게 보낸 날이 있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써야 할 글도 다 썼습니다. 여기에 강의 준비까지 마쳤습니다. “완벽해!”라고 외친 뒤에 수고한 나 자신을 위한 보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친한 신부들에게 연락해서 술 한 잔을 했지요. 기분 전환도 되고, 나를 위한 포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물론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 술을 마시다 보면 너무 많이 마시게 될 때가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어떨까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라며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분 전환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나 자신을 싫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나 자신을 싫게 만들 수 있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기분 전환이라는 그럴싸한 이유가 붙지만 결국 후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쯤이면 괜찮아.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 등의 핑계가 자신을 싫게 만듭니다. 무조건 피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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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
-사랑, 기도, 교정-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은총은 선물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예술작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가 속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말그대로 은총의 선물 공동체입니다. 내가 택한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쉬운 것에서 어려운 순서로 다섯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여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고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했습니다. 사실 첫눈에 발견되는 이웃의 결점들입니다.
둘째, 칭찬하는 것입니다.
칭찬하기는 쉽고 서로의 관계에도 도움이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값싼 칭찬은 금물입니다.
셋째. 감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까맣게 감사를 잊고 지내는 지요. 하여 진정성이 담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말마디의 표현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어느 분이 만날 때 마다 했다는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인사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넷째, 사과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앙금을 일거에 해소해 주는 사과입니다. 참으로 힘든 게 사과이지만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보다 백번 고마운 것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깨끗한 사과입니다.
다섯째, 교정입니다.
형제들의 잘못이나 죄에 대한 충고요 교정입니다. 정말 가장 힘든 것이, 또 상처주기 쉬운 것이 잘못이나 죄에 대한 지적이요 충고요 교정일 것입니다. 판단하기도 쉽고 칭찬도 감사도 사과도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충고나 교정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호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이다’ 예전 장상의 언급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입니다. ‘더불어together’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홀로와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더불어 안에서의 홀로입니다. 제가 가정공동체 삶이든 수도공동체 삶이든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사는 자체가 가장 힘들고 중요한 수행이자 수도이다. 잘살았든 못살았든 끝까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다. 부부도 함께 구원받는다. 부부 점수합하여 평균낸후 둘로 나눠 평균 60점 넘어야 둘다 함께 구원이다. 혼자서는 아무리 잘 살아도 구원받지 못한다. 참으로 중요한 평생 공동체 생활의 원리가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이다.”
과한 표현같지만 사실입니다. 어제는 틈틈이 ‘홀로와 더불어’-시인 추모 구상 문집-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문인들의 글이라 글이 쉽고 아름답고 깊고 향기로워 배우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참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깊이 글에 빠지기는 처음입니다. ‘홀로와 더불어’라는 구상 시인의 시가 좋았습니다. 구상 시인 친히 홀로와 더불어 삶의 대가요 달인이었습니다.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어떻게 하면 ‘홀로와 더불어’ 균형과 조화속에 공존의 평화를 누리며 잘 살 수 있을까요.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을성공적으로 살아 낼 수 있을까요. 판단이나 비난하지 않고 적절한 칭찬과 감사를 표하면서 즉시 잘못은 사과하면서 그 어렵다는 충고와 교정도 하면서 더불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답은 셋입니다. 사랑과 기도, 교정입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비난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칭찬, 사랑의 감사, 사랑의 사과, 사랑의 교정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은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에게 통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 한뿌리임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선물처럼 주어진, 하느님 친히 심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말그대로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서로 살기위하여’ 사랑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째로 인용합니다. 서로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무에게고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 탐내서는 안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성녀 마더 데레사의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성녀야 말로 사랑의 대가,사랑의 달인이었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배움터에서 평생학인이 되어 배우고 공부해야 할 수행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의 광신이 되기 쉽고, 기도가 없는 삶은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사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대로 삽니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는 테크닉,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되고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와 사랑 역시 함께 갑니다. 기도는 사랑의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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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높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 바른 충고를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합니다.
저는 강론 시작에 앞서 항상 ‘사랑합니다’ 하고 말문을 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입니다.
가끔은 ‘하늘만큼, 땅만큼’‘사랑합니다’를 합니다. 한 번 해볼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땅만큼. 하늘만큼. 예, 좋습니다. 우리 서로 서로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2독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라고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똑 같은 사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에게! 이것밖에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것에 젖어있으니까 좋은 줄을 몰라요. 그래서 인사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땅도 알고, 하늘도 알고!’ 즉 하늘도 알고 있을 만큼, 땅도 알고 있을 만큼 사랑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거든 하늘 앞에, 땅 앞에 부끄럼 없이 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 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칭찬은 달디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도 알만큼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를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땅도 알만큼 큰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달지만 독이 되기 쉽고, 충고는 쓰지만 약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를 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하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잠언12,15)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를 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3,19)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히브12,5) 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은총입니다.
한 주간 바른 충고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 말에 귀 기울이시길 희망합니다. 사실, 충고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욱 경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 있고, 살아 있는 충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기억해 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간 중 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출소한 후 길을 헤매다가 한 신부님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님은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 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은촛대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잠시 후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옵니다. “신부님, 혹시 은촛대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잡아왔습니다.”
