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느물느물 봉창을 넘어 어느새 침대 바로 앞까지 점령했어요. 내 육체는 이미 늙어버렸는데 어쩌면 그대는 영롱한 이팔청춘 그대로인가. 선 샤인 리스펙트! 마이너스 200만 원으로 1월 마감을 겨우 쳤는데, 3일이 토막 난 2월을 버티려면 마음을 단디 먹고 긴축재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님과 미팅 때문에 비니 대신 볼캡을 쓰고 나왔더니 귀불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어요. 인삼 2근-카스텔라 2box를 사고 양평 해장국집에 들러 내장탕 한 그릇 뚝딱 해치웠어요. 양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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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소 곱창은 소의 곱창이고 양 곱창은 양의 곱창인가? 필자도 과거에 양 곱창과 소 곱창이 따로따로인 줄 알았는데 같은 말이에요. 소의 곱창 중 위 부분을 양이라고 한다는 것 아닙니까? 소의 위는 대략 4부 위로 구별되는 데 첫 번째 위를 <양>이고 부릅니다. 위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고 얇은 부위는 국거리나 전골로, 두툼한 부위는 구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위는<벌집 양>으로 벌집 모양처럼 생겨서 이름이 붙었습니다. 쫄깃하면서도 감칠맛이 좋아 인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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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로도 먹고 얇게 썰어 샤브샤브로 익혀 먹기도 합니다. 회로 먹기엔 질기고 오래 삶으면 딱딱해지니까 주의하시라. 세 번째 위를<천엽>이라고 해요. 술집에서 간과 함께 서비스로 나옵니다. 곱창집에 천엽이 없는 집은 소규모이거나 신선하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마지막 소의 네 번째 위를<막창이라고 합니다. 창자의 마지막 부분을 일컫는 돼지 막창과는 달리, 위의 마지막 부분을 소 막창(대창)이라고 해요, 지방이 적고 열량은 돼지 막창의 1/4 정도에 불과하여 쫄깃하면서도 담백한 맛으로 우리 패밀리 들이 환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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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집 솥밥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긴 했는데 한 번의 외박이니 이해하시라! 쿠팡 문제와 새벽 배송이 맞물려 있어서 대형마트도 시장을 개방한다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새벽 배송 개방을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소상공인들은 마냥 반길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균열>을 통해 시장이나 소상공인들도 변화에 맞는 경쟁력을 확보하시라! 에예공! "소쉬르 VS 라캉 기표의 우위"에 대하여 공부하다가 라캉–푸코–들뢰즈-말씀과 기표의 관계까지 나아가게 됐구나. 다소 딱딱한 내용이지만 훗날 <기표와 기의> 혹은 <랑그와 파롤>을 공부할 때 참고하시라!
1) 소쉬르: 기표(시니피에/소리)는 기의(시니피앙/사유)에 봉사한다
기호 = 기표(signifiant) + 기의(signifié) 기표는 기의(개념)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으로 결합.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균형적 (동전의 양면) 언어의 목적이 아닌 의미 전달-개념 구분-차이를 통한 의미 안정으로 요약하면 소쉬르에게서 기표는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의미(기의)가 중심이고, 기표는 그릇이다.
2) 라캉: 기표는 기의를 지배한다
라캉은 소쉬르의 공식을 뒤집는다. 기표 → 기표 → 기표 …(기의는 미끄러진다) 기표의 지위... 기표는 기의를 담지 않는다-기표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 속에서만 작동-기의는 고정되지 않고 항상 연기됨(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주체는 의미를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표에 의해 말해지는 존재
3) 결정적 차이 한 줄 요약
a. 소쉬르... 언어 기능-(의미 전달), 기표 역할-(표현 수단), 의미 상태-(상대적 안정), 주체 위치-(언어 사용자)
b. 라캉... 언어 기능(욕망 생산)-기표의 역할(구조적 지배자)-의미 상태(영구적 미끄러짐)-주체 위치(기표의 효과)
4) 왜 라캉에게서 기표가 우위에 서는가?
