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교우위의 하나님 (1)
비교우위란 경제용어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밀접한 경제적 원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금 우리는 돈이 움직이는 가치와 득실만을 생각하는 유물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으려는 반 생태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생태적인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는 나의 희생과 손해로 전체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게 합니다. 그런 숨은 희생이 있었기에 지구가 인간이 살기 좋은 조건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그런 희생을 하지 않으려 하기에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을 가거나, 심지어 교회를 선책 할 때도, 어떤 물건을 살 때도 A라는 대학, 교회, 물건과 B라는 대학, 교회, 물건을 두고 어느 곳에 가야 할 것인지, 어느 교회를 선택할 것인지, 어느 물건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때 각각 대학 브랜드와 장래 취직에 유리한지, 내용물과 디자인과 가격 대비를 비교해보고서 말 그대도 어 우위에 있는 상품을 구매하게 됩니다. 결혼조건도 그렇습니다. 어느 것 하나 우리들의 생활조건을 결정지을 때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선택하여야 할 때 교회건물, 목사의 브랜드, 설교의 내용, 성도들 간의 친교, 목회마인드의 건전성, 등 기타 여러 가지 조건을 자신의 비교우위 결정 체크리스트에 체크하고 난후 비로소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비교우위를 결정지을 때 하나님 입장보다는 인간인 나의 입장에서 결정짓는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외형적으로 측정되는 비교우위의 조건들이기 고려되고 있기 때문에 대형교회와 브랜드목사들에게 점수를 많이 주게 됩니다. 작은 교회는 골목 구멍가게와같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져 사람들이 오기를 꺼려합니다. 마치 주차하기 좋고 쾌적한 환경속에서 원스톱 상품구매에 편리한 대형마트와, 복리후생이 좋고 기업의 이미지가 좋은 대기업으로 사람들이 모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양극화의 현상이 자연히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재도 돈도 한곳으로 쏠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도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에 따라서 비교우위의 법칙이 적용되는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 밖에는 되지가 않지요. 이게 이 땅에서 믿는다는 우리들의 죄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아니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데 말입니다.
결국 교회란 인간의 경제적 ,정치적 소꿉놀이 장난밖에 되지 않는 집단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적 비교우위의 법칙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몸으로 유기적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는 동일한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비교우위의 경제법칙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제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비교우위의 법칙이 지배하니까 교회를 마케팅 기법으로 운영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비교우위 법칙을 포함한 모든 경제법칙이란 일정한 조건하에서 경제현상간에 존재하는 일정관계의 규칙적 반복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일정한 조건이란 매점 매석, 주가조작, 부동산투기 등의 인위적인 거래조건의 조작을 통하여 거짓수요와 거짓공급, 작전세력의 정보에 의하여 놀아나는 경제현상을 말하며 이러한 경제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작게는 한국경제현상으로 크게는 글로벌 경제현상으로 빈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법칙은 철저히 인간의 죄성을 기초한 인간의 경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탐욕의 도구가 된 경제법칙은 하나님나라 경제 법칙에 반하는 맘몬의 경제법칙이 되는 거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경제질서인 희년법은 지켜지지 않고 인간의 질서인 경제법칙은 진보를 거듭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을 통한 국가 간 자유무역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약소국가는 죽어갑니다. 골목 구멍가게는 죽어갑니다. 사회적 약자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죄성만 극대화 되어가는 경제질서일 뿐입니다.
우리한국교회는 인간의 질서에 기초한 경제법칙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경제법칙을 따르는 것이 백성 된 자의 의무일진데 희년법조차도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히 인간의 질서인 자본주의의 더러운 꿀물을 빨고, 복음을 마케팅으로 삼고, 교회를 사업장으로, 성도를 고객으로, 전도를 잠재된 고객유인으로, 조직을 다단계시스템으로 하여 결국 최고의 정점에 있는 목사는 CEO의 역할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성공한 목사로, 브랜드목사로 자타가 공인을 받는 세속적인 목회에서 인기 짱, 혹은 인기스타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의 창조질서는 일정한 조건과 일정한 관계속에서 규칙적 반복이 되어집니다. 이를 자연현상의 불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틀에서에서 바람도 불고 비도 내리고하는 기후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경제현상은 한마디로 인간의 질서에 의한것이며 이는 탐욕을 기반으로 하는 죄의 질서입니다. 이처럼 탐욕에 의한 경제주체는 하라는 선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악을 행하는 죄성을 극대화하려는 자유의사에 따라 경제행위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경제의 열매는 권력자가, 강자가, 부자가, 대기업이, 거래관계상 지위우위에 있는 기업, 소수의 눈치 빠른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법칙이란 수요공급의 현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종의 경향적 법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을 기초로 한 경향이 있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조건하에서 유도할 수 있는 법칙을 보편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역시 죄의 보편성과도 연결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수요공급이기 보다는 인간의 탐욕에 기초한 수요공급의 현상은 결국 자본의 논리의 파워에 따라 돈이 몰린다는 것이지요.
