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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량심(四無量心)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불교의 수행방법으로, 중생을 한없이 어여삐 여기는 네 가지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四 : 넉 사(囗/2)
無 : 없을 무(灬/8)
量 : 헤아릴 량(里/5)
心 : 마음 심(心/0)
출전 : 열반경(涅槃經)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모두 이렇게만 산다면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어렵지 않게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다. 마찰과 분란, 갈등, 대립 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여러 종교에서 이기심의 소멸을 강조하는 것도 그럴 때 비로소 상대의 처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비는 여기에서 나오는 값진 선물이다.
불교의 수행 역시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체계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욕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 것처럼, 상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상대도 그런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인간은 '같은 마음(如心)'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또한 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수행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열반경(涅槃經)에 기초를 두고 있는 수행이다.
붓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해서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희(大喜), 대사(大捨)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는 것처럼 번뇌 가득한 세속에서 살면서도 여기에 물들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첫째는 자무량심(慈無量心), 즉 무한한 자애심을 가지고 상대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실천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중생을 사랑하는(慈) 마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겠는가.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상대와 내가 '하나'라는 자각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 비로소 어머니가 아들을 한 몸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모든 중생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연기의 진리가 작동하고 있다.
둘째는 비무량심(悲無量心)이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예컨대 벗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함께 슬퍼하고 울어주는 것도 비(悲)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도 상대와 '하나'라는 인식이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위다.
하지만 이것은 자무량심과는 달리 이기심이 남아있더라도 어느 정도 실천할 수는 있다. 그 불행이 나에게 닥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불행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셋째는 희무량심(喜無量心), 즉 상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하는 수행이다.
이는 이기적인 마음이 남아있는 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아들은 취업도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아들이 승진했다고 자랑한다면, 온전히 기뻐할 수 있겠는가.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지만 마음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자랑은 상대가 기뻐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상대가 자랑하면 함께 기뻐하기 힘든 법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실천은 자신의 이기심을 측정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다.
마지막 사무량심(捨無量心)은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捨)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 수행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우리는 친소, 애증의 관계에 따라 상대를 차별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마음을 모두 텅 비우고(空)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결국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할 때 나올 수 있는 실천이다. 혹자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족의 슬픔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함께 울고 아파했던 것이다.
수행은 그러한 공감능력을 더욱 확장시키는 일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모두가 '하나'라는 연기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서 확립한 수행체계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불교의 보살이 가지는 네 가지의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의미한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며,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처음에는 친한 사람에 대하여 이 마음을 일으키고 점차로 반경을 넓혀서 미운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이 마음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었던 교설로서, 고승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자비를 상징하는 십일면관음의 조상(彫像)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곧 십일면관음의 11가지 모습 가운데 불면(佛面)을 제외한 10가지 모습은 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자무량심은 3면으로 표현된다. 그 까닭은 자무량심이 ①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고, ②다행히 복은 있지만 지혜가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복과 아울러 지혜를 다 갖추도록 하려는 것이며, ③지혜는 있지만 통달하지 못한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아울러 신통력까지도 다 갖추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무량심 또한 3면으로 표현된다. 그 까닭은 비무량심이 ①고통스러운 과보에서 떠나려고 하지만 오히려 욕심 때문에 고통을 낳는 행위에 빠져 있는 자를 구하기 위하여, ②즐거움의 과보를 얻고자 하면서도 즐거움이 있게 하는 착한 원인을 만들 줄 모르는 자를 구하기 위하여, ③적정(寂靜)한 이치를 구하려 하지만 오히려 산란한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희무량심 또한 3면으로 표현된다. 그 까닭은 희무량심이 중생을 제도하고 정업(淨業)을 쌓기를 바라는 이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각각 올바른 행위와 말과 생각을 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은 1면으로 표현된다. 착한 이, 악한 이, 선악이 뒤섞여 있는 중생들에게 어떠한 집착도 없이 제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무량심을 철저하게 실천하면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며, 대승불교를 믿는 불제자는 이 마음을 먼저 길러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무량(無量)이라고 이름한 것은 욕계의 한량없는 유정(有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복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사무량은 네 가지 번뇌를 대치(對治)하니 자(慈)는 성냄(瞋)을 대치하고, 비(悲)는 해침(害)을 대치하며, 희(喜)는 질투(嫉)를 대치하고, 사(捨)는 욕계 탐.진(貪.瞋)의 불평등(不平等)을 대치한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색계(色界) 범천(梵天)의 선정(禪定)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고 유루선(有漏禪)에 머문 사람은 목숨을 마친 후 색계범천(色界梵天)에 태어난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고 나서 위빠사나를 통해 무루선(無漏禪)을 증득(證得)한 사람은 해탈한다.
