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가 늦어진 관계로, 지난번 올렸던 상편도 함께 올립니다)
[프롤로그]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아시는감?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그건 속임수야……커미셔너라든가 규칙위원회가 아무리 협박을 해도, 공에 뭔가 바르려고 하는 투수의 정열을 꺾을 수는 없었어……고대의 투수는 주로 땀이나 침을 공에 문질러 발랐지……문질러 바르는 액체의 점성이 높을수록 공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투수는 땀이나 침만이 아니라, 신체에서 분비되는 것은 모두 이용했지. 피, 지방, 가래, 콧물, 귀지, 소변, 대변, 정액. 시합이 시작되면 모든 투수가 관객 눈앞에서, 숨겨놓은 칼로 글러브안의 손바닥을 자르거나, 여드름을 짜거나, 손으로 코를 풀거나, 눈치채지 않게 자위에 열을 올렸어. 물론 시합중에 출혈과다로 죽거나 하는 투수도 많았지. 명예로운 전사지. 그렇지만,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투수 따위는 한사람도 없었어. 타자들도, 입으로는 투수를 향해서 '겁쟁이'라든가 '애송이'라든가 야유를 해댔지만, 마음속으로는 존경하고 있었어. 물론 타자도 큰일이었지. 여하튼 공과 함께 피나 소변이나 정액이 날라오니까. 일년 내내 몸은 끈적끈적하지……"
뭐 대충 이 따위 문장들이 튀어나오는, 야구가 사라진 저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야구광들의 철학적인 이야기라는데…… 물론 이 소설의 내용이 앞으로 내가 떠들 스토리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야. 현재 일본 프로야구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한국 프로야구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이 소설이 일종의 예고편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잠시 상기시켰을 뿐.
군대에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읽을 땐 '야구가 사라진다니, 말이 되남?'하고 생각했었어. 정말 사라지게 될 줄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 아무튼 지금부터, 도데체 한국 프로야구가 왜 사라지게 되었나, 사라진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에 대해 간략히 떠들어보도록 하겠어. 그리고 역사적인 그날의 시합도 함께. 이미 여러분들도 신문, 뉴스를 통해 내막을 다 알고 계시겠지만 말이야.
21세기 글라디에이터 (上)
"야구 안해!"
2000년 초반, 구단의 강력 진압 방침에도 불구하고 선수협 주력 선수들이 출범식을 강행한다는 소식에 발끈, 께비오의 우두머리인 바경어가 내뱉은 말.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실언이라고 판단, 웃어넘겼다. 스포츠 신문의 말말말 코너를 장식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경어의 머리속에는 이미 2000시즌 종료후 프로야구 해체작업에 돌입한다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2001년 1월 어느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도개선위와 씨름하고 집에 돌아온 바경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뭔가가 엉덩이를 찌르는 느낌에 일어나보니…… 소파위에 올려져 있는 비디오테이프 하나. 글라디에이터? 음, 작년에 바빠서 못봤는데 잘됐군. VCR에 테이프를 집어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야호!!!"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거실바닥을 뛰어다니는 바경어.
"그래! 대안을 찾아냈어! 콜로세움을 부활시키는 거야!"
프로야구 해체 프로젝트의 최대 걸림돌은 1년에 몇백만을 동원하는 프로야구를 대신할 장기적인 흥행 이벤트를 만들어내기 힘들다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나보다. 백열등이 짜잔 켜지듯?
다음날 아침, 잠실구장 지하벙커에 바경어를 비롯 나머지 7개 구단 구단주들이 모였다. 물론 바경어의 '21세기 글라디에이터' 프로젝트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콜로세움을 어떻게 부활시키냐구?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원래 대한민국엔 날림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건설업체들이 많으니까. 돔 구장을 만든다는 가짜 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한 후 단 3개월만에, 잠실구장은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으로 탈바꿈했다.
"시범경기 끝난지 한참 됐는데, 왜 페넌트레이스를 시작하지 않는거죠?"
기자들의 순진한 질문.
"대한민국에서 이제 프로야구는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이제 글라디에이터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푸하하!"
바경어와 나머지 구단주들은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일방적으로 '21세기 글라디에이터' 프로젝트를 공표해버렸다. 거액의 뇌물을 먹은 궁민의 정부도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야구팬과 선수들이 시민단체 및 노조, 원로야구인 모임인 일구회등과 연계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박격포를 앞세운 군부대의 진압작전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2001년 5월5일 어린이날, 잠실 콜로세움. 패티김, 현철등 인기 가수들의 화려한 오프닝쇼가 펼쳐졌다. 기존 야구팬들의 차가운 냉대에도 불구하고, 계열사 직원을 대거 동원, 좌석을 가득 메우는데 성공. 감격에 겨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글라디에이터 리그 개막 선언문을 낭독한 바경어. 자신의 이름을 '코묻었수'로 개명했음을 알린다. 드디어 께비오총재에서 황제로 등극한 것이었다. 작년 올스타전때 송지맨이 받은 황금빠따를 뺐어 녹여 만든 월계관(?)을 쓰고서.
