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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십의 제1차 5개년 계획의 '장자'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계획이 아직 제대로 수립도 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투르크십의 개념 자체는 기존에 존재하던 논의들에 대한 엄청난 도약이라기보다는 NEP의 확장판에 가까웠긴 했습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인 드네프르 댐과 투르크십 모두 이미 1926년에 지어야 한다고 당내에서 막연한 합의를 이루긴 했었습니다. 드네프르 댐은 러시아 전력화에 대한 레닌의 목표의 일환이었으며 투르크십은, 노보시비르스크와 타쉬켄트 사이의 2,500km 거리 중에서 1,000km 정도를 잇는 세미레치예 철도의 연장선상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세미레치예 철도의 업적을 부정했습니다. 왜냐면 이 철도의 상당수는 구체제 시절에 지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제 정권을 잡은 그들은 투르크십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 경제를 연방 전체의 경제에 통합하고, 저가의 곡물을 수송하여 목화 생산을 자극하기를 원했습니다.
경제적 목적은 같았지만 이를 둘러싼 정치는 달랐습니다. 돈은 더럽게 없는 소련에서 이런 고가의 프로젝트가 수행되려면 우선 다른 프로젝트들과 경쟁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제국 시절의 위계 구조에서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는 거의 발언권이 없었으나, 소련 시절은 달랐죠. 이들 후진 지역의 지도자들과 나르콤푸치는 때로 하나로 연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나르콤핀과 고스플란은 가성비를 들면서 뜨듯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거나 반대를 했죠. 그리고 승자는 나르콤푸치와 지역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투르크십 프로젝트를 발족시키기 위해서 체제의 레토릭을 역이용 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의 연대, 약소민족에 대한 해방, 주변부에 대한 문화혁명 등 볼셰비키적 수사는 정말 유용한 무기였죠.
세미레치예 철도와 투르크십 모두 두 가지의 중요한 경제적 배경에 의해서 정당화 되었습니다. 하나는 시베리아 철도의 개통으로 서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에 수백만의 러시아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는 점입니다. 이 새로운 정착민들은 정부의 지원, 관대한 이율의 대출, 그리고 드넓은 개척지의 분배로 러시아의 새로운 곡창지대로 탈바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곡물을 팔 시장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둘째는 1895년 트란스카스피 철도의 개통으로 이 지역의 목화가 러시아 시장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지역은 이제 러시아 제국의 목화 생산을 상당부분 담당하기를 기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이 지역은 대농장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정복자들이 수행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조그만 소농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피지배 민족의 반란을 우려한 결과였습니다. 거기에, 목화는 환금작물로서 지역 주민들에게 부의 기회를 주기도 하였지만 경작 가능한 농지가 밀과 수수 대신 목화를 생산하게 되는 것은 이 지역의 식량 사정에 큰 불안정성을 초래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통 사정이 막장이 된 러시아 내전 당시 이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지역에서 목화생산을 촉진할 유일한 인센티브는 저가의 곡물 공급이었습니다.
스탈린의 가혹한 집단화는 이 지역을 다시 목화 생산의 기지로 재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시베리아 정착민들의 곡물이 투르케스탄을 먹여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막대한 운송비를 요구하였죠. 내륙으로 운송되는 시베리아산 곡물 343,000톤 중에서 투르크십은 327,000톤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는 외국산 곡물의 수입을 대체하여 3천 500만 루블을 절약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북캅카스산 곡물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길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1 푸드(어림잡아 16.38kg) 당 수송비는 2.5 루블에서 1.5 루블로 거의 반을 줄일 수 있다면, 남는 경작지는 목화 생산에 더욱 투자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랄해의 운명은...
그러나 다른 제1차 5개년 계획의 프로젝트들보다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없었다곤 하나, 이 역시 막대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우랄 동쪽에서 가장 험난한 지형을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건조한 사막의 관목들이 늘어서 있고, 알마아타 밖의 자일리스키 알타우에서는 갑자기 불변의 스텝이 솟아올라 성벽같이 서있었고, 이르티쉬 강의 넓은 둑은 발하쉬 호수 동편의 물 없는 사구로 이어졌습니다. 기후는 더욱 끔찍했는데, 여름에는 스텝의 불지옥 더위가 이어졌으며 겨울에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미친듯한 바람이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건조할 때는 건조해서 가혹했고, 가끔 봄이 되어 산 꼭대기의 눈이 녹아내릴 때는 갑작스러운 홍수를 선사해줘 엿을 먹였습니다. 인구밀도는 매우 낮았고, 철도 건설을 지원해줄 지역 사회라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전쟁 전 노선의 건설비는 1억 5천 900만 루블로 짐작되었으나 막상 사업을 시작해보니 매년 150만 루블의 추가 경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노선의 회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굉장히 장엄하고 용감한 사업"이나 "별로 실용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지적은 매우 적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사업은 착수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북쪽에서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세미팔라틴스크까지 이어지는 알타이 노선과 남쪽에서는 타쉬켄트에서 피쉬페크(프룬제)까지 잇는 세미레치예 노선이 착공되었죠. 1917년, 알타이 노선은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과 내전으로 세미레치예 노선은 이도저도 아닉 되었죠. 체카의 수장이자 과거 나르콤푸치 의장이자, 당시 베센하 의장이었던 제르진스키는 어떻게든 부족한 자원을 끌어모아 1924년 이를 완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투르크십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인 가운데 1,400km였습니다. 이 곳은 낙타 상인들이 70일을 거쳐서 가야할만큼 혹독한 곳이었습니다. 투르크십이 건설되면 70일은 36시간으로 줄게 될 것이었습니다. 막대한 비용은, 우선 정치적 거물이었던 제르진스키의 지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충당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제르진스키의 구호인 "외국 목화로부터의 해방"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죠.
