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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서,박서영 - 생명의 몸짓과 존재의 현시
지난 가을의 시편들을 훑어보니 계절이 주는 감상 탓도 있었겠지만, 여름의 잎새들을 떨어버린 후의 고독하고 본질적인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아름다운 몇 편의 시가 눈을 끌었다.조영서가 <과일考> 연작 3편과 <日月潭紀行詩> 10편을 묶어 신작 소시집으로 발표한 시편들(현대시학 10월호)이 그것이었다. 그 작품들 중에서
전자는 문자 그대로 존재의 본질을 응시하는 이 시인의 원숙한 시력이 잘 나타나 그 울림이 깊고 크게 부딪쳐오고,
후자는 시인으로서 섬세하고 놀라운 언어구사력을 통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를 건져 올려 보여줌으로써 소위 컨씨트 하나만 가지면 시가 된다고 믿어서 온갖 거칠고 경박한 말을 함부로 뱉어내는 요즘의 일부 시인들에게 새삼스럽게 하나의 고전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봄내를 은근히 맛보는,
새삼 여름물기를 물씬 씹는
완숙한 고독의
質,
그리고
量.
은혜를 물어뜯는
내 황홀한
가을 이빨.
「가을 이빨」 -과일考<1> 전문
소품이지만 그러나 대단히 크고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한 알의 과일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무게,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각성의 시이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 속에서 피었던 꽃이 지고, 목을 태우던 가뭄과 뿌리를 흔들던 폭풍을 견뎌내고 이제 가을을 맞아 빚어낸 한 알의 과일을 깨물며, 그 과일 속에 들어있는 <봄내>를 맛본다. 봄은 죽음의 겨울에서 삶의 숨결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봄내>는 생명을 환기시키고, 따라서 겨울로 다가서는 문턱에서 과일 속에 저장되어 있는 생명의 내음을 맡는 시인의 감각에 우리는 공감한다. 뿐만 아니라 <여름물기>를 씹는 것은 생명의 절정(여름)과 그 의미를 새삼 맛보는 일이고, 그것을 맛볼 수 있는 미각은 시인에게 허여된 은총이다. 타락한 일상성 속에서 존재를 망각하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일상인으로서 살아가다가 시인이 되는 순간 깨닫게 되는 현존재로서의 고독 속에서 세계는 그 본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예컨대 릴케의 <가을날>에서 보여주는 고독과 존재의 각성을 연상케 한다. 그 각성의 주체로서의 실존과 그 실존의 본질로서 거느리고 있는 <완숙한 고독>의 <質量>을 시인은 과일을 깨물면서 선명하게 체험하며 그것을 불과 몇 행의 짧은 언어로 함축해 놓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본 일월담은 치마폭이 넓었습니다. 무척. 처음엔 치마끈을 끊고 희디흰 속살을 약간 비쳐주대요. 보일락말락. 감질났지요. 이어 치마를 풀어헤쳤습니다. 홀랑. 그만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지요. 나긋나긋한 하늘이, 느릿느릿한 바람이, 따끈따끈한 햇볕이 일시에 덤벼들었습니다. 돌연. 목숨 건 힘으로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얼마간 얼떨떨했지요. 마침내 굽이굽이 치마결에 햇볕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바람은 소리소리 찢겨 울부짖고, 하늘은 뒷덜미 잡힌 채 꼼짝달싹 못하고. 그래도 능청스런 치마폭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늘빛을 감싸며, 바람결을 구슬려, 햇볕을 끌어안아 여느때 같이 구김살을 탈탈 털고 마냥 출렁거립니다. 시치미 떼고 시치미를 떼고.....