'21세기 글라디에이터'란 무엇인가. 말그대로 고대 로마의 검투사 시합을 재현한 것. 기존의 선수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해 잠실 콜로세움에 마련된 노예합숙소-감방에 수감되었다. 8개 구단 체제는 8개 노예집단 체제로, 드림리그-매직리그 체제는 무대포리그-깡다구리그로 바뀌었다. 코치들은 전원 해고되었으나 감독들은 노예조교라는 감투를 써 살아남았다. 노예주인은 물론 예전에 구단주라 불리웠던 사람들이고.
노예에게 주어진 무기는 오로지 각목과 짱돌. 특별한 규칙은 없고, 지들 맘대로 휘두르며 쌈박질하면 된다. 한팀의 노예 전원이 쓰러져야 시합이 종료되는 방식. 하지만 노예 수급이 어려운 관계로, 또 스타 시스템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에, 시합중 상대팀 노예를 죽이는 일만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일주일에 이틀, 주말에만 시합이 열린 이유도 나머지 5일동안 부상당한 노예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노예들은 매일 보신탕, 뱀탕, 사슴피, 녹용, 붕어즙 따위를 배터지게 먹은 다음, 근육강화제, 중추신경 흥분제등의 약물 주사를 맞아야만 했다.
리그 초반엔 관중수가 겨우 천명 남짓. 노예들이 프로야구 스타였을 때 팬이었던 사람들로, 시합을 즐긴다기보단 노예들의 얼굴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무차별 쌈박질, 뿜어져나오는 핏줄기…… 그 순수한 폭력에 매료된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관중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8개 노예집단 주인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광고를 때려댄 것은 물론 방송사들에게도 압력을 넣었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방송사들도 KBS의 시험 중계방송이 시청률 71퍼센트를 기록하자 앞다퉈 중계방송을 편성했다. 주말저녁의 TV화면은 오락프로, 드라마, 뉴스대신 30대의 ENG카메라가 생생하게 잡아낸 피묻은 각목과 짱돌, 울부짓는 노예의 얼굴, 환호하는 관중들의 컷으로 가득 채워졌다.
글라디에이터 리그의 인기가 미친듯이 치솟자, 덩달아 각목과 짱돌을 움켜쥔 노예들의 사진과 인형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테헤란밸리의 벤처중 50퍼센트 이상이 글라디에이터 리그 관련 아이디어 상품으로 먹고살 정도였다. 전국의 겜방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글라디에이터 게임에만 몰두했다. 포트리스 따위는 골동품이 되었다.
마침내, 코묻었수 황제는 관중들도 시합에 참여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기 위해 쌈박질을 하는 노예들에게 뭔가를 던져도 좋다고 허락했다. 곧바로 그물이 철거되었다. 단 아무거나 던지면 안되고, 콜로세움에서 파는 '투척 용품'에 한해서. 플라스틱 물병, 컵라면 국물, 페인트 달걀같은 것들 말이다. 몇몇 관중들은 화려한 쇼맨쉽과 탁월한 투척 실력을 바탕으로 스타노예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프로야구 시절의 과격한 아이디들…… 광주해병대, 두산무대포, 삼성폭격기, 깡다구방독면등을 도용하고 다녔다.
사실 옛날 프로야구 시절에도 투척 행위는 있었다. 물론 집단 패싸움도. 그럼 코묻었수는 희대의 천재인가? 대한민국 국민들 마음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던 새디즘의 망령을 부활시키는데 성공했으니.
전반기 리그 종료. 8개 노예집단중 꼴찌는 깡다구 리그의 '안와'가 차지했다. 프로야구 시절인 99년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던 팀인데…… 안와의 꼴찌는 어느정도 예상되었던 결과라고 해야할 것이다. 근성이 없다. '생각하는 쌈박질'이 아니라 그저 크게 휘둘러대기에 급급하다. 이기는 시합과 지는 시합이 확연히 구분되고, 중반이후 역전패가 많다. 짱돌을 잘던지는 노예가 부족하다. 한마디로 맥빠지는, 뚜렷한 팀컬러가 없는 노예집단이었던 것이다. 글쎄? 노예복장이 빨간색이라서, 피를 흘려도 표시가 잘 나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을까? 어쨌든 워낙 인기가 없다보니, 관중들이 안온다고 해서 이름도 안와가 될 정도.