말없이 장발장을 바라보던 신부님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 촛대는 제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날 이후 장발장은 변했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훗날 이웃의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시장까지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논리 정연한 설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심어린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타일러라’는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배려하여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남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 하권 12장을 보면 나탄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탄은 다윗을 찾아와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 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탄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때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결국 죄의 씨인 다윗의 아들이 죽고 밧 세바가 아들을 낳게 되는 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범하여 하느님 눈 밖에 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죄를 고백하면 그분의 크신 자비가 새 삶을 살도록 안배하십니다. 예언자 나탄의 소리를 귀여겨들었던 다윗처럼 우리도 쓴 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알고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많이 사랑하고 나 혼자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을 말며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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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화해와 용서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살면서 관계 안에서 갈등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쌍방이 서로 해를 입힐 수도 있고, 내가 피해자가 되거나, 혹 가해자가 될 수도 있지요. 아예 모르는 이에게 느닷없이 해를 입을 때도 있겠지만, 지근거리의 가족이나 공동체 동료, 친척이나 지인 등이 잘못을 해 올 경우가 어쩌면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계의 빈도수가 클수록 더 자주 마주치면서 그 안에서 갈등이 더 빈번히 발생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대면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가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은 맞지만, 괜히 언급했다가 자칫 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때문에 직면을 피하고 그저 참아넘기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의 선의를 믿고 그를 만나 대화하라고 하십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내리시는 소명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에제 33,7)
에제키엘은 주님에게서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백성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경고를 대신 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지치는데, 호소와 꾸지람, 단죄와 심판의 메시지가 반복되는 경고를 백성이 반길 리가 없겠지요. 게다가 이미 이스라엘은 주님 보시기에 마음이 돌처럼 굳었습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배반하고 우상들 사이에서 다른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으니까요.
"네가 ...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 그가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까지 들으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이 아무리 전하기에 쓰고 민망하고 불편하다 해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예언자의 임무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곧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한 영혼의 구원이 달린 것입니다. 듣는 이가 회심할지 고집을 피울지는 그의 선택이겠지만 예언자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전함으로써 자기의 소명을 완성해야 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결국 용서는 "그를 풀어 주어"(요한 11,44 참조)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렵지만 그와 대면해서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서, 일단 필요한 말을 해준 뒤에 상대방의 반응에 관계 없이, 그가 뉘우치건 변명하건 오히려 더 공격적이 되건,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지요.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고, 또 상대가 그 진심을 받아들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청하면 그 자리가 곧 주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행해지는 용서와 화해는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한 당사자 두 사람, 혹은 증인까지 서너 사람이 모인 자리가, 잘잘못을 따지고 추궁하는 것을 넘어서 "죄"라는 인류 공통의 악을 함께 힘 모아 떨쳐 내고 새 마음으로 돌아서는 새창조의 현장이 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당신도 기꺼이 그 안에 들어와 한 자리 끼시겠다고 약속하시지요.
그래서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 13,10)
내게 죄를 지은 이에게 악으로 되갚지 않고 선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악의 고리를 끊어 선으로 다시 시작하게 해 주는 축복이지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니, 결국 우리는 사랑으로써 사랑을 완성합니다. 하느님을 담고 그분께 물들어 가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는 방법을 하나 더 배웠습니다. 바로 "용서"지요. 상대를 풀어 주고 결국 그로써 내 영혼도 훨훨 날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해 주는 묘약입니다. 어렵지만 보상도 이처럼 엄청나니 한번 도전해볼만하지 않을까요? 붙들고 있어 봤자 피차 힘들기만 하다면 그냥 놔줍시다.
오늘 나 때문에 상처받고 용서하지 못해 여전히 나를 힘들게 붙잡고 있는 그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그만 용서하소서. 이제 그만 내려 놓고 자유로와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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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18,15)
오늘 독서와 복음은 '너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을 파수꾼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33,9)
너의 죄와 악한 모습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의 구원을 위해 애써야 하고, 네가 구원받지 못하면, 그 책임을 나에게도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오늘 복음도 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 두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가까운 이웃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적극적으로 이에 대해 그에게 말해야 하고, 그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너의 악행이나 죄를 보고도 수수방관하거나 침묵하면,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도 묻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남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너를 살리는 일, 너를 구원을 이끄는 일입니다. 너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우리나라 북쪽에 있는 차가운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최고로 강하다고 알려진 하이선 태풍의 예상진로가 조금 우측으로 변경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큰 피해를 주지 않는 곳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미사를 9.5부터 다시 재개합니다.
안전하고 복된 주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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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W8_IrP8e2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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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 15)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길입니다.
넘어지고
일어서는
관계맺음의 길을
되풀이하며 우리는
걸어갑니다.
무기력한
우리들에게
정직한 나눔은
언제나 힘겨운
도전입니다.
수도회
안에서 조차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형제 하나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음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음을 아프게
고백합니다.
형제와 형제
사이의 간격이
진심어린
믿음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뉘우쳐야 할
대상은 언제나
제 자신부터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형제도 없는
것입니다.
언어적
폭력이 아닌
진심어린 사랑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안쓰러운
형제적 관계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받아주는 형제
부족함을
인정하는 형제
미안하다라고
말할 줄 아는 형제를
통해 공동체는
유지되고
성장합니다.
신앙은 먼저
진실한 사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공동체와 무덤
가족과 하숙집
사이에 있는
관계의
현주소입니다.
우리의 무책임한
잘못으로
떠나간 형제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사랑은 서로를
배려하며
만나는 것이며
만남은 갇혀있는
서로에게 먼저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다시 공동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기도하는
요즈음입니다.
공동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며
소중한 나눔의
자리임을
되새겨봅니다.
살아있는
공동체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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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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