「치마폭」 -日月潭紀行詩<5> 전문
일월담기행시 연작은 대단히 감각적인 언어로 숨겨진 존재의 속살을 엿보는 것들인데, 우리는 시인의 이 엿보기에 동참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이 연작시에 나오는 일월담은 시인이 말한 대로 대만 중부의 산속에 있는 아름다운 산중호수의 명칭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호수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존재의 모습은 언어라는 로고스의 빛을 비쳐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인용시에서는 일월담이라는 물빛에 <하늘> <바람> <햇볕>이 구애를 하고, 그것들은 <달아오르고> <울부짖고> <꼼짝달싹 못하>며 정사를 나누는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관능적인 표현을 통해서 뭐라 이름할 수 없는 존재의 모습은 언어로 아름답게 육화되어 나타나고, 우리들은 그 <나타남>에 경이와 찬탄을 보내는 것이다. 이 연작시에는 인용한 「치마폭」 외에 「물빛 序詩」,「햇살줍기」,「한몸」,「동반」,「低音」,「對酌」,「深夜」,「말굽소리」,「暈」 등의 9편이 있는데, 여기에는 대체로 관능적인 이미지가 동원되고 있는게 특징이다. 그것은 아마도 일월담이라는 호수를 통해서 시인이 느꼈던 존재와의 해후라는 일종의 신비한 체험을 새로운 생명과의 교감이라는 관능의 형태로 언성화함으로써 우리들에게 한층 더 강렬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적 쾌감을 주는 가장 빠르고 강렬한 것 중의 하나는 관능적 이미지이다. 예컨대 한국 현대시에서 불멸의 찬사를 얻고 있는 서정주의 초기 화사집의 시편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미적쾌미 중 많은 부분이 관능적인 것들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몸짓이기 때문이며, 이점은 모든 예술양식 전반에 걸쳐서 매우 효과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했던 조영서 시의 아름다움이 단적으로 그러하다. 이때 관능은 이들 작품의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몸짓이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의 예를 얼마든지 볼수 있지만, 그것이 언어로 육화될 때에는 미적효과가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황금분할의 이론처럼 매우 엄격한 내적질서로 통제되어야 한다. 요즘의 일부 작품들이 그 관능적인 것을 지나치게 혹은 서툴거나 저급한 호기심의 유발수단으로 남용하여 오히려 혐오감을 주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시에서 관능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아름다운 몸짓이다. 그런 뜻에서 박서영의 「단풍 들다」(현대문학 11월호)도 눈을 끈다.
내가 뱉은 신음은 붉게 물들었다 그년, 지느러미가 참 곱군, 급하게 지나가던 바람이 화상 입는다 하혈을 끝내고 밑동을 자르면 드러나는 절개지의 슬픔, 상처는 깊었다 아무리 파헤쳐도 중심은 보이지 않고 엉켜 있는 핏줄들만 환했다 그년, 속은 더 곱군
관절 가득 물을 채우고 쿵쿵 뛰고 싶었다 밤 12시, 응급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쏟아지는 피를, 온몸의 盞을 비우고 싶었다 그러면 낯뜨거운 盞들 속으로 빛들은 몰려들 것이다 나는 생명의 피를 새로 수혈받고 참말 아름다운 아이를 가질 그날을 기다린다 몸속의 피를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 하혈의 끝, 산부인과는 오늘도 만원이다
박서영의 「단풍 들다」 전문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는 생명의 피를 새로 수혈받고 참말 아름다운 아이를 가질 그날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지금 화자의 하혈은 단풍이 들어 붉게 물든 온 천지의 빛깔로 환치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화자의 몸이 단풍으로 붉게 물드는 산천(우주)과 동일화를 나타낸다. 단풍은 모든 식물들로 표상되는 생명의 한 대사현상이지만 여기서 그것은 <내가 뱉은 신음>이 <붉게 물>든 것이다. <신음>은 화자의 몸의 고통의 표현이고 그것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으로 표상된 것은 시인이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주 공동체라는 존재에 합일되어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밑동을 자르면 드러나는 절개지의 슬픔>이나 <아무리 파헤쳐도 중심은 보이지 않고 엉켜있는 핏줄들만 환>한 것은 생명에 대한 현존재의 대책 없는 열망이다. 무심하게 내뱉는 듯한 <그년, 지느러미가 참 곱군>이나 <그년, 속은 더 곱군>에서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 속에서도 생명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존재의 승리를 확인하는 놀라움을 느낀다. 단풍은 현상적으로 볼 때 대지가 <몸속의 피를 밖으로 내보내>는 현상이다. 그것은 여자가 하혈을 통해서 다시 <생명의 피를 새로 수혈 받고 참말 아름다운 아이를 가질 그날>을 소망하는 것과 합치한다. 단풍으로 온 산천이 붉게 물들었다가 낙엽으로 떨어지는 자연현상은 새 생명을 예비하는 몸짓이며 그것은 여인의 몸의 현상과 합치되고 있다. 이 시의 표제<단풍 들다>처럼 온 산이 붉게 단풍으로 물드는 만추의 모습을 시인은 여인의 하혈에 비유해서 마치 대지가 몸속의 피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산에 가득한 단풍의 모습을 <산부인과는 오늘도 만원이다>라고 끝맺고 있는데 이점은 너무 직설적이고 당돌하여 시적 효과를 감소시키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이 결국은 합일되는 생명의 비밀한 현상을 읽을 수 있고, 이점은 앞에서 언급했던 조영서의 시편들과 연계되어 우리에게 관능적 이미지가 주는 생명의 몸짓과 그것을 통해서 존재의 현시를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이들 시편은 아름다운 관능 혹은 생명의 몸짓을 통하여 존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시적 감동을 주는 것이다.(*) ([문학과 창작](창간호) 199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