후반기가 시작되기전, 코묻었수 황제와 노예집단 주인들은 특별시합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꼴찌인 안와 vs 나머지 7개 노예집단 올스타…… 무대포 리그인 혁대, 부상, 상숑, 아따. 깡다구 리그인 어때, 엔지, 새끼. 왕따 한명을 집단 이지메하듯 7개팀이 한팀을 까부수는 형태로, 관중들의 가학욕구를 더욱 자극하기 위해 기획된 이벤트였다.
특별시합이 열리기 전날밤, 안와의 노예조교인 이혜수는 안와 노예 합숙소-감방을 찾았다. 흥분된 탓인지 60여명의 노예들중 잠을 자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내일 시합에 출전할 7명, 스타팅 오다를 발표하겠다. 왕종훈, 송지맨, 코미디스, 뭔말이여, 송유성, 이생열, 조규순!"
왕종훈은 프로야구 시절 타자부문 통산 신기록 여러가지를 보유한 선수였으나, 글라디에이터 리그에서는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성격이 여린 탓인지, 각목으로 상대방을 후려쳐야 할 때 먼산을 쳐다보며 주저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집단공격-팀플레이에서 많은 약점을 드러냈다.
반면 송지맨은 우람한 근육질 몸매를 바탕으로 저돌적으로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안와의 주 공격수인 셈인데, 특히 겸손함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상대방을 화끈히 때려눕힌 후에도 화려한 세레모니 연출은 자제했기 때문. 이런 점들 때문에 당시 '국민노예'라 불리우던 상숑팀 여비의 강력한 경쟁자로 대두되기도 했다.
흑인 코미디스와 백인 뭔말이여는 송지맨과 함께 그래도 안와에서는 인기있는 스타노예. 화이바에 송진가루를 묻혀 까맣게 만드는 버릇이 있는 코미디스, 가끔 그 송진가루를 상대방 눈에 뿌리기도 했다. 또 이름 그대로, 관중들을 웃기게 만드는 기괴한 쇼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 프로야구 시절, 한시즌 용병 최다 홈런을 기록했던 뭔말이여는 말싸움이 주특기. 한번 떠들기 시작하면 상대방 노예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굉호, 송지맨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글라디에이터 리그가 탄생한 것을 가장 반겼던 노예는 송유성. 프로야구 시절부터 데드볼 전문가였던 덕분인지, 짱돌로 상대방의 허벅지나 엉덩이등을 가격하는 것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또 과거 투창 선수 출신인지라 각목 끝을 뾰족하게 갈아 던지기도 하기 때문에 상대팀에겐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안와 노예들중 가장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이생열. 프로야구 시절 선수협 회장님이었던 성진우는 코묻었수 황제에 의해 어디론가 유폐되었고, 구다성은 일본으로 도망가 사시미집을 차렸기 때문에, 이생열은 안와의 가장 믿을만한 왼손잡이 노예.
제2의 정만철이라 불리웠던 조규순. 리그 초반에는 연속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며 승승장구했으나, 체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최근엔 급격히 무너지는 경향이 생겼다. 이혜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이기도 한데, 동갑내기 친구인 새끼팀 이숭호와 너무 자주 전화통화를 해 가끔 팀워크를 깨뜨리기도.
"우리팀은 끝까지 교체노예 없이 시합한다. 하지만 상대 연합팀은 노예 교체는 물론, 동물을 이용한 작전도 펼칠 것이다. 에버랜드에서 동물들을 지원한다는구만."
"완죤히 우리 죽이자는 거 아녜요?"
왕종훈이 볼멘 소리를 한다.
"그러게 누가 꼴찌하래? 니네들 때문에 나두 조교에서 짤릴지 모른단 말이야!"
"우리가 꼴찌한 이유는 다 이혜수 조교님 때문이에요. 불길로 뛰어드는 한마리 나방처럼, 너무 무모한 작전을 많이 펼치셨잖아욧!"
안와 노예주장인 강석봉이 따지고 든다.
"아냐. 우리가 꼴찌한 이유는 짱돌 던지는 애들이 너무 부실해서야. 유성이 빼고는 잘하는 애들이 없잖아. 아…… 정만철, 이상묵, 성진우, 구다성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능교?"
"이혜수 조교님, 우리 지원해줄 관중들도 많이 오나요?"
휴대폰 폴더를 접으며, 조규순이 묻는다.
"그래. 공식 서포터즈인 싸워이글스와 다음 안와 팬클럽 회원들이 대거 몰려올 예정이야. 깡다구 방독면과 화학지원대대란 탈영병도 게릴라쇼를 펼친다더군. 그리고 얼마전 쫓겨난 한뺑덕이 깜짝 복귀할지도 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뺑덕은 송유성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연습생 출신인데, 성진우와 함께 방구레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한 노예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과거에 트럭운전수 노릇도 했었다.