(1) 자무량심(慈無量心)
자(慈)란 유정(有情)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애심(慈愛心)을 닦아 자애삼매(慈愛三昧)를 얻는다.
처음에는 ①싫어하는 사람 ②아주 좋아하는 사람 ③자신과 무관한 사람 ④원한 맺힌 사람, 이 네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닦아서는 안 된다.
특히 이성에 대하여 자애를 닦아서는 안 되니 탐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 된다. 삼매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닦는다. '내가 안락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이와 같이 닦을 때 '마치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다른 중생들도 참으로 그와 같다'고 자기를 본보기로 삼을 때 다른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에 대한 서원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닦아서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나면 그 다음에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존중하고 공경하는 스승이나 다른 사람(살아있는 사람)에 대하여 좋은 말씀과 존중을 생기게 하는 덕행이나 학식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이런 훌륭하신 분께서 행복하시기를, 고통이 없기를!'하며 자애를 닦는다. 그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삼매에 든다.
삼매에 들었다면 더욱 더 자애를 닦을 수 있다.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며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애를 닦는다. 그런 후에는 만약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대상으로 자애를 닦는다.
원한 가진 사람에 대해 자애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자기 자신과 좋아하는 사람과 무관한 사람 등에 대해 자애심을 더 닦고 나서 다시 원한 맺힌 사람에 대해 자애심을 닦는다. 또한 윤회를 생각하며 '모든 중생들은 전생에 나의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마음을 열 가지 방향(十方)으로 무한히 펼쳐 온 우주를 자애심으로 가득 채운다. ①자기 자신 ②좋아하는 사람 ③무관한 사람 ④원한 맺힌 사람 이 네 사람에 대해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방향에 대해 무량한 자애를 닦았다면 자애삼매는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다.
자애삼매(慈愛三昧)의 열한 가지 공덕(세존의 말씀)
①편안하게 잠들고 ②편안하게 깨어나고 ③악몽을 꾸지 않고 ④사람들이 좋아하고 ⑤인간 아닌 자들이 좋아하고 ⑥하늘들이 보호하고 ⑦불이나 독이나 무기가 해를 끼치지 못하고 ⑧마음이 쉽게 삼매에 들고 ⑨안색이 맑고 ⑩미혹하지 않은 채 죽고 ⑪더 높은 경지를 통찰하지 못하더라도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다.
(2) 비무량심(悲無量心)
비(悲)란 유정(有情)이 괴로움을 떠나게 하려는 마음이다. 연민심(憐愍心)을 닦아 비무량심삼매(悲無量心三昧)를 얻는다. 자애를 닦을 때와 같이 먼저 거지나 병자나 불구자 등 고통과 불행에 빠져있는 사람에 대해 연민심을 닦는다.
그 다음에는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 연민심을 닦고,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에 대해서도 연민심을 닦는다.
이 마음을 열 가지 방향(十方)으로 무한히 펼쳐 온 우주를 연민심으로 가득 채운다. ①자기 자신 ②좋아하는 사람 ③무관한 사람 ④원한 맺힌 사람 이 네 사람에 대해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방향에 대해 무량한 연민심을 닦았다면 연민심의 삼매가 완성된 것이다.
(3) 희무량심(喜無量心)
희(喜)는 중생이 괴로움을 떠나고 즐거움을 얻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따라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을 닦아 희무량심삼매(喜無量心三昧)를 얻는다. 제일 먼저 좋아하는 사람 등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성과 죽은 사람은 이 수행의 대상이 아니다.
아주 좋아하는 친구에 대해 제일 먼저 더불어 기뻐함을 가득 채운다. 혹은 좋아하는 친구가 행복하고 즐겁고 기뻐하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이 사람이 이렇게 기뻐하다니, 좋구나. 참 잘된 일이야'라고 더불어 기뻐함을 일으킨다.
이 마음을 열 가지 방향(十方)으로 무한히 펼쳐 온 우주를 수희심(隨喜心)으로 가득 채운다. 그 다음에는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에 대해서도 더불어 기뻐함을 닦는다. ①자기 자신 ②좋아하는 사람 ③무관한 사람 ④원한 맺힌 사람 이 네 사람에 대해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방향에 대해 무량한 수희심(隨喜心)을 닦았다면 삼매가 완성된 것이다.
(4) 사무량심(捨無量心)
사(捨)는 일체 유정에 대하여 사랑과 미움을 떠나 평등한 마음을 닦는 것이다. 평온한 마음(捨心)을 닦아 사무량심삼매(捨無量心三昧)를 얻는다.