무한경쟁과 자유무역을 전개하는 글로벌 문명이 보편화되어가는 시점에 우리사회는 국가 간, 기업 간, 개인 간, 더 나아가서 교회 간, 목사 간에도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의 이런 경쟁의 법칙은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경제법칙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까닭은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의 선수대결과, 대학생과 초등학생사이에 달리기 경쟁은 처음부터가 잘못 설정된 경쟁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쟁구도설정이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기초한 경쟁구도이어서 자본이 있는 사람이 결국에는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경험적 인간의 법칙이 제도화된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돈이면 다되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법원 모 부장판사가 돈을 받고 죄를 가볍게 하여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술값을 갚아주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미 모든 행정제도가 그렇게 돈의 힘에 무력화되었습니다.
남대문 화재사건도 개인의 성격장애등의 문제로 돌리지 말고 함축된 우리사회의 모순된 엔트로피의 증대현상이 터진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혈압이 높아 뇌출혈이나 코피가 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반사회적 모든 범죄현상에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고 예방적 차원에서 분석해야 합니다.
속된 말로 돈이 돈을 번다고 합니다. 도박을 하더라도 결국 밑천이 두둑한 사람이 돈을 따게 되어 있습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돈이 더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경쟁에서 더 우위의 조건에서 경쟁을 하여 마침내는 상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관찰이 됩니다. 돈이 권력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부처님도 하나님 마음도 움직이는 위치에 있으니까요.
마트간의 상권 경쟁에서 자본이 든든한 마트는 상대 마트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원가이하의 가격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붙잡아 둡니다. 그러다 상대 경쟁마트에서는 버티기에 한계를 느끼면 문을 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경쟁구도는 우리사회의 상식적으로 전재되어 있는 탐욕의 논리, 강자의 논리, 힘의 논리, 죄의 논리가 경제법칙이란 사회과학이란 학문의 옷을 입고 경제정책을 펴고 있는 국가와 글로벌경제는 한마디로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경제제도라고 여겨집니다.
국가 간의 경쟁도 그렇습니다. 종국에는 경제제도로 기초한 하나의 통합된 경제국가로 되어갈지도 모릅니다. 이미 글로벌 경제추세로 봐서 그런 징후가 농후합니다. 하나님의 생태적 국가경영이기보다는 독점적 경영방식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약자의 지위에 놓여 있는 국가들은 점점 비교우의의 경제논리의 희생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는 개인과 ,가족과, 국가사이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죄의 논리만이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과 같은 무한 경쟁을 주도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진행될수록 국가 간의 엄청난 양극화와 환경의 엄청난 불평등, 토착산업, 토착상업, 토착자본 등 이 소수의 사람의 손으로, 국가로 자본의 집중이 심화가 되면 지구의 생태계는 무너지게 되어버린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되는 시간의 단축, 연장이 관건이 되겠지만 문제는 인간의 질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와 화평을 거슬러 도전하는 보편적, 역사적 속성에 기초한 허약한 질서라는 겁니다. 이러 허약한 질서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삶의 보람과 열정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모든 것을 돈 버는데 투자하고 경쟁하는 소꿉장난을 벌리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지금은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사라졌지만 그에 대체하는 신분제도가 등장했습니다. 악이 하나 물러가면 또 다른 악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질병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지금은 돈이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하나님 역할을 합니다. 가족 간에도 돈이 화합의, 애정의, 가족구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교회도 돈이 하나님보다 더 비교우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돈이 있는 사람이 지역 유지행세를 합니다. 즉 입김, 말빨이 세어집니다. 지금은 인격보다 돈격이 더 비교우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전에는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비교우위로 우월감과 열등감등으로 서로간의 무형의 알력이 있었다면 지금은 돈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행동거지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못한 이에게는 우쭐대고 거만하게 행동하지만 자신보다 잘사는 이에게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경향이 속물적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여겨집니다.
비교우위의 하나님 (2)
교회안에서 우리는 때때로 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측정하며, 돈으로 하나님의 달란트를 거론하며,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묘, 돈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논하며, 돈으로 봉사의 직분을 거래하고는 합니다. 천부적으로 주어진 은사나 공동체에 기여하는 은사가운데 생태적인 은사나 고유한 작은 섬김을 소중이 하지 않고 오로지 돈으로 말하고, 돈으로 결론을 내어버리는 자본주의적 논리는 바람직한 사회나 교회가 되지 못하게 니다.