"어쨌든 미국 ESPN과 일본 NHK에서 위성 생중계도 한다니깐, 해외진출 하고 싶은 애들은 열심히 쌈박질하라구."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내일 시합에 나설 7인의 안와 노예들은 다리가 후들후들, 오금이 저려옴을 느꼈다. 각팀 최고의 파이터들만 출전할텐데, 중간에 교체도 가능하고, 게다가 동물?
"십자가 군병들아……"
할렐루야 형제, 안와의 군종인 송지맨, 백새호가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공포감을 떨쳐버리기엔 역부족. 오히려 이런 순간에는 요한게시록이 더 어울리는 것 아닐까?
21세기 글라디에이터 (中)
결전의 날, 저녁 6시. 쿠구구구…… 요란한 굉음을 내며 철창문이 열렸다. 이혜수 조교와 7인의 안와 노예들은 경기장 중앙을 향해 뛰어나갔다. '우우∼' 잠실 코로세움을 가득 메운 5만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플라스틱 물병과 컵라면 국물, 페인트 달걀 따위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자, 똑똑히 봐라. 피에 굶주린 저 관중들의 모습을!"
두 팔을 벌리며 이혜수가 소리쳤다.
"관중들을 흥분시켜라! 잔인하게, 사정없이 내리찍어라! 적의 피로 물든 너희의 몸뚱이를, 그 자랑스러운 몸뚱이를 관중들에게 선사해라! 너희들은 영웅이 될 수 있어! 무조건 밀어붙여!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한마리 나방처럼…… 알간? "
"예, 알겠습니다!"
"오늘도 평소처럼 1:1대결부터 시작한다. 왕종훈은 상숑-여비, 송지맨은 엔지-이방규, 코미디스는 어때-기린, 뭔말이여는 새끼-강뻥규, 송유성은 아따-김성핸, 이생열은 부상-이혜촌, 조규순은 혁대-정망태. 저쪽이 먼저 나서는 순서대로 맞장떠라."
갑자기 무시무시한 하드코어 계열의 음악이 스피커에서 터져나왔다. 올스타 노예들의 등장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와와∼' 고막을 찢어발기려는 듯한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흙바닥까지 쿵쿵 울렸다. 이혜수는 잠깐 채찍을 휘두르는 척 하고는 쫄랑쫄랑 합숙소쪽으로 뛰어갔다. 마침내 쿠구구구…… 7개의 철창문이 열리더니 7인의 올스타 노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장 중앙에 엉겨붙어 떨고 있는 안와 노예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내가 또 선빵으로 나서야되남? 아이 XX, 피부병땜에 쉬어야되는데……"
강뻥규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뒷주머니에서 조그만 짱돌을 꺼내 냅따 던진다. 짱돌은 뭔말이어의 발목 부근을 강타. 뭔말이여에겐 자신의 유행어를 써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뻑낑 언더그라운드 볼!"
"아임 대변인. 양키 고홈! 한강 독극물 방류…… 유 노? 오케이?"
"아임 송지맨 유모차 프리젠트…… 홧 어 뻑…… 댐…… 썬 오브…… 에쓰홀, 쉿트……"
뭔말이어와 강뻥규가 상대방의 얼굴에 거의 침을 뱉다시피하며 치열하게 말다툼을 하는 사이…… 기린은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톡 튀어나온 커다란 두 눈을 좌우로 굴리며, 허리를 유연하게 돌려대며, 아무튼 코믹섹시댄스로 관중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기가 죽은 코미디스. 화이바를 흙바닥에 내던지며 '뻑'이라고 외치고, 꽃가루 날리듯 송진가루도 뿌려봤지만 역부족. 이때 팔등으로 이마에 묻은 침을 닦아내던 뭔말이여의 기적같은 한마디.
"헤이, 코미디! 엄부렐라!"
"엄부렐라? 오케바리!"
허리뒷춤에 꽂혀 있던 우산을 뽑아든 코미디스. 자신을 향해 날라오던 플라스틱 물병, 컵라면 국물, 페인트 달걀 따위를 막아내기 시작한다. 급기야 형형색색의 꽃무늬 우산을 빙그르르 돌려버리자 오물들은 오히려 기린의 얼굴로 튀어버렸다.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형, 나 잠깐 쉬싸고 올께."
"알았어. 빨리 갔다와."
왕종훈은 쭈그리고 앉아서 여비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안와, 큰건감?'…… 왕종훈이 이런 생각에 빠져있던 순간, 엄정화의 페스티발이 울려퍼지더니 부르르릉…… 번쩍번쩍 빛나는 BMW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으아악!"
왕종훈은 각목을 내던지고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토끼기 시작했다. 물론 여비와 그의 애마 BMW는 성난 황소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왕종훈을 쫓아갔다.