이 삼매는 제사선정(第四禪定)과 같다. 먼저 자, 비, 희삼매를 통해 제삼선을 얻는다. 그런 후에 제삼선에서 나와 거친 결점을 관찰하고 제사선의 더 미세한 좋은 점을 고찰한다.
첫 번째로 자신과 무관한 사람을 먼저 관찰하면서 평온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런 후에 좋아하는 사람과 원한 맺힌 사람에 대해 평온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 마음을 열 가지 방향(十方)으로 무한히 펼쳐 온 우주를 평온한 마음으로 가득 채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네 사람에 대해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방향에 대해 무량한 평온함을 닦았다면 삼매가 완성된 것이다.
(5) 아함경(阿含經)의 사무량심(四無量心) 정형구(定型句)
(雜阿含 五六七)
無量三昧者, 謂聖弟子心與慈俱, 無怨, 無憎, 無恚, 寬弘重心, 無量修習普緣, 一方充滿.
무량삼매는 소위 거룩한 제자가 마음이 자애와 함께 하여 원망도 없고, 싫어함도 없고, 성냄도 없고, 넓고 크고 무거운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혀 널리 반연하여 (동서남북중) 한 방위를 충만하게 한다.
如是二方, 三方, 四方上下, 一切世間心與慈俱, 無怨, 無憎, 無恚, 寬弘重心, 無量修習, 充滿諸方, 一切世間普緣住, 是名無量三昧.
이와 같이 이방, 삼방, 사방상하와 일체세간에 대해 마음이 자애와 함께 하여 원망도 없고, 싫어함도 없고, 성냄도 없고, 넓고 크고 무거운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혀 모든 방위를 충만하게 한다. 일체세간에 널리 반연하여 머문다. 이것을 무량삼매라 한다.
사무량심(四無量心)과 고집멸도(苦集滅道)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속리산 법주사 보관 스님이 2014년에 출간한 '울화통 캠프'라는 책에도 나오지요.
'보살행(菩薩行)'의 네 가지(四) 헤아릴 수 없는(無量) 마음(心), 바로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말합니다.
'자(慈)'는 번뇌로 괴로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비(悲)'는 중생의 악행을 제 몸처럼 슬퍼하며(同體大悲) 불쌍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입니다.
'희(喜)'는 청정수행하는 공덕을 진심으로 기뻐하는(隨喜功德) 마음, '사(捨)'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자타(自他), 애증(愛憎)의 차별을 없애고 널리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입니다.
즉, 사무량심(四無量心)은 한마디로 '중생을 향한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사랑의 마음'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몇 년 전에 저도 잠깐 참여해본 적이 있는, 보관 스님이 주관하는 법주사 템플스테이는 '울화통 캠프'라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울화를 통쾌하게 날려버리자'라는 뜻이 '울화통'이라네요.
이 캠프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꾹 참고, 눌러 담아놓고, 쌓아두었던 무수한 고민과 근심, 울화를 함께 풀고 더 나은 삶, 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지혜를 전해준답니다.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게 살도록, 욕심내는 마음(貪), 화내는 마음(瞋), 어리석은 마음(癡)의 삼독(三毒)을 아름답게 정화시키는 지혜라고도 하네요. 이 모든 지혜가 결국에는 사무량심으로 귀결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부처님이 붓다가야에서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인연법칙(因緣法則)과 함께 '모든 것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일체고(一切 苦), '모든 법에는 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바라나시 부근의 녹야원(鹿野苑)에서 첫 설법(初轉法輪)을 하시게 된 동기가 바로 사무량심이라고 하지요.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머물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내는 것(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표현처럼 '모든 중생에 대한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사랑'이 아니고는 이해되지 않는 그 첫 설법의 동기를 이 사무량심이 잘 설명해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부처님의 첫 설법 내용은 중도(中道),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로 요약됩니다.
먼저 '중도(中道)'라 함은 어느 한 쪽의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반야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양쪽을 함께 설한 것처럼 '색'이나 '공'의 어느 한쪽, 또는 '있고 없다는 유무(有無)'나 선악(善惡) 등의 어느 한쪽에만 쏠리지 말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가르침이지요.
다음 '사성제(四聖諦)'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고(苦)'가 첫번째,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집(集)'이 두번째, 집착을 없애면 괴로움도 없어진다는 '멸(滅)'이 세번째, 집착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인 '도(道)'가 네번째 진리라고 하는 것이지요.