죄의 질서에서 쌓아둔 재력이나 사회적 위치, 명예, 학력을 중시 여기는 이러한 좋지 못한 습관은 동일한 이웃,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주변 사람들, 즉 나보다 , 우리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이웃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편 나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나 조직에는 그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부와 뇌물로 고급정보를 얻어 또 다시 자신의 돈 벌기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구도가 죄성이 기초한 경제질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시의원, 시장, 구청장,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들, 더 나아가 공복인 공무원들 까지도 이 그런 죄의 질서에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가 없습니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는 목사들 마져도 돈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지만 실질적인 숨은 동기는 돈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악을 선으로, 불의가 있는 곳에서는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시고, 전쟁이 있는 것에서는 평화가 있게 하시는 화평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경제질서는 생태학적 질서로 언제나 생명의 질서가 되게 합니다.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의 질서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한국교회의 화두는 탐욕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경제질서에서 화평케 하는 복음의 경제학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생태적인 신학 정립과 목회적 적용과 신앙적 실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결코 현실과 상반되지 않고 행복한 삶을 방해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삶이 현재 우리의 삶의 양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의 맘몬중심에서 유무상통적인 초대교회의 공동체삶을 새로이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사회체제가 합리적이고 가치가 있는 모든 경제질서가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경 경제학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숭배하고 대박을 꿈꾸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인생의 최고 비젼으로 강조하면서 강자가 약자의 희생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재산을 모으는 경제질서와 사회제도는 거짓되고 거짓된 사탄의 경제제도로 결국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고 멸망을 앞당기는 재물이 될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경제학은 공의와 생태적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며 사회적 약자와 과부, 고아, 노숙자, 노약자 등의 보살핌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을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든 사람들의 긍극적 이익을 골고루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이며 인간다운 생활로 하나님나라를 앞당길 것입니다. 인간다운 생활이란 말 그대로 경천애인 생활로 인간존재의 최대 가치인 셈이지요. 개인의 소유극대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무상통적인 삶의 은혜가 극대화하는데 한국교회가 관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제도 그 배후에는 성령과 악령의 대결구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입김이 쎄냐, 사탄의 입김이 쎄냐 하는 식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등의 모든 사회제도의 배후에는 영적인 투쟁과 경쟁관계로 그 대리전을 인간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승리하시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회복하여 창조사역에 동참하여 그분의 공의가 강같이 흐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대로 살아 가다면 하나님께서 구태어 사회적, 경제적 설거지를 하시지 할 필요가 없지만 인간의 역사는 항상 죄의 역사로 하나님의 간섭과 설거지가 요청되어지지요.
죄의 바다에서 우리개인과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죄의 종노릇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제도이고 그런 바탕속에서 개인과 기업 간, 국가 간, 교회 간 할 것 없이 축적하는 부와 재산은 불 타 없어질 허구의 소꿉놀이의 재물입니다. 진정한 부와 재산은 하나님의 법과 건전한 정신과 공동선에 기초한 경제질서를 바탕으로 할 때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래 지속이 됩니다.
자신이 일하는 것 이상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상대적으로 돈을 빼앗기는, 손해 보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회는 동물적이 되고 경제는 사탄의 영으로 악해집니다. 부동산투기, 증권투기가 그러합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열심히 일해서 이마에 땀을 흘려 급여를 받고 돈을 번 만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남는 소득은 검소하고 아껴 저축하여 그러한 돈이 모여 사회공동생산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돈이란 너무 있어서도 안 되고 너무 없어서도 안됩니다. 말 그대로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가난하게 마시고 잠언에 보면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것을 허락하소서. 내가 속이고 거짓말하지 않도록 나를 도우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다만 나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배불러서 주를 저버리고 여호와가 누구냐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가난해서 남의 것을 도둑질하여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모든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걷는 발자국아래에서는 개미가 밟혀 죽어갑니다. 장난으로 하는 행동속에는 벌레가 죽어갑니다. 내가 편하게 사용한 일회용 캔이나 비닐봉지로 인해 환경오염을 앞당깁니다. 지구의 종말을 앞당깁니다. 먹다 남은 음식이 강물을 흐리게 하고 바다의 적조현상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태안앞바다의 기름유출사고도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로 산불이 발생하여 창조질서를 무너지게 합니다. 나를 에워싼 전방위적 모든 연결고리망이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작용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라는 개체가 존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백성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절대적인 빈곤이 거의 해결된 것 같습니다. 단지 상대적 빈곤감에 함몰되어 남과 비교하는 병든 비교의식이 작용하여 과소비를 부르고 마케팅의 포로가 되어 너무도 많은 소비와 낭비를 하고 있어 전 국민이 카드족이 되고 마침내 신용불량자가 되도록 하는게 지금의 경제질서라고 여겨집니다. 너무 흥청망청 하게 물질을 소비하고 낭비하는 것도 죄라고 인식되었으면 합니다. 지구가 오염되고, 자원이 낭비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거든요.