근데 1926년 제르진스키가 죽었습니다. 투르크십 내려주세요. 새로 베센하 의장이 된, 우랄의 친구 쿠이븨셰프는 투르크십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소브나르콤 의장 알렉세이 릐코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만약 우리가 단 하나의 프로젝트만 지원할 수 있다면 그건 투르크십이 되어야 하오."라고 말했습니다. 릐코프는 목화 생산비용 절감으로 얻는 이익이 그 비용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했죠. 릐코프는 소브나르콤의 수장으로서 모든 인민위원회에 영향력을 미쳤는데, 투르크십 프로젝트에 돈을 안 데주려고 했던 나르콤핀을 쪼인트 까기도 합니다. 우랄에서 참 부러워했을 듯
우리의 친구 쿠이븨셰프. 러시아인답게 과음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계속 나왔던 나르콤푸치는 가장 큰 지지자였습니다. 제르진스키 이후 나르콤푸치를 맡은 얀 루드주탁은 스탈린의 측근으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죠. 철도투자는 23-24년의 1억 4천 100만 루블에서 26-27년에는 3억 1천 500만 루블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루드주탁도 투르크십을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제로 던져보려고 간을 보고 있었죠.
이는 당시의 NEP 기조에도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직물산업 같은 경공업과 농촌의 발전을 도시에 확산시킨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것으로 1억 3천 400만 루블이 매년 절약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목화 수입을 대체해서 8천만 루블을, 중앙아시아로의 운송비를 절감해서 2천 200만 루블을, 그리고 여유 곡물을 수출해서 3천 200만 루블을 절약하겠다는 것이었죠.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 건설은 즉각적인 이윤이나 기대하는 결정권자들의 관점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다!"가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루드주탁과 그의 동료들에게는 애석하게도 나르콤핀과 고스플란은 바로 반발했지만요.
베센하의 목화부서 같은 몇몇 하위 기관들이 지원사격을 넣어주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다른 관료기구들은 이에 냉담했습니다. 왜냐면 각자 자신들의 계획들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1926년에 입후보된 수많은 계획들이 있었습니다.
드네프르 댐이 있었고
볼가-돈 운하가 있었으며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과
우리의 친구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제철소도 있었죠.
그런데 왜 이 쟁쟁한 경쟁자들 중에서 정부는 드네프르 댐과 투르크십을 선택한 것일까요? 이는 정치국 문서의 접근권 때문에 대답하기 힘든 문제긴 하지만, 이 둘이 모두 러시아 바깥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과거 제국시절에 대한 부채의식, 약소민족들에게 근대화를 안겨주어야한다는 사명감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소수민족 출신 볼셰비키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하였죠. 투라르 르스쿨로프와 같은 카자흐 출신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이 지금 후진성의 사슬에 묶여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르주아적 단계를 뛰어넘고 그들이 공산주의적 근대로 진입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죠.
카자흐의 관료들에게 있어서 근대화를 해야하냐 마냐는 이미 합의 끝난 사항이었고, 문제는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근대화는 그들에게 있어서 전통과 근대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생존을 건 싸움이었습니다. 시베리아가 열리면서 시작된 러시아인 이주의 물결은 카자흐 유목민들을 마치 미국 서부의 원주민들처럼 만들었습니다. 비옥한 토지는 러시아인들의 차지가 되었고 그들은 점점 살기 힘든 땅으로 내몰렸죠. 시르다리야와 세미레치예 지역에서 카자흐인들의 가축 수는 매년 5%씩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기 초에 가구 당 150두의 가축수는 평균 5두로 곤두박질 쳤죠. 또한 인구 격차도 점차 벌어질 위기였습니다. 슬라브계 농민들은 연 3%에 가까운 성장을 보여주었고 도시에서는 4.5%까지 달한 반면, 카자흐인들의 인구 성장율은 어림잡아 1.8%였습니다.
투르크십이 통과할 동부 카자흐는 그 중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었습니다. 93만 7천명의 카자흐인들의 대다수가 유목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카자흐의 일반적인 지역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죠. 모스크바는 말할 것도 없고 카자흐 관료들은 유목을 정말 개노답으로 보았습니다. 유목은 야만적이고 전근대적이고 사회주의의 안티테제이고 뭐 하여튼 그런 수식어들이 붙었습니다. 나르콤푸치 철도건설 최고 책임자인 보리소프는 카자흐인들을 "인생의 대부분을 안장 위에서 보내는 야만인들"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사드보카소프 같은 카자흐인 관료들조차도 강제적인 산업화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유목 야영지인 '아울'은 낭만적인 민속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짜증나는 원시적 유물이었죠.