'돌출된 이빨-톡 튀어나온 엉덩이'와 '거무튀튀'의 대결도 만만치 않다. 어디서 구했는지 짱돌머신 2개를 앞에 갔다놓고, 머신에서 튀어나오는 짱돌을 누가 더 많이 맞추나 내기하고 있었다.
"넌 하나님을 믿니?
노예복장에 청테이프로 붙인 물고기 모양의 딱지를 가리키며 송지맨이 물었다.
"난 팬들을 의식안해."
동문서답을 하는 이방규.
"최익숑 꽃다발 받은게 그렇게 못마땅했니?"
"근육만 뿔리면 다냐? 어이, 뒤를 한번 봐봐."
"왜? 앗!"
송지맨뒤에는 어느새 박재흥이 서 있었다. 나이트에서 집어온듯한 깨진 맥주병을 든 채.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1:1대결은 안와의 박빙 우세. 비록 왕종훈과 송지맨은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지만, 나머지 노예들은 잘싸우고 있었다. 조명탑의 불빛에 결국 알레르기를 일으킨 강뻥규는 스스로 합숙소로 돌아가버렸다. 기린은 엄부렐라-오물쇼에 치여 더 이상 춤을 춰대지 못했다. 송유성과 김성핸은 '전생체험' 이벤트를 열었다. '각목 슬럼프에 빠지면 쉬는 날 송유석을 운동장에 불러냈는디, 삼복 더위에 짱돌 2박스(약 600개)를 다 던지구도 지치지 않는 송유성이의 씽씽한 어깨에 질려버렸당께'…… 김성핸의 고백. 이생열과 이혜촌은 미친듯이 서로를 향해 짱돌을 던져댔지만 빗나가는게 더 많았다. 체력이 팍 떨어진 정망태는 혁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조규순과 백중세의 쌈박질을 펼치는데 그쳤다.
"작전변경!"
올스타노예팀의 대표조교인 김응응의 지시. 올스타노예들을 모두 여비의 BMW에 올라탔다. 잠실 콜로세움은 순간 조용해졌다.
"도데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쨌든 안와 노예들은 다시 가운데로 엉겨붙었다. 어디서 본건 많아가지구, 둘씩 짝지어 등을 맞대고, 서로의 손을 꼭 쥐는 시늉을 한다.
"찌익, 찍찍찍찍."
"어머, 쥐다!"
합판대기 뚜껑이 뿅 열리더니, 두툼한 잿빛의 시궁쥐들이 떼거지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안와노예들은 서로 먼저 토낄려고 허둥대다 전부 자빠져버렸다.
"이제는 뽀개는거야, 스마일어겐! 니네는 다 죽었어, 해피데이!"
"으르렁, 엉엉!"
미친듯이 물어뜯어대는 시궁쥐들의 공세에 발버둥치고 있는 안와노예들을 향해 BMW가 돌진해왔다. 언제 풀어놨는지 사자, 호랑이, 곰도 피냄새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모여있지말구 떨어져욧! 송지맨과 코미디스, BMW를 유인해!"
안와 노예복장과 똑같은 차림새의 서포터즈-싸워이글스들이 합숙소 안에서 TV중계를 보며 떨고 있는 이혜수대신 작전지시를 내린다. 송지맨과 코미디스는 재빨리 일어나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스피드는 딸리지만 센스있는 뜀박질을 구사하는 뭔말이어도 합세. 예상대로 BMW는 3명의 안와노예들을 쫓아왔고, 두 그룹은 경기장안을 뺑뺑 멤돌았다. 물론 일개 노예가 세계명차보다 빠를 순 없지만, '노예를 죽여선 안된다'는 규정때문에 깔아뭉갤 수도 없는 노릇. 유독 큰 쌈박질에 약하다는 여비의 징크스도 한몫했다.
"동물들, 에버랜드에서 지원한다고 했죠?"
조규순이 말을 꺼낸다.
"응. 왜?"
왕종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차일드의 정글스토리도 못봤어요? 사자는 코끼리똥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구요!"
"이 상황에서 코끼리똥을 어떻게 구하남?"
이생열이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인간에 의해 사육된 동물들이니 야수성이 거세되었을 것으로 사려돼요.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다구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딴청을 피고 있는 동물들을 향해 짱돌을 던지는 조규순. 짱돌은 시궁쥐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던 곰 정수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조규순을 향해 잠푸를 한다.
"으르렁!"
"앗, 위험해!"
한때 혼담이 오고 갔기 때문일까? 송유성은 조규순을 밀쳐냈다. 물론 모든 드라마, 영화에서처럼 미처 자신은 피하지 못하고 자빠졌다. 호랑이가 송유성을 깔아뭉갤 찰나, 송유성은 반사적으로 끝을 뾰족하게 간 각목을 세워버렸다.