너무 없어서 그날그날 살아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또한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걱정하고. 스트레스 쌓이고. 번뇌하여 돈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돈이 너무 많으면 마음의 여유가 더 없어진다고 봅니다. 삶에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감소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너무 없어도 내일 일을 염려하고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삶의 여유를 잃고 따라서 기쁨과 사람 사는 맛과 즐거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비교우위의 원리가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천지만물 모두 다 피조물로서 각각존재의 의미를 가지며 귀하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 공생공존하는 생태는 그 자체가 조화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본질이 바로 조화로움이 아니겠습니까? 비교우위는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세상에서만 통용되는 경제법칙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많이 배웠다는 것은 남을 섬기는 은사를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가졌다는 말인데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남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 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제법칙에 반하는 인간의 질서입니다.
몸도, 사회도, 국가도, 교회도 다이어트 해야
지금 우리 사회전체가 비만에 걸린 것은 인간의 지식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숭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영학, 정치학, 법학, 신학, 영양학에 대한 잘못된 신뢰는 오히려 병들게 하고 비만에 걸리게 합니다. 오류투성이의 영양학에의 숭배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칼로리에 대한 학설과 우유와 고기에 대한 신뢰로 국민 모두를 성인병환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인병은 자신의 문제로 국한 되는 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대개의 성인병은 맛과 칼로리로 학습된 육식문화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맛있게 먹을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 소비되는 엄청난 비용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환경파괴를 가져오게 합니다.
죄가 먹는데서 들어 왔듯이 병 또한 먹는데서 들어옵니다. 소고기는 모든 성인병의 직접적인 원인인 포화지방산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가 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죄를 지으려고 하듯이 음식도 그런가 봅니다. 우리가 살면서 먹는 즐거움도 느껴야 하지만 너무 빠져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고기소비의 왕국, 고기가 주식처럼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채식문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기가 쓰레기 취급을 받아 남아돌아가는 고기를 이제 우리나라로 수출하려고 합니다. 쓰레기인 소고기를 우리는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먹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어졌으며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대자연의 일부이며 한의학적으로는 소우주이고 환경적으로는 살아있는 생태계입니다. 즉,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우리 몸은 자연의 질서와 생태계의 법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 한 세대 전에 먹지 못해서 영양결핍증에 의한 질병보다는 오히려 과잉으로 먹는데서 오는 질병이 원인이 되는 식원병(食源病)의 시대입니다. 각종 첨가물로 뒤범벅된 인스턴트 식품, 방부제로 오염된 밀가루 음식, 항생제, 성장촉진제에 절어있는 고기는 결국 우리몸을 성인병을 몰아가는 주범됨을 인식하여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육식을 하지 않으면 일정량의 단백질 섭취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단백질 우상에 사로잡혀 행여나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단백질이 많이 함유된 음식 즉 동물성식품 먹기를 애쓰는 것은 너무 과장되어 온 단백질의 허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필요한 단백질은 체내에서 대부분 합성되기 때문에 우리가 섭취해야 할 단백질의 양은 총 열량의 6%에 불과하므로 채식으로 얻을 수 있는 단백질 양은 9% 이상이니 채식만으로도 단백질 섭취는 충분합니다. 육류의 단백질 함유량이 식물에 비해 높은 것은 사실이나, 지나친 육류 섭취로 단백질이 과잉되면 칼슘 배설이 높아져 신장 기능 저하와 함께 골다공증까지 야기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음료수를 먹게 되는데 이것 역시 칼슘을 빠져 나가게 하여 이빨과 뼈를 약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이전보다 우유도 많이 먹고 고기를 비롯한 영양섭취도 좋아졌는데 충치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설탕을 많이 먹고 청량음료를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니를 포함한 32개의 영구치 중에서 앞니 8개는 채소를 뜯기 좋게 발달했고, 어금니 20개는 곡물을 빻기 좋게 창조되었습니다. 고기를 찢기 좋게 발달한 송곳니가 단지 4개뿐인 것은 인간이 전체 식사 중 10% 정도의 육류만 섭취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의 미국식 영양학은 단백질을 1군 영양소로 분류해놓았습니다. 이러한 영양학은 단백질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낳았고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쓴다"는 무의식중의 강박관념을 만들었습니다.
