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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셋째 주 메시지
누가복음 6장 문제 9부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
말씀 누가복음 6장 46~6장 49절
요절 누가복음 6장 48절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김영삼 정부 때의 이야기입니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어 502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8개월 전에 성수대교가 붕괴하였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32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두 사건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부정부패의 사건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하여 정부, 학계, 시민단체의 차원에서 부정부패를 없애고 법대로 건물을 짓고, 다리를 건축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집에 큰 물이 나고 탁류가 부딪힐 때가 옵니다. 그때 하나님의 법대로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신천지는 거짓과 모략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지은 집은 이번 코로나19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이, 우리 교회가 어떤 시련에도 심판의 날에도 무너지지 않는 집을예수님 말씀에 기초하여 지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Amen.
(1)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
46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 말하면서도 어찌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행함이 없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후에도 예수 믿는 자들의 행함이 없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과연 주여 주여 하면서 행함이 없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보면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매우 심각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부실공사로 심판 날에 무너지는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들이 왜 행함이 없는 문제가 발생할까요? 한마디로 은혜의 복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율법주의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은혜의 복음은 너무나 값진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에 기초해야 우리는 자기 의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알아야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알아야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강조하다가 행함은 쓸모없다고 행함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복음에 들어온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이것을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파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회개도 순종도 필요 없고, 십자가는 지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것은 결국 누구도 완벽할 수 없는데 행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매우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기()소식선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은혜의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들을 값싼 은혜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실공사로 집을 지은 사람들로 구()파는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참된 은혜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은혜 속에서 행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값비싼 희생으로 얻은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완벽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끊임없이 완벽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열심히 행합니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행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 열심히 행하고도 자기 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자신이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했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죽을 때까지 완벽함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완벽함을 위해서 끊임없이 달려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썼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항상 그러면 우리가 은혜로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은혜 신앙은 율법을 더 굳게 세운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은혜 신앙은 율법주의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 신앙을 가르치면서도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부끄럽지만 과거에 지은 한 가지 죄를 고백하겠습니다. 제가 천안 개척을 하고 우리 UBF 교회가 북일고 앞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처럼 그 곳에서도 예배당 옆에 작은 방이 있었고, 저는 그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학생이 들어와서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내가 있고 자녀들이 있고, 나는 목자인데 말입니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방에서 뛰쳐 나갔습니다. 그 학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손 한번 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는 그 말을 듣고 그것을 즐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나는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자 사탄이 크게 일했습니다. 잘 자라던 학생이 떠나고 한 자매 목자는 귀신이 들어갔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죄가 무섭고 하나님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인간적 사랑을 즐기는 마음이 들면 끊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영접한 말씀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를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찌어다.” 입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의 주권 신앙, 은혜 신앙을 배웠습니다. 이처럼 은혜 신앙은 행위로만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이 행위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은혜 신앙을 배워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은혜 속에서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해도 완전함을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2) 집을 바위 위에 지어야 한다.
47~49절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말씀을 듣지 않고 행하지 않는 자를 집을 짓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짓되 흙을 깊이 파고 주추를 바위 위에 놓는 사람과 같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모래 흙이 많습니다. 이 모래를 다 파내면 바위가 나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래를 파고 이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홍수가 나지 않을 때는 집을 짓는데 많은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투자하므로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홍수가 나고 탁류가 흐를 때가 있습니다. 홍수가 날 때 집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고 사람도 안전하게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그가 지혜로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흙을 파내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그냥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는 빨리 쉽게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당시는 지혜로운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탁류가 났을 때 그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탁류가 나면 앞서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듯이 집만 무너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모래 흙을 파고,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위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위와 같이 우리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에는 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부인해야 하고 시간이나 물질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시대의 조류의 역행하기도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련의 날, 심판의 날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날 지혜로웠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 힘들어서 그냥 본성대로, 감정대로, 자기 생각대로, 세상의 조류대로 사는 분이 있습니다. 이들은 입으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삶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이들은 쉽고 편하게 살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 같습니다. 천국에도 갈 수 있고 세상적인 만족도 즐기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살 때도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거나 실패를 하면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날 어리석은 것이 드러납니다.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 아시죠? 세 마리의 돼지가 각기 다른 재료로 집을 지었습니다. 첫째 아기돼지는 밀짚을 얻어서 밀짚으로 집을 지었는데 늑대가 와서 짚을 훅훅 날려 버리고 아기돼지를 잡아먹었습니다. 둘째 아기돼지는 가시덤불을 엮어 가시덤불로 집을 지었는데 또 늑대가 나타나서 훅훅 불어 집을 쓰러뜨리고 잡아먹었습니다. 막내 아기돼지는 벽돌집을 지었는데 아무리 불어도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늑대에게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늑대가 오지 않았다면 첫째 둘째 돼지가 지혜롭고, 셋째 돼지는 어리석을 것입니다. 그러나 늑대가 오니까 셋째 아기 돼지가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늑대의 죽음이 오고, 늑대의 심판이 옵니다. 그때 살아 남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힘들어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육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시련의 날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여러 시련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IMF위기, 지금 코로나 위기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위기를 넉넉히 이기고 믿음을 지킵니다. 이들은 심판의 날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말씀대로 사는 사람과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의 좋은 예가 아브라함과 롯일 겁니다.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남았습니다. 당시는 광야 땅에 거한 아브라함이 어리석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브라함은 318명의 사병을 거느릴 정도로 부족장이 되었습니다. 사라를 장사할 때도 헷 족속에게 부족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으면서도 동성애가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에 물질적 풍요만을 바라보고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롯은 그들로오멜과의 전쟁 때 재산을 잃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황불 심판 날에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힘입어 간신히 구원받았습니다.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자신은 두 딸과 잠을 자서 모압과 암몬 족속을 낳았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죄의 씨들이 되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롯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노아와 노아의 시대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노아는 구원의 방주를 힘들여 지었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즐겼습니다. 이들에게 심판이 없다면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노아시대 사람들은 죽고 노아와 가족만 구원받습니다. 그날에는 노아의 가족들이 지혜롭다는 것이 들어났습니다.
(3) 예수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자.
우리 교회는 1층을 사서 2층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2층을 짓는데 돈이 없으니 조립식으로 짓는 것이 어떠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자고 하고 학원에 출근했는데 30만원 정도 주고 조립식을 짓기로 계약을 했습니다. 제가 퇴근한 후에 안 된다고 하여 30만원 날리고 벽돌로 집을 지었습니다. 만약에 그때에 이층을 조립식으로 지었으면 볼품없고 허술하여 아마 그 집을 뜯고 다시 벽돌로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돈도 시간도 노력도 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에게 유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를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떤 희생이 있어도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 예수님을 주인으로 하여 집을 짓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사느냐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사도들과 초대성도들은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지하에 땅을 파고 땅 속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서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겼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2000년을 넘게 무너지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인도 말씀대로 살아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공산당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를 겪으면서 부실 공사한 교회들이 많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에 기초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참된 은혜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기초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고 돈이 중심이 되지 않고 가정이 중심이 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집을 지어야합니다. 그러면 이 집이 천국까지 무너지지 않고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한마디: 말씀대로 행하자
3월 셋째 주 메시지
누가복음 6장 문제 9부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
말씀 누가복음 6장 46~6장 49절
요절 누가복음 6장 48절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