"뿌지직!"
각목은 호랑이의 심장을 관통. 하지만 송유성은 호랑이 몸뚱이에 깔리고 말았다.
"어떻게좀 해봐욧! 뭐하구 있어?"
사자와 티격태격하던 조규순이 왕종훈과 이생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왕종훈은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생열은 발밑의 쥐들을 깔아뭉개는 것에 열중해 있었다.
"어이, 거기 다음 안와 팬클럽 여러분! 고기같은거 싸온거 없어요?"
조규순은 이번엔 관중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다음 안와 팬클럽 회원 한명이 일어나더니 통닭을 손에 쥐고 흔들어댔다. 냄새를 맡은 사자가 통닭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 하지만…… 그물이 없다는 걸 깜박 잊은 것이 실수였다. 사자는 관중석안으로 뛰어들었고,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왕종훈, 이제 니가 활약할 차례야. 우리들중에서 관중석까지 짱돌을 날릴 수 있는 노예는 너밖에 없어……"
호랑이 시체밑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송유성이 손바닥으로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린다. 금방 작전을 눈치챈 이생열이 왕종훈을 향해 짱돌을 살살 던졌는데…… 힘찬 각목질에도 불구하고, 짱돌은 왕종훈 발밑으로 톡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얼굴을 감싸안으며 주저 앉는 왕종훈.
"아아, 역시 난 안되나봐!"
"종훈 옵, 여길 봐요!"
"오잉?"
"종훈 옵, 싸랑해요!"
왕부회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갑자기 등장, 각목 하나를 던져준다. 각목은 떼굴떼굴 굴러 왕종훈 발밑에서 멈췄다.
"앗, 이것은……"
각목을 집어든 왕종훈의 눈빛이 빛났다. 저 언니가 썼남? 유난히 묵직한 그 각목에는 'HRKING'이란 낯익은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좋아! 이생열, 다시 한번!"
이생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짱돌을 던졌다. 왕종훈의 각목이 힘차게 돌아간 순간, 딱!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짱돌은 관중석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날라갔다. 거의 빨랫줄! 물론 각본대로, 짱돌은 사자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야호!"
왕종훈, 이생열, 송유성, 조규순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안와 짱돌노예 전담 특작부대인, 혁대의 박갱완, 낀란, 이숭늉이 기습적으로 4명의 안와노예들을 덮친 것이었다.
한편, 송지맨은 혼자 BMW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코미디스는 BMW를 교란시킬 요량으로 슬라이딩을 감행하다 팔목을 다쳐 실려나갔다. 뭔말이어는 난데없이 등장한, 옛날 프로야구 시절 심판출신 노예들과 입씨름을 벌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후우우, 더 이상은 못뛰겠어!"
송지맨이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그순간, 누군가가 잽싸게 후다닥 송지맨을 따라잡더니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부상의 정슈근이었다. 이때 각목과 깨진 맥주병을 든 채 BMW에서 하차하는 이방규와 박재흥. 쓰러져 있는 송지맨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아…… 이대로 끝나는가?"
송지맨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왕종훈, 이생열, 송유성, 조규순쪽을 쳐다보았다. 혁대 특작부대는 물론, 다른 올스타들까지 가세해 피비린내나는 린치쇼를 벌이고 있었다. 부상 합숙소쪽에서 짱돌대신 커피포트로 삶은 듯한 달걀들이 마구 날라오기까지 했다. 물론 관중들은 완죤히 열광의 도가니. 막대풍선, 두루마기 휴지, 폭죽, 신문지, 라이터따위가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오, 주여…… 절 버리시나이까!"
노예복장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십자가를 꼭 움켜쥐는 송지맨.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21세기 글라디에이터 (下)
"콰과광!"
요란한 굉음이 울리더니, 뿌연 연기가 잠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헌병대의 눈을 피해 가까스로 잠실 콜로세움에 도착한, 스타급 안와 관중이자 탈영병인 깡다구방독면과 화학지원대대가 연막탄을 터뜨린 것이다.
"뚜두두두, 쿠쿵!"
이번엔 거짓말처럼, 관중석 한귀퉁이가 무너져내리기 시작. 금방 구멍이 뻥 뚤리더니 뿌연 연기를 헤치고 무엇인가가 경기장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앗! 한뺑덕이다!"
싸워이글스중 한명이 외쳤다.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1톤짜리 포터가 등장한 것! 창문밖으로 손을 내밀어 안와쪽 관중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트럭운전수' 한뺑덕은 곧바로 핸들을 꺽어 BMW를 향해 돌진. 화들짝 놀란 여비 일당은 차에서 내려 합숙소쪽으로 또꼈다. 순식간에 BMW는 종이짝처럼 구겨져버렸다.
"빠샤!"