음식은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즉 우리가 먹는 것이 바로 우리존재를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놓으신 자연적인 먹거리와 과일과 씨맺는 채소를 먹는다면 우리 몸의 건강유지와 질병치유율도 높일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질서에 따라 가공된 죄성이 가득 찬 식품을 먹기보다 하나님이 창조질서에 의해 키워진 건강한 먹거리에 익숙해짐으로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진정한 웰빙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의 육체적 비만이 아니라 사회적 비만, 국가적 비만, 더 나아가서 교회의 비만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현상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로가 그물코와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체적 비만은 식생활에서 오는 원인이 대부분 차지합니다. 일단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필요한 기초대사에너지와 일상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약간의 비상에너지로 몸속에 비축하고 그 다음 남은 불필요한 에너지와 찌꺼기를 배설물은 몸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여기에 비만의 본질적인 해답이 있습니다. 몸에 필요한 에너지는 일정한데 섭취하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몸에 비축하게 되는 경우가 비만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이어트의 정답은 나왔지요. 에너지 섭취를 줄이든가 에너지소비량을 많이 하던가 하면 되는데 둘 다 하지 않으려 하기에 비만은 자동적으로 옵니다. 주체적인 비만 관리는 소홀히 하고 객체적인 비만치료에만 고비용을 들여가며 해결하려 합니다. 개인의 노력은 하지를 않고 병원에 가서 약물치료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유물론적 사고방식인 셈입니다.
비만은 부모 모두 비만인 경우 유전적으로 자식에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허지만 대부분의 비만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식생활 습관 즉 과식, 폭식 , 고칼로리의 간식, 불규칙한 식사시간, 기름진 식사 등의 잘못된 식습관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편리한 기계 문명의 혜택으로 걷지 않고 뛰지 않고 움직이지 않게 한 결과 몸을 허약하게 만들어 운동부족을 가져옵니다. 운동부족은 기초대사량을 감소시켜 지방의 합성을 촉진하며 인슐린 분비를 증가시켜 식욕을 왕성하게 합니다. 현대인들의 모순은 생활 속에서 부족한 운동을 이번에는 헬스장에 가서 운동으로 보충하려고 합니다.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자본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먹으라, 마셔라 , 입으라, 소비하라 그래야만 삶의 가치와 자신의 존재감을 충족된다는 이상한 소비철학이 모든 사람의 소프트웨어로 내장되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대뇌에는 포만감과 공복감을 조절하는 포만중추와 섭식중추가 있는데 비만인의 경우 섭식중추 기능이 항진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리적으로 포만중추작용은 식후 약 20분이 지나서 나타나므로 식사시간을 20분 이상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잘 씹어 먹어야 포만감을 느끼게 되는데 빨리 먹는 인스턴트식품으로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결국 과잉에너지를 섭취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오래동안 느긋하게 몇 시간씩 식사를 하기란 사회구조상 불가능 합니다. 분초를 다투는 바쁜 일상생활과, 인스턴트 음식문화가 불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포만중추가 작동이 되지 않아도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음식저장고가 되는 셈이지요.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어서 해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먹는 게 남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불안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정치, 사회, 경제, 개인의 심리적 요인 등으로 인해 무절제한 음식섭취를 통한 감정해소 방법이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비만을 막으려면 필요한 음식만 먹고 적당한 건강을 유지하고 불필요한 찌꺼기는 내보내서 그 찌꺼기는 다시 재활용하여 자원으로 , 거름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이런 에너지 순환이 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에너지순환이 안되어 생태계파괴가 되는데 모든 비만도 에너지 순환이 안 되어서 오므로 잉여 에너지를 먹지 말고 나눔과 섬김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개인의 건강은 물론이고 교회, 사회, 국가의 건강도 보장될 것입니다.
