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니이껴 하고 물을까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4.08.25. -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시멘트로 사방에 벽을 친 회색 빌라에 모여 혼자인 듯 함께 산다. 옆집, 앞집, 윗집, 아랫집이 내는 왁자한 기척이나 비명들을 함께 들으며 “숨죽이며” 산다. 커다란 울음통 같은 빌라에서 다세대가 한 덩어리의 가족인 듯 모여 산다.
시인에게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극락과 지옥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번뇌의 집을 가로로 세로로 한 칸씩 올린 다세대주택에서 거미줄에 걸린 이슬을 진주라 착각하며 산다. 매일 착각을 이불처럼 덮고 산다.
살기 위해 더 높은 허공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거미줄을 한 줄 한 줄 간신히 잇는다. 우리가 매일 짓고 부수는 번뇌의 빌라. 존재들의 모퉁이를 조금씩 갉아먹으며,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우리는 산다. 어머니가 시인에게 전화해 “어디니이껴” 자꾸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던 빌라에서 발버둥치며 산다. 우리는 모두 안개처럼 산다.