"한뺑덕 오케바리!"
그때 트럭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하차. 문방구에서 1000원주고 구입한 듯, 종이로 만든 조잡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멋진 독수리가면을 쓰고 있었다.
"저 놈을 잡아, 저 놈을!"
김응응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제히 독수리가면에게 달려드는 올스타노예들.
"아비요! 휙, 휙!"
하지만…… 독수리가면의 현란한 짱돌쇼! 체인지업 짱돌, 슬라이더 짱돌……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그야말로 올스타 노예들을 가지고 놀더니…… 1분도 안돼 올스타 노예들을 전부 쓰러뜨린다. 관중들은 박수를 치는 것도 잊은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데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저 영웅은 누구란 말인가. 아, 정적만이 흐르는 잠실 콜로세움.
"황제폐하 납시오!"
동사무소에서 지원한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친위대-공익근무요원들이 귀빈석밑 출입구에서 튀어나오더니, 경기장 중앙에 모여 있는 안와와 올스타 노예들을 에워싼다. 곧이어 보라빛 망토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바경어, 아니 코묻었수 황제.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고?"
코묻었수는 지시봉으로 독수리가면을 기분나쁘게 툭 쳤다. 피식 웃더니 돌아서버리는 독수리가면.
"무엄하도다! 감히 짐에게 등을 보이다니! 어서 그 싸구려 가면을 벗지 못할까!"
호통을 치는 코묻었수. 다시한번 피식 웃더니, 마침내 양쪽 귀에 걸린 고무줄을 떼어내는 독수리가면. 사실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아니…… 너, 너는!"
"난 옛날 프로야구 시절, 선수협 회장을 역임했던 성진우다! 아니, 이제는 노예해방대장 막살았수 장군이다! "
이혜수가 건네준 확성기에 입을 대고, 모든 관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을 하는 성진우, 아니 막살았수.
"전라도 외딴 섬에 유폐시켰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우리가 구출시켰다!"
"잉?"
뒤를 돌아보는 코묻었수. 어느 틈엔가 구명조끼, 튜브, 물안경등으로 무장한 박장태와 양조혁이 서 있었다. 트럭 짐칸에 실려온 모양이었다.
"아니, 이것들이! 어떻게 된거야, 김멍성 조교, 이갱은 조교! 얘네들 언제 탈출했어?"
"……"
"흥, 어쨌든 상관없지롱. 니네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사수 탄창결합!"
"사수 탄창결합!"
복창을 하고 탄창을 끼워넣고는 막살았수와 박장태, 양조혁등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공익근무요원들.
"안돼!"
갑자기 나타나 막살았수를 가로막고 서는 여비.
"내가 노예해방운동에 동참하지 못하면, 여비도 아니고 한국 글라디에이터 리그 노예도 아니다!"
"그래, 잘한다. 국민노예가 국민이 원하는 걸 못해주면 말이 안되지!"
최익숑이 맞장구친다.
"통일 노비문서라는 것이 95%가 한문으로 써 있어. 95%의 노예가 규약을 못 읽는다구!"
마하영도 한마디 거드는데,
"하지만 노예들아, 무좀약이나 치질약 광고에 나가면 좋겠어?"
이번엔 전 께비오 사무총장, 현 황제 특별 보좌관인 이생국이 따지고 든다. 덩달아 썰렁한 말을 내뱉는 유지헌과 정망태.
"여기 저녁식사하는 자리 아닌감?"
"난 노예주장도 아니고 노예조교도 아닌데 왜 자꾸 나한테만 물어보는거여?"
아, 노예해방군의 입지가 좁혀지려는 순간…… 기적처럼 튀어나온 백새호의 양심선언.
"노예짓은 안해도 군대는 절대로 못간다고 했는데, 이젠 아냐! "
조경탁도 안와노예들의 눈치를 쓱 보더니 멋진 말을 남기고야 만다.
"내 가족들은 게속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죽더라도…… 훗날 역사가 우릴 평가할 것이다!"
확성기를 통해 잠실 콜로세움에 울려퍼지는 막살았수의 떨리는 목소리! 뭔 쇼들을 하는가 하고 냉담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관중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결국 일제히 기립하는 관중들!
"둘셋, 뭐여?"
"둘셋, 뭐여?"
코묻었수와 그의 친위대, 공익근무요원들을 향한 섬뜻한 야유였다.
"살! 려! 라!"
"살! 려! 라!"
새로운 영웅을 반기는 관중들의 우렁찬 목소리로 잠실 콜로세움은 떠나갈 듯 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 옛날에 영화 '글라디에이터'에서 본대로, 코묻었수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다 결국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말았다.
"와와와!"
"막살았수 만세!"
"만세!"