무의식은 의미로 작동하지 않는다. 반복, 말실수, 증상 = 기표의 운동 그 이유는 욕망은 대상이 아니라 결핍의 구조로 기표가 욕망을 조직하고 연장한다. (“나는 말한다”가 아니라 말이 나를 발생시킨다”) a. 소쉬르... 기표는 기의를 나타낸다. b. 라캉... 기표는 기의를 발생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주체는 기표 사이의 간극에서 생긴다. 소쉬르에게서 기표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지만, 라캉에게서 기표는 의미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다. (a. 소쉬르... 언어는 의미의 경제 b, 라캉: 언어는 욕망의 정치)
5) 라캉: 기표는 주체를 지배한다
주체는 기표에 의해 대표된다(S1 → S2) 기표는 기의를 전달하지 않는다-기표는 다른 기표를 호출할 뿐 기의는 항상 지연(slippage) 결국 주체는 결핍된 주체- 분열된 주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는 존재다. 라캉은 기표를 너무 강하게 만든다→ 기표가 거의 운명처럼 작동(기표 = 무의식의 군주)
6) 푸코: 기표는 권력 장치의 효과다
푸코는 라캉을 이렇게 의심한다. “왜 기표가 그렇게 전능해야 하지?" 기표는 초월적 구조 no 담론–권력–제도 안에서 작동. 기표의 위치는 의학, 법, 성, 정상성 담론 속에서 주체를 분류·규정·훈육. 기표의 희생자이자 산물 동시에 자기 형성의 실천 주체. 기표는 더 이상 ‘무의식의 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산되는 장치다.
7) 들뢰즈: 기표 자체를 해체한다
들뢰즈(+가타리)는 라캉과 푸코를 모두 넘어서려 한다. 기표 중심주의는 욕망을 억압한다(기표는 욕망을 결핍으로 환원 욕망은 본래 생산적 흐름). 기표 no → 의미 no 고정된 주체 없음. 되기(becoming)의 배치. 기표는 들뢰즈에게 억압적 통치 장치다.
8) 성전 신학의 ‘말씀’과 기표 우위의 긴장
성경의 ‘말씀’(דָּבָר / λόγος)은 기표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그러나 기표를 통과한다. a. 기표는 의미를 지연-주체를 분열-욕망을 결핍으로 조직 b. 성경의 말씀은 말하면 일어난다-의미 전달 이전에 사건 발생-"하나님이 이르시되… 곧 그렇게 되니라” 말씀 = signifiant 아닌 말씀 = performative event
9) 라캉과의 긴장: 말씀은 결핍을 창조하지 않는다
a. 라캉:기표 → 결핍 → 욕망
b. 성전 신학: 말씀 → 생명 → 관계
말씀은 주체를 쪼개지 않고 새롭게 구성한다. “너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이 말은 해체가 아니라 거처의 창조
10) 푸코와의 긴장: 말씀은 규율이 아니라 통치다
a. 푸코적 기표: 규범-정상/비정상 구분-몸의 훈육
b. 성전적 말씀: 통치하지만, 내재적으로 외부 규율이 아닌 내부 생명 질서-“율법을 마음에 새기리라” 말씀은 규칙이 아니라 삶의 형식(form of life)
11) 들뢰즈와의 긴장: 말씀은 흐름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a.들뢰즈: 기표는 흐름을 고정-의미는 억압
b. 성전 신학: 말씀은 흐름을 죽이지 않고 방향을 준다(생성에 목적을 부여)
성령의 열매 = 통제가 아닌 형성, 말씀은 초월적 기표가 아니라 내재적 형성. 라캉–푸코–들뢰즈에서 기표는 주체를 지배·규율·억압하지만, 성전 신학의 말씀은 주체를 ‘거처’로 만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은 왜 라캉의 기표 이론을 정면으로 파괴하는가? (롬 10:17 × 라캉)
a. 바울: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b. 라캉: 주체는 기표를 들음으로 분열된다. 겉으로 보면 둘 다 말한다. “듣는 것이 주체를 만든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11) 라캉에서 ‘듣는다’는 것의 의미
라캉에게서 듣는다는 것은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기표에 포획되는 것이다. 기표는 다른 기표를 호출할 뿐 기의는 항상 미끄러지고 주체는 그 틈에서 발생한다 주체($) = 기표 사이의 간극 듣는다 → 이해한다 no 듣는다 → 결핍이 생긴다 yes 라캉에게서 “듣는 자”는 구원되지 않고 끝없이 욕망하는 구조에 묶인다. 바울: 들음은 주체를 거처로 만든다.