지식과 믿음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은 모든 영역이 지식을 기초로 하여 생각하고, 연구하고,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두 가지 분야만 이야기 하여 보겠습니다. 우리의 육적인 영양과 건강을 위한 기초적인 학문이 식품영양학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신학이라고 합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식품영양학이란 인간의 건강과 영양 상태의 개선을 통해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학문 연구와 그의 실천 및 응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신학은 신앙에 관한 모든 분야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인간의 체험과 이성으로써 피조물인 자연의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식품 영양학이 인체에 영양분을 공급하여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과학이라면 신학은 성경 속에 담겨진 기본원리를 분석하고 이성의 원리와 비교함으로써 학문적인 결론을 얻는 진정한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에 대한 학문적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활동하려면 기본적으로 영양소라는 특정한 물리화학적 성분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영양소는 체내에서 합성되지 못하고 음식을 통해 외부에서 섭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대부분 식물에서 얻어진 재료로음식을 만들어 섭취하게 됩니다. 식품영양학에서는 영양소의 성질, 작용, 필요량과 부족 되었을 때 발생하는 결핍 증세를 다루며 음식의 소화와 흡수에 의해 일어나는 에너지 대사를 다룹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생물학, 화학 등 기초과학과 인체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 생화학, 식품위생학, 영양학, 식생활관리 및 실험, 식품미생물학, 식품위생학, 식이요법 등을 배우게 됩니다.
신학 역시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진 우리 인간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신학 속에 많은 주변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크게는 구약 신학, 신약 신학을 다루는 성서 신학과 교회사, 역사적 신앙고백을 다루는 역사 신학, 교리를 다루는 조직신학이 있고 성경해석학 일반 윤리, 도덕, 윤리, 상황윤리, 사회 윤리등으 분야가 있습니다, 교리 문답, 목회 상담, 설교학을 다루는 실천신학과 선교를 다루는 선교 신학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이름만 달면 00신학, 000 신학으로 명칭되는 신학들이 무수하게도 많습니다.
식품영양학을 알지 못했던 우리 부모들의 세대는 지금 세대보다 더 음식을 잘 만들고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 주었습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의 용어는 몰라도 땅위에서 생산되는 제철의 곡식과 야채 ,산나물, 들나물로 아들, 딸을 키워 지금의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게 하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비만과 성인병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똥배는 부위 상징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장의 지위로 둔갑하여 어떻게 하면 저렇게 똥배가 되는지 우러러 보았습니다.
일부 극빈층에서는 너무 못 먹어 영양실조에 걸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건강하게 잔병치레 없이 잘 컸습니다. 그 당시의 아이들에게는 실개천이 수영장이었고 산기슭과 동네 앞 공터가 그들의 오락장이었습니다. 산골짜기와 논둑 옆 찔레순은 맛있는 간식이었고, 초여름 감자는 햄버그 보다 더 맛있는 간식이었고, 띠 풀은 빼빼로 과자보다 더 맛있었습니다. 밀기울이나 보리등겨로 만든 개떡은 피자보다 더 맛있고 영양이 풍부했습니다. 덜 익은 밀과 보리이삭을 불에 태워먹은 재미와 껌으로 만들어 씹는 재미는 오락게임보다 더 재미있고 찬구간의 정이 저절로 들게 하였습니다. 어른들은 산과 들의 나물로 비타민제 하나 먹지 않고서도 모든 영양을 채워주었습니다.
이모든 것들이 지금은 농촌체험이라는 이벤트로 사라져 가는 것을 농촌의 추억을 도시어린이들에게는 일시적인 체험으로 인위적인 추억을 만들고 있습니다. 불과 한세대전의 자연스런 추억을 인위적으로 학습하고, 체험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기반이기보다는 인간의 질서의 기반위에 살다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 자연에 대한 동경, 땅과 가까이 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생기지요. 자연히 그러한 욕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당시의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는 유전자의 발현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교외로 나들이를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식품들은 대개가 식품영양학적 지식위에 만들어진 음식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음식들은 대개 가공단계가 복잡하고 각종 첨가제가 들어갑니다. 그러는 과정에 우리 몸에 유익한 알맹이인 영양소들은 파괴되어지거나 버려지게 되고 껍데기만 조미료를 넣어 맛있게 ,착색제를 넣어 보기 좋게, 방부제를 넣어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게, 씹어 먹지 않아도 되도록 잘게 빻고, 유화제를 넣어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도록 하는 등의 복잡한 가공과정과 식품첨가제가 수백 종이나 들어갑니다.