[에필로그]
그후 어떻게 됐느냐구?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들은 노예해방, 더나아가 프로야구의 부활을 이루어내진 못했어. 코묻었수 황제와 궁민의 정부의 막강한 권력, 그리고 이미 피맛을 본 국민들의 가학욕구가 하루아침에 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도 여전히…… 그들은 보신탕, 뱀탕, 사슴피, 녹용, 붕어즙 따위를 배터지게 먹은 다음, 근육강화제, 중추신경 흥분제등의 약물 주사를 맞고 있어. 물론 주말엔 경기장에 나가 각목을 휘두르고 짱돌을 던지겠지. 언제 에버랜드에서 데려온 맹수들의 이빨에 목숨을 잃을지 모를 일. 하지만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야. 말하자면 현재진행형. 그들은 언젠가는 노예해방의 그날, 프로야구 부활의 그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 굳게 믿고 있어.
최근 코묻었수가 '엑스맨' 비디오를 빌려봤다는군. 혹시 알아? 코묻었수에서 매그니토로 짜잔 변신해버릴지.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초능력으로 담배꽁초 정도는 쓰러뜨리는 경지에 올랐대나 뭐래나. 아무튼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들 역시 울버린, 사이클롭스, 스톰, 로그 등으로 능히 변신할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니까.
음, 갑자기 미스리가 센치한 목소리로 책을 읽는구먼. 그래, 바로 그 이상한 소설…… 다까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말이야.
"맑은 날. 야구를 하기엔 더없이 맑은 날. 시합개시를 기다리고 있는 스타디움. 스탠드에 관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필드에서 나른한 듯이 캐치볼을 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어느 스타디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 이제부터 비가 내리지만 않으면 아마도, 시합이 시작될 것이다. 아마, 그건 야구겠지. 이 '아마'라는 부사는 통상 생략되는 단어. 그러나 오늘은 어떻게든지 '아마'라고 쓰고 싶다. 아마, 관객들은 시합을 즐길 것이다. 아마, 선수들은 던지고, 그리고 그라운드를 달릴 것이다. 아마, 이 스타디움 이외에도 스타디움이 있어, 거기에서도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마'도 아마 생략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마, 그런 일일 것이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시합은 아직도 시작되지 않는다."
(끝)
[부록: 참고자료] 스포츠서울 1월 31일자 '선수협 관련 말말말' 기사 중에서 일부 인용
"선수단체 만들면 야구 안해!"(KBO 박용오총재. 구단의 강력 진압 방침 천명에도 불구하고 양준혁등 선수협 주력 선수들이 출범식을 강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발끈. 이 한마디가 불을 지를 줄이야)
"내가 내일 올라가지 못하면 이승엽도 아니고 한국 프로야구 선수도 아니다!"(두산 심정수가 대구로 내려간 이승엽에게 선수협 가입 권유 전화를 걸자 이승엽이 꼭 올라가 가입하겠다면서 대답했다는 말)
"국민타자가 국민이 원하는 걸 못해주면 말이 안된다."(한화 최익성. 국민타자로 추앙받는 이승엽이 대다수 야구팬들이 원하는 선수협 가입에 뛰어들지 않자 서운하다며)
"통일계약서라는 것이 95%가 한문으로 써 있습니다. 선수 95%가 규약을 못 읽습니다."(롯데 마해영. 경실련의 한 관계자가 프로야구 규약이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밝혀달라고 하자 계약자가 읽어내지 못하는 계약서는 그 자체가 무효라며)
"무좀약이나 치질약 광고에 나가면 좋겠어?"(KBO 이상국 사무총장. 선수협 정관을 보니 선수들이 광고권을 얻겠다고 돼 있는데 아무 광고나 나가서는 안된다며)
"저녁식사 하는 자리인줄 알고 왔어요."(LG 유지현. 창립 총회때 LG선수 대표로 왔는데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 몰랐다며)
"나는 주장도 아니고 단장도 아닌데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현대 정민태. 선수협의 임시총회에서 현대 선수의 입단및 탈퇴 문제가 어떻게 됐는 지 기자들이 묻자)
"야구는 안해도 군대는 절대로 못 갑니다."(한화 백재호. 지난 98년 아시안게임 출전멤버로 병역 면제혜택을 받게 돼 있는데 구단이 자신에게 자유계약선수 공시등 강력하게 탈퇴 압력을 가해오자 탈퇴 원서를 내며. 현업 프로야구에 종사하지 않으면 병역 면제혜택은 없어진다)
"내 가족들을 데리러 왔다."(한화 조경택. KBO에서 가진 양심선언 기자회견에서 선수협 가입파 선수들을 탈퇴시켜 대전으로 내려가겠다며)
"훗날 역사가 우리를 평가할 것입니다."(한화 송진우. 회장으로 선수협을 이끄는 소감을 피력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