'팔정도(八正道)'는 사성제의 마지막인 집착과 괴로움을 없애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가리킵니다. 즉, 정견(正見; 바른 견해, 수행의 이유와 깨달아야 할 바를 바르게 살펴 아는 것),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바른 뜻을 가지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마음의 삼독을 지우려는 것), 정어(正語; 바른 말, 꾸미는 말과 거짓말과 이간질하는 말과 못된 말을 하지 않는 것), 정업(正業; 바른 행위, 살생과 도둑질과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 것), 정명(正命; 바른 삶,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 정정진(正精進; 바른 정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바른 노력), 정념(正念; 바른 염원), 정정(正定; 바른 선정)의 여덟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가 그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무량심(四無量心)과 고집멸도(苦集滅道)에 대해 새삼 깊이 되새겨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量(헤아릴 량/양)은 ❶상형문자로 곡물을 넣는 주머니 위에 깔때기를 댄 모양을 본떠 '분량을 되다'의 뜻을 나타낸다. 되는 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이다. ❷회의문자로 量자는 '헤아리다'나 '재다', '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量자에서 말하는 '재다'나 '달다'라는 것을 무게를 측정한다는 뜻이다. 量자는 旦(아침 단)자와 里(마을 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量자의 갑골문을 보면 東(동녘 동)자 위로 네모난 모형이 그려져 있었다. 東자는 곡식의 씨앗이든 봇짐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곡식이 들어있는 봇짐을 그린 東자 위에 口자가 있는 것은 깔때기가 꽂혀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量자는 봇짐에 곡식을 담으며 양을 헤아린다는 의미에서 '헤아리다'나 '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量(량/양)은 ①헤아리다 ②추측하다(미루어 생각하여 헤아리다) ③달다 ④재다 ⑤되질하다(되로 되어 헤아리다) ⑥가득 차다 ⑦양(量) ⑧분량(分量) ⑨용기(用器) ⑩용적(容積) ⑪기량(技倆) ⑫성격(性格) ⑬재능(才能) ⑭되(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헤아릴 감(勘), 헤아릴 탁(度), 헤아릴 촌(忖), 헤아릴 규(揆), 헤아릴 측(測), 헤아릴 료/요(料)이다. 용례로는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양산(量産), 형벌의 양을 정함을 양형(量刑), 양으로 따지는 모양을 양적(量的), 도량이 매우 좁음을 양협(量狹), 헤아려 정함을 양정(量定), 물건의 양을 헤아리는 데 쓰는 기구를 양기(量器), 필요한 수량을 잘 헤아려서 남겨 둠을 양류(量留), 측량에 관한 사무를 양무(量務), 기름이나 술 따위를 되는 데 쓰는 병을 양병(量瓶), 인재의 재능을 헤아려서 그에 알맞게 벼슬을 줌을 양서(量敍), 셈을 잘 헤아려서 알맞게 덞을 양쇄(量殺), 수량을 대강 어림쳐서 나타내는 말을 가량(假量), 어떤 일을 감당하여 해낼 수 있는 힘을 역량(力量),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도량(度量), 낱낱으로 갈라서 셀 수 있는 물건들의 많고 적은 정도를 분량(分量),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함을 재량(裁量), 사람의 덕량과 재능을 기량(器量),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 분량을 함량(含量), 용기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을 용량(容量), 앞일에 대하여 잘 생각하여 헤아림을 요량(料量), 너그럽고 깊은 도량을 아량(雅量), 몸에 맞게 옷을 고친다는 뜻으로 일의 처한 형편에 따라 적합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양체재의(量體裁衣), 짐을 실을 수 있는 정량을 일컫는 말을 적재정량(積載定量), 사람의 기량은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을 기욕난량(器欲難量),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으로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사량침주(捨量沈舟), 수레에 싣고 말斗로 될 수 있을 정도라는 뜻으로 인재나 물건이 아주 많음을 비유함을 일컫는 말을 거재두량(車載斗量), 그지없도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느낌을 일컫는 말을 감개무량(感慨無量), 되로써 섬 곡식을 된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이승양석(以升量石) 등에 쓰인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묵묵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함을 이르는 말을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일컫는 말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일컫는 말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일컫는 말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높은 산속의 깊은 골짜기를 이르는 말을 심산계곡(心山溪谷), 심술꾸러기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심술거복(心術去福), 마음이 번거롭고 뜻이 어지럽다는 뜻으로 의지가 뒤흔들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심번의란(心煩意亂),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심심풀이로 어떤 일을 함 또는 그 일을 일컫는 말을 심심소일(心心消日),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는 말을 심동신피(心動神疲), 심두 즉 마음을 멸각하면 불 또한 시원하다라는 뜻으로 잡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 속에서도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는 말을 심두멸각(心頭滅却),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말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생각을 집중할 수 없다는 말을 심원의마(心猿意馬)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