유목민들을 정착시켜야만 한다는 건 당관료들에 있어서 민족을 가리지 않고 동의되는 바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르스쿨로프는 사실상 국가의 명령으로 그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고 경제적 인센티브로 자발적인 정착을 유도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 이전의 국가는 사실상 줄 인센티브가 없었습니다. 숙련된 유럽 노동자들 고용할 직장도 부족한 판에 카자흐인들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유목민이 할 수 있는 "노동"은 저임금의 목동 일, 혹은 농업 노동자로서의 단순노동이 끝이었죠.
그러나 중앙의 경제기구들은 이를 지원하는 것에 시큰둥 했습니다. 그들은 별로 정치를 고려하지 않았고, 경제적 효율에 맞게 최대의 효용을 창출할 지역에 투자하기를 원했습니다. 지역 관료들에게 이는 별로 좋은 신호가 아니었죠. 이는 잘 되어봐야 예산 집행 연기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 영원한 경제적 종속의 굴레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카자흐는 자신들의 부족한 철도 밀도에 대해 특히 불만이었습니다. 1925년 5차 카자흐 당회의는 모스크바의 철도 건설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것이 요지였고, 중앙위의 감독관은 이것이 타당하다고 평가합니다. 소위 카자흐 좌파라고 불린 세력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그저 하루하루 원재료 토해내는 기계 정도로만 보며, 우리를 산업화 안 시켜주겠다는 건 곧 신제국주의나 다름 없다며 아주 격렬한 비판을 전개합니다.
카자흐의 분노는 단순한 불평을 초월했습니다. 1926년 11월, 체이카에서 르스쿨로프는 비러시아계 대표들을 허가받지 않고(!) 모아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카자흐 대표들은 여기서 울분을 토해내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빨리 해결해줘야한다고 징징댑니다. 르스쿨로프는 익명의 중앙 관료를 비판하며 이들은 지금 신제국주의적 책동으로 자신들을 러시아의 하위파트너로 빌빌 기게 만들 심산이라고 깠습니다. "니들 지금 우리 신경 안 쓰는 건 숨겨진 정치적 의도 때문 아니야?"가 요지였죠.
그리고 열심히 중앙에 "우리 지원해줘요 징징 ㅠㅠ"를 시전했습니다. 우랄과 우크라이나의 로비와는 다르게, 카자흐, 키르기즈, 중앙아시아의 로비에는 "저발전 지역"이라는 수사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회의 이후, 카자흐 당회의가 다시 개최되었습니다. 충실한 스탈린주의자 총독인 골로셰킨은 발전의 우선권을 따내야한다고 적당히 말했지만, 여론은 그보다 더 격렬하였습니다. 나르콤푸치는 그들의 주요한 동맹자들을 지역 당에서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이러한 움직임을 고깝게 봤습니다. 왜냐면
여전히 남아 있는 좌익반대파들과 엮여서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남은 좌익반대파들은 민족 공화국들의 발전에 대해 역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지역당의 지지를 받아 재기해보려고 했고, 1927년 9월에 관련 의제를 중앙위에서 열기로 작정합니다!
이 새끼들이!
그러나 그들의 적이 가장 위대하신 지도자 동지라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되겠죠. 스탈린 파는 1926년, 드네프르 댐과 투르크십 건설의 허가가 나버립니다. 선수를 친 셈이죠. 정치적 계산을 돌려보면, 마그니토고르스크는 고작해야 우랄 친구들을 만족시켜줄 것이었지만, 투르크십은 키르기즈, 카자흐,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그리고 섬유산업의 중심지로서 이바노보와 야로슬라블을 만족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 계산을 돌려보았을 때 어느 게 더 지지를 따내기 쉬웠을지는 명백했죠. 좌익반대파를 약화시키면서, 약소민족에 근대를 선사하고 민족적 불균형을 타파한다는 레토릭은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정말 좋은 떡밥으로 여겨졌습니다.
1927년, 그 상징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러시아 소브나르콤은 "쇼크 프로젝트"로서 투르크십의 건설을 승인합니다. 거기에, 중앙과 지방을 접목시키는 것처럼 여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 시베리아의 곡물, 목재와 중앙아시아의 목화를 연결하는 것. 둘째, 철도가 지나는 곳의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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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주의의 기본적 입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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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셋이야!
이번편에도 인상깊은 구절이 있군요. 우랄의 문제가 발전한 지역의 문제라면 중앙아시아는 저발전 지역의 문제라는 것. 근데 그 우랄또한 오래된 역사속에 낙후한 지역이었다는 점이... 관련된 문건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까지 나온 이야기중 최 선진지역인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어땠는지,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나온 글도 있으면 좋은 비교가 될 것 같군요.
주로 지방사적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집단화와 기근 문제로 연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슬픔의 수확" 같은 책들이 그런 것들이고. 동부 우크라이나의 발전한 산업지대에 대해서는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