그러한 식품영양학의 공헌으로 지금은 전 국민이 영양과잉으로 인해 전 국민이 성인병환자화가 되어 약국과 건강보조식품회사와 병원들만 돈벌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식품영양학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학문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일자무식이었던 무리 부모의 세대들은 이웃과 동네 모두 훈훈한 인심이 있었고 지금과 같은 각박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시집온 며느리가 아무런 식품영학적인 지식이 없어도 조미료가 없어도 신선한 자연재료로 요리와 음식을 잘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며느리는 이런 생명의 음식을 만들기란 불가능합니다. 단지 모양만 예쁘게, 먹기 좋게, 만들뿐 생명의 음식은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삶속에 우러나오고 전수되어 하나하나 모아져 생활의 지혜로 축적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학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 주경신학, 민중신학, 보수신학, 개혁신학, 정통신학, 상담신학, 치유신학, 등등 이름만 갖다 붙이면 00 신학이 되는 수 십 가지의 신학이 신학대학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신학적 지식이 얼마나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하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하였을까요? 결론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식품영양학 지식과 같은 부작용이 우리의 신앙환경에도 생긴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신학적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의 잘 예배하고 복음의 정체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서점에 가보면 수천종의 기독교 서적들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넘쳐나면서도 왜 교회가 욕을 얻어먹을까요? 그것은 가공된 복음, 오염된 복음, 인스턴트 복음이기 때문이지요.
대형교회는 비만에 걸려 있는 교회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이 넘치고 잉여에너지가 쌓여 부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남는 인적 물적 에너지를 작은교회와, 농어촌 교회로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형교회도 살고 작은 교회도 삽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교회인데 한 쪽은 흥청망청이고 한쪽은 궁핍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모든 한국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고 몸인 교회가 상처를 받고, 비만과 영양과잉으로 병들면 안 되지요.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력은 지도자인 목사들에게 더 많이 요구됩니다. 목사들은 성도에게 늘 헌신하라, 사랑하라, 실천하라, 외치지만 정작 자신은 그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설교영양과다 현상이 일어나서 그런 것입니다. 스스로 설교비만에 빠지게 됩니다. 목사가 영적으로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설교의 대상에 자신도 포함시켜야 하고 성도들로 부터 피드백을 수용하여야 합니다. 육적으로 건강해지기 원하면 음식물을 줄이고 운동을 해야 하듯이 영적으로 건강해지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종으로 성도를 섬기는데 전력을 다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영적 다이어트가 됩니다. 목사의 비만은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는데서 비롯되어집니다.
설사 걸리게 하는 설교, 변비를 유발하는 설교
교회를 운영하눈대 유형적인 교회의 중심축은 누가 뭐라 해도 목사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라 하지만 실제 교회중심축은 목사중심으로 교회의 기능이 돌아가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목사의 직분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뿐만 아니라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대변인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목사란 직분이 너무도 큰 직분이기에 항상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목소리와 성도들의 피드백을 경청하여 복음적인 메시지를 설교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막중한 목사의 소임이 목회성공이란 참욕의 두루마기를 입고서 목회를 할때는 여러가지 병리적인 현상을 가져요게 합니다. 우리몸은 바이러스에에 오염된 병든 음식을 먹을때는 토하거나 설사를 하게 하여 나쁜 독소를 체외로 내보내게 합니다. 빈면에 변비는 몸속에 흡수한 음식을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똥이 제 시간에 몸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나가 지 못해 독소가 몸속으로 흡수되어 질병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게 합니다.; 교회안에서 신앙생헐 역시 그렇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병들고 사탄의 바이러그가 감염되었을대 교회는 설사증세를 가져오게 합니다. 이를 시험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형교회는 변비에 걸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인적, 물적 신앙자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변비증세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이런 저런 잡음은 변비에 걸린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교회라고 하면 목사,가 연상되고, 목사라고 하면 설교로 연상되고, 설교하면 잔소리...... 지긋 지긋........한편의 영화스토리..... 한 편의 시낭송....... 약장사 홍보........정치, 경제를 들먹거리는 강의수준........... 민방위 강의 수준........ 으로 받아들이면서 페이(헌금)를 지불하고 시간이 지나면 무감각하게 교회 문을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현상을 관찰 해 보면 교회가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으러 간다는 말이 됩니다. 예배는 어디서든 언제이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지만 설교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간으로 가게 되고 이왕이면 브랜드목사의 설교를 선호하게 되지요.
설교를 듣는 것 까지는 좋은데 교회 문을 나오는 순간 결단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설교이기보다는 신앙의 형식적 욕구를 충족만 시켜주고서는 반납하여 가고 있다는데 설교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지요. 집에서 사랑스런 아내가, 식당에서 주방장이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은 다음 그 음식이 주는 영양분의 에너지로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몽탕 토하거나 아니면 그냥 눈으로 즐기고 젓가락으로 먹는 시늉만 하다가 식사시간을 마친다면 아내의 기분도 나쁠 것이고 식당의 요리사도 자신의 요리자존심이 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지 않는 이유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내의 음식솜씨가 없거나, 주방장의 요리가 너무 조미료와 첨가제가 많이 들어가고 불량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요리이어서 먹지 않거나 식중독이 걸려 토해 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몸의 본능은 상한 음식이 위장에 들어오면 식도를 거쳐 입으로 다시 밖으로 토해내는 생리적 기능이 있습니다. 이런 기능이 없다면 우리 몸은 상하고 병들게 되겠지요.