12) 바울의 문장 정확히 읽기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ἡ πίστις ἐξ ἀκοῆς) 여기서 ‘들음’(ἀκοή)은 단순한 음향, 기표 인식이 아닌 사건(event)이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말씀은 설명이 아니라 선포, 정보가 아니라 현존이다.
13) 말씀은 기표가 아니다
a.기표: 의미를 지연시킴-주체를 분열시킴
b.말씀(ῥῆμα Χριστοῦ): 말해지는 순간, 무엇을 일으킨다-듣는 자 안에 성령의 거처를 만든다(“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 들음은 결핍을 만들지 않고 들음은 내주를 만든다.
14) 들음의 결과
a.라캉-들음의 본질(기표 포착)주체 결과 (분열($) -욕망(영속적 결핍)-종착점(불안)
b.바울-들음의 본질(말씀 사건)-주체 결과(거처/성전)-욕망(신뢰)-종착점(안식)
15) 정면 충돌(1)
a. 라캉에게 ‘믿음’은 무엇인가? 라캉에게서 불가능한 것. 라캉의 구조 안에서는 믿음(trust)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표는 언제나 배반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보장되지 않는다-타자는 항상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라캉의 주체는 절대로 안식하지 못한다.
b. 바울에게서 믿음이란 믿음은 인지적 동의 no 해석적 이해 no 통치 수용 “예수는 주다 (κύριος)” 이 고백은 기표의 의미 놀이가 아니라 주권의 이전이므로 주체는 더 이상 의미를 생산하지 않고 통치에 머문다.
16) 정면 충돌(2)
a.라캉의 ‘큰 타자’...언어-법-상징 질서-그러나 **결핍된 타자→ 결코 응답하지 않는다.
b.바울의 타자...살아 계신 하나님-말씀하시는 분-응답하고 거하시는 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나니”) 바울에게서 타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체계는 붕괴한다. *라캉에게서 들음은 주체를 언어에 묶고, 바울에게서 들음은 주체를 하나님께 맡긴다.
a)라캉: 들음 → 분열 → 욕망
b)바울: 들음 → 신뢰 → 내주
17) 성전 신학으로의 귀결
a.기표 → 의미의 지연
b.말씀 → 생명의 현현
c.기표 → 주체의 분열
d.말씀 → 주체의 거주 가능성
그래서 성전 신학에서 ‘나’는 기표가 지배하는 주체 no 의미를 해석하는 의식 no 말씀을 들음으로 거처가 된 존재("너희 몸은 성령의 성전이다”) 이 문장은 라캉적으로는 불가능한 문장이다. 왜냐하면 기표는 거하지 못하고 오직 인격만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에서 들음은 주체를 갈라놓지만, 바울에게서 들음은 주체를 하나님께 내어준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은 기표의 우위를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기표의 통치를 종결시키는 선언이다. 나는 지금 기표들(평가·정체성·담론)에 의해 살아가는가, 아니면 말씀에 의해 거처가 된 존재로 살아가는가?
“나는 지금도 시장에서 흔들리고,
돈에 쫄리고,
몸은 늙어가지만,
적어도 기표에 의해 살고 싶지는 않다.”
2026.2.8.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