우리 몸속의 위장은 온갖 음식을 다 받아들여 소화되기 쉽도록 연동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위장은에 받아들인 음식물들은 웬만하면 소장에서 흡수하게 되지만 소화, 흡수과정에 세균이 번식하여 도저히 소화흡수 시키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우리 몸은 저절로 아래쪽으로 쏟아내도록 히야 몸을 보호케 하는 생리적 설계가 되어 있는 게 바로 설사입니다.
이런 몸의 생리적 현상을 한국교회를 한번 살펴보면 목사가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가 제대로 소화흡수 되지 못하고 토해내거나 설사를 하는 모습이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발생했는지 원인은 눈치 빠른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불량재료를 사용하여 설교를 하였거나 그 설교가 제대로 교회안이나 사회에서 사탄의 간섭으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자 설교가 설사의 현상을 나타내 반사회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섭취한 대부분의 소장에서 흡수가 되고 나머지 찌꺼기가 대장으로 이동해서 나머지 수분을 흡수하고 최종 찌꺼기를 직장이 대변으로 차게 되면 대뇌신경의 배변 중추신경의 작용과 배에 힘을 주어 복압의 힘으로 밀어냅니다. 이런 기능이 제대로 안되어 직장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저절로 대장에까지 차 있게되어 거기에서 유해한 가스가 다시 체내에 흡수되어 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변비의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변비의 현상은 왜 생길까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식사 습관에 의한 변비, 운동이나 활동이 부족해서 오는 변비, 과민성대장증후군과 같은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서 오는 변비, 진통제나 소화제, 빈혈치료제, 고혈압치료제, 경구 피임약 등으로 해서 오는 변비, 해외여행과 같은 장거리 출장 등의 경의 변화도 변비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모든 것 중에 가장 주요한 원인은 물 섭취량과 섬유질은 부족해서입니다. 섬유질은 물론 양양소가 없다고 하지만 섬유질의 팽창하는 성질과 불순물을 흡착하는 기능과 양적부피를 유지시키고 부드러운 형태로 만들어 배변을 쉽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변비가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온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이 운동이나 활동이 부족하면 소화기능과 대사기능이 떨어져 변비를 유발시킨다면 역시 설교의 메시지가 부족하고 말씀의 적용이 부족 되어 영적 대사기능이 떨어져 설교쓰레기에 중독되어 불순물이 다시 교회안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몸에서 물은 70%∼80% 정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은 수소와 산소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액체(H2O)로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물질입니다. 인간은 호흡을 통하여 산소를 마셔야만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 구성성분 또한 절묘하게 되어 있는데 공기중에서 산소의 비율은 21%정도입니다. 산소가 그리도 좋은 물질이라면 왜 100% 순도로 만들어 놓으시지 21%의 농도로 공기 중에 만들어 놓았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기회에 설명 해드리겠습니다. 일상적인 호흡을 통하여 얻는 산소 외에 필요한 산소가 있을 수 있는 경우를 대비해 물을 마셔야 합니다. 체내 수분함량이 조금만 부족되어도 생존에 어려움을 느끼며 물이 부족하면 신진대사에 장애가 오고 체내에 독소가 축적되면서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합니다.
성인이 정상적인 대사에 필요한 하루의 수분 소요량은 3ℓ 이상인데 신장에서 재흡수 하거나 식사로 충당하는 양이 1.5ℓ 정도이고 나머지 1.5~2ℓ의 정도의 물은 마셔서 보충해야 합니다. 물론 깨끗한 생수입니다. 콜라와 사이다 맥주 같은 가공된 물은 아니고요. 수분이 부족하면 체내의 독소가 배출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피도 탁해지면서 걸쭉하고 끈적거리는 상태가 되어 고혈압증세가 나타나고 변비도 유발하게 되지요.
변비의 가장 큰 원인이 물이라면 역시 영적 변비의 가장 큰 원인은 생명수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와 변비를 막으려면 인간의 어떠한 포장에도 속아넘어가지 않은 주체적 신앙생활읗 하여야 합니다. 아예 상한 설교는 듣지 말아야 하고 변질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경계하여야 합니다. 너무 화려하고 지식으로정제된 설교는 변비를 유발하기에 이 또한 경계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